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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깊은 사이 (7/63)


#7화. 깊은 사이
2023.01.23.


혜리가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그녀를 보고 우뚝 멈춰 선 도한이 아무 말이 없자 혜리는 그의 눈을 피하며 이곳에 온 이유를 설명했다.


“동기들이랑 학교 앞에서 저녁 먹었거든. 주말인데 귀찮게 해서 미안해.”

“기다려. 차 키 가지고 나올 테니까.”

“응.”

도한은 사랑에게 그만 들어가라는 말을 하고서 원룸 건물로 들어갔다.

사랑도 집에 가려고 발을 돌리려는데 혜리가 말을 걸어왔다.


“도한 오빠랑 사귀는 사이예요?”

악의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맑은 눈을 보며 사랑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과제 때문에 어디 좀 같이 다녀왔어요.”

“아, 그랬구나. 지난번에도 오빠랑 같이 있는 거 봐서요. 여자 친구인 줄 알았어요.”

어색하게 웃기만 하는 사랑을 따라 혜리도 미소를 지었다.


“신입생 같은데. 둘이 많이 친한가 봐요. 오빠가 원래 1, 2학년 여자들하고는 별로 안 친하거든요.”

사랑이 걸치고 있는 도한의 카디건에 혜리의 시선이 닿았다. 사랑은 어쩐지 기분이 이상했다.

별다른 뜻은 없는 것 같은데 혜리의 눈빛이 거슬렸다. 그녀가 제게 한 말도 어쩐지 비꼬는 것처럼 들렸다.

사랑은 괜히 지고 싶지 않은 마음이 들었다.


“언니는 도한 오빠랑 친하시잖아요.”

혜리가 2학년이라는 걸 태훈에게서 들어 기억하고 있었다.

사랑은 그러면서 왜 시비냐는 표정을 숨길 수가 없었다.

그녀의 감정을 읽었는지 혜리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우리가 친한가.”

“집에 데려다 달라고 찾아올 정도면 친한 거죠.”

혜리는 곰곰이 생각하는 얼굴을 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긴 한데. 친하다는 말로는 부족한 것도 같고.”

사랑의 가슴이 점점 뛰었다.

그럼 사귀었던 사이였을까.

둘이 어떤 관계인지 차마 묻지 못했다. 그런데 혜리가 먼저 조용히 읊조렸다.


“깊은 사이.”

순간 혜리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가는 듯하더니 이내 천사 같은 미소로 돌아왔다.


“우리는 그렇게 정의할 수 있겠네요.”

 

 
사랑은 자신이 잘못 본 게 아닌가 싶었다.

충격적인 한마디에 시력마저 이상해진 게 틀림없었다.

눈을 깜빡이지도 못할 정도로 얼어붙고 말았으니까.

그녀가 그렇게 멍하니 서 있는데 도한이 건물 계단을 내려왔다.

그를 본 혜리가 두 눈을 예쁘게 접으며 사랑에게 마지막 인사를 전했다.


“그럼 다음에 또 봐요.”

사랑은 겨우 고개를 돌렸다.

도한이 집 앞에 주차한 차의 조수석 문을 열었고 혜리가 올라타는 장면이 시야에 들어왔다.

곧이어 운전석에 오른 그가 차를 출발시켰다.

더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데도 사랑은 그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 * *

일요일 저녁 시간이라 도로가 꽉 막혔다.

경철의 집까지는 차로 20분이면 충분했지만 지금은 30분이 지나도록 도로에 갇힌 상태였다.


“지하철 타고 갈까 했는데. 그러면 또 아빠가 오빠 불러서 한소리 하실 것 같아서.”

혜리의 목소리가 고요한 차 안을 채웠다.

출발했을 때부터 쭉 그랬다.

도한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는데, 그녀 혼자서 조곤조곤하게 말했다.

군대 간 동기가 휴가를 나와서 모이게 됐고, 오랜만에 만났으니 다들 일찍 들어갈 생각하지 말라고 했지만 아빠가 걱정하실까 봐 먼저 나왔다고.

술은 몇 잔 안 마셨는데 아빠가 알면 혼날 것 같다고.

그녀가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 동안 도한은 그저 묵묵히 운전을 했다.

마치 제 할 일은 그것뿐이라는 듯이.


“아까 그 신입생이 오빠랑 과제 하고 오는 길이라고 하던데.”

아무런 감정도 담고 있지 않던 그의 두 눈이 잠깐 흔들렸다.

도한을 지켜보고 있던 혜리는 그 찰나의 변화를 단번에 느꼈다.


“차 가져가지 그랬어. 대중교통 불편하잖아.”

“너 데려다주라고 사 주신 차야.”

