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선배님이랑 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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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선배님이랑 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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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선배님이랑 하고 싶어요
2023.01.06.
3월, 개강을 했다.
사랑은 캠퍼스를 걷는 것만으로도 설레고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신기했다.
이제 대학생이 되었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하늘에 가득한 먹구름마저도 예쁘게 보일 정도로 그녀의 기분은 한껏 고조된 상태였다.
길을 가다 넘어져도 하하하 웃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사랑이 들뜬 마음으로 강의실 문을 열었다.
첫 수업은 <연애와 결혼>.
대학생이 되면 가장 먼저 하고 싶은 일이 남자 친구를 사귀는 것이었으니 그녀에게 이 교양 강의는 필수였다.
열심히 배워서 조만간 꼭 연애해야지!
벌써 남자 친구가 생긴 것만 같은 기분에 그녀의 입꼬리가 내려올 줄을 몰랐다.
잠시 후 옆에서 바람이 일더니 누군가가 다급히 앉았다.
교수님과 거의 동시에 들어오다니.
첫날부터 늦은 걸 보면 강의실을 헤맨 신입생이 아닐까.
얼굴이나 보려고 고개를 돌린 사랑은 순간 숨이 턱 막혔다.
그 남자였다.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때 제게 담요를 건넸던.
스무 살 인생에 첫눈에 반해 버린 바로 그 남자.
사랑은 혹시 꿈인가 싶어 두 눈을 여러 번 깜빡거렸다.
남자는 그녀를 기억하지 못하는지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수업이 시작됐다.
교수님은 간단히 본인을 소개하고, 앞으로 1학기 동안 무엇을 배우는지 대략적인 설명을 이어 갔다.
“우리 수업 이름이 <연애와 결혼>인 건 다들 알고 신청한 거죠?”
“네!”
우렁찬 목소리가 강의실을 울렸다.
첫 시간인 만큼 학생들의 얼굴에 흥분이 엿보였다.
사랑이 보기에는 옆에 앉은 남자만 예외로 못마땅한 표정인 것 같았다.
“다들 연애는 잘하고 있나요?”
‘네’와 ‘아니요’가 뒤섞인 대답에 웃음소리가 커졌다.
“적어도 우리가 종강할 때쯤이면 연애는 제대로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명색이 강의명이 <연애와 결혼>인데. 내 수업을 듣고 나서도 아무런 변화가 없다면 재수강해야지. 안 그래요?”
교수님은 칠판에 자신의 이메일 주소를 쓰고는 다시 말했다.
“내 강의에서 시험을 보지 않고도 A+ 받는 방법이 딱 하나 있어요.”
학생들의 눈이 어느 때보다도 반짝거렸다.
교수님의 이메일 주소를 받아 적으며 다들 귀를 기울였다.
“내 메일로 본인의 청첩장을 보내면 됩니다. 결혼을 하면 이미 다 배운 거지. 아주 간단하죠?”
잔뜩 기대했던 학생들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결국 아무도 A+를 받지 못할 거라는 뜻이었다.
“벌써부터 포기하지 말아요. 우리 강의가 커플 제조기라는 소문 못 들었어요? 과제만 꼬박꼬박해도 사랑이 싹틀 테니까 두고 봐요.”
사랑은 교수님 말을 전적으로 믿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주시는 과제 열심히 할 테니 저에게도 남자 친구를 내려 주소서.
두 손 모아 기도하며 슬쩍 옆자리의 남자를 힐긋거렸다.
그는 여전히 관심 없는 듯 지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자! 그럼 오늘은 첫날이니까 수업은 다음 시간부터 하기로 하고.”
교수님의 말이 끝나자마자 학생들은 박수를 치고 환호성을 질렀다.
“우리 수업이 과제가 좀 많아요. 두 사람이 한 조를 이뤄서 하는 과제인데 오늘 그 조를 짤 겁니다. 동성이든 이성이든 상관없이 두 명이기만 하면 돼요. 원하는 사람과 짝을 만들어서 이름을 써내시고, 마땅히 할 사람이 없으면 나한테 와서 얘기해요. 그럼 내가 커플 매니저가 되어 줄 테니까. 이 강의실에서 마음에 드는 이성이 있다면 조용히 나를 찾아와요. 아주 좋은 기회가 되겠죠?”
학생들의 입에서 감탄이 절로 나왔다.
주위를 둘러보며 마음에 드는 사람을 급히 찾아보는 이들도 있었다.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친구와 함께 수업을 듣는 사람들은 쉽게 조를 만들어 종이에 적었다.
혼자 수강하는 이들은 앞으로 나가 교수님에게 이름을 말했다.
사랑은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했다.
남자와 초면은 아니지만 아는 척을 하기에도 애매했다.
할 수 없이 교수님께 운명을 맡기자는 생각으로 일어나는데 옆에서 남자가 말을 걸어 왔다.
“이 강의 혼자 들어?”
“네?”
깜짝 놀란 사랑이 어깨를 움찔했다.
“혼자면 같은 조 하자고.”
