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화 약속의 무게 -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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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마린스 우승까지 남은 승리 횟수.
마린스 팬이라면 너나 할 것 없이 이미 우승한 듯한 기쁨을 만끽하고 있지만, 막상 매직넘버가 10에 가까워져 오니 묘한 느낌이 받았다.
30년 우승의 숙원은 작년에 이미 풀었다.
하지만 이번 정규시즌 우승은 의미가 남달랐다.
1982년에 프로야구가 탄생한 이후 원년 팀으로 변화 없이 지금까지 온 부산 마린스.
하지만 놀랍게도 정규시즌 우승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당연히 50년 동안 통합 우승은커녕 고작 한국시리즈 2회 우승에 그쳤을 뿐이다.
작년 한국시리즈 우승에 묻혀 본인들도 채 까먹고 있었던 숙원이 풀린다는 기대감이 가슴 속에서 다시금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그 기대감은 곧 그 광경을 직접 눈으로 담고 싶다는 결론으로 이어졌다.
평일에도 사직을 가득 채운 팬들이 바라는 건 단 하나.
승리.
화요일, 광주 울프즈와의 시리즈 1차전.
웰링턴의 압도적인 피칭과 초반부터 점수를 쓸어 담은 타선.
-따아아악!
그리고 그 화력의 정점을 찍는 김수호의 홈런까지.
6대1, 부산 마린스 승리.
같은 날 프렌즈가 패배하면서 매직넘버는 10.
수요일, 역시나 광주 울프즈와의 2차전.
하스가 선발인 만큼 김수호가 빠질 줄 알았지만, 라인업에 이름을 올렸다.
대외적인 이유는 포스트시즌을 앞두고 다시 하스와 호흡을 맞추기 위해서였고.
다른 이유로는 김수호가 도전 중인 한 가지 기록 때문이었다.
연속 홈런 기록.
지난주 챌린저스 2차전 이후 무려 6경기 연속 홈런을 진행 중인 만큼 연속 출장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김수호는 그 기대를 또다시 충족시켰다.
[김수호! 강하게 친 타구가 계속 날아갑니다! 멈추지 않습니다! 계속 갑니다! 그대로 담장! 넘깁니다! 김수호의 시즌 50번째 홈런! 대단합니다! 무려 프로 2년 차에 50개의 홈런을 때려낸 첫 번째 선수가 됩니다!]
3대2로 지고 있던 6회 말, 스코어를 동점으로 만드는 솔로홈런.
7경기 연속 홈런이자 팀의 5대4 역전승을 이끈 결정적인 50번째 홈런이었다.
그 홈런에 힘입어 매직넘버는 드디어 한 자리를 향했다.
그리고 다음 날, 사직 구장은 아직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사직 구장이 매진을 기록했다.
팀의 9연승 도전과 김수호의 대기록 도전에 응원을 보내고자 하는 팬들의 마음이었다.
그 응원이 통했을까.
김호기는 지난주에 이어 이번 주에도 호투를 이어갔고 불펜진은 1점을 지켜냈다.
그리고 8회 말, 아직 홈런이 없는 김수호의 마지막 타석.
-따아아악!
귀를 때리는 소리가 구장에 울려 퍼졌다.
“제발 넘어가라.”
누군가 중얼거린 소리와 함께 곧 엄청난 함성이 구장에 가득 퍼졌다.
“우와아아아아!”
“김수호! 김수호! 김수호!”
8경기 연속 홈런, 그리고 9연승.
이제 대기록, 9경기 연속 홈런까지 고작 한 경기를 앞둔 상황에 마린스는 KBO에서 가장 홈런이 잘 나오는 구장으로 향했다.
인천 문학 경기장.
그리고 마린스 팬들도 뭐에 홀린 듯 부산에서 인천으로 따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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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즈와 마린스의 정규시즌 마지막 3차전은 이미 목요일에 매진이 됐다.
