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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꿈에서나 훔쳤던 입술 (9/63)


#9화. 꿈에서나 훔쳤던 입술
2023.01.30.


사랑은 당황한 걸 드러내지 않으려고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다시 핸드폰으로 시선을 내렸다.


“그때 말했잖아요. 여자 친구 있으시면 우산 같이 쓰기 좀 그렇다고. 선배님은 여자 친구가 다른 남자랑 한 우산을 쓰든, 단둘이 밥을 먹든 술을 먹든 상관하지 않는다고 하셨지만 저는 그렇지가 못하거든요.”

“그럼 곧 물어보겠네.”

“네?”

사랑이 고개를 들자 이번엔 도한이 노트북으로 눈을 옮겼다.


“네가 다음에 밥 산다며.”

그녀가 조용히 핸드폰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도한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혹시 저한테 뭐 화나신 거라도 있으세요?”

“아니. 그런 거 없는데.”

“그럼 제가 뭐 잘못한 거라도…….”

“왜 그렇게 생각해?”

“표정이 안 좋으셔서요.”

도한은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사랑과 눈을 맞추었다.

괜한 심통을 부리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잔뜩 꼬인 심사가 풀어지질 않았다.

누구한테 화가 나고 왜 이렇게 기분이 나쁜 건지 도통 모르겠다.

겨우 여자 후배가 다른 남자랑 친하게 지내는 모습을 봤을 뿐인데 질투 비슷한 감정을 느낀다는 게 스스로도 이해되지 않았다.

지금껏 그 누구에게도 이런 마음이 든 적이 없었다.

그를 혼란스럽게 하는 이사랑 같은 여자도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 도한은 머릿속이 복잡하기만 했다.

결국 자신이 생각해도 재수 없는 말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나 원래 이래.”

젠장.

꼭 이렇게까지 형편없이 굴어야 하나.

그녀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도한은 속으로 망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사랑의 반응이 궁금했다.

다른 사람들에게 그러듯이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을 때 그녀가 어떻게 나올지 무척이나 궁금했다.

그들과 똑같이 상대도 하기 싫다는 얼굴로 외면해 버리지 않을까.

지금까지 자신에게 친절했던 이유는 그저 어려운 선배와 1학기 내내 같은 수업을 들어야 하니 예의상 그랬던 것뿐이었겠지.

정윤재하고 있을 때가 더 편하고 좋아 보였던 거로 보아선 자신을 그 정도로 생각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도한은 그녀가 어색하게 웃으며 그만 리포트나 쓰자고 할 거라 예상했다.

하지만 사랑은 뜨거운 커피를 벌컥 마시고는 거칠게 내려놓았다.

머그컵이 테이블에 부딪히는 둔탁한 소리에 그의 눈이 조금 커졌다.


“왜 그래?”

“뭐가요?”

“화 난 것 같은데.”

“제가요? 아닌데요?”

“맞는 것 같은데.”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너 표정이 안 좋아서.”

“저도 원래 이래요.”

그에게 받은 대로 돌려준 사랑은 테이블에 올려 둔 핸드폰을 홱 낚아채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안 그래도 속에서 천불이 나는데 뜨거운 커피까지 마셨더니 얼굴이 터질 것 같았다.

기분이 안 좋으면 그냥 집에나 갈 것이지, 왜 멀쩡한 사람 끌고 와서 열받게 하냐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때 앞에서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핸드폰을 살짝 내려 보니 황당하게도 도한이 웃고 있었다.

뭐 이런 인간이 다 있나 싶은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사랑은 그냥 무시하기로 했다.

조금 전 정리한 사진들을 한꺼번에 그에게 전송했다.

빨리 집에 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리포트에 쓸 사진 보냈어요. 저는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사랑은 얼굴의 열기를 식히고 올 겸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테이블을 벗어나 도한을 지나치는 순간 등골이 서늘했다.

