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좋아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8/63)


#8화. 좋아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2023.01.27.



 
월요일 아침.

사랑은 도한에게 모닝콜을 할 수 있는 이 시간을 늘 기다렸지만 오늘만큼은 아니었다.

그와 혜리가 꿈에 나타나는 바람에 잠을 설쳤다.

지우에게 잠자리 파트너라는 말을 들어서인지 꿈에서 두 사람은 그런 사이였다.

그 모습을 지켜봐야 하는 사랑은 괴로웠지만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귀를 막고 눈을 감아도 소용없었다.

주저앉은 채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나서야 잠에서 깼다.

등이 온통 땀으로 젖어 있었다.

악몽이었다.

다시 잠이 오지 않아서 눈을 뜬 채로 누워 있다가, 방이 환해지고 나서야 일어났다.

어느덧 도한에게 전화를 걸 시간이 다가왔다.

사랑은 핸드폰을 매만지다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안녕.

“일어나셨네요.”

-어.

잠에 취해 있던 평소와 달리 도한의 목소리가 또렷했다.


“그럼 이따 뵐게요.”

-그래.

그가 깨어 있어서 통화를 길게 할 필요가 없었다.

오늘은 목소리를 오래 듣고 싶지 않았는데 다행이었다.

가능하면 얼굴도 보고 싶지 않았지만 수업에 빠질 수는 없었다.

사랑은 그만 학교 갈 준비를 하고 집을 나섰다.

유리로 된 현관문을 열고 계단을 내려오자 마침 집에서 나오던 도한과 마주쳤다.


“안녕하세요.”

그렇게 보고 싶을 땐 만나지지도 않더니 오늘은 참 우연이라는 놈이 미웠다.

가는 방향이 같을 수밖에 없어 따로 가지도 못했다.

나란히 걷는 그들에게 침묵이 내려앉았다.

둘 사이에 변한 건 아무것도 없는데 둘러싼 공기가 무거웠다.

사랑은 혼자서 화를 내는 자신이 황당하다고 느꼈다.

생각해 보면 그가 잘못한 건 없었다.

혜리와 무슨 사이든 자신에게 설명할 이유는 없었다.

자신이 그의 여자 친구도 아니고, 심지어 좋아한다고 말한 적도 없으니까.

그러니 갑자기 달라진 자신의 태도가 그로서는 당혹스러울 것 같았다.

사랑은 이성적으로 생각하려고 노력했다.

그에게 나는 그저 알고 지내는 후배일 뿐이라고.


“다음 달 과제는 언제 할까요?”

도한과 나눌 수 있는 대화 주제는 수업에 관한 것뿐이었다.

바로 어제 첫 과제를 했지만 달리 할 말이 없어서 툭 던지듯 물었다.

하지만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노력해도 사랑의 표정엔 딱딱함이 사라지지 않았다.

도한이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미리 생각해 두려고요. 언제 시간 괜찮으세요?”

“아무 때나. 너 편할 때.”

“그럼 주말 말고 평일 오후에 가요.”

사랑은 아무리 과제라고 해도 그를 좋아하고 있는 이상 진심이 섞일 수밖에 없었다.

다른 여자와 깊은 사이라는데 그만 좋아해야 하는 게 아닐까.

조금씩 마음을 접어 볼까.

어떻게 해야 할지 혼란스럽기만 했다.

그런 마음으로 다음 과제는 하루 종일 함께 있어야 하는 주말 대신 잠깐 시간을 보낼 수 있는 평일 오후를 택했다.


“그래.”

평일 오후엔 혜리 때문에 어려울 수도 있었지만 도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한 달이나 남기도 했고, 사랑의 기분이 어쩐지 별로인 것 같아 그녀의 말을 들어주고 싶었다.

잠시 정적이 흐르고 그가 물었다.


“어디로 갈 건데?”

“글쎄요. 이제부터 알아봐야죠.”

