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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신입생, 괜찮아? (1/63)


#1화. 신입생, 괜찮아?
2023.01.02.



“저 오빠 좋아해요.”

사랑은 충동적으로 고백했다.

그저 도한과 과제를 하기 위해 놀이공원에 왔을 뿐인데 저도 모르게 이렇게 돼 버렸다.

새까만 밤하늘에 핀 화려한 불꽃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 불꽃들이 이제 짝사랑은 그만하고 어서 빨리 고백하라며 가슴을 팡팡 두드렸다.

그러다 가장 큰 불꽃이 쾅 소리를 내며 터졌을 때, 마침내 그녀의 마음이 울컥 쏟아졌다.

하지만 일방적인 마음이었던 만큼 상대의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나 말고 다른 사람 좋아해. 정윤재 같은. 둘이 잘 어울려.”

도한은 바짝 긴장한 사랑의 얼굴을 무심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다정하게 대해 준 적 없고, 이름 한번 불러 준 적 없는 후배였다.

우연히 교양 과목이 겹쳐서 같은 조가 되었고, 가끔 만나서 과제나 하는 사이.

서로의 친구가 사귀게 되는 바람에 이따금 함께 밥을 먹는 사이.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마음에 들어와 버린 아이.

그런 그녀가 저를 좋아하고 있다는 고백에 도한의 가슴에 불꽃이 일었다.

그렇지만 그의 입에서는 차가운 말들만 흘러나왔다.

다정히 이름을 불러 줄 수 있는 그런 남자를 만나길.

도한은 사랑의 마음을 거절하는 것만이 그녀를 위하는 길이라 확신했다.

사랑은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애초에 그가 제 마음을 받아 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충동적이었던 만큼 기대도 없었다.

미련 없이 고백했고 가차 없이 거절당했으니 이제부터는 그를 잊으면 된다.

그런데 사랑은 그럴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다른 사람을 좋아하라고 말하는 그의 눈빛이 지나치게 다정해서, 오늘의 고백은 끝이 아닌 또 다른 시작이 될 것만 같았다.

첫눈에 지독히도 얽혀 들었던 바로 그 순간처럼.


* * *

두 달 전.


“이사랑!”

사랑은 저를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북적거리는 도서관 앞 광장 저 멀리에서 지우의 모습이 보였다.

세 개의 단과 대학이 함께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을 떠나는 날이라 시끄럽고 정신이 없었다.

곧 지우가 손을 흔들며 뛰어왔다.


“여기서 보니까 더 반갑다, 지우야.”

일주일 만에 보는 얼굴이지만 1년 만에 상봉한 가족처럼 부둥켜안고 방방 뛰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단짝이었던 둘은 같은 대학에 합격했고, 같이 살 원룸까지 미리 구해 놓을 정도로 끈끈한 사이였다.

아직 이사하기 전이라 지방인 집에서부터 같이 버스를 타고 왔으면 좋았겠지만, 지우가 서울에 있는 친척 집에 머물고 있어 이곳에서 만나기로 한 것이다.


“내가 먼저 왔을 줄 알았는데. 잘 찾아왔네?”

“그럼. 내가 애냐.”

“애지. 좀 봐라. 여기 여학생들 중에 화장 안 한 애가 너 말고 또 있냐?”

지우의 핀잔에 사랑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누가 봐도 너 고등학생 같잖아.”

“정말 그러네. 다들 왜 이렇게 예쁘게 하고 온 거야.”

버스를 타고 오랫동안 이동해야 해서 편하게 입고 모자까지 눌러쓴 사랑의 얼굴에 못마땅한 기색이 비쳤다.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오느라 새벽부터 서두른 탓에 신경 쓰지 못했다.


“내일 내가 화장해 줄게. 단발머리까진 어떻게 못 해도 화장이라도 하면 좀 나을 거야.”

“됐어. 어색해서 싫어.”

화장을 안 해 본 것은 아니지만 아무리 봐도 어울리지 않았다.

들인 시간이 아까울 정도로 예쁘지도 않고.


“하여간 순진한 이사랑.”

“누가 보면 네가 내 언니인 줄 알겠다. 내가 순진하면 너도 순진한 거지.”

사랑이 입을 삐죽 내밀었다.

같은 신입생이면서 어른처럼 구는 지우가 영 거슬렸다.


“이 언니는 그래도 남자 친구를 좀 사귀어 봤잖니. 연애 안 해 봤음 순진한 거야.”

“그럼 나도 순진한 거 얼마 안 남았네. 개강하면 남자 친구부터 사귈 거니까.”

“연애하려고 대학 왔냐?”

“당연하지. 내가 왜 그렇게 공부만 했는데. 대학 가면 멋있는 남자 친구 사귈 수 있다고 해서 코피 터지게 공부만 했다고.”