그가 차에 탄 이후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혼자만 떠들던 혜리는 도한의 목소리가 반가웠지만, 한편으론 말에서 가시가 느껴져 얼굴에 그늘이 졌다.


“미안해. 내가 좀 더 건강했으면 오빠가 불편할 일도 없을 텐데. 괜찮다가도 어느 순간 숨이 안 쉬어지니까 언제 또 그럴지 몰라서 더 무서워. 아빠도 그래서 불안한가 봐.”

경철의 집 앞에 도착한 도한은 말없이 차를 세웠다.


“들어가.”

혜리가 무슨 말을 하려고 입을 달싹이다 그만두었다.

같이 들어가서 아빠한테 인사라도 하길 바랐지만 쓸데없는 생각이었다.


“데려다줘서 고마워. 그럼 조심히 가.”

그녀가 내리자 도한이 바로 차를 몰았다.

잠깐이라도 머물고 싶지 않은 곳이었다.

혜리와 같은 대학을 가겠다는 조건으로 그 집에서 나왔으니까.

4년. 그녀가 졸업할 때까지 경철의 말대로 빚 갚는 심정으로 오빠 노릇을 하기로 했다.

동생에게 죄를 지은 그 날은 여전히 끔찍한 기억으로 남아 있으므로.

도한은 우습게도 이 순간에 사랑이 떠올랐다.

홍매화 나무 아래에서 해맑게 미소를 짓던 그녀를 핸드폰 카메라에 담던 그 장면이, 마치 오래전 과거의 일처럼 흑백 사진으로 변해 버린 기분이었다.

어쩌면 꿈이었을지도.

그가 사는 현실과 어울리지 않는 아름다움이라서.

화사한 홍매화도, 그리고 이사랑도.

* * *

집에 오자마자 찬물로 세수를 한 사랑은 방 한가운데에 멍하니 앉았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지우가 문을 열고 들어와 사랑에게 달려들었다.


“사랑아! 나 남자 친구 생겼어.”

정신이 번쩍 드는 소식에 사랑이 지우를 떼어 내며 물었다.

친구가 누굴 좋아하는지는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태훈 오빠랑 사귀는 거야?”

“응. 오빠도 날 좋아하고 있었더라고.”

“정말? 잘됐다. 축하해, 지우야.”

사랑은 제 일처럼 기뻐했다.

여섯 살 차이가 나는 두 사람의 연애에 괜히 희망이 생기기도 했다.

도한과 그녀 역시 같은 나이 차였기에, 불가능하기만 한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마워. 나 혼자 남자 친구 생겨서 미안하고.”

“그게 왜 미안해. 나도 곧 연애하면 되지.”

“너 좋아하는 사람 있어?”

잔뜩 들떠 있던 지우가 갑자기 웃음을 멈췄다.

사랑이 대답을 망설이는 걸 보니 마음에 담은 사람이 진짜로 있는 듯했다.

꼭 듣고 말겠다며 지우가 추궁하자 사랑은 할 수 없이 입을 열었다.


“……도한 오빠.”

지우는 잠시 눈을 깜빡거리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한 오빠?”

“응.”

“설마 태훈 오빠 친구? 컴공 2학년 지도한?”

“그래.”

몇 번이나 확인한 지우가 할 말을 잃은 듯 얼어붙었다가 목소리를 높였다.


“말도 안 돼! 왜 하필 도한 오빠야.”

“그러는 넌 왜 태훈 오빤데.”

“자상하잖아. 착하고 다정하고.”

“도한 오빠도 그래.”

“누가. 너 지금 내가 아는 지도한 얘기 하는 거 맞아?”

사랑이 고개를 끄덕이는데도 지우는 믿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도한은 얼음장같이 차가운 표정을 한 채 필요한 말 외에는 입도 열지 않는 사람이었다.

자상? 착해? 다정?

뭐 하나 맞아떨어지는 게 없는데 얘가 지금 무슨 얘길 하는 건지.


“그 오빠 별명이 괜히 지독한이 아니야, 사랑아.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으니까 그렇게 부르는 거라고.”

지우는 여자 선배들한테 들은 얘기가 있다며 도한을 깎아내렸다.

고백하면 다 받아 주는 바람둥이라더라.

사귀는 동안 사랑한다는 말을 단 한 번도 하지 않는 나쁜 놈이라더라.

결국 여자 친구가 지쳐서 떠나도 붙잡는 법이 없는 지독한 놈이라더라.


“너도 전에 태훈 오빠가 하는 말 들었잖아.”

“그래. 도한 오빠가 바람둥이는 아니라고.”

어떻게 그 말만을 기억할 수 있는지 답답해 지우가 꽥 소리를 쳤다.


“그거 말고! 그 오빠가 여자 친구한테 절대로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는 거.”

“사정이 있겠지.”

“뭐?”

