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지독한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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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지독한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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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지독한 남자
2023.01.09.
화요일 9시, <한자의 이해> 강의가 끝났다.
사랑이 가방을 챙기자 옆에 앉은 남학생이 말을 걸었다.
“혹시 1학년이에요?”
“네.”
“저도 1학년인데 수강 신청 망해서 혼자 떨어졌거든요. 아는 사람이 없어서 인사나 하고 지냈으면 해서요.”
남학생이 붙임성 좋게 말하자 사랑이 가볍게 웃어 주었다.
“같은 1학년인데 말 놔도 되지?”
“그래.”
한 학기 동안 같이 수업을 들을 텐데 신입생끼리 친하게 지내면 좋을 듯해 사랑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체육학과 정윤재야.”
“나는 전자공학부 이사랑.”
“와. 듣기만 해도 머리 아픈 전공이다.”
윤재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자 사랑도 질 수 없다며 말했다.
“나한테는 체육이 더 그래. 운동 신경이 꽝이거든. 너는 어떤 종목이 전공인데?”
“체육학과라고 하면 다들 운동선수인 줄 아는데, 나는 비실기전형으로 들어왔어. 중학생 때 수영 선수였다가 부상 때문에 그만두었거든.”
“아, 그렇구나.”
윤재는 강의실을 나가면서 대화를 이어 갔다.
“너도 수강 신청 망한 거야?”
“아니. 그냥 한자가 좋아서 신청했어.”
“넌 주로 머리 아픈 걸 좋아하는구나.”
윤재가 얼굴을 찌푸리자 사랑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전화번호 알려 줄 수 있어?”
“어?”
사랑은 저보다 훨씬 키가 큰 윤재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다부진 체격과 달리 인상은 부드러웠다.
자신도 낯을 가리는 성격은 아니지만, 이렇게까지 사교적이지는 않아서 그저 신기했다.
“부담스러우면 안 알려 줘도 돼.”
“아니야. 그게 뭐 부담이라고.”
사랑이 손을 내밀었다.
윤재가 핸드폰을 건네자 전화번호를 입력하고 돌려주었다.
새 학기라 전화번호를 주고받을 일이 참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마워. 혹시 나한테 부탁할 일 있으면 연락해. 아무래도 내가 그럴 것 같지만.”
윤재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웃어 보였다.
공대와 체대가 같은 방향이라 나란히 걷던 두 사람은 갈림길 앞에서 멈춰 섰다.
“공대 식당 밥은 맛있어?”
“그냥 그래.”
“체대는 웬만한 식당보다 맛있어. 나중에 한번 먹으러 와. 내가 사 줄게. 선배들한테 받은 식권이 꽤 있거든.”
“그래. 알았어.”
사랑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보면 오래 알고 지낸 사이처럼 생각할 것 같았다.
그만큼 정윤재는 사람을 편하게 해 주는 성격이었다.
“그럼 잘 가.”
“응, 안녕.”
윤재는 손을 흔들고 체대 건물 쪽으로 걸어갔다.
그녀도 다음 수업을 위해 얼른 공대로 향했다.
* * *
지우와 전공 기초를 듣고 나온 사랑은 배가 고팠다.
수업이 전부 9시에 시작하는 바람에 아침을 일찍 먹다 보니 점심시간 때가 되면 꽤 허기가 졌다.
“밥 먹고 가자. 나 더는 못 참겠어.”
학교 밖을 나가면 이곳보다 더 맛있는 식당들이 많겠지만 사랑은 걸을 힘조차 없었다.
일단은 뭐라도 먹어 속을 채워야 했다.
“그래. 나도 배고프다.”
지우의 동의를 얻은 사랑이 계단을 올라 2층 식당으로 들어갔다.
그녀들은 똑같이 한식을 주문하고 쟁반에 음식을 받아 자리에 앉았다.
사랑이 숟가락으로 밥을 크게 떠 막 입 안에 넣을 때, 도한과 그의 친구 태훈이 맞은편에 앉았다.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서 도한을 ‘지독한’이라고 불렀던 바로 그 남자였다.
