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능빨로 FA 천억 포수-200화 (200/203)

200화 영원히 기억에 남을 시즌 - 10

#

지금까지 마린스 팬들은 아주 큰 착각 속에 살았다.

1년 365일 중 야구가 없는 겨울이 가장 힘들었다는 착각.

"와, 기다리다 미쳐버리는 줄 알았네."

그 멍청한 착각을 깨닫는 데까지 얼마 걸리지 않았다.

10월 9일, 피닉스와의 정규시즌 마지막 경기가 끝나고 기분 좋게 하루를 마무리했다.

강주호의 은퇴식다운 경기였고, 마지막 경기까지 손에 땀을 쥐게 할 정도로 재밌었다.

그리고 5위 결정전을 즐겁게 시청했다.

여기까진 좋았다.

항상 마린스와 같이 꼴찌였던 피닉스의 분전도 재밌었고 작년 마린스를 보는 것 같아 이입도 되고 흥미진진했다.

"근데 마린스는 언제 하냐?"

문제는 마린스 경기를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 길었다.

아무리 타 팀 경기가 흥미진진해도 결국 본인이 응원하는 팀 경기가 제일 재밌다.

이 중요한 사실을 인제 와서 깨달은 것이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지금까지 마린스 팬들이 가을야구를 챙겨볼 이유가 없었다.

어차피 저 밑에 박혀있는데 위쪽 팀들의 잔치를 챙겨볼 이유가 없으니까.

가뜩이나 꼴찌 해서 기분 나쁜데 굳이 남의 잔치에 껴달라고 하는 것도 웃겼다.

하지만 올해는 달랐다.

마린스는 당당한 1등.

한국시리즈 상대를 살펴본다는 명분으로 가을야구를 챙겨봤다.

하지만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오히려 감질만 날 뿐이었다.

그나마 팬들을 달래주는 건 가끔 올라오는 마린스 TV 영상뿐.

그마저도 얼마 전부터 뚝 끊겼다.

그렇게 11월 1일 화요일.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한국시리즈가 열리는 날이 됐다.

그리고 치열했던 티켓팅을 뚫고 당당히 사직구장으로 찾아온 마린스 팬들이 이른 시간부터 몰려들었다.

특히 올해 티켓팅은 작년보다 더 치열했는데, 마린스가 103승 41패라는 말도 안 되는 기록을 냈고, 1차전 선발이 허하준이기 때문에 그렇다.

승리가 보장된 경기.

특히 그 경기가 한국시리즈 1차전 경기라면 모두가 가고 싶어할 수밖에 없었다.

"오늘도 이기리라!"

아직 경기가 시작하기 한참 전이지만, 이미 승리한 듯 입장부터 노래를 부르는 마린스 팬들을 보며 프렌즈 팬들이 눈살을 찌푸렸다.

평일에 멀리 부산까지 내려온 만큼 프렌즈 팬들도 승리를 기대하고 있다.

‘할만하지 않나?’

플레이오프에서 보여줬던 것처럼 한다면 아직 모른다는 게 프렌즈 팬들의 생각이었다.

그건 프렌즈 선수단도 비슷했다.

이미 마린스의 우승이 확정이 된 양 쏟아지는 기사들에 프렌즈 선수들도 잔뜩 열을 받은 상태였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우리가 이길 거라는 기사가 하나도 없냐?"

기세를 제대로 탄 피닉스를 3대0으로 꺾고 올라왔다.

객관적으로 마린스와 비교하면 부족한 건 맞지만 아무리 그래도 단기전은 모르는 거였다.

실제로 작년 포스트시즌 진출 팀 중 유일하게 마린스를 상대로 승리를 따낸 팀이 프렌즈였다.

그때 그 1승을 2승, 3승, 4승으로 만들어내면 됐고 선수들도 자신 있었다.

문제는 1차전이었다.

“허하준....”

양 팀 모두 에이스가 나온다.

마린스에선 허하준, 프렌즈에선 사무엘 우즈.

에이스의 맞대결에서 승리를 가져가는 것은 단기전에서 그 어떤 승리보다 중요하다.

무패의 상징 허하준을 꺾는다면 그 기세를 타고 순식간에 유리한 고지를 점하는 것이 가능할 터.

"도하야. 도하 준비됐냐? 오늘 작전명 뭔지 알지? 서도하의 부산 상륙 작전!"

