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인연 -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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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이 마린스의 우승으로 한창 축제 분위기에 취하고 있을 때 바로 옆에 위치한 창원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준우승, 분명 자랑할 만한 성적이었지만 지난 5년간 한국시리즈 우승 4회, 통합우승 3회의 돌핀스에 좋은 성적표는 아니었다.
심지어 보약이라 부르던 마린스에게, 그것도 4대0이라는 치욕적인 패배를 당한 만큼 팬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특히 7월 이후 허하준에게 노히트노런과 완봉승을 무려 3번(시즌 1회, 한국시리즈 2회)이나 내준 타자들에 대한 분노가 컸다.
허하준은 이미 메이저 1선발급이라며 어쩔 수 없었다는 팬들과 아무리 그래도 40이닝 동안 1점도 못 뽑는 게 말이 되냐는 팬들이 싸울 동안 타선의 중심이라 볼 수 있는 이규영은 다소 허망한 눈으로 뉴스를 보고 있었다.
-부산 마린스와 부산시가 32년 만의 우승을 기념하는 카퍼레이드를 개최하기로 했습니다. 오는 13일 토요일에 부산역에서···.
부산, 마린스, 부산, 마린스.
마치 세상의 중심이 부산과 마린스인 것처럼 채널 어디를 틀어도 온통 마린스 얘기뿐이었다.
특히 저 얘기만 나오면 따라오는 두 얼굴이 보였다.
김수호와 허하준.
마린스에게 노히트노런을 당한 다음 경기, 압도적으로 승리를 거둔 돌핀스를 대표해 이규영이 했던 인터뷰가 떠올랐다.
‘우리는 마린스에게 진 게 아니라 김수호와 허하준에게 진 거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어처구니가 없는 말이다.
돌핀스라는 팀이 고작 두 선수에게 졌다는 건 오히려 돌핀스를 깎아내리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게 한국시리즈에서 정말 현실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아직도 눈을 감으면 떠오른다.
한국시리즈 1차전과 4차전에서 단 한 번의 출루도 성공하지 못하며 팀이 무기력하게 지는 걸 보고만 있어야 했던 자신의 모습을.
그렇다고 2차전이나 3차전에서 활약했냐? 그것도 아니었다.
기껏 출루해도 시즌 도루 50개는 가뿐히 기록하는 다리는 김수호에게 걸려 2루에서 아웃당하기 일쑤였다.
이규영은 소파에 누워 한참이나 자신을 휘감는 이 감정의 정체를 생각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깨달았다.
‘이게 재능이구나.’
21살 이른 나이에 돌핀스의 톱 타자 자리를 꿰찰 정도로 이규영은 빛나는 선수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완숙해지는 실력에 국가대표까지 진출하며 자신의 재능을 뽐냈다.
그리고 자신의 끝은 분명 더 높은 곳에 있을 거라는 멍청한 착각을 했다.
메이저리그.
존경하는 선배인 최지용도 처참한 실패를 맛보고 돌아온 곳.
국내용 투수라는 별명에도 절대 후회하지 않는다며 도전 그 자체를 한 것에 만족하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솔직히 이해하지 못했다.
도전한 결과가 조롱거리가 됐다.
만약 자신이라면?
이규영이란 선수가 쌓아 올린 커리어가 한순간에 조롱거리가 되는 걸 버틸 수 있을까?
그걸 인지한 순간부터 불타올랐던 메이저리그 도전 의지는 싸늘하게 식어버렸다.
자신이 허하준과 나카무라 같은 투수들의 공을 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실패는 사실상 정해진 수순이었다.
겁쟁이라 욕해도 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결정을 내리기에 앞서 자신의 정체를 알게 해준 단 한 사람에게만 겁쟁이 같은 모습을 보이기로 했다.
“나, 메이저리그 도전하지 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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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영이 만나자마자 한 말은 뜬금없었다.
“갑자기요?”
