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화 영원히 기억에 남을 시즌 -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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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 우즈가 김수호를 보고 얼어붙은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김수호가 본격적으로 1군 무대로 뛰어든 건 작년 7월.
자의든 타의든 사무엘 우즈는 김수호와 자주 만났다.
그리고 그때마다 기록은 최악이었다.
김수호의 작년 최연소, 최단기 20홈런도, 플레이오프 1차전과 4차전에서 총 세 개의 홈런을 맞은 것도, 올 시즌에 한국 신기록을 깨는 57번째 홈런을 친 것도 전부 사무엘 우즈를 만나 기록한 거였다.
어떤 투수든 자신의 먹이사슬 아래에 놓는 김수호였지만, 사무엘 우즈는 그런 투수 중 최하위였다.
그러니까 사무엘 우즈가 김수호를 보고 든 생각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어떤 생물이든 자신을 위협하는 생물을 경계하고,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건 본능이니까.
되려 사무엘 우즈가 이상한 거였다.
지금까지 만날 때마다 홈런을 허용했던 김수호에게 이런 생각이 든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하지만 지난 경험들이, 그리고 사직을 가득 채운 마린스 팬들이 김수호에게 원하는 무언가가 사무엘 우즈 안에 잠들어있던 감정을 일깨웠다.
그러니까 공이 포수가 요구한 곳과 멀리 동떨어진 곳에 가는 것도, 제대로 던지자 생각하고 다시 김수호를 쳐다봤을 때 머릿속이 텅 빈 것처럼 느껴지는 것도 전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볼!”
하지만 공을 받는 박희준은 이런 사무엘 우즈의 상황을 몰랐다.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되려 항상 마운드에서 당당했던 사무엘 우즈가 이렇게까지 흔들리는 모습은 처음이기에 2개의 볼을 받고서 곧장 마운드로 올라갔다.
‘일단 다독이자. 그리고 카운트 하나 잡고, 승부 보는 거야.’
할 말을 정한 박희준이 사무엘 우즈를 쳐다봤다.
“우즈! 괜찮···.”
하지만 박희준이 사무엘 우즈의 흔들리는 눈을 보곤 말문이 막혔다.
저 눈, 어디선가 본 적이 있었다.
언젠가 티비에서 봤던 사냥감이 된 사슴의 불안한 눈망울.
그때 박희준이 느낀 감정이 연민이라면, 지금 느낀 감정은 절망이다.
‘이건···. 안 된다.’
만약 억지로 승부를 끌다가 한 방을 맞는다면?
오늘 경기는 그대로 끝이었다.
아니, 최소 한 번의 등판을 더 해야 하는 사무엘 우즈가 완전히 무너져버릴 위기였다.
이미 상황은 안 좋았다.
1회에 20개가 넘는 공을 던졌고, 아웃카운트는 고작 하나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오늘 경기를 포기하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결국 벤치에 사인을 보내자 급하게 이찬용 감독이 올라왔다.
자초지종을 들은 이찬용 감독이 심각한 표정으로 사무엘 우즈를 쳐다봤다.
박희준 말대로 평소의 우즈가 아니었다.
결국 선택하는 것은 감독의 몫.
“희준아. 네 말대로 하자.”
최악과 차악 중 차악을 고른 이찬용 감독의 말에 박희준이 끄덕였다.
그리고 자리로 돌아온 박희준이 앉자, 심판이 프렌즈 더그아웃을 확인하고 김수호에게 말했다.
“타자, 1루로.”
설마 했던 일이 일어났다.
[고의사구, 김수호 선수에게 자동 고의사구가 나왔습니다!]
[지금 1회 초에 주자 1루 상황이거든요? 보기 힘든 장면이 나왔습니다.]
어지간하면 1루 상황에서 고의사구는 하지 않는다.
득점권에 주자를 놓는다는 건, 특히 리그에서 가장 빠른 이규영이 2루에 들어간다는 건 그 자체로도 부담이었다.
하지만 타석에 들어온 강주호를 바라보는 사무엘 우즈의 표정은 한층 편안해 보였다.
[쳤습니다! 일·이간을 완벽히 뚫어내는 안타! 2루 주자 홈으로! 들어옵니다! 선취점, 부산 마린스! 강주홉니다!]
비록 강주호에게 적시타를 허용하긴 했지만, 오준혁을 병살로 처리하면서 1실점으로 이닝을 끝냈다.
결과만 봤을 때 1실점으로 막은 건 그럭저럭 괜찮다고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이 경기를 보고 있는 사람들은 알았다.
경기의 흐름이 마린스 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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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그런 생각이 든다.
이깟 공놀이가 뭐라고.
경험은 없지만, 평일에 직장이든 학교든 공부든 본인이 할 일을 마치고 야구장에 오는 건 굉장히 힘든 일이다.
멀리 볼 것 없이 아빠만 봐도 알 수 있다.
퇴근해도 얼굴에 남아있는 피로가 채 가시기 전에 다시 출근해야 한다.
