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나른한 목소리, 숨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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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나른한 목소리, 숨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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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나른한 목소리, 숨소리
2023.01.16.
“저는 선배님하고 친해지고 싶어요. 사실 아까도 안 오셔서 전화해 보고 싶었는데 귀찮아하실까 봐 못 했고, 또 수업 시간에는 늦게까지 술을 드셔서 피곤하신 것 같은데 깨워도 되나 싶어서 가만히 있었어요. 이기적이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는데 저 혼자 좋은 학점 받겠다고 그런 건 절대 아니에요. 그냥, 제가 선배님을 안 지 얼마 안 돼서 어디까지 친하게 대해야 하는 건지 몰라서 그래요. 친구도 아니고 선배님이라서 이런 관계는 제가 처음이라.”
생각나는 대로 내뱉다 보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그녀조차 모르고 있었다.
그저 오해를 풀어야겠다는 마음밖에 없었다.
“아, 그리고 한 번도 선배님을 지독하다고 생각한 적 없어요. 저한테는 늘 잘해 주셔서…….”
사랑은 두 눈을 꽉 감고서 입술을 말아 물었다.
어떻게 마무리를 지어야 할지 수습이 되지 않았다.
처음부터 말을 하지 말걸 그랬다.
이렇게까지 솔직할 필요가 있었을까, 후회만 남았다.
그녀의 말을 가만히 듣고만 있던 그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괜히 심술 나서 뱉어 본 말들이었는데, 순수한 이사랑은 진심으로 받아들였는지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도한은 또 한 번 그녀가 귀엽다고 느끼는 자신이 어이가 없었다.
방금까지 왜 날을 세웠는지 잊어버릴 정도로 눈앞에 있는 그녀에게 온 정신을 빼앗기고 말았다.
잔뜩 상기된 사랑의 두 볼이, 최선을 다해 항변하는 붉은 입술이 그의 시선을 붙잡았다.
도한은 속으로 스스로를 미친놈이라 욕하며 미간을 좁혔다.
“내가 너한테 특별히 잘해 준 적은 없는 것 같은데.”
사랑이 갑자기 고개를 들고서 그를 쳐다보았다.
“오티 때 담요도 주시고, 방금 커피도 사 주셨잖아요.”
“그게 잘해 주는 건가.”
“아, 선배님은 아닐 수도 있겠네요.”
그녀가 도한을 좋아했기에 더 특별하게 느꼈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도한 입장에서 그 정도는, 그냥 이름 정도 알고 지내는 후배에게 아무 뜻 없이 베풀 수 있는 친절일 테니까.
“특별한 것도 같네.”
“네?”
그가 곰곰이 생각하더니 말했다.
“여자 후배한테 커피를 사 준 건 처음이니까.”
사랑의 두 눈이 빠르게 깜빡거렸다.
이 또한 별 뜻 없는 말일 텐데 심장이 무리하게 뛰어 댔다.
“전화번호 알고 있는 여자 후배도 너밖에 없고.”
도한이 놀란 얼굴을 한 사랑을 보며 피식 웃었다.
그녀는 그의 빛나는 미소에 넋이 나가고 말았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만 가자. 특별한 신입생.”
도한이 더욱 환하게 웃자 사랑은 두 다리에 힘이 풀려 꼼짝할 수가 없었다.
이기적이라고 몰아붙일 때는 언제고.
잘생긴 얼굴을 코앞까지 들이대 숨도 제대로 못 쉬게 사람 혼을 쏙 빼놓더니.
저렇게 가슴 떨리게 웃는 건 명백한 반칙이었다.
* * *
일주일 후, 사랑은 핸드폰을 붙들고 10분째 한숨만 내쉬었다.
도한에게 모닝콜을 해야 하는데 손이 떨렸다.
월요일 아침마다 전화로 깨워 주겠다는 생각은 어떻게 한 건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때 잠깐 미쳤었던 것 같다.
사랑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가 화장실 쪽을 흘긋 살폈다. 지우가 화장실에 있을 동안 전화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사랑은 두 눈을 질끈 감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한참의 신호가 흐른 후에 연결이 됐다.
“여보세요?”
-…….
“저기, 아침인데요.”
-…….
“그만 일어나셔야 하는데. 여보세요?”
얼굴을 마주하는 것도 아닌데 사랑은 식은땀이 흘렀다.
그가 아직 잠에서 안 깼는지 조용하더니 이내 잠긴 음성이 들려왔다.
-어. 고맙다.
짧은 대답을 끝으로 전화가 뚝 끊겼다.
사랑은 왠지 불안했다.
도한의 목소리를 들어 보니 바로 일어날 것 같지가 않았다.
이왕 모닝콜을 해 주기로 했으니 확실하게 깨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다시 전화를 걸었다.
역시나 신호가 길게 이어지다 통화가 됐다.
“일어나셨어요?”
-응.
“아닌 것 같은데. 아직도 누워 있는 거 아니에요? 지금 눈 감고 있죠.”
-귀신이네.
웃음이 섞인 나른한 목소리가 귓가에 퍼지자 그녀의 얼굴이 화끈거렸다.
