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화 약속의 무게 -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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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경기가 끝난 시간은 밤 열 시가 넘었다.
구장 근처에 대규모로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식당은 거의 없었고 반강제적으로 마린스와 피닉스는 같은 식당에 오게 됐다.
서로에게 당황스러운 일이긴 했지만 어차피 건너 건너 다 아는 얼굴이었다.
같이 먹진 않았지만 오고 가며 인사를 했고 편한 분위기가 형성됐다.
문제는 식당이 꽉 찼고 자연스럽게 두 팀이 만나는 교차 지점이 생겼다.
마린스 테이블엔 김수호, 강주호, 허하준, 이호민이 앉아있었고 피닉스 테이블은 비어있었다.
피닉스 테이블이 빈 이유는 간단했다.
일단 마린스 멤버만 봐도 가까이 가기 어려운 조합이다.
그리고 아직 자리에 없는 사람들이 있었다.
자연히 피닉스 테이블은 늦게 온 황인재, 오기택, 홍민우가 앉았다.
“내가 미쳤지.”
“왜.”
“내가 고기 구워준다고 말하는 게 아니었는데.”
이호민은 이곳에서 도망치려고 했지만, 김수호에게 붙잡혔다.
“내일 홈런 못 치기만 해봐라.”
“나도 있고 싶어서 있냐.”
“다 들린다.”
“너무 좋다 수호야. 그치?”
“어. 좋지.”
강주호의 말에 두 사람이 태세 전환을 하며 고기를 먹었다.
그 모습을 보던 오기택이 일어났다.
우연한 합석이긴 했지만, 대선배인 강주호가 있다.
오기택이 술을 들고 강주호에게 향했다.
“선배님. 제가 한잔 따라드리겠습니다.”
“나 술 안 먹는다.”
“예?”
국가대표를 갔다 온 선배들에게 강주호의 일화에 들은 적이 있는 오기택은 당황했다.
‘너 혹시라도 강주호랑 절대 술 마시지 마라. 와, 괴물 새끼. 무슨 새벽 6시까지 쉬지도 않고 술을 마시냐?’
그러면서 다신 강주호와 술을 마시지 않겠다고 맹세한 선배가 한둘이 아니었다.
그런 강주호가 술을 거절한다고?
“술 안 먹는다고. 요즘 술 먹으면 다음 날 뒤져. 쯧, 나이를 먹긴 했나 봐.”
“아, 예. 그럼 음료수라도 따라드릴까요?”
“내 신경은 그만 쓰고 너희 애들이나 신경 써라. 저게 먹는 거냐?”
황인재는 조금 먹다 멈췄고 홍민우는 그런 황인재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에후, 알겠습니다.”
어찌 됐든 안 오겠다는 놈을 끌고 온 건 오기택이었다.
“이럴 때 많이 먹어야지. 민우야, 가서 고기 좀 더 시켜라. 집게 나 주고.”
“아, 넵. 알겠습니다.”
그 이후 고기가 익는 소리만 두 테이블에 울려 퍼졌다.
그렇게 한바탕 식사가 끝나고 다른 테이블도 거의 마무리됐을 무렵 황인재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오늘 볼 배합, 네가 한 거냐?”
김수호가 황인재를 바라봤다.
밥 먹는 내내 황인재가 쳐다보느라 체하는 줄 알았다.
먼저 말을 건 건 의외지만 차라리 이렇게 말이라도 거는 게 나았다.
“8회 말에? 어. 내가 했지.”
“...”
물어놓고 왜 말이 없어.
딱히 아무 말 안 하기 좀 그래서 몇 마디 덧붙였다.
“네가 알려준 거잖아. 배터리랑 심리 싸움하는 거. 그거 반대로 써먹은 거지.”
황인재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짜증이나 화가 난 건 아니고 가끔 뭔가 생각할 게 있으면 저러는 습관이 있다.
황인재 바로 옆에서 3년 동안 있다 보니 자잘한 습관들은 전부 알고 있었다.
그 이후 말이 없길래 딱히 더 말을 하진 않았다.
황인재의 미간도 펴지지 않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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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그렇게 헤어지고 나서 별다른 일이 있진 않았다.