그런 와중 어딘가를 간다는 건, 그것도 에너지를 쏟아야 하는 야구장에 온다는 건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하지만 어린 내 손을 잡고 야구장으로 향하던 아빠의 미소는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다.
심지어 직관한 그날 경기에서 져 욕을 하면서도 다음 날 다시 리모컨을 잡고, 티켓을 사고 구장으로 향한다.
집에서 편하게 볼 수 있는데 굳이 돈까지 내면서 직접 구장에 온다는 게 얼마나 큰 의미인지 아직도 잘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승리하고 팬들에게 인사를 했을 때, 그 어느 때보다 뜨겁고 열정적인 환호를 보낼 때 팬들의 얼굴엔 피로라는 건 찾아볼 수 없었다.
감히 짐작해 보면 아마 그 승리의 순간을 위해 소중한 시간을 쓰는 게 아닌가 싶다.
오늘도 마찬가지다.
1년의 노력이 결정되는 한국시리즈.
우리의 노력뿐만이 아니라 팬들의 노력 역시 한국시리즈의 결과로 결정된다.
부담스럽다.
오늘 이곳을 찾아온 2만 명의 열망이 오로지 나를 향하고 있다.
누군가는 내가 홈런을 치길 원하고, 또 누군가는 병살을 치길 원한다.
나도 사람인지라 모든 걸 다 들어줄 수 없다.
그냥, 가능한 노력할 뿐이다.
“김수호! 홈런!”
숨을 고르고 나를 부르는 팬들의 소리를 들으며 방망이로 투수를 겨눴다.
사무엘 우즈는 좋은 투수다.
아무리 투수 친화적인 잠실 구장을 홈으로 쓰고 있다지만 기록은 거짓말 하지 않는다.
1회에 조금 흔들리긴 했지만 2회, 3회 전부 삼자범퇴로 처리하면서 제 능력을 보여줬다.
하지만 4회 말 내 두 번째 타석, 초구에 바깥쪽으로 완전히 빠지는 공을 보고 기대를 접었다.
“볼!”
이번엔 고의사구는 아니었다.
다만 존에 들어오는 공은 하나도 없었다.
이게 프렌즈에서 선택한 방법이라면 딱히 뭐라 할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그건 내 생각이고, 오늘 경기장을 찾은 팬들은 생각이 달랐다.
“우우우우우우!”
“쫄았냐! 그따구로 던질끄면 투수 갈아라!”
“김수호! 김수호! 김수호! 김수호!”
첫 타석보다 더 심한 야유와 내 이름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지만 사무엘 우즈는 아무렇지 않은 듯 강주호가 들어오는 걸 보고만 있었다.
심지어 내가 있는 곳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나도 사람인지라 저 정도로 나를 무시하면 좀 열받는다.
그건 감독님도 마찬가지였는지 사인을 전달받은 1루 코치님이 내게 속삭였다.
“이번에 리드폭 늘려보고 견제 없으면 바로 뛰어. 할 수 있지?”
내 시즌 도루는 7개.
이주학의 통산 홈런 개수와 같았다.
그러니까 전혀 생각도 안 하고 있을 때 한 번씩 나오는 빈도였다.
웬만해선 부상의 위험 때문에 도루 사인이 나오지 않는 데 나야 좋았다.
1루 코치님의 말대로 평소보다 조금 리드폭을 늘렸다.
평소엔 엎어지면 베이스에 딱 닿을 정도의 리드라면 지금은 한 발 정도 더.
그리고 이규영이 알려준 것처럼 우투수의 왼 다리가 움직이는 것과 동시에 출발했다.
“2루!”
뛰는 동안 타격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2루수가 커버 들어오는 걸 보면서 그대로 베이스를 향해 손을 뻗었다.
“세이프!”
손으로 베이스를 잡은 뒤, 뒤늦게 글러브가 몸에 닿는 감각에 몸을 일으켰다.
몸에 묻은 흙을 가볍게 털고 강주호를 향해 웃었다.
이 정도면 밥상 맛있게 차린 거 같은데.
1회에 이어 4회에도 맛 들어가지게 차려진 밥상에 강주호의 방망이가 맹렬하게 휘둘러졌다.
-따아악!
타구를 보자마자 장타를 직감했지만, 2루와 3루 중간에 서서 공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저 정도 타구라면 뒤늦게 출발해도 충분히 홈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공이 완전히 우익수와 중견수 사이를 가르자 다시 출발하면서 홈으로 들어왔다.
강주호도 여유롭게 2루까지 들어갔다.
강주호의 두 타석 연속 적시타로 2대0.
“선배님. 저 안 뛰게 해주신다면서요.”
아쉽게 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터덜터덜 걸어오는 강주호를 향해 투덜거렸다.
“나 믿고 바로 홈으로 갔으면 걸어도 들어갔겠다.”
“그 정도는 아니었던 거 같은데···.”
