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화 가장 빛나는 별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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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스타 투표가 시작됐지만, 겉으로 보이는 마린스 선수단에 특별한 변화는 없었다.
물론 마린스에는 올스타전을 나가본 선수보다 구경만 해본 선수가 훨씬 많았다.
허하준, 강주호, 이규영, 최치호, 오상엽을 제외하면 투표로 뽑혀본 선수가 없었고 감독 추천으로 올스타전 무대를 밟아본 선수가 두어 명 더 있을 뿐이다.
그나마 언급한 다섯 명의 선수 중 뒤에 세 명은 FA 이적 이전의 일이었으니 마린스 출신으로 올스타에 가본 건 허하준과 강주호뿐이었다.
그래서일까, 많은 선수가 지금 이 상황이 그저 얼떨떨하게 느낄 뿐이었다.
“이거 내 이름 맞나?”
“예. 선배님 얼굴까지 정확하네요.”
당연한 말이지만 올스타전에 나가기 싫어하는 선수는 거의 없다.
대학 졸업 후 12년간 프로 생활을 하면서 이런 경험은 처음인 채지훈 역시 얼떨떨한 마음뿐이었다.
입단할 때부터 강주호라는 거대한 그림자가 채지훈을 가리고 있었기에 올스타와 인연이 없거니 하며 살아온 채지훈이었다.
그런 채지훈이 얼마나 못 믿겠으면 만나는 선수마다 올스타 투표 현황을 보여주며 자기가 맞냐고 묻고 있었다.
김수호 역시 채지훈에게 붙잡혔지만 기꺼운 마음으로 채지훈에게 맞춰줬다.
“...수호야. 햄이 야구하면서 꼭 이루고 싶었던 게 몇 개 있다. 아나?”
“뭔데요?”
“주호 햄 우승하기 전에 우승, 조금이라도 좋으니까 FA, 그리고 올스타다.”
“올해 다 이루시겠네요?”
우승은 작년에 했고 올 시즌이 끝나면 FA자격을 얻는다.
FA 선언을 한다고 해도 반드시 계약하는 건 아니지만 강주호 은퇴 후 마땅한 1루수가 없는 마린스로서는 적당한 가격에 채지훈과 계약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채지훈 역시 욕심부릴 생각은 없었고.
이제 남은 건 올스타였는데 무려 서울 호올스의 간판타자 강신이를 앞서고 있었다.
평소였다면 꿈도 못 꿀 기록이었다.
강주호가 없는 동안 이름을 올려도 투표에서 강신이는 커녕 다섯 명의 후보 중 4, 5위에 머무는 게 채지훈이었다.
“다 네 덕이다.”
그런 채지훈이 고민도 하지 않고 김수호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예? 아니에요. 선배님이 잘하셔서 그런 건데 왜 제가 나와요?”
“마. 가끔은 아무 말 없이 알겠다고 하는 거다. 알겠나.”
채지훈이 그렇게 말하자 김수호도 민망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습니다.”
그제야 만족스러운 표정을 한 채지훈이 김수호의 어깨를 두드리고 떠났다.
물론 선수단 투표 합산 후 채지훈이 떨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채지훈은 이미 만족한 상태였다.
평소의 채지훈이었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올스타전에 참가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에 가까웠을 거다.
팀이 잘하고 덩달아 본인도 성적이 올라서 이런 경험이라도 하는 거였다.
설사 나중에 올스타전에 떨어진다고 하더라도 원래 자신의 자리가 아니었을 뿐, 아쉬움은 없었다.
나중에 아직 어린 자식들이 컸을 때 한마디 할 거리가 생긴 거에 만족했다.
‘마! 아빠가 왕년에 드림 올스타 1루수 팬 투표 1위 했던 선수다!’
이렇게 말이다.
물론 모든 선수가 채지훈처럼 쿨한 건 아니다.
마린스 열두 명의 후보 중 가장 투표에 예민한 한 선수가 경기가 끝나자마자 초조한 얼굴로 투표현황을 확인했다.
“후, 어제보다 좁혀졌네.”
