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인연 -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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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믿지 못할 일을 겪으면 순간적으로 말이 안 나올 정도로 충격을 받는 경우가 종종 있다.
올해만 벌써 이런 경험이 수두룩한 돌핀스의 광팬, 박충남씨도 그랬다.
“어.... 어....”
눈으로 분명 기사를 보고 있었지만, 자신이 읽는 게 맞는 건지 분간이 안 됐다.
눈을 손으로 비벼보고, 화장실에 가 세수도 해보고 허벅지도 꼬집어봤지만 기사 내용은 도저히 바뀔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만큼 이번 기사는 너무 충격적이었다.
“이건 아니지···. 점마는 왜 또 마린슨데!”
언제나 든든하게 뒷문을 책임졌던 오상엽의 충격적인 마린스 이적 소식을 들은 박충남씨는 말 그대로 뒷목을 잡았다.
돌핀스가 마린스에 노히트노런을 당할 때도, 한국시리즈에 올라 4대0 패배를 당할 때도 잡았던 뒷목이지만 그때는 괜찮았다.
돌핀스는 강팀이었고, 돌핀스의 선수들이라면 충분히 미래를 바라볼 수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하지만 주전 선수, 심지어 국가대표급 둘의 이탈은 너무 치명적이었다.
거기에 하필 옮겨간 팀이 마린스였다.
그나마 버틸 수 있었던 힘인 미래마저 사라진 느낌.
충격이 약간 가신 박충남씨는 5년 전부터 봉인해뒀던 전화번호를 눌렀다.
-트럭 기사님
“예. 접니다. 오랜만입니다. 기사님.”
곧 트럭 시위를 받게 될 돌핀스였지만, 단장을 비롯한 직원들도 혼란하긴 마찬가지였다.
“뭐야! 이 기사 뭐냐고!”
이규영을 놓친 후 멘붕에 빠진 돌핀스는 곧바로 접촉 중이던 최필주에게 고액의 계약을 제시하며 영입에 성공했다.
다음 타겟은 바로 오상엽이었다.
돌핀스 출신 FA 중 이규영과 더불어 반드시 잡아야 하는 선수.
비록 이규영은 잡지 못했지만, 이번이 두 번째 FA인 오상엽은 절대 돌핀스를 떠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외부 영입에 눈을 돌리고 약간 소홀히 했던 건 사실이었다.
그래도 하필 마린스라니, 그 많고 많은 팀 중에 하필 마린스로 가다니!
돌핀스 단장은 허탈한 눈으로 이규영의 이적 때 마린스에서 보내온 보호선수 명단을 확인했다.
투수와 타자, 아무리 뒤져봐도 고를 만한 선수가 없었다.
그간 꼴찌를 밥 먹듯이 했던 팀이 20인 외 선수 중 유망주 소리를 들을 선수가 없었다.
아니, 있긴 했지만 이미 알짜배기 유망주들은 보호선수에 포함되어있거나, 군대 때문에 픽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오민찬이 부임하자마자 유망주들을 대거 군대로 보낸 선택이 돌핀스에겐 최악의 결과로 돌아왔다.
이규영의 보상선수 때도 차마 돈을 선택할 수 없어 울며 겨자 먹기로 선수를 뽑았는데 이번이라고 다를 것 같진 않았다.
“하, 이걸 어쩌라고! 으아아악!”
단장이 답답함에 내지른 비명 소리와 종이가 휘날리는 소리가 돌핀스 단장실을 가득 채웠다.
돌핀스 단장이 참을 수 없는 답답함에 고함을 지르는 동안 마린스는 축제 분위기였다.
보상선수 유출도 거의 없고 마린스의 고질적인 문제였던 수비와 불펜에 큰 힘이 되어줄 선수 둘을 영입했다.
거기에 우승의 가장 큰 걸림돌이었던 돌핀스 선수들이다.
이규영과 오상엽이 빠졌다고 해도 여전히 강력한 돌핀스였지만, 무게감이 이전과 달랐다.
오상엽의 합류에 누구보다 반가워한 선수는 다름 아닌 이규영이였다.
김수호와 함께 최현우의 체육관에서 훈련 중이던 이규영이 오상엽의 계약 소식을 듣자마자 오상엽에게 전화를 걸었다.
“상엽이 형! 온다면 미리 좀 말하지.”
-그렇게 됐다.
김수호나 강주호, 허하준 등 국가대표에서 만났던 선수들이 있는 마린스였지만, 그래도 같은 팀 소속이었던 오상엽과 느낌이 달랐다.
-밖이냐? 왜 이렇게 시끄러워?
“아, 지금 수호랑 훈련 나왔거든.”
-수호? 한 번 바꿔봐.
“잠만. 수호야. 상엽이 형이 바꾸란다.”
“저요? 여보세요.”
-어. 오랜만이다. 신영이가 아니라 실망한 건 아니지?
“그럴 리가요. 전 선배님이 더 잘 맞습니다.”
-뭐? 내 공이 더 맞추기 쉽다고? 한국시리즈에서 털었다고 그러기야?
