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화 뭐라 불러야 할까요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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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주가 끝나고 다시 찾아온 월요일.
마치 제방인양 이주학과 이호민이 내 방에 찾아왔다.
다행히 이번엔 집이 아닌 원정 숙소였다.
“호민아. 넌 올스타 때 뭐하냐?”
“훈련하려고.”
“안 쉬고?”
“어. 쉴 시간이 어딨어.”
마치 믿었던 동료가 떠나간 것처럼 이주학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진짜? 왜? 너 어디 아파?”
“수호야. 얘 왜 이러냐?”
“평소의 이주학인데?”
“하긴, 그렇긴 하지.”
“김수호, 스탑. 그 말 뭐냐? 평소의 이주학? 뭔가 기분 나쁜데?”
“좋은 뜻인데? 그치?”
“어. 맞지.”
의심스러운 눈으로 쳐다보는 이호민과 눈이 마주치자 자연스럽게 웃음이 나왔다.
“너는? 김수호 너는 뭐 하는데.”
“나도 올스타전 이틀 빼고는 호민이랑 같이 훈련하려고.”
당연히 빡센 훈련은 아니고 트레이닝 팀의 도움을 받아서 회복훈련을 할 생각이었다.
중간중간 이호민 공도 좀 받아주고.
어느새 올스타전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이번 주가 지나면 다음 주 월요일부터 일주일 동안 올스타 휴식기에 들어선다.
이번 올스타 휴식기에 팀 단체 훈련은 하루뿐, 나머지는 선수 자율로 맡겼다.
다른 팀들의 훈련 기간은 최소 이틀, 길면 나흘로 알고 있다.
우리가 비교적 훈련이 적긴 하지만 승패 여유도 있고 감독님은 휴식이 먼저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다.
뭐 주전들은 전부 올스타전 참가 예정이라 쉬는 게 쉬는 건 아니었지만.
내 말에 이주학이 뭔가 고민하는 듯했다.
“넌 뭐 하는데?”
“나? 난 그냥 쉬려고 했는데···. 오랜만에 집도 좀 가고.”
말끝을 흐리는 걸 보니 우리 말을 듣고 약간 양심에 찔리는 듯했다.
“걱정하지 마. 이번엔 강제로 안 시키니까. 푹 쉬고 와라.”
“어. 올스타전 하면 또 부산 와야 하잖아. 그냥 서울에서 며칠 쉬다 내려와.”
“그건 그렇지. 오케이. 그럼 나는 쉬는···.”
“아, 호민아. 이번에 우리 집에서 며칠 잘래? 엄마가 저번에 너무 금방 갔다고 섭섭해하시더라. 이번에 음식 제대로 해주신대.”
“오, 그래도 돼? 나야 좋지. 그럼 너도 우리 집 와서 며칠 자라. 그때 부모님이 오랜만에 쉰다고 소 한 마리 잡으신다고 했거든.”
그렇게 이호민과 훈련 계획을 짜고 이주학을 바라봤다.
“아, 주학아 미안. 뭐라고?”
“개새끼들.”
“왜?”
“알았어. 알았다고! 나도 훈련하면 될 거 아냐.”
“아니, 진짜 안 해도 된다니까? 괜찮아.”
“그렇게 말해놓고 안 해도 된다고? 꺼져.”
예상했던 이주학의 반응을 보고 웃고 있는데 이주학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나도 잘 수 있는 거지? 나 숙소에서 자라고 하면 안 간다?”
“오케이.”
그렇게 훈련 멤버가 정해졌다.
“뭔가 당한 거 같은데.”
이주학의 끝말은 무시했다.
다 널 위한 거야.
이제 이건 됐고, 다른 볼일을 처리하러 가야 했다.
“나 잠깐 나갔다 온다.”
둘한테 얘기하고 호텔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찾던 사람과 만난 건 호텔 헬스장이었다.
“아, 여깄었네요?”
“웬일이냐? 네가 나를 먼저 찾고?”
“그렇게 말하면 오해하잖아요.”
웨이트를 하고 있던 이규영이 흥건히 흘러내리는 땀을 닦고 있었다.
“볼일이 뭔데.”
“부탁 하나만 하려고요.”
“부탁?”
그 말을 듣자 이규영의 입꼬리가 씨익 하고 올라갔다.
“네가 나한테 부탁? 부타악? 뭔데. 들어는 볼게.”
“음. 그냥 없던 걸로 할게요.”
“에이. 말은 해봐. 뭔데. 뭔데 그런데?”
그냥 돌아가려고 하자 이규영이 급하게 내 손목을 붙잡았다.
“별건 아니고, 그냥 홈런 더비 때 공 좀 던져줄 수 있나 해서요.”
지난번에 이규영과 특타를 했을 때 이규영이 꽤 잘 던졌던 기억이 있었다.
물론 이규영은 순순히 들어줄 생각은 아닌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공? 아 맞다. 너 홈런 더비 나가지? 흐음. 글쎄. 공이라. 그거 던져주려면 전날에도 올스타전에 가야 하는데···.”