단장님이 말한 대로 사고 없이 숙소에 잘 들어왔고 푹 쉬었다.
근데 이호민은 아닌가 보다.
“생각할수록 열받네.”
“뭐가.”
“아니, 황인재 걔. 어제 날 아예 개무시를 하던데?”
“원래 그런 놈인 거 몰랐냐?”
“알지. 아는데 괜히 열받네. 아오!”
이호민이 저러는 건 다 이유가 있었다.
고등학교 때 우리 기수에서 황인재라고 하면 느낌이 달랐다.
한 단계, 아니 두 단계는 앞서있는 느낌.
특히 이호민은 황인재를 만날 때마다 늘 성적이 좋지 못했다.
내 기여도가 없다고 하진 못하겠는데 고등학교 때 이호민은 그냥 155km가 넘는 빠른 볼을 던지는 유망주였다.
물론 고등학교에서 그 정도면 충분했지만, 황인재는 그 수준을 넘었으니 만날 때마다 이호민이 분한 표정을 지었던 게 보였다.
심지어 프로에 와서도 황인재만 보면 내가 낸 사인에 여러 번 고개를 젓기도 한다.
그러다가 홈런도 꽤 맞았고.
심지어 드래프트도 황인재가 전체 1위, 이호민이 그다음이었고 타자인 내가 모르는 투수들의 자존심 비슷한 뭔가도 있지 않을까.
“너 오늘 홈런 치기로 한 약속 절대 잊지 마. 꼭 쳐야 한다? 꼭!”
“알겠어. 알겠으니까 그만 말해.”
이호민의 저 모습은 투구에서 그대로 드러났다.
난 첫 타석에서 이호민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고 1회 말이 됐다.
이호민이 흥분한 건지 아니면 긴장한 건지는 몰라도 몸에 필요 이상으로 힘이 들어간 건 확실했다.
제구가 그리 좋지는 못했고 공은 자꾸 빠져나가기 일쑤였다.
그래도 구위로 찍어누르면서 투구수 20개로 세 타자를 상대하며 1회를 마쳤다.
결과는 좋았지만, 과정은 탐탁지 않았다.
이호민이 가장 잘 던질 때는 아무 생각 없이 마운드에 오를 때였다.
그래서 가능한 등판 날에 뭐라 하지 않지만, 오늘은 해야겠다.
“너 2회에도 이렇게 던질 거냐?”
“후. 나도 알아. 제대로 할게.”
하지만 2회 말 선두타자로 들어온 황인재에게 볼넷.
꽤 오랜만에 보는 이호민의 분한 표정이 보였다.
본인이 제일 화나긴 하겠지.
그래도 그건 황인재 타석에서 끝내야 한다.
“형. 어제 잘 들어가셨어요?”
웃으면서 나한테 말을 거는 홍민우까지 이어지면 골치 아프다.
“응. 어젠 얘기도 한 번 못 했네. 다음에 시간 되면 밥이라도 먹자.”
“형 너무 바쁘잖아요. 평소에 연락하면 답도 제대로 안 하시면서. 정확히 날짜라도 정해주세요.”
“음. 시즌 끝나면?”
아무튼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다.
“어제 인재랑 무슨 일 있었어?”
황인재가 원래 저런 놈이긴 한데 그래도 아예 막가는 놈은 아니다.
국대 때 봤듯 존경하는 선배, 특히 강주호 앞에 있으면 순해진다.
근데 강주호도 있는 자리에서 저랬다는 건 어제 뭔 일이 있었다는 거다.
“아···. 그냥 마지막 타석 때문에 그렇죠.”
그리고 예상대로 원인을 제공한 사람은 나였다.
어지간히 분하긴 했나 보다.
그걸 사람들이 다 있는 곳에서 말하고.
정보를 알려준 홍민우에게 정신을 차린 이호민의 포심을 선물로 주고 나머지 타자들도 처리하면서 실점 없이 이닝을 마쳤다.
그리고 4회에 돌아온 두 번째 타석.
-따악!
깔끔한 소리와 함께 공이 2루 베이스 위를 통과했다.
