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친해지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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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친해지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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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친해지고 싶어요
2023.01.13.
높은 담이 세워진 주택 앞에서 도한이 차를 멈췄다.
밖으로 나와 조수석 문을 열어 주자 혜리가 휘청거리며 내렸다.
도한이 무심한 얼굴로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병원으로 가.”
“가도 소용없는 거 알잖아. 좀 쉬면 괜찮아져.”
혜리가 대문을 열고 정원을 지나는 동안 도한은 그녀를 부축했다.
거실에 들어섰을 때 소파에 앉아 있던 경철이 두 사람을 보고 벌떡 일어섰다.
“혜리야! 또 쓰러진 거야?”
“아니야, 아빠. 그냥 좀 어지러워서.”
경철은 사색이 된 채로 혜리를 데리고 와 소파에 앉혔다.
부엌으로 달려가 물 한 컵과 약을 가져오더니 얼른 딸의 손에 쥐여 주었다.
“한동안 괜찮더니 왜. 학교에서 무슨 일 있었어?”
“그냥 갑자기 숨이 안 쉬어져서. 원래 가끔 그랬잖아.”
혜리가 약을 먹고 컵을 테이블에 내려놓자 경철이 그녀의 옆에 앉아 손을 꼭 잡았다.
어릴 때 시작된 공황 장애를 꾸준히 치료해 왔지만 완치는 쉽지 않았다.
괜찮아진 것 같다가도 어느 순간 예기치 못한 장소에서 발작하곤 했다.
다 큰딸을 매일같이 따라다닐 수 없는 노릇이라 경철은 늘 불안을 안고 살았다.
“혼자서는 도저히 집에 못 오겠더라고. 그래서 오빠한테는 미안하지만 내가 부탁했어.”
“미안하긴 뭐가. 그러라고 차까지 사 줬는데. 너는 그런 거 신경 안 써도 돼.”
혜리가 도한의 눈치를 보았다.
경철이 저만 걱정하느라 그를 내내 세워 두는 게 마음에 걸렸다.
“아빠. 오빠 오랜만에 집에 왔는데 얘기 좀 해.”
그제야 경철이 도한에게 시선을 옮겼다.
“뭘 그렇게 서 있어. 와서 앉지.”
“수업 있어요.”
나란히 앉아서 오붓하게 대화를 나눌 사이는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도한은 빠르게 인사하고 집에서 나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경철은 할 말이 남은 듯 보였다.
“당분간 혜리 수업 끝나면 네가 집으로 데려와라.”
“아빠. 나 진짜 괜찮다니까.”
혜리가 다급히 경철을 말렸다.
작년에 대학을 입학하고 1년이나 도한의 차를 타고 집에 왔다.
더는 미안해서 안 되겠다고 겨우 경철을 설득해서 혼자 다니기 시작했는데, 또다시 이런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괜찮긴. 그러다 갑자기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려고.”
혜리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에 관해서는 한 치도 양보하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이럴 땐 타협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럼 일주일만. 응? 아빠.”
경철은 딸의 애원에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없이 부드러운 눈으로 혜리를 바라보던 경철이 도한에게 날카로운 눈빛을 보냈다.
“네가 이 집에서 살면 해결될 일을 왜 이렇게 어렵게 만들어?”
“그 얘긴 또 왜 해. 오빠, 그만 가. 오늘 고마웠어.”
혜리가 경철에게 그만하라며 얼굴을 찌푸렸다.
도한은 그런 부녀 사이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문 앞까지 걸어오는 동안 뒤에서 그들이 주고받는 말들이 들려왔다.
“아빠, 자꾸 그러면 내가 오빠한테 더 미안해지잖아.”
“괘씸해서 그래. 여기서 살면 사랑하는 우리 딸 아침에 학교도 데려다주고 좋잖아.”
“안 그래도 오빠 나 때문에 자퇴하고 우리 학교 왔어. 그걸로도 충분히 고맙고 미안하단 말이야.”
“겨우 그 정도로 뭐가 고마워? 도한이가 너한테 어떻게 했는데.”
높아진 경철의 목소리에 도한이 잠깐 발을 멈췄다.
문을 열어야 하는데 손에서 힘이 빠졌다.
경철은 아직 문 앞에 서 있는 도한을 보고 들으라는 듯 더욱 목소리를 키웠다.
“쟤는 너한테 평생 빚 갚는 심정으로 살아야 해.”
“아빠…….”
혜리가 안절부절못하며 말려 봐도 소용없었다.
“지독한 놈. 나는 쟤가 뭘 해도 위선 떠는 거로밖에 안 보여.”
도한은 두 눈을 꾹 감았다가 뜨곤 문을 열었다.
그대로 밖으로 나가 차에 오르고 나서야 숨이 트이는 듯했다.
평생 빚 갚는 심정.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제 아버지 지경철이 할 말은 아니라는 생각에 비틀린 웃음이 새어 나왔다.