다시 적막이 찾아왔다.

어색함이 길어지자 사랑이 머릿속으로 얘기할 만한 주젯거리를 찾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가 먼저 말을 붙였다.


“꽃 보러 갈래?”

“네?”

“꽃에 관심 많은 것 같아서.”

그제야 사랑은 그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했다.

과제를 위한 데이트 장소를 얘기하고 있었다.


“다음 달에 놀이공원에서 튤립 축제를 하던데. 야간 개장 때 가면 불꽃놀이도 볼 수 있고.”

사랑이 조금 놀란 눈으로 도한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재수강을 하고 있으면서도 그다지 열심히 수업을 듣지 않는 것 같았다.

겨우 지각을 면할 시간에 강의실에 도착했고, 언뜻 보기엔 수업도 대충 들었다.

데이트해야 하는 과제도 억지로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직접 알아보신 거예요?”

“너한테만 알아보라고 할 순 없잖아. 별로야?”

“아니요. 좋아요. 저 꽃 좋아해요.”

사랑은 어느새 웃고 있었다.

꽃을 보러 가게 돼서 좋은 건지, 아니면 꽃에 관심이 있는 걸 도한이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에 기쁜 건지 알 수 없었다.

그에게 향하는 마음을 멈춰 볼까 생각했던 것이 무색하게 그녀의 가슴은 또다시 두근거렸다.

도한도 그제야 미소를 지었다.

오늘이 월요일이라 그랬는지, 일찍 잠에서 깬 그는 진즉부터 사랑의 전화를 기다렸다.

벌써 모닝콜에 길들여졌는지 그 시간만 되면 알아서 눈이 떠졌다.

벨 소리가 울리자 도한은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언제나 밝고 청량한 목소리를 곧 들을 생각에 기분이 한껏 고조되었는데, 이상하게도 오늘 그녀는 기운이 없어 보였다.

어디가 아픈 건 아닐까.

잠을 푹 못 잔 건가.

집을 나설 때까지 걱정이 끊이질 않았다. 걱정한 게 기우는 아니었는지 사랑의 얼굴이 매우 수척해 보였다.

표정도 안 좋고 말도 없고.

잘 웃는 그녀가 오늘따라 한 번을 웃질 않았다.

도한은 사랑의 기분이 좋아질 만한 게 뭐가 있을까 고민하다 어제 홍매화를 보고 좋아했던 모습이 떠올랐다.

후배에게만 과제를 떠넘길 수는 없었기에 미리 데이트 장소를 알아본 곳이 있었는데, 그곳이 마침 튤립 축제가 예정된 놀이공원이었다.


“세 번째 과제 할 때는 오빠 좋아하는 데로 가요.”

“그게 어딘데.”

“피시방이랑 당구장이요. 게임하고 컵라면 먹고, 당구 치고 자장면 먹고.”

“게임은 할 줄 알아? 당구는 칠 줄 알고?”

“아니요. 배우면 되죠. 어려워요?”

“어려워.”

“가르쳐 주기 싫어서 그렇죠.”

“어.”

“와, 치사하다. 다른 사람한테라도 배워서 가야겠네.”

“그럴 사람은 있고?”

“……아니요.”

재잘재잘 잘도 떠들던 사랑이 그새 시무룩한 표정을 짓자 도한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다시 예전으로 돌아온 그녀가 반가웠다.

어제 사랑의 눈앞에서 혜리와 차를 타고 가 버린 게 내내 마음에 걸렸었다.

이사랑이 내 여자 친구도 아닌데.

여자 친구라 해도 언제부터 그런 걸 신경 썼다고.

그는 평생 한 여자만을 사랑한, 아니 한 여자에게 집착한 아버지를 닮고 싶지 않았다.

어려울 것도 없었다.

누군가 그를 좋아한다 하면 받아 주고, 그만 만나자고 하면 보내 주면 되는 일이었다.