평소라면 기뻐할 스타즈 선수들과 직원들이겠지만 그 이유가 스타즈 때문이 아니라는 게 흠이었다.
9연승의 마린스.
마린스가 5강 경쟁자였던 챌린저스와 피닉스를 스윕하는 거까진 좋았다.
하지만 울프즈까지 스윕하며 기세를 완벽하게 끌어올린 마린스를 상대하는 건 그다지 좋은 일은 아니었다.
심지어 주말 경기면 몰라도 금요일 경기까지 매진됐다는 건 마린스 팬들도 구장의 반을 차지한다는 뜻.
아니, 사실 반 정도면 소원이 없었다.
“이게 우리 구장이냐, 아니면 마린스 홈 구장이냐.”
스타즈 선수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릴 정도로 원정 응원석인 3루 측은 이미 마린스 팬들로 꽉 찼고 중앙 응원석 역시 마린스 팬들이 더 많이 보였다.
평소였다면 아무리 마린스가 잘하고 있다 해도 이 정도까지 오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김수호의 대기록이 코앞까지 다가온 만큼 그걸 보기 위한 팬들로 가득 찼다.
심지어 두 팀의 유니폼이 아닌 다른 팀의 유니폼을 입은 팬들도 자주 눈에 띄었다.
그만큼 오늘 경기는 많은 주목을 받는 경기였다.
경기 전 스타즈 감독이 선수들에게 한 가지 당부사항을 전달했다.
“만약 기록 때문에 승부를 피하는 놈이 있으면 바로 2군행이다. 알겠나!”
기록에 기죽지 말고 승패에 집중하라는 의도였지만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
9경기 연속 홈런.
전 세계에 단 한 명밖에 없는 기록이다.
투수로서 만약 홈런을 허용한다면 그 이름은 언제나 붙어 다닐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반대도 마찬가지.
만약 승부를 제대로 하지 않고 피해서 기록 달성에 실패한다면 그 오명 또한 평생 따라다닐 수밖에 없었다.
“볼!”
스타즈의 외국인 선발 투수는 그 기록 때문인지, 아니면 김수호의 현재 기세 때문인지는 몰라도 김수호를 두 타석 연속 볼넷으로 내보냈다.
“우우우우우!”
“우우우우우우우!”
쏟아지는 야유에 스타즈 팬들도 박수와 함성을 치며 투수를 응원했지만, 막상 속은 탐탁지 않았다.
결국 승부를 피해 기록을 망쳤다는 평가를 듣는 건 팬들이었다.
차라리 홈런을 허용하더라도 승부를 하길 원했지만 그런 팬들의 마음을 모르는지 투수는 다음 투구를 이어갔다.
그리고 다음 타자는 일요일, 문학구장에서 은퇴 투어를 앞둔 강주호.
-따아악!
강렬한 타구음과 함께 공은 순식간에 담장을 넘어 사라졌다.
40세의 나이로 친 라인드라이브 홈런.
시즌 17호 홈런이었다.
“아오! 김수호를 피했으면 경기라도 이기던가!”
홈런을 보자 결국 참아 왔던 분노를 폭발시킨 스타즈 팬들을 뒤로하고 강주호가 여유롭게 홈에 들어왔다.
설상가상으로 투수가 그 이후 심각하게 흔들렸고 결국 주자를 꽉 채운 채 마운드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마린스 타자들은 급하게 올라와 제구가 잡히지 않은 두 번째 투수를 가만두지 않았다.
결국 교체된 투수마저 연달아 실점.
이번 이닝, 벌써 6득점에 성공한 마린스 타선은 선두타자로 나왔던 김수호에게까지 연결됐다.
1사 주자 1, 3루.
투수 교체가 이뤄졌지만 벌어진 격차에 올라온 투수는 9월 확장 엔트리로 처음 1군을 밟은 유운기.
최필주가 떠난 뒤 주전 포수로 자리 잡은 최재성가 마운드를 방문했다.