방금 보낸 여러 사진 중에 그의 뒷모습을 몰래 찍은 사진 한 장이 들어간 것 같았다.

아니, 확실히 있었다.

그녀가 재빨리 뒤를 돌아봤다.

도한은 이미 핸드폰을 손에 들고 있었다.


“잠깐만요!”

사랑이 손을 뻗으며 달려갔다.

오로지 목표는 그의 핸드폰이었다.

메시지를 읽었다 해도 문제의 사진은 아직 못 봤을 수도 있었다.

그가 사진을 보기 전에 핸드폰을 빼앗아 지우는 방법밖에 없었다.

반면 도한은 핸드폰을 보다가 옆에서 뭔가가 빠르게 다가오는 걸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사랑이 무서운 속도로 그에게 쏟아지고 있었다.

도한은 손에 들고 있던 핸드폰을 테이블에 툭 내려놓고 반사적으로 그녀를 받았다.

그러지 않으면 다칠 것 같았다.

다행히 그가 소파처럼 생긴 긴 의자에 몸을 눕히며 사랑의 허리를 안정적으로 감쌌다.

두 사람의 몸이 자연스레 포개졌다.

잠시 시간이 멈춘 듯 누구도 움직이지 못했다.

주위의 소음이 한꺼번에 사라지면서 맞닿은 가슴으로 서로의 온기만이 전해졌다.

먼저 정신을 차린 건 도한이었다.


“괜찮아?”

사랑은 넋이 나간 채로 두 눈만 깜빡거렸다.

바로 눈앞에 그의 얼굴이 있었다.

짙은 눈썹과 서늘함이 매력인 눈, 그리고 날렵한 콧날과 꿈에서나 훔쳤던 입술.

그의 숨소리가 느껴질 정도로 가까웠다.

고개에 힘을 풀면 입술이 부딪힐 것도 같았다.


 


“괜찮은 거야?”

도한은 사랑의 얼굴을 살폈다.

다친 데는 없어 보이는데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걸 보니 많이 놀란 것 같았다.


“아, 네. 괜찮아요.”

사랑이 재빨리 몸을 일으켜 자리에 앉았다.

그와 닿았던 모든 곳에 화르르 불길이 타오르는 것 같았다.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이리저리 방황하다가 테이블에 시선이 닿았다. 그녀가 노렸던 도한의 핸드폰이 바로 보였다.

사랑은 그제야 잊고 있었던 사진이 생각나 다급하게 그것을 가져왔다.

도한이 ‘너 지금 뭐 하냐.’는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제가 사진을 잘못 보내서요. 잠금 좀 풀어 주시면 안 될까요?”

“뭘 보냈는데.”

“그게…….”

사랑은 말할 수 있었으면 이렇게 달려들지도 않았다는 속마음을 삼켰다.

그 사진을 도한이 보게 되면 자신의 마음을 들킬 것만 같았다.

풍경을 찍다가 그의 뒷모습이 걸렸다고 변명할 수도 있는 거였는데, 사진을 잘못 보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땐 그럴 여유가 없었다.


“그냥 잠금 좀 풀어 주세요. 사진만 지우고 돌려드릴게요.”

이미 변명을 하기엔 늦었다.

이렇게 된 이상 그의 핸드폰을 사수해야만 했다.

사랑은 그가 뺏어 가기라도 할까 봐 핸드폰을 꼭 쥔 손을 가슴 앞으로 끌어당겼다.


“야한 사진이라도 보냈어?”

“……네.”

그녀가 두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사진만 지울 수 있다면 변태가 되는 것쯤은 감수해야 했다.


“제가 신체 일부를 찍었는데. 실수로 같이 보냈어요. 정말 죄송해요.”

빨개진 얼굴을 내리고 입술을 깨무는 그녀를 보며 도한은 헛숨을 터트렸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서 잠시 멍하게 있던 그가 사랑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런 취미가 있는 줄은 몰랐네.”