한숨을 내쉰 이주학이 핸드폰을 락커에 핸드폰을 던졌다.
이게 얼마나 미련하고 한심한 짓인지 너무 잘 안다.
아마 김수호나 다른 선배들이 알았다면 잔소리를 크게 했을 거다.
하지만 이주학도 할 말은 있었다.
‘나도 내세울 게 있으면 좋겠는데.’
KBO 1위 팀의 21살 주전 유격수.
주전 유격수가 없던 상황도 맞물리긴 했지만, 엄연히 이주학의 힘으로 따낸 자리다.
어디 가서 당당하게 내세울 만한 능력이었다.
다만 그의 기준은 같은 팀의 두 동기와 황인재에게 맞춰져 있었다.
‘김수호나 황인재는 불가능하고 그나마 이호민인데.’
비교해봤자 타자로서 자괴감을 들게 하는 둘은 진즉에 포기한 지 오래였다.
이제 그의 (자칭) 라이벌은 김수호도 황인재도 아닌 이호민이었다.
하지만 이호민도 무려 퍼펙트게임을 기록하며 저 멀리 떠나버렸다.
지금 그의 상황은 전교에서 4등이지만 반에서 3등인 학생과 비슷했다.
어쩔 수 없이 비교 대상이 동기들이 되는 건 이상한 게 아니었다.
그래서 이주학에겐 이번 올스타가 정말 중요했다.
올스타전에 나가서 미스터 올스타라도 따야 나머지를 조금이나마 따라갈 수 있을 것 같았다.
현실은 올스타가 될 거라는 확신도 없었지만.
“후. 오늘 그래도 나름 괜찮았는데.”
4타석 3타수 1안타 1볼넷 1득점.
수비에선 꽤 괜찮은 호수비 하나.
물론 최근 마린스는 저 정도 성적으로 MVP를 받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결승타나 끝내기 같은 임팩트 있는 한방이 있다면 모를까.
“임팩트?”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잠시 고민에 빠졌던 이주학이 갑자기 싱긋 웃었다.
“이럴 땐 김수호지.”
그렇게 이호민은 급하게 김수호를 찾기 위해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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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올스타에 뽑히려면 임팩트 있는 뭔가가 필요하다?”
“그렇지. 다른 팀 팬들이나 선수들이 나를 뽑게 만드는 뭔가가 있어야지.”
처음엔 뭔가 허무맹랑한 소리를 하나 싶었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틀린 말은 아니었다.
가만히 투표 결과를 지켜보는 게 아니라 능동적으로 뭔가를 하겠다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근데 그걸 왜 또 나한테 얘기하는 건데?”
“왜냐니? 임팩트하면 김수호고, 김수호 하면 임팩트 아니겠냐? 나 좀 도와줘.”
“근데 딱히 생각나는 게 없는데?”
“진짜 없어?”
흠. 야구에서 임팩트 있는 거라면 역시 끝내기 홈런이다.
아니면 무사 만루에서 KKK로 이닝을 끝내는 장면도 꽤 임팩트 있는 장면이다.
하지만 이주학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장면이다.
이주학은 거포도 아니고 투수도 아니다.
저런 거 말고 이주학만이 할 수 있는 그런 게 필요한데.
진지하게 같이 고민한 결과 하나가 나오긴 했다.
“근데 이게 될까?”
“음. 글쎄?”
이주학이 내세울 수 있는 것, 단번에 사람들의 시선을 확 사로잡을 수 있는 무언가.
“일단 나쁘지 않은 거 같으니까 준비해볼게.”
“진짜? 고마워!”
“근데 알지? 이거 좀 도박이다.”
“어. 알지. 괜찮아. 할 수 있어.”
이주학이 확신 어린 말을 내뱉었다.
“대신 실책 하나 하는 순간 끝이다.”
“오케이.”
우리가 세운 계획은 바로 타구를 최대한 이주학 방면으로 보낸다는 거였다.
타구 방향을 정하는 게 당연히 마음처럼 되는 건 아니다.
심지어 이건 내 타구도 아니고 상대 타자들의 방향이다.
