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뉴 페이스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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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즌 첫 경기에서 에이스가 완벽투를 던지고 타선은 폭발했다.
감독으로선 이보다 좋은 상황은 없었다.
개막 2연전 중 두 번째 경기에 모든 전력을 쏟을 수 있는 상황이 마련됐다.
하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스트라이크 아웃!”
지난 시즌 부진을 딛고 후반기 거짓말처럼 날아오른 브릭 웰링턴이 압도적인 피칭으로 호올스 타자들을 요리했다.
허하준이 150km 중반까지 나오는 빠른 포심을 중심으로 스플리터, 투심 등 수준 높은 변화구를 사용해 타자의 머리를 흔들어 놓는다면 웰링턴의 무기는 단 2개였다.
“공이 생각보다 너무 빨리 와요.”
포심에 땅볼을 친 호올스 타자가 대기 타석에 선 타자에게 한 말처럼 웰링턴의 공은 다른 투수보다 체감 속도가 남달랐다.
2m가 넘는 릴리스포인트 (투수가 공을 놓는 지점).
그리고 평균 140km 후반에 형성되는 빠른 공과 흔히 12 to 6 라고 불리는 커브.
고질적인 문제였던 제구가 어느 정도 해결된 웰링턴은 자신의 역할을 완벽하게 완수했다.
7과 2/3이닝 3피안타 2볼넷 무실점 8k.
이미 타선은 5점을 낸 상황.
필승조를 아낄 수 있었지만, 이정훈 감독은 점검차 먼저 김동준을 올렸다.
만원 관중 앞에서 이번 시리즈 세 번째 투수로 마운드에선 김동준이 김수호의 미트를 빤히 쳐다봤다.
‘수호가 고생했지.’
야구를 처음 시작할 때부터 구속은 잘 안 나와도 제구엔 꽤 자신 있었다.
하지만 이번 겨울, 처음으로 마음대로 안 되는 제구에 마음고생을 많이 했다.
그때 훈련이 끝난 밤에도 자신의 공을 받아주며 같이 문제점을 고쳐나간 게 바로 김수호였다.
이미 은인이라 해도 모자람이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마운드에선 누구보다 든든한 배터리기도 했다.
웰링턴이 마지막 타자에게 볼넷을 주고 내려가 2사 주자 1루 상황.
김수호가 초구에 몸쪽 커터 사인을 냈다.
상대는 호올스의 강타자 중 한 명인 2번 타자 소윤재.
작년 전역 직후 김수호가 저런 사인을 냈다면 기겁하고 고개를 흔들었겠지만, 이제는 큰 신경을 쓰지 않는다.
‘형 공은 저라도 쉽게 못 쳐요.’
오늘도 2안타를 친 걸 생각하면 그다지 믿음은 가지 않지만, 김수호가 해줬던 말을 떠올리며 사인대로 공을 던졌다.
포심처럼 날아간 공이 홈플레이트 직전에서 좌타자 몸쪽으로 꺾여 들어갔다.
-딱!
빗맞은 타구가 2루수 방향으로 흘렀고 대수비를 들어온 이민상이 잡아서 1루로 송구했다.
“아웃!”
공 1개로 이닝을 마무리한 김동준에게 김수호가 웃으면서 다가왔다.
“타자 봤어요? 손 만지면서 뛰는 거. 제대로 빗맞았던데 아마 충격이 꽤 오래갈걸요? 진짜 이 근육이 괜히 있는 게 아니라니까요.”
“고맙다.”
“예? 뭐가요?”
“아니, 그냥.”
“동준이 공 좋네! 한 타자 공 한 개면 세 타자면 공 3개 아니냐?”
“크, 27개 완봉 페이스 좋았습니다!”
김수호는 더 물어보고 싶었지만, 환호하는 더그아웃 선수들에 밀려 물어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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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프링캠프에서 오상엽에게 마린스에 오게 된 이유를 물어본 적 있었다.