* * *
월요일 오전 9시.
강의실에 일찍 도착한 사랑이 맨 앞에 앉았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도 도한이 오지 않아서 맨 뒤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그가 늦게 오더라도 쉽게 찾을 수 있게.
전화를 해 볼까 싶었지만 그만두었다.
아직까진 그에게 전화를 걸기가 조심스러웠다.
별것도 아닌 일로 귀찮게 군다고 할까 봐 핸드폰만 만지작거리다 수업이 시작됐다.
다행히 교수님이 출석을 부르는 중에 그가 뒷문을 열고 들어왔다.
도한이 옆에 앉자 사랑은 그가 왜 지각을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새벽까지 술을 마셨는지 약하게 술 냄새가 풍겨 왔다.
피곤함에 얼굴도 많이 상해 보였다.
재수강이면서 도대체 학점을 받겠다는 건지 말겠다는 건지, 도한보다 되레 그녀가 더 신경 쓰는 듯했다.
후배라면 잔소리라도 할 텐데 여섯 살이나 많은 선배라 그럴 수도 없었다.
그녀가 몰래 한숨을 내쉬는데 교수님의 목소리가 귀에 꽂혔다.
“요즘 날씨가 참 좋죠? 꽃도 피고 봄비도 내리고. 그래서 첫 번째 과제를 내주려고 합니다.”
학생들이 탄식하며 웅성거렸지만 교수님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해 보면 알겠지만 과제가 아니라 그냥 노는 거예요. 지난 시간에 정한 짝이랑 데이트를 하고 오면 됩니다.”
데이트라는 말에 사랑은 흠칫 놀라 들고 있던 펜을 떨어뜨렸다.
강의명이 <연애와 결혼>인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직접적인 과제를 내줄 줄은 몰랐다.
그녀가 슬쩍 도한을 쳐다보았다.
누구는 심장이 떨려 죽겠는데 그는 태평하게 앉은 채로 눈을 붙이고 있었다.
뭘 기대했던 건지, 허무함이 밀려왔다.
“둘이서 같이 데이트 코스를 짜고, 그대로 실행도 해 보면서 어떤 점이 좋았고 아쉬웠는지 리포트를 작성해 주세요. 이 과제는 한 달에 한 번씩 나갈 겁니다. 3월, 4월, 5월, 6월. 날씨가 변하면 사람 마음도 달라지잖아요. 이런 날씨엔 어딜 가고 싶고, 저런 날씨엔 뭘 하고 싶고.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서 상대에 대한 마음도 달라지겠죠? 우리 강의가 괜히 커플 제조기겠어요?”
동성끼리 조를 이룬 학생들은 아쉬운 목소리를 냈다.
조용히 교수님을 찾아가 마음에 드는 이성을 얘기해 짝이 된 이들은 숨죽인 채로 쾌재를 불렀다.
사랑은 설레면서도 난처했다.
도한과 단둘이 데이트를 할 생각에 벌써부터 흥분이 가라앉질 않았지만 그가 과연 이 과제를 잘 수행할지 의문이었다.
억지로 듣는 수업이라 제시간에 오지도 않는데 과제에 열정을 쏟겠는가.
그녀 혼자 데이트 코스를 돌아다니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사랑은 여전히 눈을 감고 있는 도한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 * *
수업이 끝나고 도한은 복도에 마련된 자판기에서 캔 커피를 뽑았다.
그가 남은 돈을 반환하지 않고 사랑에게 물었다.
“뭐 마실래.”
“저도 같은 거요.”
두 사람은 각자 캔 커피를 들고 자판기 옆 벤치에 앉았다.
차가운 커피가 몸속으로 들어가자 도한은 그제야 술이 깨는 기분이었다.
전에 다니던 대학에서 알고 지냈던 동기가 새벽까지 붙잡고 늘어지는 바람에 늦게서야 집에 들어갔다.
아침에 알람이 몇 번이나 울렸지만 끌 정신이 없었다.
갈증이 나서 눈을 떠 보니 방 안이 훤해 놀라서 일어났다.
그때부턴 바쁘게 씻고 옷을 갈아입고 집에서 뛰쳐나왔다.
재수강도 짜증 나는데 강의명도 마음에 안 드는 <연애와 결혼>을 세 번이나 수강하고 싶지는 않았다.
사력을 다해 뛴 덕에 지각은 면했지만 잠이 부족해서 계속 눈이 감겼다.
하지만 교수님의 우렁찬 목소리에 잘 수는 없었다.
도한은 그새 커피를 다 마시고 옆에 있는 쓰레기통에 캔을 버렸다.
“너 그렇게 안 봤는데 되게 이기적이다.”
그가 사랑의 앞으로 고개를 내밀어 그녀를 가만히 바라봤다.
갑작스럽게 마주한 도한의 얼굴에 흠칫 놀란 사랑이 몸을 뒤로 물렸다.
그와의 거리가 너무나 가까워 순간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제, 제가 뭘…….”