그래도 할만하다 생각이 드는 게 일단 내일 선발이 허하준이다.
어느 코스든 망설임 없이 공을 꽂는 투수인 만큼 문제없었다.
만약 일이 발생했을 때 수습도 가능했고.
물론 이런 이유만으로 수락한 건 아니었다.
최근 허하준의 경기에서 볼 배합의 변화를 주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허하준이라고 무조건 무실점, 9이닝을 던지는 건 아니라 체력 관리할 때가 됐다.
이럴 때 볼 배합에 변화를 주면 꽤 좋은 효과가 있지 않을까.
그래도 허하준의 동의 없이 할 순 없으니 다음 날 허하준을 찾아가서 물어봤다.
“재밌겠는데?”
얘기를 들은 허하준이 고민 없이 수락했다.
이걸로 해결될 건 다 했고.
“아오. 괜히 한다고 했네.”
이제 내가 고생할 일만 남았다.
오늘 상대할 나이츠 타자들의 분석은 거의 다 돼서 그걸 바탕으로 볼 배합만 바꾸면 됐다.
대략적인 틀만 짜고 나머진 즉흥적으로.
그래도 당일에 할 만한 일은 아니었다.
진짜 실책 한 번이라도 하기만 해봐.
괜히 이주학을 노려봤지만, 경기 시작 전부터 이를 악물고 펑고를 하는 중이라 내 시선은 눈치채지 못한 듯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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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격수 방면으로 타구를 유도하는 이론은 간단하다.
우타자는 당겨치게 만들면 되고 좌타자는 밀어 치게 만들면 된다.
말은 쉽지만 그걸 실행에 옮기는 건 굉장히 까다롭다.
일단 타자들의 성향에 대해 전부 알아야 했다.
당겨치기와 밀어치기 중 뭘 주로 사용하는지, 또 주자가 있을 때와 없을 때 어떻게 달라지는지 기타 등등.
그래도 노력 대비 나름 마음에 드는 결과물이 나왔다.
나이츠의 1번 타자인 최재우는 빠른 발을 가진 좌타자.
딱히 유도하지 않아도 바깥쪽 공을 밀어 치는 타자다.
워낙 공을 맞히는 데 꽤 강점이 있는 선수라 주로 몸쪽을 요구하다 결정구로 체인지업 같은 오프스피드 피치를 쓴다.
하지만 오늘은 초구부터 바깥쪽으로 공을 던지니 곧바로 방망이가 나왔다.
-딱!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이주학이 있는 방향으로 가는 타구.
몸을 날려봤지만, 타구의 질이 너무 좋았다.
3유간을 빠져나가면서 안타.
이주학이 내 쪽을 보는 시선이 느껴져서 일부러 쳐다보지 않았다.
벌써 저렇게 눈치 보는 걸 보니 무리인 것 같은데.
슬쩍 이주학을 살피고 있으니 다음 타자 최건우가 타석에 들어섰다.
최건우는 그냥 잘 치는 타자다.
타구 방향이 좌측, 중간, 우측의 비율이 균일하게 나올 만큼 밀어 치든 당겨치든 원하는 공이 오면 방망이가 나온다.
거기에 팀 배팅도, 한 방도 노릴 수 있는 까다로운 타자였다.
이런 선수를 상대로 초반부터 모험을 거는 건 그다지 내키지 않았다.
‘어?’
하지만 사인을 내자 허하준이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내가 낸 사인은 좌타자인 최건우의 몸쪽, 하지만 허하준은 바깥쪽을 원했다.
‘괜히 얘기했나.’
결국 이주학을 믿겠다는 뜻.
뭐 모든 타구가 다 정타가 되는 것도 아니고 전부 이주학 쪽으로 가는 것도 아니다.
볼 배합은 어디까지나 그 확률을 높이는 것이지 정확한 건 바빕신만 안다.
허하준이 원하는 대로 바깥쪽, 구종은 체인지업.
“스트라이크!”
초구는 전혀 생각 못했는지 공과 꽤 차이 나는 스윙이 나왔다.
“이러기야?”
“저희는 기러긴데요.”