이규영이야 옵트아웃이라는 조건이 걸렸으니 그럴 만했지만, 오상엽은 이미 돌핀스에서 FA를 보낸 적이 있는 투수다.
데뷔부터 지금까지 장장 10년 넘는 세월을 한 팀에서 뛴 선수가 돈 때문에 구단을 옮길 것 같진 않았다.
“돈을 더 많이 주더라고?”
“예?”
“농담이야.”
오상엽이 농담을 하는 건 처음 봤다.
아무튼 당황해하는 내 모습이 마음에 드는지 몇 번 웃더니 이내 진짜 이유를 말해줬다.
“마린스가 돈도 돌핀스보다 더 주긴 했지. 근데 그것보다 새로운 도전이 하고 싶었어. 돌핀스에서 우승도 여러 번 해봤고 그 팀에서 해볼 만한 건 다 이룬 느낌이 들더라고? 일본이나 메이저도 생각 해봤는데 그때 마린스에서 제안이 오더라고.”
“그게 다예요? 다른 팀에선 제안 안 왔어요?”
“오긴 했지. 근데 규영이도 마린스로 갔고 집도 가깝고, 아는 사람도 꽤 있으니까 마린스로 온 거지. 때마침 너도 있었고. 너랑도 같이 해보고 싶었거든. 우리 올림픽 때 꽤 잘 맞았잖냐?”
“그건 그렇죠.”
“네가 첫 FA로 돌핀스로 온다고 쳐도 그때면 난 은퇴해야 해. 그럴 바엔 내가 가는 게 낫겠다, 돈도 더 주겠다. 그래서 왔지. 왜, 싫냐?”
“아뇨. 선배님이 오셔서 엄청 든든하죠.”
“그런 의미에서 공이나 한번 던질까?”
오상엽은 팀에 빠르게 적응했다.
오상엽 성격상 먼저 다가가진 않았지만, 베테랑이라고 부를 만한 투수가 이용기뿐인 우리 팀에 오상엽의 합류는 젊은 투수들에게 큰 도움이 됐다.
언젠가 스프링캠프에서 오상엽이 투수들을 모아놓고 한 강의를 도와준 적이 있었다.
“자. 야구는 쉽게 말하면 기세다. 기세. 너네들이 컨디션이 좋든 안 좋든, 준비됐든 안 됐든 상관없이 마운드에 오른 순간 할 일은 정해져 있어. 아웃카운트를 잡는 거. 간단하지?”
그러면서 손가락을 세 개 펼쳤다.
“이 세 개.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이닝을 끝내려면 세 개의 아웃카운트를 잡아야 한다. 그럼 이걸 어떻게 잡냐. 기세. 기세로 잡는 거야. 예를 들어서 수호가 타석에 있다고 생각해봐. 이호민, 어떡할 거야.”
잠시 고민하던 이호민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정면 승부하겠습니다.”
“다른 타자라면 그게 맞지.”
그러면서 오상엽이 나를 쳐다봤다.
“얘는 그러면 안 돼. 미쳤냐? 얘는 그냥 미친놈이야. 얘랑 정면 승부를 할 이유가 없지. 기세란 게 정면 승부를 말하는 게 아니야. 내가 이길 수 있는 환경, 타자, 조건을 만들어놓고 타자를 거기로 끌어드리고 쓱.”
오상엽이 말을 잠시 멈추고 손으로 목을 그었다.
“근데 얘는 목에 칼을 겨누면 그걸 씹어먹을 놈이야. 그러니까 너네가 하준이만큼 던지는 게 아니면 얘는 피해라. 뭐, 다른 팀으로 만날 일이 있기야 하겠냐만.”
오상엽이 상황을 환기하기 위해 박수를 두어 번 치면서 말을 이었다.