“그럴 만한 사정이 있을 수도 있잖아. 그리고 꼭 사랑한다는 말을 해야 해? 그런 건 말로 안 해도 그냥 느낄 수 있는 거 아니야?”

지우는 말문이 막혔다.

도한의 편을 드는 걸 보니 진심인 듯했다.

순진한 이사랑을 어쩌면 좋을까.

드라마에서 보면 꼭 착하고 순진한 여자가 나쁜 남자한테 빠지던데.

내 친구가 그렇게 될 줄이야.


“걱정하지 마. 내가 아무리 도한 오빠 좋아해도 오빠는 나한테 관심도 없으니까. 그 사람한테 나는 그저 신입생일 뿐이야. 여자가 아니라.”

“그나마 다행이네. 그 오빠가 널 여자로 봤으면 진짜 양심도 없는 인간이지.”

지우가 씩씩거리는 동안 사랑은 조금 전에 헤어진 도한을 떠올렸다.

자연스레 집 앞에서 마주친 혜리의 얼굴도 눈앞을 스쳤다.

그녀가 했던 말이 가슴에 새겨져 지워지질 않았다.


“근데 지우야.”

“왜. 또 뭐.”

여기서 더 충격일 게 있나 싶어 지우가 불안한 눈으로 물었다.


“나 좀 전에 그 언니 만났는데.”

“그 언니? 누구?”

“도한 오빠 아는 동생이라는 언니 있잖아. 전에 공대 앞에서 마주쳤던 국문과 2학년.”

“박혜리 언니?”

“이름도 기억해?”

“이름도 예쁘잖아. 암튼 그 언니를 만났다고?”

“응.”

사랑은 제게 웃어 주던 혜리가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도한의 차에 오르는 장면은 아예 눈에 박혀 버렸는지 두 눈을 감아도 나타났다.


“오늘 그 언니가 나한테 그러더라.”

“뭐라고?”

“도한 오빠하고 깊은 사이라고.”

지우의 입이 떡 하니 벌어졌다.


“그게 무슨 뜻일까, 지우야?”

지우는 한동안 말을 잇질 못했다.

하지만 사랑이 끈질기게 대답을 기다리자 어쩔 수 없이 제 생각을 조심스럽게 드러냈다.


“그런…… 거 아닐까?”

“그런 게 뭔데?”

사랑의 맑은 두 눈을 보면서 얘기하려니 지우는 한 번 더 머뭇거렸다.


“왜, 그런 거 있잖아. 잠자리 파트너.”

“어? 파, 파트너?”

“그래. 그런 거.”

“설마. 대학생인데?”

“성인이니까 그럴 수도 있지.”

사랑은 나쁜 말이라도 들은 것처럼 가슴이 뛰었다.

깊은 사이라고 해서 서로 사랑한다는 의미가 아닐까 짐작했다.

사랑하지만 남모를 사정이 있어서 사귀지는 않는 게 아닐까, 그렇게 생각했다.

지우가 말한 것처럼 잠자리 파트너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듣고 보니 그쪽에 더 가까운 뜻일 것 같았다.


“사랑아, 너 그냥 도한 오빠 포기해라.”

안 그래도 도한이 마음에 안 드는데 혜리까지 나타나자 지우는 없던 정까지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아무리 봐도 그 오빠는 아니야. 우리 학교에 남자가 얼마나 많은데.”

“너 오티 가던 날 도한 오빠 보고 저런 남자랑 사귀면 인정하겠다고 한 거 잊었어?”

지우는 태훈에게서 도한을 소개받았을 때 그가 그때 그 남자였다는 사실을 바로 알아챘다.

사랑에게 이왕이면 저 정도로 잘생긴 사람이랑 사귀어 보라고 추천했던 남자라는 걸.


“그거야 얼굴만 보고 그런 거지.”

자신이 했던 말을 주워 담을 수도 없는 지우가 괜히 흠흠 목을 가다듬었다.


“차라리 그 체대생을 만나.”

“갑자기 윤재가 여기서 왜 나와.”

“누굴 만나도 도한 오빠보다는 나을 것 같아서 그래.”

“됐다. 잠이나 자자.”

“그러게 왜 하필 도한 오빠를 좋아해. 그것도 첫사랑이면서.”

사랑은 앉아 있을 기운도 없었다.

이제 그만 자려고 옷을 갈아입는데, 문득 오늘이 지우에게 중요한 날인 걸 깨달았다.


“나 때문에 열 내지 마. 너 오늘부터 태훈 오빠랑 1일이잖아. 다시 한번 축하한다, 친구야.”

지우는 애써 웃어 주는 사랑이 안쓰러웠다.

그렇다 해도 도한과 잘되는 일은 절대로 없길 바라고 또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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