“후, 지금 무슨 상황인지 알지?”
지금 구장에 감도는 분위기, 자신을 쏘아붙이는 눈빛들, 자신의 이름을 부를 때 눈을 마주치지 않았던 불펜코치님까지.
말 그대로 제물과 같았다.
김수호라는 괴물에게 바치는 제물.
“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선택지는 없었다.
괴물에게 제물이 되지 않으면 돌아와봤자 원망을 살 뿐이고 유운기가 살 방법은 오직 하나.
용감하게 괴물과 맞서 싸우는 것.
“여기서 맞는 홈런은 네 잘못이 아니니까 쫄지마.”
그렇게 말하는 최재성의 목소리가 오히려 더 떨렸다.
최재성 역시 최필주의 빈자리를 완벽하게 대체하기엔 부족함이 있는 선수.
나름 선배이자 포수로서 유운기를 다독이려 했지만 실패했다.
그렇게 몇 가지 더 얘기하고 마운드에서 내려간 최재성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유운기의 눈에 김수호가 들어왔다.
그리고 우연이겠지만 눈이 마주쳤다.
방금까지 한번 해보자고 생각했던 의욕은 사라지고 어느새 두려움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볼!”
“볼!”
“볼!”
그 결과는 연속 볼 3개.
“우우우우우!”
아까보다 더 심해진 야유소리가 유운기의 가슴을 옥죄인다.
심지어 환호와 박수로 야유를 막아준 스타즈 팬들도 이번엔 형식적인 소리만 낼 뿐 큰 액션이 없었다.
“괜찮아! 진정하고 던져!”
최재성의 외침은 한 귀로 들어왔다가 반대쪽 귀로 나갔다.
그리고 그때, 다시 김수호와 눈이 마주쳤다.
당연하게도 두 눈은 유운기를 향해있었다.
멀어서 잘 보이진 않지만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준비되면 언제든지 들어오라고.
유운기가 김수호의 생각을 읽은 건 아니었지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거라는 강한 확신이 들었다.
이유는 없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한 후부터 가슴이 진정됐다.
미칠 듯이 뛰던 심장은 가라앉고 귀를 파고드는 야유소리도 점차 들리지 않았다.
이제 그곳엔 공을 던지는 투수와 공을 치려는 타자만 남아있을 뿐.
“끄악!”
절로 기합 소리가 나올 만큼 전력투구.
“스트라이크!”
앞선 세 번의 투구와 다르게 존을 파고들었다.
야유하던 마린스 팬들도, 될 대로 보던 스타즈 팬들도 모두 과감한 투구에 당황하던 것도 잠시.
“스트라이크!”
두 번째 공 역시 스트라이크가 되자 분위기가 바뀌었다.
“그렇지! 김수호라고 맨날 홈런 치냐! 과감하게 던져!”
짝짝짝-
“삼진!
짝짝짝-
“김수호! 홈런!”
상반된 바람을 가진 응원 소리가 쏟아졌지만, 유운기는 온전히 투구에 집중한 상태였다.
그리고 갑자기 안정을 찾은 유운기에 놀란 최재성이 다음 사인을 냈다.
떨어지는 슬라이더.
“끄아악!”
홈런을 노리고 스윙이 나올 거라 예측한 사인이었고 유운기의 손에서 공이 떠났다.
그리고 최재성의 생각대로 김수호의 방망이가 나왔다.
하지만 그보다 앞서 그런 생각을 했던 포수가 많았고, 전부 그 선택을 후회했다는 사실을 최재성은 알지 못했다.
-따아아악!
망연자실한 최재성과 다르게 카메라에 잡힌 유운기의 표정은 꽤 후련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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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마린스 9 : 3 인천 스타즈]
[김수호! 세계기록 타이 달성! 강주호의 9경기 연속 홈런 타이!]