“알겠지? 근데 얘만 아니면 다른 타자들은 상대해도 괜찮다. 홈런 맞아도 뭐 어때. 물론 팬들이 죽일 듯이 쏘아붙이겠지. 나도 많이 당해봤다. 나 봐라. 안 죽고 여기 있잖냐. 내가 저번 한국시리즈에서 아오. 됐다. 얄미운 새끼.”
“저도 기세를 살린 것뿐입니다.”
“알아 인마. 아무튼 그런 의미에서 너네는 복 받았지. 수호랑 같은 팀이잖아. 얘랑 상대할 일도 없지, 홈런 뻥뻥 쳐주지, 잘못 던져도 다 받아주지, 떨어지는 공 다 블로킹해 주지, 거기에 주자가 뛰면 잡아주지. 우리가 할 건 공을 던지는 거밖에 없어. 나머진 다 얘가 해줄 거니까.”
그렇게 강의는 마지막에 내 얼굴에 금칠하면서 끝났다.
아무튼 기세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가 오상엽이 한 말의 의미와 약간 다를 수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동의한다.
야구는 기세다.
그걸 오상엽이 오늘 경기에서 제대로 증명했다.
마지막 공격을 중심타선부터 시작한 호올스의 타선.
이틀 동안 우리 투수들에게 막혀 1점도 내지 못한 호올스 타선은 9회 초에 등판한 오상엽의 기세에 잡아먹혔다.
누구 하나 제대로 된 스윙을 가져가는 선수가 없었다.
어서 빨리 이곳에서 도망가고 싶다는 마음인지 헛스윙하기 일쑤였다.
“스트라이크 아웃!”
“아웃!”
삼진과 뜬공으로 2아웃.
“스트라이크 아웃!”
그리고 마지막은 그대로 지켜보며 루킹삼진으로 마무리했다.
“오상엽! 오상엽! 오상엽!”
비록 세이브 상황은 아니었지만, 오상엽의 첫 사직 데뷔는 완벽하게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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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은 순항 중이었다.
개막 2연전을 연승을 거뒀고, 호올스에 이어 사직으로 온 울프즈에게도 첫 경기에 승리하며 기분 좋게 시작했다.
하스는 6이닝 2실점 하면서 퀄리티스타트를 기록했고 남은 세 이닝은 김동준, 이용기, 오상엽이 깔끔하게 틀어막았다.
나도 나쁘지 않았다.
4타석 2타수 1안타 1볼넷과 희생 플라이를 치면서 1타점을 기록했다.
다음 경기 선발은 김호기, 울프즈는 우민준을 예고했다.
두 사이드암 투수의 대결인 만큼 우리 팀의 달리기 선수들인 이규영과 박은성, 이주학이 한데 모여 몸을 풀고 있었다.
무슨 얘기 하나 궁금해서 가까이 가서 들어보니 포수로서 듣기에 어처구니없는 얘기를 하고 있었다.
“야, 당연히 도루는 하면 안 되지. 네 동기랑 똑같아. 호기 걔도 상대할 때 도루하면 오히려 편하게 던진다니까? 그냥 1루에서 살살 약 올리면 알아서 볼넷 줘.”
“그래도 이럴 때 뛰어야죠. 선배가 도루는 타점이라면서요. 주학이한테 하는 얘기 다 들었습니다. 그치?”
“저번에 그렇게 말씀하시긴 했죠.”
“하. 답답하네. 그건 경우가 다르지. 그리고 우민준 쟤는 공이 빨라서 너네 타이밍 잘못 잡으면 바로 잡힌다?”
누구는 김호기 선발 때 주자가 나가면 머리가 복잡한데 이런 얘기를 하고 있었구먼?
그때 이규영이 날 발견했는지 손짓했다.
“야. 수호야 이리 와봐. 네가 말해봐. 호기가 선발일 때 내가 뛰는 게 낫냐, 아니면 1루에서 있는 게 낫냐.”