프렌즈 감독 박준호가 꼽은 승리를 위한 선봉장이 바로 서도하였다.

이름을 이용한 유치한 말장난이었지만 서도하는 박준호 감독이 왜 저렇게 말하는지 알고 있다.

항상 선수들의 긴장을 풀어주려는 일종의 루틴이었다.

서도하뿐만 아니라 다른 선수들에게도 그랬다.

김혁.

"혁이. 혁대는 단단히 맺지?"

오대현.

"오늘 잘 못 하면 소현으로 이름 개명하는 거다."

페드로 산체스.

"페드로! 오늘 배트로 싹 다 페드로!"

어디 내보내기 부끄러운 장면에 서도하가 질끈 눈을 감았다.

그래도 효과는 있었다.

프렌즈 선수단의 어느 때보다 긴장되고 부담스러웠던 마음이 조금은 풀어졌다.

"신이야! 오늘 신내림 좀 받자!"

'그러니까 제발 그만해주세요. 감독님.'

이렇게 프렌즈 박준호 감독이 나름대로 애쓸 무렵, 마린스에서도 이정훈 감독이 선수들과 대화 중이었다.

"주학이. 누가 뭐라 했어? 왜 그렇게 심각한 표정이야?"

이정훈 감독이 다른 선수들과 따로 떨어져서 심각한 표정으로 무언갈 보고 있는 이주학을 발견하고 다가갔다.

이정훈 감독이 다가가자 이주학이 급하게 종이를 숨겼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니긴 무슨. 뭔데, 이리 줘봐."

"감독님! 진짜 아무것도 아닙니다!"

반항하던 이주학이었지만, 이정훈 감독을 이길 수 없었다.

결국 심각하게 보던 무언가를 가져온 이정훈 감독이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편지네? 여자친구?"

"아닙니다! 그, 아까 들어오는 길에 어떤 팬분이 주셔서···."

한숨을 푹 내쉰 이정훈 감독이 이주학에게 편지를 돌려줬다.

"가봐."

"넵. 감사합니다!"

한국시리즈를 앞두고 저런 걸 읽고 있다.

이걸 긴장을 안 했다고 좋아해야 하는지, 아니면 화를 내야 할지 갈피를 못 잡던 이정훈 감독이 결국 이주학을 돌려보냈다.

긴장을 안 한 것 같아서 좋긴 했는데.

'너무 풀어진 거 아니야?'

이런 걱정도 들었다.

그렇다고 이주학이 풀어진 모습만 보이는 건 또 아니었다.

얼마 전 연습경기나 훈련에서 항상 좋은 모습을 보여줬다.

물론 이주학이라고 긴장을 안 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주학은 이미 고등학생 때부터 갖가지 국제 대회에 출전했고 작년엔 와일드카드부터 한국시리즈까지 전부 경험하면서 한층 성장했다.

결정적으로 얼마 전에 있었던 연습경기에서 김수호의 칭찬을 들은 뒤로 자존감이 높아졌다.

그리고 이주학은 긴장할 때보다 약간 풀어져 있을 때 제 실력을 발휘하는 타입이었다.

물론 너무 풀어지면 잔 실수가 많아지긴 했지만, 그라운드에서 그걸 붙잡아줄 선수가 무려 셋이나 됐다.

키스톤 콤비 최치호, 중견수 자리에서 이주학을 지켜보고 있는 이규영.

그리고 김수호까지.

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됐다.

그렇게 생각한 이정훈 감독이 대뜸 미소를 지었다.

'좋은 팀이야.'

팬들이 부르는 이정훈 감독의 별명은 행운아였다.

부임하자마자 김수호, 이호민, 이주학이라는 세 명의 신인이 갑자기 튀어나왔다.

그리고 정확히 마린스에 필요했던 포수, 유격수, 선발투수에 각각 자리매김했다.

심지어 김수호는 역대급 성적을 기록하며 팀 체질 자체를 변경시켰다.

물론 김수호를 포수로 기용한 건 이정훈 감독의 판단이었지만 그건 세간에 노출되지 않았다.

결정적으로 이정훈 감독도 본인을 그렇게 생각했다.

허하준을 바라보고 취임한 감독 자리에 여러 뛰어난 선수들이 찾아왔다.

하지만 이정훈 감독의 스승은 김목근 감독.

단기전의 승부수나 팀을 장악하는 카리스마는 그대로 물려받았다.