“뭘 원하는데요?”
“어허. 그렇게 말하면 섭섭하지. 뭘 원한다니. 누구 부탁인데 당연히 해주지. 해주는데 이제 우리 후배님이 이 형님한테 자발적으로 뭔가 해주려는 생각이 아닌가 싶어서 말해본 거지.”
“그러니까 뭐요?”
“흠. 이제 슬슬 형이라 부를 때도 되지 않았냐?”
“형이요?”
뭐 이규영과 처음 만난 지도 벌써 일 년이 넘었다.
살짝 답이 늦자 이규영이 곧바로 말했다.
“왜? 좀 그렇냐?”
“아뇨. 상관없죠. 규영이 형. 됐죠?”
“어?”
이런 걸로 해준다고 하면 좋지.
내 말에 이규영은 뭔가 애매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왜 그래요?”
“아니, 너 말 놓는 거 별로 안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제가요?”
살면서 처음 듣는 말이었다.
“어. 너 동준이한테 밖에 형이라고 안 하잖아.”
“그쵸.”
“그건 왜 그런 건데?”
“다른 선배들한테 갑자기 형이라고 하는 게 더 이상한 거 아니에요?”
“그건 그런데.”
“딱히 선배들도 형이라고 하라는 사람 없던데요? 그래서 그냥 그런 거죠.”
이규영의 표정은 뭔가 오묘했다.
“아무튼 해주는 거죠? 그렇게 알고 있을게요.”
“어. 그래. 해주기로 했으니까.”
뭔가 찝찝하긴 했지만 그렇게 하나 더 해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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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스타전 직전 마지막 1주일.
다음 주에 일주일 동안의 휴식이 보장된 만큼 각 팀은 마지막 1주일을 불태우기 위해 분주하게 준비하고 있었다.
그건 시즌 시작부터 지금까지 단 하루도 1위에서 내려오지 않은 마린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지금까지도 잘 해왔지만, 전반기를 어떻게 마무리하냐도 중요했다.
보통 야구에서 팀 간 3경기 차이를 좁히려면 한 달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다.
현재 마린스와 2위 프렌즈 간의 격차는 8.5경기 차.
후반기는 석 달 정도 진행하니 이론상 두 팀 간의 격차는 후반기에 들어갔을 때 겨우 역전할 만한 격차다.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후반기 마린스가 5할 승률을 기록했을 때의 얘기였다.
마린스가 전반기처럼 7할의 승률을 기록할 경우, 사실상 역전은 불가능했다.
이정훈 감독을 비롯한 마린스 코치진 역시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전반기 마지막에 승차가 좁혀지면 어떻게 될 지 모른다.
코치진이 생각하는 안정권은 10경기 차.
그걸 위해 승부수를 내기로 했다.
“이번 주 라인업은 이대로 간다.”
이규영, 박은성의 테이블세터를 필두로 김수호, 강주호, 오준혁의 클린업 트리오, 잭 미켈, 채지훈, 최치호, 이주학의 하위타선.
한동안 주전들의 체력 관리로 잘 보이지 않았던 마린스의 완전체 라인업이 가동됐다.
투수진 역시 준비를 마쳤다.
화요일 선발은 허하준.
그 말은 허하준이 이번 주에 두 차례 등판이 가능하다는 뜻이었다.
총력전을 선언한 마린스의 첫 번째 상대는 바로 개막전 상대였던 서울 호올스였다.
지난 시즌 꼴등의 수모를 겪으며 이번 시즌 반등을 선언한 호올스였지만 뚜렷한 투자 없이 반등하기란 불가능이었다.
결국 이번 시즌 역시 최하위권에 머물며 사실상 리빌딩에 들어갔다.
마린스와 호올스의 1차전은 예상대로 진행됐다.
강신이를 제외하고 허하준의 공을 제대로 공략하는 타자가 없었고 타선은 넉넉한 점수를 뽑아내면서 마린스가 거의 승기를 잡은 7회 말.
선수단에 때아닌 소란이 일어난 건 바로 그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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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2안타 1볼넷을 기록하며 1번 타자로서 완벽한 모습을 보여준 이규영이 7회 말 시작 전에 더그아웃으로 들어왔다.
이규영뿐만 아니라 김수호, 강주호 등 이미 타석에 네번씩 들어간 선수들은 거의 다 교체가 됐다.
총력전을 선언한 이정훈 감독이었지만, 7회 말 10대 0이라는 스코어는 주전을 전부 빼도 안심할 수 있는 격차였다.
허하준 역시 체력 관리를 위해 6회를 끝으로 마운드에서 내려왔다.
이제 선수가 아닌 관중이 된 이규영이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김수호 옆에 앉았다.
“흐. 땀 봐. 오늘 존나 습하네. 넌 안 덥냐?”
“덥죠. 근데 뭐 어쩌겠어요.”
남들보다 입어야 할 게 더 많은 김수호는 이미 땀으로 범벅된 지 오래였다.