“나이스 안타. 오늘도 타격감 좋은데?”
보호구를 벗어 1루 코치님한테 주고 작전을 전달받았다.
“뛰진 않을 건데 2스트라이크에 작전이 나올 수도 있으니까 집중해. 공 잘 보고 뛰고. 알아서 잘할 수 있지?”
코치님이 어깨를 두드리고 자리로 돌아갔고 조금 넉넉하게 리드폭을 잡았다.
-따악!
당겨친 타구가 빠르게 3루를 향했다.
하지만 타구가 내야를 빠져나가지 못하고 황인재의 글러브에 걸렸다.
땅볼이 되는 걸 보고 바로 2루를 향해 뛰었지만, 워낙 빠른 타구라 슬라이딩할 기회도 없이 아웃.
1루에선 당연히 아웃이었다.
꽤 어려운 타구였는데 완벽하게 잡았다.
이전 타석도 그렇고 오늘 경기 황인재의 집중력이 상당해 보였다.
차라리 타석에서 거르는 게 나을 것 같긴 한데.
더그아웃에서 눈을 불태우고 있는 이호민을 보면 그건 어려울 것 같고.
어떻게든 황인재 앞에 주자를 쌓지 말고 장타만 피해 보자.
그게 오늘 경기에서 가장 중요한 키 포인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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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가 마음대로 되는 스포츠였다면 모든 팀이 다 우승했을 거다.
아쉽게도 정확히 피하고자 했던 걸 정확하게 허용하고 말았다.
황인재 앞에 주자를 쌓았고 만루에서 장타를 맞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담장 끝에 걸리면서 2루타에 그쳤고 1루 주자는 홈에 들어오지 못했다.
그래도 2타점 적시타.
흔들린 이호민이 추가로 볼넷 하나를 내주긴 했지만, 다음 타자에게 160km를 던지며 이닝을 마무리했다.
더그아웃에 돌아온 이호민의 앙다문 입이 지금 어떤 심정인지 말해주는 듯했다.
“해줘.”
저 소리 오랜만에 듣네.
“뭘. 잔소리?”
“복수 해줘.”
“내가 투수냐. 어떻게 복수해.”
이호민도 그냥 한 소리였는지 우울한 표정으로 구석에 박혔다.
그래도 위기 뒤 기회라고 곧바로 기회가 찾아왔다.
실점하고 난 뒤 6회 초 공격.
선두타자인 이규영이 출루에 성공했다.
대기타석으로 가기 전 이호민한테 말했다.
“잘 보고 있어라.”
점수는 2대0.
1점 차였다면 감독님도 번트를 고민했겠지만 2점 차에 발 빠른 주자와 타자.
-따악!
박은성이 한쪽 손을 놓으면서 기술적인 타격을 선보였다.
그리고 이규영의 진면목이 나왔다.
꽤 느린 타구였지만 좌익수 방향으로 간 타구다.
3루를 가는 건 위험할 수 있지만 과감하게 도전하면서 3루에 도착했다.
무사 주자 1, 3루.
병살만 쳐도 1점인 만큼 점수를 못 내기 어려운 상황이다.
하지만 이호민이든, 멀리 대전까지 찾아온 팬들이든 나한테 원하는 게 고작 병살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투수 교체는 없다.
단지 나를 피하려는 배터리의 의지가 느껴졌다.
“볼!”
“볼!”
“볼!”
연속 세 개의 볼.
스트라이크가 들어올 확률이 높지만 내 뒤에 강주호가 있다.
아까 병살이 되긴 했어도 좋은 타구를 날린 만큼 하나 지켜봤다.
“스트라이크!”
이제 진짜 승부할 카운트가 됐다.
-따아악!
땅볼을 만들겠다는 의도가 확실한 낮게 들어오는 공.
내 타격도 의도가 확실했다.
따라가기 위한 1점, 그걸 위한 뜬공.
아까도 말했지만, 야구는 마음대로 되는 스포츠가 아니다.
땅볼을 만들기 위한 피닉스 배터리의 선택은 뜬공이 됐고, 1점을 내기 위한 내 스윙은.
“와아아아아!”