그날 지우는 태훈과 같은 조였고, 학교로 돌아왔을 때 이미 지우는 그를 좋아하고 있었다.
둘이 친해진 덕에 사랑은 지우로부터 도한에 관해 조금 알게 되었다.
삼수 끝에 합격한 태훈은 1학년을 마치고 군대에 다녀와 작년에 교양 강의에서 처음 도한을 만났다고 했다.
전공은 다르지만 같은 나이라는 것만으로도 둘은 절친이 되었다고.
그리고 또 하나.
도한은 그녀들과 이웃이었다.
원룸이 모여 있는 골목에서 바로 옆 건물에 살고 있었다.
사랑은 이를 운명이라 여겼다.
“어? 안녕하세요.”
지우가 먼저 인사를 하고 사랑도 고개를 숙였다.
태훈과는 같은 학부라 공대 복도에서 마주친 적이 있었다.
“안녕. 여기서 보니까 더 반갑다.”
“오빠들은 주로 공대에서 점심 드세요?”
“학관이 더 맛있긴 한데 멀어서 우린 그냥 여기서 먹는 편이야.”
태훈과 지우의 대화를 듣고 사랑은 앞으로 이곳에 자주 와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점심때마다 도한을 볼 수도 있으니까.
그런 날엔 어느 식당보다도 맛있을 게 분명했다.
지금도 입 안에 가득한 밥알이 설탕처럼 달게 느껴졌다.
지우가 뜬금없는 말을 하기 전까진.
“근데 사랑아, 그 사람 누구야?”
“그 사람?”
“키 크고 체격 좋은. 아까 너랑 같이 걸어오던데.”
사랑이 처음 보는 남자와 친하게 대화하는 모습을 의아하게 지켜봤던 지우는 강의실에 가서 물어보려고 했다.
곧바로 교수님이 오시는 바람에 잊어버리고 말았지만.
그 남자만큼이나 키가 큰 도한을 보니 생각이 났다.
“아. <한자의 이해> 같이 듣는…… 친구.”
사랑은 윤재를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몰라서 잠시 머뭇거렸다.
사람이라고 하기에도 그렇고, 남자라고 하기도 뭐해서 단순히 ‘친구’라고만 했다.
“친구? 오, 이사랑. 벌써부터 남자 친구 사귀는 거야?”
지우가 흥분해서 목소리를 높이자 사랑이 얼굴을 찌푸렸다.
“남자 친구 아니고 친구라고. 어쩌다 옆자리에 앉았는데 우리 둘 다 혼자 수업 들어서 인사 나눈 것뿐이야.”
“전화번호도 주고받고?”
“어떻게 알았어?”
“대학 가면 남자 친구부터 사귀겠다더니 대단한데?”
사랑이 답답한 마음에 그런 게 아니라고 하려 했지만, 태훈이 좋은 먹잇감을 발견했다는 듯이 장난기 가득한 얼굴을 하고선 끼어들었다.
“사랑이 그래서 대학 온 거였어? 남자 친구 사귀려고?”
“꼭 그런 건 아닌데요, 그게…….”
“근데 걔 체대생이야? 체격이 남다르던데.”
변명할 시간도 주지 않고 지우가 질문하는 바람에 사랑은 허탈하게 숨을 내쉬었다.
“응. 체육학과긴 한데 운동선수는 아니래. 중학생 때 수영 선수였다가 부상 때문에 그만뒀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비실기전형으로 입학했대.”
“와, 둘이 진짜 친한가 보네. 그런 것까지 다 알고.”
“말해 줬으니까 아는 거지. 오늘 처음 봤는데 친하긴 뭘.”
“처음 본 남자한테 전화번호도 주고. 그 친구 잘생겼나 봐?”
태훈까지 합세하니 사랑은 죽을 맛이었다.
이 와중에 도한은 조용히 밥만 먹고 있었다.
자신에게 전혀 관심이 없는 그의 모습에 사랑은 괜히 가슴이 아렸다.
그사이 태훈의 마지막 질문엔 지우가 대신 대답했다.
“멀리서 봐도 괜찮더라고요. 그 체대생 이름은 뭐야?”