“누가 그랬는데?”

“우리 담임 선생님이.”

지우가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니까 네가 순진하다는 거야. 우리 사촌 언니는 대학 졸업할 때까지 연애 한 번 못했어. 대학 간다고 해서 누구나 남자 친구, 그것도 멋있는 남자 친구 사귀는 거 절대 아니다? 이 순진무구한 친구야. 도대체 얠 어디서부터 가르쳐야 하냐.”

이러니 사랑의 부모님이 제 손을 꼭 붙잡고 우리 딸 좀 잘 부탁한다고 신신당부를 하지.

그 순간 지우는 사위가 되면 이런 기분이겠구나 하는 걸 느꼈다.

세상 물정 모르는 친구를 어쩌면 좋을지, 사랑의 부모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았다.


“두고 봐. 내가 꼭 멋있는 남자 친구 사귀어서 네 앞에 데려올 테니까.”

오기가 생긴 사랑이 두 눈에 결의를 담았다.

지우는 그 마음가짐 하나는 높이 샀다.

원래 아무것도 모를수록 용감한 법이니까.

순수한 이사랑다웠다.


“그래! 기대할게. 이왕이면 우리 학교에서 가장 잘생긴 남자랑 사귀어라.”

지우가 목을 길게 빼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지금 당장 사랑의 남자 친구감을 찾기라도 하는 것처럼 남학생들을 유심히 살폈다.

그러다 저 멀리 보이는 남자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저기 저 사람 진짜 잘생겼다. 저 정도 인물이면 인정.”

사랑은 지우가 가리키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남자가 하필 뒤를 돌아보는 바람에 아쉽게도 얼굴은 볼 수 없었다.

하지만 뒷모습만으로도 탄성이 나올 정도였다.

큰 키의 균형 잡힌 몸이 마치 모델 같았다.

신입생이라고 하기엔 서 있는 자세에서부터 여유가 느껴졌다.

남자는 존재만으로도 주위를 압도하고 있었다.


“와, 선배님인가 봐. 분위기 있다.”

사랑은 남자의 얼굴을 직접 보고 싶었지만 그가 더욱 멀어지는 바람에 실패했다.

지우도 그만 남자에게서 눈길을 거두었다.


“확실히 신입생은 아닌 것 같다.”

“응. 그럴 거 같아.”

“근데 진짜 잘생겼어. 완전 연예인이야.”

“그 정도였어?”

“그렇다니까. 무슨 과지?”

“그건 알아서 뭐 하게.”

“그냥 궁금하잖아. 넌 안 궁금해? 멋있는 남자 친구 사귈 거라며.”

“아무리 그래도 내가 연예인처럼 생긴 남자를 어떻게 만나냐?”

“뭐야, 이사랑. 아까 그 자신감은 다 어디 갔어?”

지우의 놀림에 사랑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연예인처럼 생긴 남자 친구를 사귀려면 자신 또한 예뻐야 한다는 사실을 미처 몰랐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어쨌든 담임 선생님의 말씀은 옳았다.

대학에 가면 잘생긴 남자가 있다는 것만은 사실이었다.

사랑은 다시 한번 그 남자가 있었던 곳을 바라봤다.

덕분에 대학 생활이 기대가 됐다.

* * *


“또 이사랑이네. 너 술 마시고 싶어서 일부러 못 하는 척하는 거 아니야?”

예정된 일정을 마치고 숙소에 들어와서 술 게임을 할 때였다.

지우와 다른 조가 된 사랑은 동기들과 선배들 사이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유독 게임을 못 하는 사랑이 세 번이나 연속해서 벌주에 당첨된 것이다.

선배의 놀림에 그녀는 어색하게 웃으며 술잔을 비웠다.

소주를 석 잔째 마셨더니 머리가 조금 어지러웠다.

도대체 이 쓴 걸 왜 먹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사랑의 사정은 아랑곳없이 게임은 계속됐고 그 후로도 세 번을 더 걸렸다.


“안 되겠다. 너 잠깐 밖에 나갔다 와라.”

보다 못한 동기가 사랑에게 슬쩍 말했다.

화장실에 다녀오겠다고 하고서 술 좀 깨고 오라고.

그러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한 사랑은 비틀거리는 몸짓으로 일어나 슬리퍼를 신었다.

건물 밖으로 나오니 하얀 눈발이 흩날리고 있었다.

술기운 때문에 추운 것도 몰랐다.

양말도 안 신고 외투 하나 걸치지 않은 티셔츠 차림이었지만 시원하게 느껴졌다.

사랑은 계단에 털썩 앉아 기둥에 머리를 기댔다.

이 와중에 잠이 와서 계속 눈이 감겼다.

슬슬 추위를 느낀 사랑이 여기서 잠들면 얼어 죽겠다고 생각할 찰나였다.

