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오늘은 000날, 우리들 세상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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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과 비교해서 이 시기에 팀이 가장 달라진 점을 꼽자면 역시 선발진이다.
작년 이맘때쯤 허하준도 부상이라 없었고 이호민은 나랑 같이 2군, 웰링턴과 김호기는 겨우 5이닝 정도 소화하는 것에 그쳤다.
뉴스를 들어가면 패배 소식과 분노한 팬들이 허하준을 찾는 댓글만 있었으니 분위기가 어떨지 짐작됐다.
결국 지금 있는 다섯 선발 중 그나마 선발처럼 던져준 선수는 하스 뿐이었던 걸로 안다.
사실 작년 하반기에 그렇게 치고 올라갈 수 있었던 것도 초중반에 하스가 중심을 잡아주면서 끝까지 무너지지 않은 덕분이었다.
반면 이번 시즌 하스의 출발은 그리 좋진 않았다.
연승이 끊긴 것도 하스의 등판이었고 중간에 큰 위기가 있었던 에이스 전도 하스가 선발이었던 경기였다.
세 경기에서 퀄리티스타트는 한 번.
사실 하스의 성적은 작년과 비교해도 크게 나빠진 기록은 아니었다.
다만 다른 네 명의 성적 변화가 너무 극적이었다.
허하준은 말할 것도 없고 웰링턴도 개막 이후 무려 세 경기 연속 퀄리티스타트 플러스(7이닝 3자책 이하)를 기록했다.
김호기도 꾸준한 피칭을 보여주고 있고 이호민은 무려 퍼펙트게임을 기록했다.
이렇게 다른 선발들은 눈에 띄는 변화가 있지만 하스는 그다지 변한 게 없으니 하스가 눈에 딱 들어왔다.
거기에 선발 중 유일하게 내가 아닌 김성준과 호흡을 맞추는 선수기도 했고.
그만큼 아쉬운 점도 있을 테지만 하스는 의연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이것도 레타쿠의 뜻이다.”
오늘 경기도 나 대신 김성준이 포수마스크를 낀다.
그나마 다행인 건 라인업에는 이름을 올렸다.
SP 요그 하스
1. 박은성 CF
2. 최치호 2B
3. 김수호 DH
4. 오준혁 3B
5. 잭 미켈 RF
6. 채지훈 1B
7. 이민상 SS
8. 이준 LF
9. 김성준 C
기존 라인업에서 이규영과 강주호, 이주학이 빠지고 이준과 김성준, 이민상이 들어왔다.
무려 세 타자가 바뀐 라인업이었지만, 딱히 어색함이 느껴지는 부분은 없었다.
내 이름 대신 강주호만 넣고 타순만 바꾸면 작년 주전 라인업이랑 거의 비슷했으니까.
팬들의 반응은 극명하게 갈렸다.
뎁스가 좋아진 거라는 파와 아무리 그래도 너무 다 뺀 건 아니냐는 파.
아무튼 이게 하스만이 가지고 있는 엄청난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주변 환경이 어떻게 변화하든 간에 자신의 공을 뿌릴 수 있는 능력.
비록 1회부터 실점하면서 안 좋은 출발을 했지만 이후 타자들을 잘 잡아내면서 경기를 이끌어갔다.
그렇게 내 두 번째 타석이 돌아왔다.
2대1로 한 점 차로 추격하는 3회 말.
타석에 들어선 내 눈에 2루타를 치고 나간 최치호가 보였다.
2사인 만큼 단타에도 동점을 만들기 충분한 상황.
-따아악!
2-2의 카운트에서 프렌즈 배터리가 선택한 공을 정확히 때려냈다.
만원 관중이 열광하는 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홈으로 들어오자 먼저 홈에 들어왔던 최치호가 손을 내밀었다.
“나이스! 아, 역시 네가 뒤에 있으면 든든하단 말이야? 네 동기도 너처럼 만들어주면 안 되냐?”
주로 들어가던 타석이 2번에서 7번, 8번으로 바뀐 최치호가 볼멘소리를 했다.
저렇게 말해도 우리 팀에서 이주학을 챙기는 건 최치호가 최고였다.
정작 이주학 본인은 맨날 갈군다면서 싫어했지만.
“그게 됐으면 당장 했죠.”
“그건 맞지.”
아무튼 점수는 단번에 역전.
몸을 풀기 위해 더그아웃 밖에 나와 있던 하스가 가장 먼저 반겨줬다.
“멋진 스윙, 레타쿠께서 좋아하시겠군. 멋있었다.”
“하스는 어떤데요?”
잠시 고민하던 하스가 나지막하게 내뱉었다.
“끝내주는군.”
그 말을 한 사람이 하스라 그런지 내가 들었던 말 중에 최고의 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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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런 이후 하스가 오랜만에 6이닝 2실점으로 퀄리티스타트를 기록하면서 좋은 피칭을 선보였다.
이후 김동준, 이용기, 오상엽의 필승조가 3이닝을 무실점으로 틀어막으면서 4대2 승리.