사랑은 눈물을 머금고 손을 뻗었다.

대신 핸드폰은 여전히 생명줄처럼 놓지 않았다.

도한이 잠금을 풀어 주자 그녀가 재빨리 팔을 접었다.

빛의 속도로 메시지를 확인해 문제의 사진을 지웠다.


“휴. 됐다.”

사랑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핸드폰을 돌려주는 그녀의 손이 작게 떨렸다.


“여기요. 고맙습니다.”

“내가 더 고맙지. 못 볼 꼴 볼 뻔했는데.”

맞는 말이긴 한데 이상하게 기분이 나빠져 그녀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가 생각하는 제 신체 일부는 대체 어디이기에 못 볼 꼴이라는 건지 궁금하기도 했다.

어쨌든 무사히 상황이 종료돼 다행이었다.

몇 분 사이에 몇 년은 늙은 것 같은 기분으로 사랑이 몸을 축 늘어뜨렸다. 문득 옆에서 그의 끈질긴 시선이 느껴졌다.


“왜, 왜 그러세요?”

또다시 그녀의 심장이 터질 듯했다.

얼마나 세게 뛰는지 가슴이 오르내리는 게 제 눈에 보일 지경이었다.

사랑이 마른침을 꿀꺽 삼키자 그가 테이블에 한쪽 팔을 걸치며 그녀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계속 여기 앉아 있을 건가 해서.”

“네?”

“나야 상관없지만 너 불편할까 봐. 저쪽에 우리 과 애들 있거든.”

“무슨 말씀인지.”

“보통 사귀는 사이끼리 옆에 앉잖아.”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사랑이 벌떡 일어나 제자리로 돌아갔다.

얼굴을 구긴 그녀가 테이블에 머리를 박을 것처럼 고개를 숙이자 도한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화장실 간다며.”

“아, 맞다. 화장실.”

깜박한 걸 알아챈 사랑이 다시 몸을 일으켰다.

그러곤 도망이라도 치듯 빠르게 그곳을 빠져나갔다.

도한은 그 모습을 지켜보며 조금 더 웃었다.

아직도 그녀를 안고 있는 것 같은 느낌에 가슴이 자꾸만 간질거렸다.

* * *

사랑은 체대 식당에 처음으로 와 보았다.

윤재에게 밥을 사 주겠다고 한 약속을 지키겠다고 했더니, 선배들로부터 받은 식권이 많다며 오히려 그가 그녀를 이곳으로 초대했다.

지우가 늘 윤재를 궁금해해서 셋이서 함께 만났다.

제집처럼 밥을 먹는 그와 달리 그녀들은 주위를 둘러보느라 바빴다.

운동하는 학생들이 많아서인지 공대와는 분위기가 달랐다.

활동적이고 더 북적이는 느낌이랄까.

맛있다고 소문난 곳이라 찾아오는 이들이 많은 것 같았다.

체대생의 상징인 과 잠바도 흔히 볼 수 있었다.

윤재가 아니었다면 아마 졸업 전에 이곳에 올 일은 없었을 거라 생각하며 그녀들도 식사를 시작했다.


“어때? 웬만한 식당보다 맛있지?”

윤재의 얼굴엔 체대생의 자부심이 가득했다.

대답을 기대하는 두 눈은 부담스러울 정도로 빛났다.


“응. 진짜 맛있다.”

“여기가 우리 학교 맛집이었네.”

그녀들의 칭찬에 윤재는 만족스러워했다.

누가 보면 이 식당의 조리사인 줄 알겠다.

그런 그가 재미있어 지우는 웃음이 나왔다.


“우린 공대 밥 맛없어서 거의 학관에서 먹는데 너는 반대겠다.”

“여기가 더 잘 나와서 학관은 잘 안 가는 편이야.”

“좋겠다. 학관은 멀어서 점심시간에 여유가 없는데.”