아버지가 어머니한테 한 것처럼 다른 여자를 좋아하는 짓만 하지 않으면 상대가 상처받을 일은 없었다.

애초에 그에게 진심을 바라는 이들도 없었으니까.

원래부터 그런 놈이라는 걸 아는 여자들만이 그에게 다가왔다.

그러니 여자 친구가 다른 남자와 단둘이 밥을 먹든 술을 마시든, 도한은 상관이 없었다.

그런데 왜 어젯밤 사이드미러 속에 혼자 남겨진 이사랑의 모습이 이리도 마음 쓰이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마치 그녀를 좋아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사랑이라는 말을 입 밖으로 뱉지도 못하는 주제라 그게 어떤 감정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 * *

도한은 금요일 마지막 수업을 마치고 공대 건물을 나섰다.

그의 옆에 있던 태훈이 어딘가를 가리켰다.


“저기 사랑이 아니야? 옆에는 전에 말한 체대생인가. 몸 좋네.”

공대 식당에서 다 같이 점심을 먹었을 때 지우가 사랑에게 물어봤던 남자인 것 같았다.

한눈에 봐도 체격이 좋아 보였다.


“둘이 진짜 사귀나? 잘 어울린다. 안 그러냐?”

도한은 대답도 하지 않고 사랑과 윤재가 걸어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며칠 전에 그 역시 둘을 보면서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었는데, 태훈의 질문에 이상하게도 고개가 끄덕여지질 않았다.


 


“너 먼저 가라.”

“왜. 약속 있어?”

이 시간엔 항상 도한과 저녁을 먹었던 터라 태훈이 의아하게 물었다.


“과제 때문에.”

“과제? 연애와 결혼?”

도한의 시선이 사랑에게 고정되어 있는 걸 보고 그녀와 함께해야 하는 과제라는 걸 태훈은 눈치챘다.


“그러게 지난 학기에 나랑 같이 재수강하자니까.”

고생이 많다는 말을 남기고 태훈이 자리를 떠나자 도한은 사랑에게 가기 위해 길을 가로질렀다.

거리가 좁혀질수록 두 사람의 웃음소리가 점점 크게 들렸다.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사랑은 고개까지 젖혀 가며 웃고 있었다.

도한은 괜히 심술이 났다.

다른 사람과 다르게 사랑은 저를 어려워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고백해 오는 여자들은 많았어도, 친구나 선후배로 친하게 지내고 싶어 하는 여자들은 없었다.

보통은 지우처럼 소문을 듣고 가까이하지 않으려 했다.

그런데 사랑은 달랐다.

첫 만남 때 좋은 인상을 남겼는지 자신을 편하게 대했으며, 하고 싶은 말도 당차게 했다.

그런 그녀에게 자꾸만 마음이 기울었지만 거기까지였다.

좋은 선후배 사이.

순수한 신입생에게 그가 지켜야 하는 선이었다.

하지만 윤재 옆에서 웃고 있는 사랑을 본 순간 도한은 뭔지 모를 배신감을 느꼈다.

아무한테나 웃어 주는 미소가 싫었다.

다른 사람에게도 똑같이 친절한 그녀가 미웠다.

다른 친구하고는 놀지 말라는 유치한 초등학생 심리처럼 지금 그가 딱 그랬다.

도한은 그걸 알면서도 멈추지 못하고 그녀 앞으로 다가갔다.

느닷없이 나타난 그를 본 사랑이 깜짝 놀랐다.


“안녕하세요.”

인사부터 한 그녀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젠 그의 시간표를 어느 정도 알고 있었기에 이 시간이면 태훈과 함께 있어야 했다.

역시나 반대편 길로 태훈이 내려가며 그녀에게 손을 흔들었다.

사랑은 태훈에게 고개를 숙이고는 다시 도한을 쳐다보았다.

무슨 일이냐고 눈으로 묻는데 그가 도리어 질문을 했다.