다음 날 경기는 지긴 했지만, 2위 프렌즈를 위닝시리즈를 거둔 건 좋은 성과였다.
그 이후로 일주일이 더 흘렀다.
4월의 마지막 주, 나이츠와 챌린저스의 원정 경기에서 3승 3패를 따내며 기분 좋은 4월을 마쳤다.
19승 6패라는 어마어마한 승률을 기록하면서 단독 1위.
2위 프렌즈와는 4.5경기 차를 유지했다.
여기까지만 해도 기분이 좋은데 기쁜 일이 연이어 찾아왔다.
4월 MVP 후보에 나와 허하준이 나란히 이름을 올린 것.
그 외에도 황인재, 잭 랜들, 김규완 등이 이름을 올렸지만, 우리 둘 중에 뽑히는 게 당연시됐다.
그도 그럴 것이 허하준은 4월 한 달 동안 5경기 1완봉승 포함 37이닝 3자책으로 5승 ERA 0,71을 기록했다.
나도 23경기에 나와서 8홈런 0.400/0.504/0.770을 기록했고.
누가 받아도 이상하지 않았고, 사실 작년 후반기에도 이런 일이 자주 있던 터라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냥 둘 중 상을 탄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밥 한번 사는 정도?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올 시즌 처음 겪는 연패.
챌린저스에 1차전은 따냈지만 2, 3차전을 내주면서 첫 루징시리즈이자 첫 연패에 빠졌다.
사실 연패라고 해봤자 2연패에 불과하고 4월을 겪으면서 이미 자신감은 붙을 대로 붙은 상태라 크게 걱정하진 않았다.
문제는 5월의 그날이 다가온다는 거였다.
“이번에도 만원이겠지?”
“주중에도 2만 명 넘게 오는데 무조건이지. 하, 어떡하냐.”
성적이 좋아지면서 자동으로 따라온 만원 관중.
이젠 익숙해져서 긴장 대신 즐기는 단계에 돌입했지만, 어쩐지 선배들 반응이 이상했다.
“왜 그러세요?”
심각한 표정으로 달력을 보던 김호기와 박은성이 내 얼굴을 보더니 말했다.
“그날이 오잖아.”
“그날이요?”
“너 모르냐?”
대체 뭔 얘기를 하길래 조심스럽게 뜬구름 잡는 대답만 하는지 답답하던 찰나 박은성이 팔꿈치로 김호기의 옆구리를 툭툭 찔렀다.
그제야 김호기가 아주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어린이날.”
“예? 어린이날이요?”
“얀마! 조용히 말해.”
이게 조용히 말할 이유라도 있나 싶었지만, 김호기의 심각한 표정을 보자 눈치껏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어린이날이 왜요?”
“너 진짜 몰라? 어린이날 우리 팀 승률.”
“알죠. 최근 10년간 전패.”
“스읍. 입 조심해.”
신경을 안 쓰려야 안 쓸 수 없는 기록이긴 했다.
어떻게 같은 날에 10년 동안 전부 질 수 있는 걸까.
심지어 작년엔 5대0으로 이기고 있다 9회 말에 끝내기 만루 홈런을 맞고 진 걸로 알고 있다.
“우리 목요일 선발이 누구지? 웰링턴인가?”
“예. 오늘 호민이, 내일 하준 선배, 그리고 웰링턴이죠.”
“후. 다행이네.”
어린이날 선발로 예정된 선수는 웰링턴.
이미 저번 등판부터 일찌감치 엘리에게 최고의 어린이날을 선물하겠다는 다짐을 하고 있다.
근데 엘리는 이제 두 살인데 두 살도 어린인가?
아무튼 김호기는 심각한 얼굴로 얘기를 이어갔다.
“네가 몰라서 그러는데 어린이날만 되면 별의별 해괴한 일이 다 일어나. 작년엔 누구야, 이용기 선배가 씻고 나오다 아들이 흘린 장난감 밟고 일주일 빠졌잖아.”
“재작년엔 치호 선배도 강아지 산책시키다 다리 삐었지?”
음, 내 생각엔 호들갑 떠는 게 더 문제를 키우는 것 같은데....
아무튼 이런 생각을 하는 것도 이해가 안 되진 않는다.
워낙 미신에 약한 야구 선수들이기도 했고 저렇게 특정한 날에 안 좋은 일이 반복되면 더 그럴 만했다.
“아무튼 어디 가서 어린이날 얘기 함부로 하지 마라. 무조건 조심해야 해.”
“우리니까 이렇게 말해주는 거지 다른 선배들이었으면 말도 못 했어.”
“아, 네네. 알겠습니다.”
“쟤 표정 봐라. 백 퍼 못 믿는 표정인데?”
“우린 경고 했다?”
두 사람이 살벌한 경고를 날리며 비밀(?)회담은 끝이 났다.
솔직히 말해서 두 사람 말을 못 믿은 것도 있고 다른 사람들은 반응이 어떨지 궁금하기도 했다.
그래서 만나는 사람마다 물어봤는데.
“선배님 혹시 어린이날···.”