내 말에 잠시 멈칫한 최건우가 이내 한 마디를 툭 뱉었다.
“너도 못 하는 게 있구나. 다행이다. 이제 좀 사람 같네.”
어쩐지 자존심 상하는 말이다.
“나중에 은퇴해서 자서전 쓸 때 김수호가 이런 개그 쳤다고 적어야겠다.”
장난 한번 쳤다가 자서전에 박제가 된다고?
“저 이제 아무 말도 안 합니다.”
선전포고를 한 최건우에게 대화 단절 선언 후 공 받을 준비를 했다.
이번에도 코스는 바깥쪽, 구종은 빠른 포심.
-딱!
이번에도 날카로운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이주학은 또다시 몸을 날렸다.
“아웃!”
“아웃!”
“오. 좋은데?”
날카로운 강습타구에 바운드를 잘 맞춘 이주학이 병살타를 만들어냈다.
워낙 빠른 타구라 빠른 주자 두 명도 방법이 없었다.
확실히 작년이라면 단번에 포구 못할 타구였는데 겨우내 흘린 땀이 헛되진 않은 것 같아 내가 더 기분이 좋았다.
이후 페르난도 알론소까지 삼진 처리하며 3명으로 이닝을 끝마쳤다.
“후. 어땠냐? 좀 임팩트 있었어?”
“좋았지. 첫 번짼 좀 그랬는데 그래도 두 번째건 잘 잡았더라?”
내가 사인을 바꿨다는 걸 아는 허하준이 우리 대화를 듣더니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지만, 이주학은 결과만 알면 된다.
“다음에도 부탁해.”
“그게 내 맘대로 되는 게 아니라니까.”
이후 이닝을 거듭할수록 이주학의 유니폼에 흙 얼룩들이 하나둘씩 늘어났다.
나도 이게 될 줄은 몰랐는데 되네.
“아웃!”
7회에도 어려운 라인드라이브 강습 타구를 단번에 잡으면서 쓰리 아웃을 완성한 이주학이 뭐라 중얼거리면서 들어오는 게 보였다.
그걸 발견한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너네 어제 뭐 짰냐?”
“네?”
“쟤 오늘 하루 종일 뭐라 뭐라 중얼거리던데? 뭔데?”
바로 옆에서 수비를 하는 만큼 이주학을 잘 챙겨주는 최치호의 말에 그냥 웃을 수밖에 없었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그러는 사이 이주학이 방망이를 열심히 휘두르고 있었다.
스코어는 2대1로 1점 차 리드.
때마침 8회 초 선두타자는 이주학이였다.
계속 중얼거리면서 휘두르길래 몰래 들으려고 가까이 붙었다.
“후. 홈런. 후. 홈런.”
점수 차가 1점밖에 안 나는 상황에서 선두타자 홈런은 확실한 임팩트를 줄 수 있었다.
“볼!”
이주학 타석의 결과는 볼넷.
홈런은 아니지만 귀중한 출루에 성공했다.
그리고 이규영과 박은성이 진루타를 치면서 2사 주자 3루.
-따악
이제 기회가 나한테 왔다.
타석에 들어서서 초구 변화구를 가볍게 밀어 쳐 타구가 내야를 뚫자 이주학이 홈으로 들어왔다.
이어서 8회 이용기, 9회 오상엽이 이닝을 삭제하면서 그대로 경기 끝.
그날 밤, 이주학이 내 방에 쳐들어왔다.
들어오자마자 화면을 보여주더니 대성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가볍게 휘둘러 도망가는 점수를 낸 김수호, 클러치 상황에 강한 능력 선보여.]
“왜 내가 주인공이 아닌데!”
괜시리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주학에 관한 기사도 뜨긴 했다.
근데 정작 메인에 걸린 게 내 기사였다.
“잘난 놈만 더 띄어주는 세상!”
울부짖는 이주학은 다음 날이 돼서야 진정했다.
어제 죽어라 뛴 게 효과가 있었는지 투표수가 다시 벌어진 모양이었다.
“김수호님. 한 번만 더 부탁드립니다.”
“꺼져.”
“아, 한 번만 더! 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