“근데 덥다면서 왜 옆에 앉는 거예요? 옆에 자리도 많구만.”
“내 맘이다.”
“아, 네.”
김수호의 딱딱한 반응에도 이규영이 실실 웃으면서 말했다.
“야.”
“예.”
“야.”
“예.”
“야.”
“왜 자꾸 불러요.”
“그거 해봐.”
“그거요?”
영문 모를 말에 생각하던 김수호가 이내 깨달았는지 어이없는 웃음을 지었다.
“무슨 애도 아니고 그런 걸 해달라 말라 그래요.”
“알겠으니까 한 번 해봐.”
“예. 규영이 형. 됐죠?”
“크, 이거지.”
둘이 있는 곳은 더그아웃 중앙.
응원소리에 시끄럽지만 주변에 있는 선수들은 전부 둘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그때 김수호가 그 말을 내뱉자 더그아웃 분위기가 묘해졌다.
‘형?’
‘방금 수호가 형이라고 했냐?’
그 묘한 분위기를 김수호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선천적으로 눈치 하나만큼은 기가 막히게 타고 난 이규영은 달라진 분위기에 미소를 지었다.
‘이거지.’
이규영이 괜히 형이라고 부르란 말을 한 게 아니었다.
사소하다면 사소한 문제였지만 김수호가 1군에 합류한 지 벌써 1년이 됐다.
그동안 김수호가 호칭을 편하게 부르는 사람은 김동준밖에 없었다.
둘의 인연은 고등학교 때부터였으니 그러려니 했다.
하지만 이규영은 달랐다.
‘형이라고? 수호가?’
‘규영이랑 저렇게 친했나?’
사람 가리지 않고 두루두루 친했던 김수호였지만, 가장 먼저 형이라는 호칭을 쓴 사람이 이규영이라는 사실에 몇몇 선수들이 크게 놀랐다.
사소하다면 사소한 문제다.
하지만 가끔은 그런 사소한 문제 때문에 쓸데없는 분쟁이 생기기도 한다.
이것도 그랬다.
“은성아. 너 동생 있다고 하지 않았냐?”
“어. 그치. 남동생 하나 있어. 수호보다 한 살 어릴걸?”
가장 먼저 움직인 사람은 김호기와 박은성이었다.
김수호가 충분히 들을 수 있는 정도의 거리에서 대화를 나눴다.
“그 정도 나이 차이면 동생이 뭐라 부르냐? 형? 형님?”
“뭔 형님이야. 당연히 은성이 형, 이렇게 부르지.”
“그치? 5년, 6년 차이가 어려운 차이는 아니지 않냐?”
그러면서 슬쩍슬쩍 김수호 눈치를 보는데 김수호는커녕 옆에 있던 이규영만 둘의 대화를 눈치채고 좋아 죽으려고 했다.
반면 정작 당사자인 김수호는 경기에 집중하느라 결국 둘의 작전은 수포로 돌아갔다.
다음으로 움직인 선수는 오준혁.
“수호야. 오늘 스윙 좋더라. 컨디션 좋았나 봐?”
“선배님도 좋으셨습니다.”
깍듯이 차린 예의에 할 말이 없어진 오준혁이 그대로 웃으면서 끝났다.
그 외에도 여러 선수가 김수호에게 형 소리를 듣기 위해 도전했지만, 성공한 선수는 없었다.
‘왜들 이래.’
막상 당사자인 김수호는 갑자기 선배들이 쉴새 없이 말을 걸자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너 진짜 눈치 없다.”
“제가요? 제가 여기서 눈치 제일 빠를걸요?”
그 말에 다시 이규영이 김수호를 때리면서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
‘이 형은 또 왜 이래.’
아무튼 그렇게 다른 선수들이 2차 작전을 짜는 사이 채지훈이 당당하게 김수호에게 걸어갔다.
“마. 수호야.”
“넵.”
“지훈이 행님이라고 해봐라.”
“예? 아, 지훈이 행....”
정공법을 택한 채지훈의 말에 김수호가 당황하면서도 대답하려던 찰나.
“채지훈. 형님은 얼어 죽을 형님. 너랑 얘랑 지금 15살 차이가 넘어. 이 정도면 삼촌이지. 수호야, 지훈이 삼촌 해봐라.”
강주호의 훼방에 채지훈의 작전이 완벽하게 망해버렸다.
“아, 행님. 다 됐는데 와 방해를 하십니꺼!”
“애 그만 괴롭히고 경기 좀 보세요. 우리 막내가 열심히 공 던지고 있는데 선배란 놈들이 경기에 집중도 안 하고 뭐 하냐.”
그 말에 은근슬쩍 눈치를 보고 있던 다른 선수들도 경기 보는 척을 시작했다.
“박우주 화이팅!”
“스트라이크 꽂아버려!”
상황을 정리한 강주호가 김수호 옆에 앉았다.
“근데 19살 차이 정도면 형이라고 해도 괜찮지 않냐?”
그 말에 결국 참지 못해 터져버린 이규영의 웃음소리가 깔끔하게 상황을 정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