강주호가 눈을 부라리자 급하게 마스크를 끼고 그라운드에 나왔다.
방금 얼굴은 진짜 살벌한데?
진짜 악마라고 해도 믿겠다.
“너 이상한 생각하지?”
생각까지 읽는 걸 보면 진짜 악마가 맞는 것 같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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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회 말에 마린스가 1득점을 더해 2대0.
이 경기가 얼마나 중요한지 양 팀 선수단 전부 알고 있다.
선수들의 집중력도 그만큼 올라왔고, 야구에서 2점 정도야 언제든지 나올 수 있는 점수였다.
하지만 이번 시즌, 그 상식이 통하지 않는 투수가 한 명 있었다.
평균자책점 0.98.
9회까지 단 1점도 내주지 않는다는 걸 의미한다.
그런 투수에게 2점을 뽑으라는 건 너무 가혹한 일이었다.
하지만 해야 했다.
프렌즈 타자들은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허하준의 공을 쳤고, 결국 그 노력이 보상받는 순간이 찾아왔다.
6회 초, 2사 주자 2, 3루.
오준혁의 실책과 서도하의 발이 만들어낸 프렌즈의 첫 번째 득점권 찬스.
단 하나의 안타면 경기를 제자리로 돌릴 기회.
오늘의 승부처였다.
양 팀 모두 교체는 없었다.
마린스는 에이스인 허하준을 믿었고, 프렌즈 역시 중심타선을 믿었다.
그리고 타석엔 강신이.
작년 패배를 토대로 마린스를 꺾기 위해 출혈을 감수하고 데려온 타자.
충분히 해줄 수 있는 타자였고, 오늘도 이미 안타가 하나 있었다.
고조되는 분위기 속에 허하준의 초구가 김수호의 미트를 향해 날아왔다.
“볼!”
평소의 강신이라면 망설임 없이 나갈만한 코스였지만, 인내로 참아냈다.
그리고 2구.
방망이가 공을 향해 매섭게 날아들었지만, 그걸 비웃기라도 하듯 공은 뚝 하고 떨어졌다.
“스트라이크!”
제대로 속은 강신이가 혀를 찼다.
주자가 3루에 있을 때 보통 떨어지는 공은 머릿속에서 빼는 편이다.
특히 이런 상황에서 저런 스플리터가 한 번 빠지기라도 한다면 1실점은 확실했고, 운이 나쁘면 2루 주자까지 들어올 수도 있다.
하지만 마린스 배터리는 그런 가정 조차 생각하지 않고 공을 던지는 것 같았다.
강신이가 그런 생각을 하던 사이, 바운드 된 공을 단번에 잡은 김수호가 망설임 없이 2루로 공을 뿌렸다.
“아웃!”
점점 프렌즈 쪽으로 고조되던 분위기가 완전히 식어버리는 소리가 심판의 입에서 나왔다.
반면 마린스를 응원하는 입장에선.
“와아아아아아!”
그 어떤 순간보다 짜릿했다.
약속된 플레이였다.
2사긴 하지만 경기가 경기인 만큼 안타가 나오면 확실한 득점을 하기 위해 2루 주자인 서도하가 평소보다 리드폭을 길게 가져갔다.
그걸 확인한 김수호가 최치호와 이주학한테 사인을 보냈고, 스플리터가 바운드 되며 떨어지자 서도하의 몸이 3루 쪽으로 기울었다.
그런 서도하를 향해 송구, 백업을 들어온 최치호가 정확히 들어온 공을 잡고 가볍게 서도하를 터치하면서 그대로 이닝 종료.
프렌즈 벤치가 급하게 비디오 판독을 신청했지만, 판정은 변하지 않았다.
“김수호! 김수호! 김수호! 김수호!”
판정 결과를 지켜보는 김수호가 전광판에 잡히자 김수호의 이름이 사직 구장에 울려 퍼졌다.
거기에 7회 초, 선두타자로 들어선 강신이가 결국 안타를 쳐내면서 프렌즈 팬들에겐 아쉬움을, 마린스 팬들은 안도를 느꼈다.
이후 사무엘 우즈는 6회를 마지막으로 마운드에서 내려왔고, 허하준은 8회까지 무실점으로 막은 뒤 팬들의 기립 박수를 받았다.
그리고 8회 말, 2사 주자 없는 상황.
[김수호, 오늘 네 번째 타석입니다. 앞선 세 타석에선 전부 볼넷으로 출루했습니다.]
1회 고의사구 이후 나머지 2번의 타석에서도 볼넷을 얻었던 김수호.
그리고 7회부터 올라온 프렌즈의 4선발 조현수를 상대로 초구.
-따아악!
[쳤습니다! 큽니다! 계속 가는 타구! 멈추지 않습니다! 계속 갑니다! 담장! 넘깁니다! 김수호! 스스로 프렌즈의 선택이 옳았다는 걸 증명해냅니다!]
오늘 팬들이 듣고 싶었던 그 타격음을 끝으로 치열했던 1차전이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