“리포트는 다 썼어?”

“아니요, 아직.”

“쓰러 가자.”

“지금요?”

“어. 지금.”

선배가 하자는데 사랑은 차마 거기서 토를 달 수가 없었다.

처음부터 같이 하고 싶었기에 마다할 이유도 없었다.

다만 조금 전에 우연히 만나 도서관으로 함께 가는 길이었던 윤재에게 미안한 마음이었다.


“윤재야, 나 과제 때문에 가 봐야겠다.”

“그래. 도서관은 다음에 같이 가지, 뭐.”

“미안해.”

“괜찮아. 미리 약속한 것도 아닌데. 나중에 밥이나 사든가.”

괜찮다면서 밥을 사라는 말에 사랑이 맑게 미소 지었다.


“알았어. 다음에 꼭 살게.”

“농담이야.”

큰 키의 윤재가 사랑의 머리를 헝클이며 장난을 쳤다.

그녀는 얼굴을 찌푸린 채 손을 흔들어 주고 도한과 왔던 길을 도로 내려갔다.

사랑이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그를 올려다봤다.


“리포트 각자 쓰는 거 아니었어요? 저한테 보내 주신다고 하셨는데.”

“내가 그랬나.”

“네.”

“그럼 각자 쓸까? 그렇게 하는 게 좋겠어?”

퉁명스러운 목소리에 사랑은 그의 얼굴을 살폈다.

기분이 안 좋아 보였다.

수업 시간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아니면 태훈과 싸우기라도 했나.

자세히 물어보기에도 애매한 사이라 그녀는 생각을 그만하고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저야 같이 하는 게 더 편하죠.”

“다행이네.”

“근데 어디서 해요? 노트북 가져오셨어요?”

“어.”

“그럼 카페로 갈까요?”

도한에게서 대답이 없자 사랑은 그의 눈치를 슬쩍 보곤 말을 이었다.


“카페 별로면 빈 강의실 찾아볼게요.”

“카페로 가.”

“아, 네.”

도대체 뭐가 문제인지 그의 얼굴은 좀처럼 밝아지질 않았다.

사랑은 이대로 리포트는 제대로 쓸 수 있을지 걱정스러웠다.

* * *

학교 정문을 나와 카페에 들어갔다.

도한이 자리를 잡고 노트북을 켜는 동안 주문을 한 사랑은 잠시 카운터 앞에서 기다렸다가 커피를 받아 왔다.

지난번에 강의실 앞 자판기에서 도한에게 커피를 얻어먹은 적이 있어 오늘은 그녀가 사겠다고 나섰다.


“드세요.”

커피를 한 모금 마시려던 그가 컵을 제자리에 내려놓았다.

사랑이 윤재에게 밥을 사겠다고 했던 장면이 불현듯 떠올랐다.

나는 커피고 걔는 왜 밥이야.

도한은 자신도 모르고 있었던 유치함에 표정이 차갑게 식어 버렸다.


“둘이 많이 친한가 봐.”

도한이 무심한 표정으로 노트북을 바라보며 툭 던진 말에 사랑은 커피를 마시다 말고 그에게 눈을 들었다.


“윤재요?”

그가 노트북에 시선을 고정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사랑은 머그컵을 내려놓고 핸드폰을 들었다.

리포트를 쓰려면 지난 주말에 찍은 사진을 정리해 놓을 필요가 있었다.

한 장 한 장 넘겨 보며 쓸데없는 사진은 삭제하던 그녀가 대답했다.


“수업 같이 들으니까요.”

“걔는 여자 친구 있고?”

“글쎄요. 모르겠는데요.”

“안 물어봤어?”

“네.”

“왜?”

“안 궁금해서요.”

“그럼 나한텐 왜 물어봤는데.”

가슴이 뜨끔한 사랑은 손을 멈추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언제부터 보고 있었는지 도한의 시선이 제게 꽂혀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