“내가 수업에 오는지 안 오는지 궁금하지도 않아?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전화 한 번을 안 하네.”
사랑은 억울했지만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안 그래도 핸드폰을 몇 번이나 들었다 놨다고, 늦게 오면 찾기 쉬우라고 일부러 뒤에 앉은 거라고 해명하고 싶었지만 입을 꾹 다물었다.
사실대로 말하면 자신의 마음을 들켜 버릴까 봐.
그렇다고 참기만 하는 성격도 못돼 다른 말이라도 해야 했다.
“해도 되는 거였어요?”
“뭐?”
“해도 되는 건지 몰라서 못 했어요.”
도한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헛숨을 터트렸다.
“안 되는 거면 번호는 뭐 하러 알려 줬겠어. 이럴 때 전화 좀 해 달라고 준 거지.”
“그럼 다음부터는 할게요.”
“아주 엎드려 절 받기네.”
도한이 인상을 구기자 그녀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니면 제가…….”
무슨 말을 하려나 싶어서 도한이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사랑은 잠시 머뭇거리다 어렵게 입을 열었다.
“월요일 아침마다 모닝콜 해 드릴까요?”
“모닝콜?”
“네. 일찍 못 일어나시는 것 같은데 제가 전화해서 깨워 드리면 어떨까 해서요.”
도한이 말이 없자 사랑은 괜한 오지랖을 부렸나 싶어서 얼른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그건 좀 부담스러우시겠죠? 그냥 한번 말해 본 거니까 신경 쓰지…….”
“좋아.”
“네?”
자기가 먼저 제안을 했으면서도 그가 승낙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지 사랑이 눈을 크게 떴다.
“알람은 꺼도 전화는 받겠지. 근데 귀찮을 텐데, 하루 이틀도 아니고.”
“괜찮아요. 제가 워낙 아침에 일찍 일어나거든요. 그 시간에 할 일도 없어서 화장실 청소도 하고 그래요.”
“……우리 어머니가 그러셨는데.”
도한은 잠시 돌아가신 어머니를 떠올렸다.
외박이 잦은 아버지 때문에 밤잠을 설칠 때가 많았던 어머니는 새벽부터 일어나서 밥을 하고 청소를 하고 빨래를 했다.
어릴 땐 어머니가 그저 부지런하다고 생각했는데 조금 크고 나서야 그 이유를 알게 됐다.
외로운 그 시간을 견딜 수가 없어 뭐라도 해서 채워야 했다는 걸.
“어쨌든 고맙다. 그럼 잘 부탁할게.”
“네.”
월요일 아침마다 도한을 깨울 생각에 잔뜩 들떠 있던 사랑이 어색하게 웃었다.
고등학생같이 안 보이려고 노력하는 중인데 이젠 어머니라니.
조금 전에 뱉은 말이 후회스러웠다.
“과제는 언제 할까.”
“네?”
갑자기 바뀐 대화 주제에 적응하지 못한 그녀가 되물었다.
“데이트 과제. 언제 시간 괜찮냐고.”
“주무신 거 아니었어요?”
한참 동안 눈을 감고 있어서 자고 있는 줄 알았는데, 그가 과제 내용을 알고 있어서 사랑은 크게 놀랐다.
그 한참 동안 몰래몰래 그를 감상하고 있었는데 중간에 그가 눈이라도 떴으면 어땠을지 생각만으로도 아찔했다.
“너 진짜 이기적이구나.”
갑작스러운 도한의 말에 사랑이 무슨 큰일이라도 난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도한은 그 모습이 놀란 토끼처럼 귀엽게 느껴져 저도 모르게 놀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반면 사랑은 두 번이나 같은 말을 들어서 황당했다.
이번엔 또 어떤 이유로 이기적인 사람이 된 걸까.
그녀가 초조해하는 사이 도한이 눈을 가늘게 뜨고 서운함을 내비쳤다.
“자는 걸 봤으면 깨웠어야지. 너 혼자 학점 받으려고 수업 시간에 자는 사람 깨우지도 않고, 사람이 오지도 않는데 전화도 안 하고. 나 너 그렇게 안 봤는데.”
사랑은 눈앞이 깜깜해졌다.
어떻게 속을 보여 줘야 할지 모르겠어서 제대로 말이 나오지도 않았다.
“그, 그게 아니라요.”
“너도 내가 지독한 놈으로 보여?”
“네?”
사랑이 당황한 모습을 보이자 도한은 정말 그런 거냐며 비딱한 마음이 꿈틀댔다.
“그래서 친해지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한 거 아니냐고.”
너라고 뭐 다르겠냐는 듯한 자조 섞인 말투에 그녀가 다급히 입을 열었다.
“친해지고 싶어요!”
단호한 목소리에 도한의 두 눈이 조금 커졌다.
좋아한다는 말도 아니고 그저 친해지고 싶다는 것뿐인데 이상하게 그의 가슴이 두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