“바로 옆이니까 너희도 자주 와.”

“왠지 체대생들만 와야 할 것 같아서 우린 좀…….”

“그럼 오고 싶을 때 나한테 연락해. 나랑 같이 오면 되니까.”

사랑이 대답을 망설이자 지우가 얼른 끼어들었다.


“정말 그래도 돼?”

“뭐 어려운 거라고.”

“그럼 나도 사랑이 올 때 가끔 같이 온다?”

“그래.”

지우는 윤재와 사랑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옆에서 보기에 두 사람은 참 잘 어울렸다.

윤재와 대화를 나눈 건 오늘이 처음이었지만 지우는 그가 꽤 마음에 들었다.

성격도 밝고, 친절하고.

다정한 모습이 누구와는 달랐다.

대체 사랑은 왜 이런 애를 놔두고 어둡고, 불친절하고, 다정과도 거리가 먼 도한을 좋아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지우는 윤재가 사랑에게 관심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윤재 같은 남자가 적극적으로 나오면 마음이 흔들리는 법이니까.

일단 사귀는 사람이 있는지부터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근데 너 여자 친구 있어?”

“아니.”

“의외네. 당연히 있을 것 같았는데.”

“내가? 왜?”

“여자들한테 친절하니까.”

지우가 툭 내뱉은 말에 윤재는 갑자기 식사를 멈추었다.

어딘지 불편한 시선으로 사랑을 흘깃 보더니 지우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내가 혹시 바람둥이 이미지야?”

“아니, 전혀. 그런 건 아니야.”

그제야 윤재는 안도한 표정으로 그녀들에게 물었다.


“그러는 너희는? 남자 친구 있어?”

“나는 있고, 사랑이는 없어.”

그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나타났다 사라지는 걸 지우는 놓치지 않았다.

그녀의 촉으로는 윤재가 사랑에게 관심이 전혀 없진 않았다.

희망이 보였다.

윤재를 붙들고 그의 마음을 캐묻고 싶지만 오지랖이었다.

오늘은 이 정도의 성과로 만족해야 했다.


“참, 내 이름은 강지우야. 사랑이랑 같은 학부.”

“나는 정윤재.”

두 사람은 뒤늦게 인사를 주고받았다.

그 후로 지우와 사랑은 초등학교 때부터 친구였다는 얘기를 했고, 윤재는 중학교 때 수영 선수로 활약했었던 이야기를 나눴다.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체대를 나왔다.


“점심 잘 먹었어.”

“다음엔 공대로 와. 우리가 살게. 가끔 괜찮게 나올 때도 있거든.”

그녀들의 감사 인사에 윤재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언제 한번 갈게.”

돌아선 그가 저 멀리까지 멀어졌을 때쯤 지우가 말했다.


“괜찮은데?”

“윤재?”

“어.”

“뭐야. 너 남친 생긴 지 얼마나 됐다고 다른 남자가 괜찮대?”

“네 남자 친구로 괜찮다고.”

“뭐?”

사랑은 얼른 뒤돌아 윤재가 보이는지 확인했다.

당연히 안 보이겠지만 지우의 말에 놀라서 한 행동이었다.


“너 윤재 앞에서 그런 소리 하지 마.”

“왜? 걔는 너한테 관심 있는 것 같은데.”

“어딜 봐서?”

“그냥 감으로?”

말도 안 된다며 사랑이 헛숨을 터트렸다.


“윤재는 그냥 친구라고 몇 번을 말해.”

“친구로 지내다 남자 친구 되면 좋지, 뭐.”

“너 자꾸 그럴 거면 다음부턴 윤재랑 밥 먹을 때 끼지 마.”

“그럴까? 아무래도 너희 둘이 있는 게 더 낫겠지?”

사랑이 그만하라는 뜻으로 눈을 흘기자 지우는 입을 다물었다.

여기서 더 나댔다가는 사랑이 진짜로 화를 낼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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