“어, 나 잠깐 전화 좀!”
“코치님. 어린이날....”
“네, 감독님. 네네. 지금 가겠습니다.”
“저....”
“예! 갑니다!”
...뭐지?
그새 소문이 퍼졌는지 이젠 내가 말만 걸면 도망가기 바빴다.
그나마 미신을 안 믿는 최치호, 강기호, 이용기한테 말을 걸었는데 전부 어린이날의 ‘어’만 나와도 내 눈앞에서 사라졌다.
결국 이번에 이적해온 이규영과 오상엽, 신인이라 나처럼 잘 모르는 박우주, 그리고 외국인 세 명과 허하준을 제외하면 모두가 어린이날을 극도로 의식하고 있었다.
이호민 역시 어느새 그 소리를 들었는지 나를 피해 다녔다.
이 정도면 좀 무서운데?
일단 경기는 치러야 하니까 오늘 선발 투수인 이호민을 찾아갔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도망갈 준비를 하길래 급하게 뛰어가서 어깨를 잡았다.
“흐억!!! 놔! 놔!”
“아오, 뭘 들었길래 그렇게 도망치려고 하냐. 진정 좀 해라.”
“나도 들었어! 너처럼 아무렇지 않은 사람이 그날 어떤 성적을 기록하는지!”
“후, 골이야. 시끄럽고 그 얘기 아니니까 호들갑 좀 떨지 마.”
“...진짜?”
“어. 진짜.”
그 무섭다는 웰시코기도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침을 꿀꺽 삼킨 이호민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럼 무슨 얘긴데?”
“오늘 선발인 놈한테 뭔 얘기를 하겠냐. 당연히 오늘 경기 얘기지.”
“아, 그렇지. 어. 말해.”
겨우 진정한 이호민한테 오늘 경기를 어떻게 풀어갈지 얘기하고 짧은 대화를 마쳤다.
“그래서 어리....”
“으악! 살려줘!”
아, 진짜 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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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날이 포함된 대구 에이스와의 3연전.
이론(?)상 어린이날은 패배하니 반드시 두 경기를 잡아서 위닝시리즈를 확보해야 했다.
다행히 이호민은 저번 등판부터 제 컨디션을 찾은 상태.
“후, 오늘 육회도 맛있었다.”
저번 배탈 퍼펙트게임 이후 등판 전 육회를 먹는(저번 퍼펙트게임 때 배탈 난 원인이 육회였다) 이상한 루틴이 생기긴 했지만, 멘탈도 경기의 일부분이다.
당연히 도움이 된다면 육회가 아니라 생고기라도 씹어 먹는 게 좋다.
사직에서 열린 에이스와의 시즌 4차전.
지난 스윕패를 설욕하기 위한 에이스의 의지가 라인업에서 묻어나왔다.
이호민을 상대로 9명의 타자 중 7명이 좌타자인 타선.
거기에 선발 투수는 에이스 제이든 스미스가 등판했다.
어쩐지 1선발과 자주 만나는 이호민이었지만.
“오히려 좋아.”
지난 퍼펙트게임의 기억을 되살리며 기뻐하는 중이었다.
아무튼 에이스는 현재 중하위권에서 피닉스, 스타즈, 울프즈, 돌핀스 등과 촘촘히 붙어 있는 상황.
한 경기 한 경기가 순위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
즉, 오늘 경기에 임하는 각오가 남다를 수밖에 없다.
그래도 우리 역시 어린이날을 생각해서라도 반드시 잡아야 하는 경기.
경기는 초반부터 팽팽하게 흘러갔다.
양 팀 선발 투수들의 호투를 바탕으로 1대1 팽팽한 균형을 유지하던 4회 말.
“오. 쟤 겁나 귀엽다.”
전광판을 보던 이주학의 한 마디에 선수들의 눈이 전광판에 쏠렸다.
제 나이다운 통통한 볼살, 시선을 집중시키는 똘망똘망한 눈동자, 그리고 앙증맞은 손까지.
누가 봐도 귀엽다는 말이 먼저 나올 것 같은 어린애가 전광판에 잡혔다.
그 곁엔 형으로 보이는 조그만 꼬마와 부모님이 함께 있었다.
“저 정도면 몇 살일까?”
“한 다섯 살 정도 되지 않을까요?”
“아냐. 우리 애가 지금 다섯 살인데 쟤보다 더 작아. 한 네 살?”
저마다 추측하는 와중에 이주학이 한마디 했다.
“저 정도면 어린이겠죠? 어린이날에 오려나···.”
그 순간 짠 것처럼 말이 없어진 선수들.
어린이날에 얽힌 얘기를 모르는 듯한 이주학이 당황해하며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 나와 눈이 마주치자 슬금슬금 내 쪽으로 다가왔다.
“나 뭐 잘못했냐?”
반응을 보니까 어린이날을 언급하는 게 얼마나 큰일인지 모르나 본데.
“어. 아주 큰 잘못.”
너 이제 큰일 났다.
이주학의 표정이 하얗게 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