평소에도 차분하게 가라앉은 저음이 매력적이었는데, 잠결에 전화를 받으니 제게 속삭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숨소리까지 고스란히 느껴져 사랑은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침대에 누워서 자신과 통화하고 있을 도한을 떠올리자 가슴이 두근거리다 못해 터질 것만 같았다.
이러다 큰일 나겠다 싶었던 그녀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이대로 고백이라도 쏟아 낼 것 같았다.
그만큼 이른 아침에 듣는 도한의 목소리는 위험천만했다.
“빨리 일어나요. 그러다 지각해요.”
-알았어.
“……일어났어요?”
-아니.
“아 진짜! 일어나라니까요!”
사랑이 저도 모르게 짜증 섞인 목소리를 내자 그가 피식 웃었다.
-모닝콜 좋네. 강의실에서 보자.
전화가 끊어지고 이내 화장실에서 지우가 나왔다.
“뭐야? 무슨 소리야?”
아침부터 옆집에서 싸우나.
지우가 의문스럽게 중얼거렸지만 사랑은 모른 척 고개를 저었다.
속으로는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꾀꼬리 같은 목소리로 깨워 주고 싶었는데 딱따구리가 된 기분이었다.
시끄러워서 그가 일어난 것만 같다.
* * *
사랑은 평소보다 조금 일찍 집을 나섰다.
강의실에 도착해 오늘도 뒤쪽에 자리를 잡았다.
모닝콜까지 해 줬지만 도한이 정말로 일어났을지 의심스러웠다.
언제 오려나,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는데 맡아 놓은 옆자리에 누군가가 앉았다.
짙은 향수 냄새가 풍기는 거로 보아선 그는 아니었다.
사랑이 고개를 돌리자 어떤 여자가 그녀를 보며 싱긋 웃었다.
“안녕? 내가 부탁이 있는데.”
“네? 저한테요?”
딱 봐도 여자는 고학년이었다.
반대로 여자는 사랑이 한눈에 신입생인 걸 파악하곤 다짜고짜 말을 놨다.
사랑은 당황스러웠지만 같은 수업을 듣는 선배의 말이라 가만히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혹시 과제 했어?”
설마 리포트를 베끼려는 걸까.
그런 예상을 하며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아직 안 했는데요.”
“다행이다.”
여자가 기뻐하며 안도하는 걸 보니 잘못 짚은 듯했다.
사랑은 여자의 의도를 짐작할 수가 없었다.
“내가 사실 교수님한테 도한 오빠랑 같은 조 하고 싶다고 했었거든. 근데 오빠는 이미 다른 애랑 됐다고 하더라고.”
여기까지 듣고도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지 몰랐다.
사랑은 가만히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말인데, 조를 좀 바꿔 주면 안 될까?”
“네?”
“내가 하도 사정을 하니까, 교수님께서 도한 오빠한테 먼저 물어보라고 하시더라고. 오빠가 그렇게 하겠다고 하면 바꿔 주겠다고.”
그런데 왜 저한테 이러시냐는 말이 목까지 차올랐다.
사랑이 그 말을 뱉기도 전에 여자가 다시 말했다.
“근데 오빠 성격에 그래 줄 것 같진 않아서. 네가 오빠한테 조를 바꾸고 싶다고 먼저 말해 줄래? 대신 사례는 할게.”
이게 정녕 부탁하는 태도인가.
돈이라도 줄 테니까 도한에게서 떨어지라는 말처럼 들렸다.
사랑은 어이가 없어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입만 벙긋거렸다.
무시를 당한 기분이었다.
그때 도한이 나타났다.
“여기 내 자린데.”
무겁게 내려앉은 목소리에 여자가 흠칫 놀라며 일어났다.
도한은 자리에 앉아 가방에서 책을 꺼내 펼쳤다.
그가 눈길도 주지 않자 여자는 무안해진 얼굴로 발을 옮겼다.
“잠깐.”
방금보다 더 살벌한 목소리를 듣고 여자가 멈춰 섰다.
“대답 듣고 가라고.”
“네?”
여자만큼이나 사랑도 숨을 죽였다.
그의 별명이 왜 ‘지독한’인지 지금 그의 딱딱한 표정이 말해 주고 있었다.
지금까지 보아 온 그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눈빛이 서늘하고 무서웠다.
“난 너하고 같은 조 할 생각 없어. 그러니까 앞으론 내 조원 찾아와서 협박하지 마.”
“오, 오해예요. 협박이 아니라 부탁한 거예요.”
여자는 곧 울 것 같았다.
하지만 도한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부탁을 하려면 예의부터 갖춰. 반말부터 지껄이지 말고.”
사랑은 여자가 안쓰러웠다.
그냥 바꿔 줄 수 없다고 하면 될걸, 저렇게까지 매몰찰 필요가 있을까.
여자를 힐긋 보니 상처받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여자는 더 이상 아무 말도 못 한 채 울먹이는 표정으로 제자리에 돌아갔다.
사랑이 낯설다는 시선으로 도한을 쳐다보자 그가 사랑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누가 또 찾아오면 무시해. 나는 조 안 바꿀 거니까.”