“아뇨 아뇨. 그런 게 아니라 이신영 선배보다 선배님 공이 더 좋다는 거죠.”
-네가 내 공 잘 치는 건 뭐 비밀도 아닌데. 너 때문에 마린스 온 거니까 책임져라.
“예? 저 때문에요?”
-어. 누가 나만 만나면 홈런을 쳐대는데 내가 억울해서 살 수 있어야지.
“하하하....”
오상엽과의 상대전적이 좋은 건 사실이라 딱히 변명 없이 웃기만 했다.
-아무튼 다음에 같이 한번 보자. 언제가 괜찮냐?
그렇게 오상엽과 다음을 기약하고 전화를 끊은 김수호가 이규영에게 핸드폰을 건넸다.
“여기요.”
“야.”
“예?”
“너 상엽이 형 대하는 태도랑 나를 대하는 태도가 너무 차이 나는 거 아니냐? 나도 어디 가서 꿀리는 선수 아니다? 어?”
“알죠.”
“알아? 아는 놈이 그래?”
“그럼 제대로 각 잡아서 해볼까요? 이규영 선배님. 이제 다시 운동하실 시간입니다. 가실까요?”
그 모습을 본 이규영이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가자. 안내해.”
“이런 게 좋아요?”
“어. 최고야. 짜릿해.”
“그래요? 그럼 안 해야지.”
“뭐? 야! 김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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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브리그는 잔인하리만큼 냉정하다.
이규영, 오상엽, 이신영, 최필주 등 준척급 FA 선수들에겐 둘도 없는 기회지만, 이민상, 박상훈 등 애매한 FA에겐 차가웠다.
그리고 그런 분위기는 비단 FA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1년 중 선수들에게 가장 소중한 시기가 바로 연봉협상 시기가 다가왔다.
성적에 따라 연봉이 결정되는 만큼 마린스 선수들의 기대감은 커졌다.
연봉협상을 시작한 이후 단장실에 들린 마린스 선수들은 하나같이 미소를 띠며 구단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하지만 구단 자체 평가에서 가장 높은 공헌도를 기록한 김수호는 날이 지나도 구단의 부름을 받지 못했다.
물론 오민찬이 언질을 줬던 만큼 김수호 역시 훈련에만 매진하며 차례를 기다렸다.
그렇게 대부분의 마린스 선수가 별다른 잡음 없이 도장을 찍을 무렵, 오민찬이 한 기사를 보고 급하게 핸드폰을 꺼내며 단장실 밖으로 나갔다.
“예. 김수호 선수. 연봉협상 때문에 연락드렸습니다.”
주인이 떠난 모니터엔 오민찬이 기다리던 기사가 떠 있었다.
[대전 피닉스, 연봉협상 완료. 황인재 2년차 최고액 갱신! 1억 5천만 원에 도장 찍어.]
그렇게 급하게 마련된 연봉협상 테이블에서 오민찬이 미소를 지으며 김수호가 오기를 기다렸다.
문이 열리고 김수호가 들어오자 오민찬이 순식간에 다가갔다.
“아이고, 김수호 선수. 오래 기다리셨죠?”
“조금 기다리긴 했는데 괜찮습니다.”
“얼른 앉으세요.”
김수호만큼, 아니 김수호보다 더 애가 탔던 게 바로 오민찬이었다.
“자, 여기 계약서입니다.”
계약서를 꺼내면서 곧바로 왜 늦었는지에 대한 설명을 했다.
“크흠, 저희는 김수호 선수의 노고에 항상 감사하고, 그만큼 보상을 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연히 김수호 선수라면 역대 최고액은 절대 무리가 아니죠. 하지만 한 계약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러면서 아까 봤던 기사를 보여줬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피닉스 구단에서 황인재 선수에게 역대 최고액을 제시할 거란 건 기정사실이었죠. 1억 5천. 충분히 큰 금액입니다. 하지만 우리 김수호 선수에겐 부족하죠.”
그리고 계약서 금액에 있는 부분에 손을 가져다 댔다.
이 말을 하기 위해 얼마나 애가 탔는지.
마치 어린이날에 자식에게 숨겨준 선물을 꺼내는 부모님의 마음으로 오민찬이 씨익 웃었다.
“1억 7천만 원. 역대 신인 최고액입니다. 김수호 선수가 황인재 선수의 기록을 곧바로 깬 것처럼 이번에도 그렇게 하시죠.”
“1억 7천이요?”
“예. 맞습니다.”
김수호가 입단 계약금으로 받은 금액이 1억 1천만 원.
그보다 1.5배 되는 금액에 놀랐다.
“저야 좋긴 한데....”
“그럼 찍으시죠!”
그렇게 황인재의 기사가 나간 직후, 곧바로 2년 차 최고 금액이 갱신됐다.
[김수호, 황인재 뛰어넘는 1억 7천만 원 도장. 마린스 연봉협상 완료.]
그리고 리암 에이전트의 제이슨은 그 기사를 보자마자 탄식했다.