밥을 먹느라 시선을 내리고 있는 도한을 바라보던 사랑이 힘없이 말했다.
“정윤재.”
“나중에 나도 같이 한번 만나자. 왠지 재미있을 것 같다.”
“그래.”
그녀는 쓰라린 마음을 숨기고 애써 웃어 보였다.
* * *
식사를 마치고 1층으로 내려왔다.
다음 수업은 어디에서 듣는지 서로 이야기를 나누다가 태훈이 도한에게 누군가를 가리켰다.
“저기 박혜리 아니야?”
이따금 저렇게 공대 앞으로 찾아와서 익히 아는 얼굴이었다.
태훈의 손을 따라 시선을 옮긴 도한이 혜리를 보고 멈춰 섰다.
곧 그와 눈이 마주친 혜리가 조금 망설이더니 이내 그들 쪽으로 걸어왔다.
“오빠, 수업 끝났어?”
눈치를 보듯 조심스러운 태도에 태훈과 지우, 그리고 사랑이 더 긴장했다.
도한은 익숙하다는 듯 무표정이었다.
“무슨 일인데.”
“몸이 좀 안 좋아서. 혹시 시간 되면 집까지 데려다줄 수 있나 하고.”
혜리의 얼굴엔 미안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
몸이 안 좋다더니 안색도 창백했다.
도한을 제외한 세 사람은 그녀가 이 자리에서 쓰러지기라도 할까 봐 조마조마했다.
그만큼 안쓰러워 보였다.
그런 그녀를 가만히 내려다본 도한이 태훈에게 시선을 옮겼다.
“먼저 갈게.”
“어? 너 수업은…….”
“못 들어갈 거 같다.”
“뭐?”
아무리 그래도 수업을 빠지는 게 말이 되나 싶어 태훈은 황당한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택시를 태워서 보내든가.
굳이 직접 혜리를 데려다주겠다는 도한의 태도가 못마땅했다.
그렇다고 아프다는 사람을 앞에 두고 친구를 붙잡을 수도 없었다.
할 수 없이 멀어지는 두 사람의 뒷모습만 바라보고 있을 때 지우가 물었다.
“저 언니, 도한 오빠 여자 친구예요?”
한눈에 보기에도 혜리는 1학년 같지는 않았다.
그만큼 성숙한 분위기를 풍겼다.
가슴까지 내려오는 갈색 머리카락은 풍성하게 구불거렸고, 자연스러운 화장은 청순한 얼굴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여자가 봐도 예쁜 여자였다.
“아니. 그냥 아는 동생.”
“왠지 공대생은 아닐 것 같은데.”
“국문과야. 2학년.”
적어도 3학년은 될 줄 알았던 지우는 조금 놀랐다.
4학년이라고 해도 믿을 것만 같았다.
혜리에 비하면 저와 사랑은 고등학생 같았다.
“오빠하고도 친해요?”
“아니. 난 그냥 쟤가 싫더라고.”
“왜요? 예쁜데.”
“예쁘면 다 친해야 하냐?”
“그런 건 아니지만.”
예쁜 여자 싫어하는 남자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의외였다.
태훈은 정말 혜리가 마음에 안 드는지 인상을 찌푸렸다.
“아무튼 도한이 여자 친구는 아니야. 둘이 사귄 적은 없어.”
두 사람이 어떤 사인지 자세한 내막까진 알지 못했기에 태훈은 말을 아꼈다.
“여자 친구도 아닌데 집까지 데려다줘요? 도한 오빠 그렇게 아무한테나 친절한 성격 아닌 거 같은데.”
“그러게 말이다. 지독한 놈이 박혜리한테는 도대체 왜 저러는지 모르겠다.”
“근데 도한 오빠 별명이 왜 지독한이에요? 단순히 이름 때문에 그렇게 부르는 거예요?”
지우의 물음에 사랑이 더 궁금한 눈으로 대답을 기다렸다.
태훈은 그녀들의 반짝이는 눈빛을 보며 도리어 질문을 했다.