3점이 됐다.
강주호, 이규영, 박은성과 차례로 하이파이브를 하고 더그아웃에 들어오자 이호민이 달려들었다.
“역시! 청부 홈런 업자! 해줄 줄 알았다!”
“약속 지켰다. 됐지? 또 볼질 하기만 해라.”
“진짜 고맙다. 내가 이건 꼭 막을게.”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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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쉽게도 이호민은 6회를 끝으로 내려갔다.
6이닝 2실점 9k 115구.
그래도 한계까지 던지면서 했던 말을 지키려고 했다.
오늘도 가동된 필승조가 호투하면서 4대3로 이겼다.
점수를 한 점 더 낸 상태로 맞이한 8회 말.
이용기와 다시 만난 황인재가 안타를 만들었다.
그 이후 이용기가 실점하면서 약간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줬지만 어쨌든 이겼으면 됐다.
힘들만도 한 게 이번 주에 벌써 네 번째 등판이다.
필승조 전체가 내일 나오기 어려운 상황.
말 그대로 잇몸으로 버텨야 할 경기였다.
하지만 필승조가 필요한 상황이 나오지 않으면 딱히 상관없다.
그리고 딱 맞는 투수가 대기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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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경기가 시작하기 전 강주호의 은퇴 투어 행사가 시작됐다.
올스타전을 시작으로 벌써 8번째 행사.
피닉스에선 황인재가 대표로 나왔다.
고등학교 후배이자 현재 피닉스를 대표하는 타자니까 당연한 일이었다.
황인재랑 무슨 얘기를 하는 게 보였지만 들리진 않았다.
마지막으로 선수단 전부와 사진을 찍으면서 행사가 마무리됐다.
이제 남은 은퇴 투어는 두 번.
강주호의 마지막이 오고 있다는 게 실감이 안 난다.
이건 나 뿐만이 아니라 다른 선수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일까, 강주호의 은퇴 투어 승률은 자그마치 100%.
올스타전을 포함해 8전 8승이다.
그리고 오늘 그 기록을 이어가기 완벽한 투수가 나왔다.
우리 선발 투수는 허하준, 상대는 김태민.
최근 김태민 공이 좋다고 하지만 우리한테 워낙 약했던 김태민이었다.
5이닝 4실점으로 분전했지만, 허하준은 끄떡없었다.
결국 김태민 이후에 나온 불펜마저 공략하면서 총 8득점.
-따아악!
그 8점 중 1점은 강주호의 것이었다.
이번 시즌 15번째 홈런을 기록하며 은퇴 투어를 자축했다.
“아오, 누가 주자 쓸어가는 바람에 1점밖에 못 냈네?”
“와, 그게 누구죠?”
“너 인마. 쯧 이제 은퇴하는 늙은이 타점이나 뺏어가는 나쁜 새끼.”
정확히 강주호가 홈런을 치기 전에 내 타구가 먼저 담장을 넘겼다.
이걸로 다섯 경기 연속 홈런이자 47번째 홈런.
반면 피닉스 타선은 허하준한테 꽁꽁 묶였다.
8이닝 1실점 도미넌트 스타트.
남은 한 이닝은 박우주가 처리하면서 8대1 완승으로 마무리했다.
경기가 끝나고 정리를 위해 라커룸에 왔다.
하지만 어떤 식이든 가장 큰 존재감을 자랑했던 강주호는 한동안 들어오지 않았다.
강주호는 은퇴 투어마다 늘 그랬듯 경기가 끝나고 잠시 더그아웃에 혼자 앉아있었다.
피닉스와의 남은 한 경기는 사직에서 열린다.
피닉스가 한국시리즈에 오는 게 아닌 이상 정말 마지막이다.
그리고 피닉스가 한국시리즈까지 올 확률은 아주 낮았다.
그래서일까, 오늘 강주호는 평소보다 더 늦게 돌아왔다.
“이제 집으로 가자.”
혼자 마무리를 한 강주호가 라커룸에 들어오자 그제야 우리도 정리를 시작했다.
여느 때와 같이 승리해서 기쁘고, 집으로 가서 좋은 날이었다.
아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