선수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향한 이정훈 감독이 입을 열었다.

"다들 모였나?"

부드럽게 미소를 지은 이정훈 감독이 선수 한 명, 한 명을 쳐다봤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다.

하지만 그건 잠시 미뤄두기로 했다.

눈을 마주친 순간 알았다.

지금 마린스에 필요한 건 긴장을 풀어주고, 승리에 대한 의미를 떠올리게 하는 게 아니었다.

자신들이 팬들에게 어떤 존재인지 알려줘야 했다.

잠시 고민하던 이정훈 감독이 입을 열었다.

"사막에 떨어져 몇십 년을 헤맨 끝에 오아시스를 찾았다."

대뜸 시작한 말이었지만 선수들이 집중했다.

"그리고 그걸 들이킨 순간은 그 어떤 순간과 비교해도 달콤하겠지."

이제 막 우승이라는 물을 맛본 팬들에겐 도저히 만족할 수 없었다.

끊임없는 갈증처럼, 우승을 갈구한다.

"그게 바로 자네들이야. 팬들에게 억만금을 줘도 바꾸지 않을 오아시스. 자네들은 그 물이 될 준비가 됐나?"

"예!"

수십 년간 참아온 갈등은 고작 한 번 마셨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그리고 선수들은 2번, 3번, 아니 수십 번을 마셔도 질리지 않을 달콤한 물이 될 준비가 됐다.

"좋아. 가자! 마린스!"

"예!"

시즌의 주인공은 한 팀.

그 주인을 가릴 경기가 시작됐다.

#

허하준은 항상 웃고 있다.

그게 화목한 팀 분위기 때문이지, 아니면 웃상인 얼굴 때문인지는 몰라도 허하준은 항상 웃고 있다.

마운드에 선 허하준을 바라보는 타자들은 그 묘한 이중적인 모습에 숨을 참곤 한다.

어떻게 이 분위기 속에 웃을 수 있는지.

그리고 저런 모습으로 악마에 가까운 공을 던질 수 있는지.

하지만 오늘, 한국시리즈 1차전의 선두타자로 들어선 김혁은 차라리 허하준이 웃는 게 낫다는 걸 깨달았다.

'무슨 놈의 표정이···.'

소름 돋는다.

항상 웃던 사람이 무표정이 되면 더 무섭다는 말을 절실히 깨달았다.

하지만 김혁도 프렌즈라는 강팀의 1번 타자.

이런 상황 속에서도 제 역할이 뭔지, 그리고 뭘 해야 하는지 기계적으로 점검했다.

'아무리 허하준이라도 몸이 덜 풀렸을 거야.'

프렌즈가 마린스에 비해 갖는 강점이 바로 그것이었다.

실전 감각.

하지만 그것도 얼마나 갈지 모른다.

그러니까 1회, 허하준이 이제 막 공을 던지기 시작했을 때를 노려야 한다.

그리고 허하준의 공은 지켜본다고 크게 달라질 게 없다는 건 여러 번의 경험으로 깨달은 김혁이었다.

초구부터 적극적으로 방망이를 휘둘렀다.

-딱!

'딱?'

이런 경기에서 초구로 포심을 주로 던진다는 걸 분석하고 올라온 김혁이었다.

포심 궤적에 정확히 휘둘렀다고 생각했지만, 방망이에서 들린 소리는 그의 생각과 거리가 있었다.

이어서 공을 잘못 맞혔을 때 느껴지는 찌릿한 통증이 손을 타고 올라왔다.

방망이를 던지고 주먹을 불끈 쥐면서 통증을 참고 1루로 달렸다.

"아웃!"

하지만 너무나 평범한 타구에 세이프를 바라는 건 욕심이었다.

공 하나로 아웃카운트 하나.

너무 허무한 결과였다.

더그아웃을 향하는 김혁의 시선은 김수호를 향했다.

마린스의 사인은 전부 김수호가 낸다.

즉, 허하준의 초구는 김수호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냥 늘 상 있었던 일인 양 평소 같은 모습에 김혁이 이를 악물고 돌아섰다.

이어서 타석에 들어온 서도하.

'읽혔다.'

김혁의 행동은 프렌즈가 준비한 작전이 읽혔다는 걸 의미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달라지는 건 없었다.

허하준의 구종 중 하나를 노리기엔 너무 많은 구종을 던지고 그렇다고 보고 치기엔 구종마다 수준이 너무 높다.