“나야 삼수를 해서 이 나이에 3학년이지만 지도한은 왜 스물여섯에 2학년인지 알아?”
그녀들이 고개를 젓자 태훈이 말을 이었다.
“걔가 원래는 한국대 다녔었거든.”
“한국대요?”
지우와 사랑의 두 눈이 잔뜩 커졌다.
자신들의 학교도 나름 상위권 대학에 속했지만 수재들만 모이는 한국대에 비할 곳은 아니었다.
“그래. 거기 3년 다니다가 다시 수능 봐서 우리 학교 들어온 거야. 편입도 아니고 자퇴하고.”
“아니…… 왜요? 한국대 공대가 훨씬 알아주는데?”
공과 대학뿐만 아니라 모든 단과 대학의 수능 성적이 한국대가 앞섰기에 그녀들은 쉽게 이해할 수 없었다.
“나도 그게 궁금해서 도한이한테 물어봤는데 뭐라는 줄 아냐?”
“뭐라는데요?”
“우리 학교 캠퍼스가 예뻐서란다.”
“네?”
더욱 이해할 수 없는 이유에 지우와 사랑이 동시에 인상을 찌푸렸다.
“근데 내가 한국대 컴공과에 친구가 있어서 좀 알아봤더니, 도한이 걔가 아주 실력자더라고. 고등학교 다닐 때 이미 앱 개발해서 돈도 벌고 그랬대. 그런 놈이 뭐가 아쉬워서 우리 학교에 다니는지. 수능이 무슨 기말고사냐고. 나는 삼수해서 겨우 들어온 학교를 말이야. 그러니 지독한 놈이지.”
지우와 사랑은 태훈의 말에 동감했다.
꿈에서라도 다시 수능을 치르고 싶지 않을 정도로 수험생으로서의 시간은 끔찍했으니까.
“나는 그런 이유로 그렇게 불렀는데, 어렸을 때부터 그 별명이었다고 하는 거 보면 그때도 독했나 봐. 도한이가 좀 그렇게 보이긴 하잖아. 무표정하고 차갑고. 친해지기가 어려운 타입이지. 막상 친해지면 사람 참 괜찮은데. 못하는 운동도 없고 의리도 있고, 친구로는 최고거든. 남자 친구로는 꽝이지만. 여자들은 자상한 남자 좋아하잖아. 지도한은 그런 거랑은 거리가 멀어.”
“그래도 여자들한테 인기 많을 거 같은데요? 도한 오빠 잘생겼잖아요.”
“인기야 많지. 주로 4학년이 지도한한테 고백 많이 해. 오래 못 사귀어서 그렇지.”
“왜요? 도한 오빠 바람둥이예요?”
“그런 건 아닌데. 도한이랑 사귄 여자들이 헤어지고 꼭 하는 말이, 지도한 진짜 지독하다는 거야. 대체 뭐 땜에 그러는지 궁금했는데 나중에 소문 듣고 알았어. 지도한이 여자 친구한테 절대로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는 걸.”
태훈은 후배들에게 친구의 연애사까지 떠벌리는 게 어쩐지 내키지 않았다.
지금도 이미 너무 많은 말을 늘어놓은 것 같아 그만 입을 다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침 갈림길이 나와 그가 인사를 전했다.
“난 이쪽으로 가야 해서. 다음에 보자.”
“네. 안녕히 가세요.”
고개를 숙인 사랑은 지우와 함께 도서관 쪽으로 걸었다.
태훈에게서 도한의 이야기를 들어서인지 머릿속에서 그가 떠나질 않았다.
지우도 태훈의 말을 곱씹어보는 듯했다.
“우리 학교가 예뻐서 수능을 다시 봤다니. 아무래도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지 않아?”
“다른 이유?”
“말이 안 되잖아. 겨우 그거 때문에 한국대를 자퇴했다는 게.”
사랑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보다도 그녀의 관심을 끄는 건 따로 있었다.
공대 앞에서 마주친 혜리가 도한과 무슨 사이인지.
온통 그 생각에 사로잡혀 그가 왜 수능을 다시 봤는지 따위는 궁금해할 여유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