“저, 저랑요?”
나를 알아보는 건가?
마치 잘 알고 지내는 사이처럼 말을 걸어서 사랑은 당황했다.
“내가 아는 사람이 없어서.”
그녀가 여전히 딱딱하게 굳은 채 아무 말이 없자 남자가 미간을 찌푸렸다.
“나 기억 안 나?”
잠깐이지만 대화도 나누고 담요까지 던져 주었건만 기억도 못 하냐는 듯 그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그제야 사랑이 다급히 말했다.
“기억해요. 기억나요, 당연히.”
어떻게 이 얼굴을 잊어버릴 수가 있을까.
그날 이후로 단 하루도 떠올리지 않은 적이 없을 만큼 그녀의 눈에, 머리에, 그리고 가슴에 새겨진 남자인데.
개강하면 우연히라도 캠퍼스에서 볼 수 있을까.
무슨 과인지 알아 두기라도 할 걸 그랬나.
그러면 강의실 근처를 서성이다 마주칠 수도 있을 텐데.
사랑은 매일매일 남자를 생각하고 또 생각했었다.
“기억은 나는데, 같은 조 하긴 싫다?”
그렇다고 하면 다른 사람을 찾아보겠다는 듯 그가 미련 없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때 사랑이 서둘러 외쳤다.
“아니요! 선배님이랑 하고 싶어요.”
어디 도망이라도 갈까 봐 붙잡는 모습이 꽤 다급해 보였다.
그녀 역시 강의실에 아는 사람이 없어 곤란했던 게 아닐까.
그렇게 생각한 남자가 무감하게 종이에 자신의 이름을 적으며 물었다.
“학과랑 이름.”
“전자공학부 이사랑이요.”
순간 남자의 손이 멈칫했다.
사랑은 무슨 문제라도 있나 싶어 잠시 숨을 죽였다.
없었던 일로 하자고 할까 봐 조마조마하기까지 했다.
다행히 그가 다시 펜을 움직였다.
“내고 와.”
종이를 건네받은 사랑은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가 얼른 입술을 말아 물었다.
컴퓨터학과 2학년 지도한, 전자공학부 1학년 이사랑.
이 선배 이름이 지도한이구나.
그래서 별명이 ‘지독한’이었구나.
휘갈겨 쓴 글씨마저 그를 닮아 멋졌다.
교수님께 내지 않고 갖고 싶을 정도로 그의 글씨에도 반해 버렸다.
* * *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더니 기어이 비가 내렸다.
강의실에서 나와 1층으로 내려온 사랑이 가방에서 우산을 꺼냈다.
그런데 옆에 선 도한은 가만히 밖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우산 안 가지고 오셨어요?”
“오후에 온다고 해서.”
도한은 오전에만 수업이 있어서 굳이 우산을 챙기지 않았다.
하여간 일기예보는 믿을 게 못 된다며 눈썹을 찌푸리는 그에게 사랑이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다음 수업 어디에서 들으세요?”
“공대.”
“그럼, 같이 쓰실래요? 저도 공대 수업인데.”
무섭게 쏟아지는 비를 지켜보던 도한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한 마디에 사랑의 입꼬리가 휘었다.
벌써 가슴이 두근거려 우산을 펼치던 손이 작게 떨렸다. 우산이 반쯤 펴졌을 때, 사랑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뗐다.
“저기.”
도한이 왜 그러냐는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혹시, 여자 친구 있으세요?”
“뭐?”
뜬금없는 소리에 그가 되묻자 사랑이 조금 망설이다가 말했다.
“여자 친구 있으시면 같이 쓰기가 좀…….”
그의 친구가 여자 이름을 꺼내며 도한에게 말을 걸었던 일이 떠올랐다.
정말 여자 친구가 있다면 왠지 우리 학교 학생일 것만 같았다.
그렇다면 우산을 같이 쓰고 가는 모습을 누군가 보고 얘기해 줄 수도 있지 않을까.
쓸데없는 생각일지라도 사랑은 확인하고 싶었다.
그런데 만약 여자 친구가 있다고 하면 어떡하지?
거기까지 생각할 즈음 도한이 답했다.
“여자 친구 있으면 후배랑 우산도 같이 쓰면 안 돼?”
“안 되는 건 아닌데. 입장을 바꿔서 제 남자 친구가 여자 후배랑 한 우산을 썼다고 하면 전 기분이 별로일 것 같거든요.”
“아, 그래?”
“네. 선배님은 안 그러세요?”
“안 그래. 내 여자 친구가 누구하고 우산을 쓰든 남자랑 단둘이 밥을 먹든 술을 마시든, 신경 안 써.”
“아. 그, 그러시구나.”
사랑은 머리가 뜨거워지면서 이마에 땀이 맺혔다.
바보 같은 질문이었다는 생각에 후회가 밀려왔지만 다행히도 그가 깔끔하게 정리해 주었다.
“여자 친구 없어.”
도한에겐 여자 친구가 있다고 해도 문제 될 건 없었다.