“전 당연히 뛰는 게 낫죠. 제가 선배 잡은 것만 해도 몇 번인데.”
“에라이. 꺼져.”
부를 땐 언제고 다시 손을 저으며 돌려보내려고 했다.
그 행동에 솔직하게 말했다.
“호기 선배가 선발이면 안 뛰는 게 더 껄끄럽죠.”
“거봐. 내 말이 맞다니까?”
의기양양해 하는 이규영을 보니 생각난 게 있었다.
“그러고 보니까 선배 요즘 잘 안 뛰잖아요. 1루에서 투수 견제하느라 그래요?”
세 경기에서 이규영의 도루는 0개.
출루를 못 했으면 모를까 그것도 아니고, 심심하면 도루왕 타이틀을 훔치는 이규영답지 않은 성적이었다.
“아, 이래서 야알못들이랑 얘기하기 힘들어. 얌마, 내가 안 뛰는 거지 못 뛰는 거냐. 내가 계속 얘기하지만 도루의 완성은 안 뛰는 거야. 아, 안 되겠다. 오늘 내가 도루가 뭔지 제대로 보여줄 테니까 똑똑히 봐라.”
“기대하겠습니다.”
오늘 경기 볼거리가 늘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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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야구의 대도의 계보가 있다면 당대 대도는 단연코 이규영일 것이다.
프로 생활 9년 동안 무려 371개의 도루를 기록한 이규영은 올 시즌 400도루 돌파가 유력했다.
그런 이규영이 최근 뛰지 않는 이유는 간단했다.
뛸 이유가 없으니까.
후속 타자로 출전하는 박은성이 느린 주자도 아니고 어지간한 땅볼에 병살을 만들어내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거기에 김수호, 강주호, 오준혁 등 장타를 뻥뻥 치는 중심타선이 있는데 굳이 무리해서 뛸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김수호가 한 말이 이규영의 대도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하. 생각할수록 열받네.’
이규영이 생각했을 때 본인의 가치는 도루 성공이 아닌 실패 확률이다.
지난 시즌까지 무려 90%가 넘는 도루 성공률을 기록했던 만큼 도루에 대해서 누구보다 자긍심이 넘치는 선수가 바로 이규영이었다.
김호기가 1회 초를 무실점으로 막아내자 이규영이 선두 타석에 들어섰다.
도루를 하기 위한 선행조건, 출루.
“볼!”
그걸 최상의 형태로 얻어낸 이규영이 의기양양하게 1루로 걸어 나갔다.
이미 개막 전부터 이정훈 감독이 그린라이트를 준 만큼 도루 시도에 대한 부담은 없었다.
거기에 선발투수는 사이드암 투수 이민준.
솔직하게 말하면 자신의 밥이었다.
‘평범한 도루는 재미없지.’
하지만 선수들에게 해놓은 말이 있는데 일반적인 도루를 하는 건 그의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다.
슬슬 눈치를 보면서 리드폭을 조금씩 넓혀갔다.
“세이프!”
그러자 곧장 1루로 들어오는 견제구에 슬라이딩으로 귀루했다.
이걸 몇 차례 반복하니 1회부터 유니폼이 더러워졌다.
하지만 이규영에겐 너무 익숙한 일이었고 계속 투수와 눈치 싸움을 하는 것도 잠시.
투수가 결국 박은성에게 공을 던졌다.
“스트라이크!”
어느새 볼 카운트는 2-2.
‘지금!’
수많은 기회에도 뛰지 않았던 이규영이 드디어 2루를 향해 뛰었다.
딜레이드 스틸.
방심을 틈탄 갑작스러운 도루에 울프즈 내야진이 급하게 2루로 움직였다.
하지만 너무 급했던 탓에 공은 뒤로 빠져버렸고 이규영은 유유히 3루까지 들어갔다.
이후 박은성의 땅볼에 홈까지 들어온 이규영이 대기 타석에 있던 김수호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봤냐 짜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