누군가의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더니 바로 앞에서 멈췄다.


“신입생, 괜찮아?”

그녀가 고개만 들어 올려 목소리의 주인을 쳐다보았다.

눈 내리는 배경에 서 있는 남자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온 순간 그녀는 그만 눈이 멀 것만 같았다.

청바지에 흰색 반팔 티셔츠를 입었을 뿐인데 온몸에서 빛이 났다.

첫눈에 반한다는 게 이런 거구나, 머리와 가슴이 크게 울렸다.

사랑은 멍하니 남자를 바라보다가 이내 두 눈을 크게 떴다.

그 남자인 것 같았다.

도서관 광장에서 지우가 가리켰던 남자.

완전 연예인이라더니 정말 그랬다.

짙은 눈썹에 조금은 날카로운 눈, 곧게 뻗은 콧날과 적당히 도톰한 입술.

무엇보다 날렵한 턱선이 남성적인 이미지를 더욱 부각시켰다.

뒷모습만 봤을 때는 몰랐는데 전체적으로 차가운 분위기가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그의 머리 위에 내려앉는 눈송이들이 오히려 더 따스하게 보일 만큼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게다가 신입생으로 착각할 수 없을 만큼 성숙한 외모였다.

대학생보다는 대학원생에 가까운.

하지만 그것마저도 멋있게 보일 정도로 사랑은 순식간에 그에게 빠져들었다.

넋을 놓고 그를 바라보던 사랑은 그의 눈매가 일그러지는 걸 보고서야 얼른 고개를 흔들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하나 당황하다가 조금 전 남자가 한 말을 떠올렸다.


“그렇게 티 나요?”

“취했으니까 이 날씨에 그러고 있겠지.”

“아니요, 그거 말고. 신입생인 거 그렇게 티 나냐고요.”

사랑의 말에 남자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술주정이라도 하는 것처럼 많은 말을 늘어놓았다.


“제가 사실 지방에서 자랐거든요. 아니, 꼭 지방에서 왔다고 다 촌스러운 건 아닌데 서울에 와 보니까 다들 정말 예쁘더라고요. 제가 너무 고등학생 같기도 하고. 아직 개강을 안 했으니까 대학생이 아닌 건 맞는데, 그러니까 제 말은…….”

지우에겐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지만 내내 신경 쓰였던 모양이다.

모르는 사람한테 속마음을 드러내는 걸 보면.

말을 할수록 수습이 되지 않아 사랑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냥 입을 다물걸.

처음 보는 사람한테, 그것도 첫눈에 반한 사람한테 내가 지금 뭐라고 떠드는 건지.

남자가 그냥 가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잠깐의 정적이 흐르고, 듣기 좋은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전해졌다.


“내가 보기엔 그쪽 신입생이나 저쪽 신입생이나 다 똑같은 신입생이야.”

“네?”

무슨 말인가 싶어 사랑이 다시 고개를 들어 남자의 얼굴을 바라봤다.


“화장했다고 해서 신입생이 재학생으로 보이진 않는다고. 내 눈에는 오히려 그쪽 신입생이 덜 촌스러워 보여. 어설프게 어른 흉내 내는 신입생보다는.”

사랑은 눈을 깜빡거렸다.

분명 남자는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는데 다정함이 느껴졌다.


“술 취해서 추운 줄도 모르나 본데 그만 들어가. 촌스럽게 감기나 걸리지 말고.”

남자는 어울리지 않게 들고 있던 빨간 담요를 그녀에게 던져 주었다.

남자가 그만 발을 돌리자 사랑이 재빨리 일어났다.


“선배님은 안 들어가세요?”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동안만이라도 같이 있고 싶었다.

이게 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감정인지 모르겠지만 그러고 싶었다.


“누구 때문에 전화를 못 해서.”

남자는 핸드폰을 들고 있는 손을 올렸다.


“주는 술 다 받아먹지 말고 적당히 요령도 좀 피워. 대학에서까지 범생이일 필요는 없으니까.”

할 말을 마친 남자가 앞으로 걸어갔다.

아쉬움이 가득 남은 사랑은 담요를 어깨에 걸치며 계단을 올라갔다.

그때 건물 안에서 다른 남자가 나오더니 그를 불렀다.


“야, 지독한. 또 박혜리한테 전화 왔냐?”

사랑은 그대로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지독한? 별명인가?

그것보다도 박혜리라는 사람이 저 남자의 여자 친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괜히 가슴에서 바람이 빠졌다.

저 혼자 첫눈에 반했을 뿐인데 고백했다 차인 기분이랄까.

마음은 쓸쓸했지만, 빨간 담요만은 사랑을 위로하듯 그녀의 어깨를 따뜻하게 감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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