그의 여자 친구 또한 그가 누구와 우산을 쓰든 상관하지 않을 테니까.
그의 연애엔 늘 보이지 않는 선이 있었고, 누구도 그 안으로 침범할 수 없었다.
처음부터 그 선을 넘을 생각이 없는 사람만이 그와 사귈 수 있었다.
그러니 후배와 우산 좀 썼다고 질투할 여자라면 애초에 그와의 연애는 불가능했다.
하지만 보기와 다르게 직설적인 사랑의 물음이 도한을 솔직하게 만들었다.
스무 살다운 순수함 앞에서 그는 어쩐지 거짓을 말하기가 어려웠다.
“그, 그럼 가요.”
뒤늦게 얼굴이 빨개진 사랑이 서둘러 우산을 활짝 폈다.
지우의 말대로 순진한 건지 아니면 맹한 건지, 스스로가 한심했다.
키 차이 때문에 그녀가 힘겹게 팔을 올려 도한의 쪽으로 기울이자 그가 대신 우산을 들었다.
“고맙습니다.”
“네 우산이야. 내가 고마워해야지.”
누구 것이든 사랑에겐 중요하지 않았다.
한 우산 안에서 그와 함께 발을 맞춰 걷는다는 게 그저 좋았다.
그에게 여자 친구가 없다는 사실 또한 그녀를 설레게 했다.
문제는 둘이 걷기엔 우산이 작다는 것.
사랑은 도한이 저를 배려하느라 한쪽 어깨가 비에 젖어 드는 게 신경 쓰였다.
자신이 우산을 씌워 주겠다고 해 놓고선 그 반대의 상황이 되어 버렸다.
조금이라도 그가 비를 덜 맞았으면 좋겠어서 사랑은 도한 쪽으로 밀착했다.
도한은 그녀가 어깨에 멘 가방이 젖지 않게 하려고 제게 붙는 건가 싶어서 가방을 대신 들었다.
갑자기 어깨가 허전해지자 사랑이 깜짝 놀라 그를 올려다봤다.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무심한 얼굴이 후배의 가방을 들어 주는 자상함과 참 대조적이었다.
“감사합니다.”
연이은 감사 인사가 멋쩍은지 도한은 앞만 보고 있었다.
그의 무표정이 살짝 풀어진 것을 보자 사랑은 피식 웃음이 나 입술을 말아 물었다.
“선배님은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빗소리만 들리는 정적이 어색해서 그녀가 질문을 했다.
2학년이면 스물하나거나, 군대에 갔다 와서 복학했으면 스물셋이었다.
그의 얼굴을 봤을 때 후자에 가까웠지만 그보다 더 어른처럼 보였다.
“스물여섯.”
“스물여섯이요?”
그 나이에 어떻게 2학년일 수 있는지 궁금했지만 사정이 있겠다 싶어서 사랑은 아무것도 묻지 못했다.
물어본다 한들 대답해 줄 것 같지도 않았다.
시니컬한 말투와 세상만사 관심 없다는 표정이 다정이나 친절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묻는 말에 대답은 잘해 주지만 그마저도 차가움이 뚝뚝 떨어졌다.
그런데도 첫눈에 반해서인지 사랑은 그런 모습까지 매력 있게 느껴졌다.
나쁜 남자가 이상형이었나 의심될 정도로 그의 모든 게 멋있어 보였다.
심지어 스물여섯이라는 것까지.
스물하나의 2학년이었다면 거만하게 보였겠지만 스물여섯은 여유로움으로 비쳤다.
사랑이 아무 말도 않자 이번엔 도한이 입을 열었다.
“오늘은 화장했네.”
분명 비바람이 불고 있는데 사랑은 그의 시선이 느껴지는 왼쪽 뺨이 불에 덴 듯 화끈거렸다.
“더 촌스러워요?”
화장해서 어설프게 어른 흉내 내는 신입생보다 오히려 안 하는 쪽이 덜 촌스러워 보인다고 했던 도한의 말이 떠올라 그녀가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아침에 지우가 살짝 화장을 해 줬지만 어색하기만 해서 감추고 싶었다.
“아니. 근데 안 한 게 더 예뻐.”
순간 사랑은 도한이 우산을 들고 있길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자신의 손에 있었다면 놓치고 말았을 테니까.
예쁘다는 말을 저렇게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다는 데에 놀랐다.
안 예쁘다는 말투로 예쁘다고 하는 재주가 있었다.
그게 또 왜 그렇게 설렐 일인지.
빗소리 덕분에 심장 뛰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도 다행이었다.
무슨 정신으로 두 발을 움직였는지 모르겠는데, 벌써 공과대학 건물 앞에 다다랐다.
도한이 우산을 접고서 사랑에게 돌려주었다.
“고마웠다.”
“네. 그럼 안녕히 가세요.”
멀어지는 도한의 뒷모습을 사랑은 끝까지 지켜보았다.
여섯 살 차이.
저 사람에게는 내가 어떻게 보일까.
후배든 신입생이든 뭐든 좋으니 여자이기만 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