거기에 더해진 김수호의 볼 배합은 상대하는 타자들에게 절망을 느끼게 한다.

'쟨 대체 무슨 생각 중이냐.'

거기에 허하준의 무감각한 표정은 심리 싸움마저 하기 힘들게 만든다.

-딱!

출루를 위해 짧게 밀어 친 공이 이주학의 글러브에 걸렸다.

“오케이! 침착하게 던져!”

백핸드로 잡고 안전하게 송구.

"아웃!"

결국 프렌즈 작전의 주력이었던 김혁, 서도하가 출루에 실패했다.

이어서 오대현마저 삼진으로 물러나면서 삼자범퇴.

이제 마운드는 프렌즈의 사무엘 우즈가 물려받았다.

올해로 3년 차 장수 외국인 투수.

특히 올해는 15승 5패, 2.91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며 어느 팀으로 가나 에이스 역할을 할 수 있는 투수였다.

독실한 크리스천인 사무엘 우즈가 마운드에 작게 십자가를 새겼다.

그리고 눈을 감고 신에게 기도했다.

눈을 뜬 사무엘 우즈의 시야에 이규영이 들어왔다.

투수들에게 악마 소리를 듣는 이규영.

말 그대로 톱 타자로서 교과서에 가까운 타자였다.

하지만 이규영의 진가는 고작 발이 빠르고 컨택이 좋은 게 다가 아니었다.

돌핀스라는 강팀에서 다년간 1번 타자로 활약했고, 국가대표에서도 항상 1번 자리의 주인이었다.

한국시리즈 정도 되는 큰 경기는 셀 수 없이 나와봤고, 또 본인도 그런 경기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었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반드시 우승하기 위해 마린스가 데려온 선수가 바로 이규영이었다.

그리고 첫 타석부터 이규영의 진가가 발휘됐다.

"와아아아아아!"

함성을 들으며 사무엘 우즈가 이규영을 노려봤다.

'악마 같은 놈.'

마치 홈런이라도 친 듯한 함성이 나왔지만, 이규영은 서두르지 않았다.

되려 자신을 노려보는 사무엘 우즈에게 잘 보라는 듯 동작 하나, 하나 천천히.

그리고 마지막으로 투수를 바라보면서 천천히 1루로 향했다.

그냥 볼 4개를 얻고 저렇게 했어도 화날 판에 무려 공 12개를 골라내고 저런 짓을 했다.

사무엘 우즈가 이를 악물고 겨우 참아냈다.

지금 벤치클리어링을 일으켜 이규영과 본인이 퇴장되면 1차전은 끝이다.

그렇다고 무사 주자 1루에 박은성을 상대로 빈볼을 던질 수도 없는 노릇.

겨우 진정한 사무엘 우즈를 기다리는 건 이규영의 긴 리드폭이었다.

"세이프!"

"마!"

"세이프!"

"마!"

견제를 계속 던져 조금이나마 리드폭을 줄여보려고 해도 소용없다.

결국 포기하고 박은성을 향해 공을 던지려고 무릎을 들자 이규영이 뛰는 모습이 보였다.

-딱!

"파울!"

파울이 돼서 다행이지, 이규영에게 타이밍을 완전히 뺏겼다.

"스트라이크 아웃!"

그나마 박은성을 상대로 7구 승부 끝에 삼진을 잡아냈지만, 아웃카운트 하나 잡는 데 쓴 공이 무려 19개였다.

그리고 사무엘 우즈는 박은성의 뒤를 바라봤다.

"3번 타자! 김수호!"

신기한 경험이었다.

그 압도적인 존재감에 김수호를 제외한 모든 사람의 소리가, 시선이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만큼은 눈엣가시 같던 이규영도 보이지 않았다.

아니, 볼 상황이 아니었다.

천천히 대기타석에서 본인의 자리로 들어온 타자, 김수호.

멍하니 김수호를 바라보던 사무엘 우즈가 정신을 차린 건 얼마 지나지 않은 시간이 지난 후였다.

"김수호! 김수호! 김수호!"

"김! 수! 호!"

"3번 타자! 김수호!"

그의 이름이 생각에 잠든 사무엘 우즈를 깨우는 소리였다.

김수호가 방망이를 들자 곧 깨달았다.

'Oh, my God....'

여기가 지옥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