그러더니 조금 전 자신의 행동이 마음에 걸렸는지 변명을 덧붙였다.
“예의를 갖출 필요가 없는 경우라 반말한 거야. 그리고 너는 내 후배니까 반말하는 거고.”
사랑의 시선이 ‘그러는 너는 왜 저 언니랑 나한테 반말하세요.’라고 느껴진 듯했다.
냉랭한 기운이 감돌던 그의 얼굴이 어느새 온순해져 있었다.
극명하게 갈린 도한의 표정에 사랑은 웃음이 나왔다.
“누가 뭐래요.”
그녀의 대답에 도한은 멋쩍은지 헛기침을 하며 괜히 책을 넘겼다.
사랑은 그가 더욱 좋아지고 말았다.
* * *
건물 밖으로 나오니 잔뜩 흐렸던 지난주와 달리 해가 쨍쨍했다.
일주일 사이에 봄이 성큼 다가왔다.
“과제는 언제 할까요?”
사랑은 하루라도 빨리 도한과 데이트를 하고 싶었다.
비록 진짜는 아니지만 이 좋은 날들을 흘려보내기가 아까웠다.
“이번 주 어때? 일요일.”
혜리를 데려다줘야 하는 상황이 생길지도 몰랐기에 도한은 최대한 평일은 피하고 싶었다.
주말엔 그녀가 학교에 나오지 않으니 신경 쓰지 않고 외출할 수 있었다.
“좋아요. 근데 어디 가서 뭐 하죠?”
“데이트가 다 거기서 거기지.”
“제가 해 본 적이 없어서.”
도한이 우뚝 걸음을 멈추고 사랑을 바라봤다.
조금 의외였다.
대학 가면 남자 친구부터 사귈 거라고 했다기에, 입시 준비를 하느라 잠시 이성을 멀리한 줄 알았다.
연애 경험이 아예 없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성격도 괜찮고 얼굴도 귀엽게 생겼고.
무엇보다 같이 있으면 밝은 기운이 전해져서 덩달아 마음이 정화되는 기분이라 남자들한테 꽤 인기가 있을 거라 여겼다.
그런데 데이트를 해 본 적이 없다니.
뜻밖의 대답이었다.
“왜, 그러세요?”
도한이 저를 빤히 쳐다보자 사랑이 얼굴을 붉혔다.
괜한 말을 한 것 같았다.
스무 살이나 먹도록 데이트 한 번 안 해 봤다는 게 자랑은 아니니까.
“아니야. 아무것도.”
도한은 다시 걸으며 과제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3월에 가 볼 만한 데이트 장소로 검색해 봐. 그중에 가고 싶은 곳 골라 보고.”
“네.”
사랑이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눈을 맞추기가 민망해서 발끝만 쳐다보며 걷는데 갑자기 도한이 멈춰 섰다.
“그럼 일요일에 보자.”
“공대 수업 아니세요?”
지난주에 그와 한 우산을 쓰고 공대까지 같이 갔었던 사랑은 갑작스러운 작별 인사에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휴강.”
간단한 설명이 그녀의 가슴을 가라앉혔다.
이제 겨우 월요일인데 그를 보려면 일요일까지 기다려야 했다.
침울한 얼굴로 인사하려던 사랑은 누군가 뒤에서 제 어깨를 두드리는 감각에 깜짝 놀랐다.
뒤돌아보니 윤재였다.
“안녕?”
“어? 안녕.”
화요일에만 만나는 친구를 월요일에도 보게 되어 사랑은 평소보다 반갑게 인사했다.
“수업 듣고 나오는 거야?”
“응.”
“다음 수업은 어딘데?”
“공대. 너는?”
“난 체대. 같이 가자.”
“그래.”
조금 전까지만 해도 축 처져 있었던 사랑은 윤재 덕분에 밝아진 표정으로 도한에게 인사를 전했다.
“먼저 가 볼게요.”
도한이 끄덕이자 윤재가 그에게 고개를 조금 숙이고는 사랑과 함께 걸음을 옮겼다.
“무슨 책이 그렇게 많아?”
“도서관에 반납할 거.”
“이리 줘. 내가 들어 줄게.”
“아니야. 괜찮아.”
“가는 데까지만 들어 줄게.”
윤재는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책을 휙 가져갔다.
손이 가벼워진 사랑이 편안해진 얼굴로 말했다.
“고마워.”
“뭘 이 정도로.”
두 사람은 마주 보고 웃으며 내일 수업에 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의 다정한 모습을 도한이 멀리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 아래에 나란히 걷는 신입생들이 참 풋풋해 보였다.
둘 다 밝고 예뻤고, 잘 어울렸다.
“곧 해 보겠네. 데이트.”
활짝 웃는 사랑을 보며 도한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가 그만 돌아서려는데 어쩐지 발길이 떨어지질 않았다.
그의 두 눈이 그녀에게 붙잡혀 버렸다.
맑고 투명한 사랑의 미소가 청량한 바람이 되어 그에게 불어오는 것만 같았다.
그녀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도한은 저도 모르게 그 자리를 지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