협상 소식이 들려오지 않자 김수호가 자신에게 도움을 청할 거라는 기대를 했었다.
하지만 그건 자신의 착각일 뿐이라는 것에 큰 실망을 했다.
‘킴은 애초에 내가 필요 없었군.’
야구도 잘하고 협상도 잘한다.
어쩌면 에이전트와의 계약을 미루는 것도 자신의 가치를 올리기 위해서라는 생각이 들었다.
“쉽지 않군.”
하지만 그 점이 더더욱 제이슨의 승부욕을 끌어올렸다.
그렇게 김수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여러 방면에서 가치가 높아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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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영, 오상엽 등 두 명의 FA 계약 이후 마린스는 거침없이 일을 처리해갔다.
[돌핀스, 이규영의 보상선수 홍규민 지명. 최대 구속 150km의 강속구 유망주!]
ㄴ 한국 유망주 특 : 150KM 유망주 -> 어쩌다 제구 안 되는 공을 던졌는데 우연히 150km 찍힘
ㄴ 퓨쳐스 방어율 5.42 실화? ㅋㅋㅋㅋ 마린스 뎁스 개쓰레기네?
[돌핀스 이번엔 타자다! 오상엽 보상선수로 퓨처스 10홈런 거포 유망주 1루수 이성민 지명!]
ㄴ 한국 유망주 특 : 거포 -> 10홈런은 치지만 시즌 안타 = 홈런
ㄴ 하. 타출갭이 0.1인데? 타율은 0.232 출루율은 0.245 ㅋㅋㅋㅋㅋㅋ
ㄴ 돌핀스 진짜 개망했넼ㅋㅋㅋㅋㅋ
[마린스 내부 FA 이민상과 2+1년 5억 계약. ‘이민상은 우리 프렌차이즈 선수.’]
[마린스 집토끼 다 잡다! 박상훈과 3+1년 최대 10억 계약!]
이주학만으로 한 시즌을 소화하기 어렵다는 걸 아는 마린스는 이민상을 싼값에 잔류시켰고, 쏠쏠한 활약을 해주는 좌완 원포인트 박상훈까지 계약하며 이번 FA 시장을 마무리 지었다.
보상선수 유출도 선방하고 연봉협상도, FA까지 성공리에 마무리 지었다.
이제 남은 건 외국인 선수들과의 계약뿐이었다.
가장 먼저 마린스와 계약을 한 선수는 잭 미켈이었다.
[잭 미켈, 마린스 역사상 최장수 외국인 선수 되나? 최대 130만 불에 계약!]
[요그 하스, 총액 100만 불에 마린스 잔류!]
일찌감치 두 선수와 계약을 완료한 마린스는 마지막 남은 브릭 웰링턴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계약은 더디게 진행됐다.
“...하아.”
오랜만에 돌아온 미국이었지만, 웰링턴은 그저 한숨만 내쉴 뿐이었다.
웰링턴은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한국행을 선택했다.
그리고 거기서 지옥과 천국을 오가면서 점점 단단해졌다.
그 과정에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 있었으니, 바로 김수호였다.
“브로....”
김수호가 없었다면 그가 이런 행복한 고민에 빠질 일은 없었을 거다.
침을 한 번 꿀꺽 삼킨 웰링턴은 다시 자신에게 온 에이전트의 메시지를 확인했다.
-웰. 축하해요. 메이저리그 몇몇 구단이 계약하자고 연락이 왔어요. 곧 리스트를 추려서 보내줄게요.
메이저리그.
언제나 꿈에 그리던 구단들이 자신에게 관심을 표하는 상황이었다.
물론 25인 로스터 보장 계약은 아니었지만 40인 로스터가 포함된 메이저리그 계약이다.
작년까지 꿈도 못 꾸던 일이 그에게 일어난 거였다.
후반기에 에이스다운 모습을 보여줬고, 메이저 구단들이 그의 고질적인 문제였던 제구가 해결됐다고 판단했기에 온 오퍼였다.
하지만 꿈에도 그리던 메이저리그 오퍼에 그가 고민하는 건 그의 가족 때문이었다.
미국에서 보냈던 길고 긴 마이너리그 생활에 와이프 엠마가 고생하는 걸 매일같이 봐왔던 웰링턴이었다.
마지막, 정말 마지막이라고 생각한 한국 도전이 그의 가족의 표정을 변화시켰다.
이젠 울음보다 웃음이 많은 생활에 겨우 익숙해진 참인데 다시 기약 없는 메이저 도전을 하는 게 맞는 걸까.
한국에서 많은 팬에게 사랑받으며 행복해하는 엠마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아른거렸다.
그리고 부부 곁에 찾아온 천사 같은 엘리 역시 고민의 이유였다.
거기에 자신의 가족이라 해도 부족함 없는 브로, 김수호가 없으면 잘할 자신이 없었다.
결국 하루를 꼬박 새우며 고민한 웰링턴은 전화기를 꺼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잠시 통화음이 이어지고.
-여보세요?
“브로. 나야.”
언제나처럼 든든한 목소리가 웰링턴을 반겨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