[볼볼볼 이후 연속 스트라이크. 김수호의 침착한 대처가 52호 홈런으로 연결되다!]
[아직 끝나지 않은 대기록! 김수호, 이민수를 상대로 시즌 53호 홈런과 10경기 연속 홈런 기록 노려!]
[김수호의 9경기 연속 홈런볼을 잡은 관객은 바로 집으로 떠났다.]
[김수호, 홈런볼에 대해 언급, ‘개의치 않는다. 내가 원하는 공은 오직 통합 우승 공뿐. 추억이 됐다면 만족. 승부를 피하지 않은 유운기에게 감사.’]
[10연승 마린스, 프렌즈가 패배하면서 매직넘버 단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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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강도가 들었어.”
“네?”
“근데 그 강도가 처음에 내 이름을 뺏더니 그걸로 부족한지 기록을 하나씩 뺏더라고.”
강주호가 만나자마자 뜬금없이 한 말이었지만 무슨 얘기인지 알겠다.
“근데 그 강도가 선배님한테 가장 좋은 걸 줬으니까 강도라 부르면 안 되죠.”
“그럼 뭐냐?”
“음. 은인?”
내 입으로 말하고 뻘쭘하긴 했는데 뭐 틀린 말은 아니지 않나?
“강도 같은 놈이 이젠 기록도 모자라서 은인 행세를 하려고 드네. 아이고.”
그다음에 강주호가 내 목에 팔을 걸고 장난스럽게 조였다.
그 상태로 라커룸에 들어가니 흥분한 채지훈의 목소리가 들렸다.
“행님! 지금 우리 수호한테 무슨 짓입니꺼!?”
“우리 수호? 언제부터 수호 성이 우리로 바뀌었냐?”
강주호가 어이없다는 듯 팔을 풀었다.
“아이고, 수호야. 정신이 좀 드나? 이 행님 알아보겠나?”
채지훈이 오버하면서 내 몸을 살폈고 주변에 있던 선수들이 한 마디씩 던졌다.
“선배님. 이제 수호 마린스인 거 모르십니까? 선배님도 조심하셔야죠.”
“수호야. 언제부터였냐? 언제부터 선배님이 괴롭혔어!”
과장된 말투와 대놓고 웃음을 참는 표정.
나도 어색하지만, 거기에 한마디 보탰다.
“형들. 저 좀 살려주세요.”
내 말이 기폭제였을까.
“끄흑.... 쟤 진짜 연기 못한다.”
“수호야. 너 야구하기 잘했다. 너 얼굴은 연예인인데 연기는 진짜 아니다.”
그렇게 웃으면서 마무리되는 듯했다.
하지만 경기 시작 전이 되자 묘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오늘 선발 투수인 허하준의 공을 받고 왔는데 더그아웃이 고요했다.
“다들 왜 그러세요?”
대답은 들리지 않았고 모든 선수의 눈짓이 한 곳을 가리켰다.
팔짱을 끼고 눈을 감은 채 가만히 앉아있는 강주호를 향해 말이다.
“주호 선배가 왜요?”
김호기에게 조용히 묻자 나를 끌고 밖으로 나왔다.
“아까 장난친 이후로 계속 저기압이신데?”
“예? 왜요?”
“몰라. 아무튼 너 가고 분위기가 갑자기 이렇게 됐어.”
장난도 강주호가 먼저 시작했고 딱히 문제 될 건 없어 보였는데 설마 그 장난에 기분이 상한 걸까.
조용히 돌아와 강주호한테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선배님.”
그러자 강주호의 눈이 나를 향했다.
“어.”
침을 한번 꿀꺽 삼키고 말했다.
“괜찮으세요?”
“어. 안 괜찮을 건 또 뭐 있냐.”
하지만 목소리는 저기압 그 자체.
솔직히 이유도 잡히지 않고 답답했다.
다행히 강주호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호야. 잠깐만 따라와라.”
“아, 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