“어.”
인사도 하기 전에 갑자기 들은 말 때문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이 말을 한국시리즈에서 들었으면 아마 효과가 좋았을 텐데.
“주문 도와드릴까요?”
다행히 종업원이 와서 생각할 시간을 벌 수 있었다.
대충 주문하자 이규영과 눈이 마주쳤다.
“갑자기 왜 그러세요?”
내일이면 FA시장이 열린다.
아직 메이저리그 도전은 말하지 않은 상황.
혹시 다른 구단에서 미리 접촉해 거액의 FA를 제시해서 마음이 흔들렸나 싶었지만, 그건 아닌 것 같다.
이규영은 대답 없이 한참 동안 말이 없다 입을 열었다.
“하준이가 메이저리그에서 성공할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
“음. 아마 99%죠?”
“1%는 왜?”
“제가 없으니까?”
나름 분위기 풀어보려고 한 농담이었지만, 이규영의 표정만 더 이상해질 뿐이었다.
“후, 그렇지. 그 허하준도 실패할 가능성이 있는 곳이 메이저리그인 거잖아.”
“그렇죠.”
“근데 나는 하준이 공도 제대로 못 치는데, 나 같은 똑딱이가 가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왜 이렇게 약한 척해요. 제가 한국시리즈 준비하면서 선배 약점 찾으려고 얼마나 노력했는데.”
“그런 말로 위로해도 소용없다.”
“진심인데요?”
“후, 됐다. 얘기 꺼낸 내 잘못이지.”
아무래도 한국시리즈의 충격이 좀 컸나 보다.
항상 자신감이 넘치던 이규영이 이런 모습을 보일 줄은 몰랐다.
“그래서 진짜 도전 안 하려고요?”
약간 움찔한 이규영이 한숨을 내뱉었다.
“후. 모르겠다 나도. 머리 아프네.”
“음, 선배가 지금 몇 살이죠?”
“나? 스물일곱.”
“그럼 2년 뒤에 스물아홉, 4년 뒤면 서른하나네요?”
“그렇지.”
“이건 그냥 제 생각인데 당장 도전하는 게 어려우면 FA하고 도전하는 건 어때요? 요즘 옵트아웃도 걸잖아요.”
“미쳤냐? 지금도 안 통할 것 같아서 고민하는데 그때 통하겠냐?”
“선배가 지금 고민하는 거, 빠른 공 때문에 그런 거 아니에요?”
내 말에 이규영의 입이 꽉 닫혔다.
“빠른 공 대처만 되면 선배도 충분히 통할 거 같은데. 안 그래요?”
“그게 쉬운 줄 아냐?”
“어렵죠. 근데 제가 그쪽으로 잘 아는 분이 있는데 소개해 드려요?”
강주호가 소개해준 최현우 얘기를 꺼내자 꽤 흥미로워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 이후 고민이 길어지는지 이규영은 조용했고 꽤 길었던 침묵은 음식이 나오면서 끝이 났다.
“이게 다 뭐냐?”
“좀 많죠?”
“다 먹을 수 있어?”
“음. 먹어봐야죠.”
최현우가 내게 내준 과제가 있었다.
바로 증량.
그걸 위해 스테이크만 4개를 시켰지만, 아마 이것도 적다고 할 거다.
“제가 사는 거니까 많이 드세요.”
황당해하는 이규영의 표정을 뒤로하고 포크와 나이프를 들었다.
고민하던 게 해결됐으면 좋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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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하게 00시가 되자 이규영의 전화가 불티나게 울리기 시작했다.
첫 전화는 모르는 번호였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이규영 선수. 부산 마린스 단장 오민찬이라고 합니다.
“아, 예. 안녕하세요.”
-늦은 시간 죄송합니다. 잠시 통화 괜찮으신가요?
오민찬을 시작으로 돌핀스를 비롯한 여러 단장과 통화를 마친 이규영이 진이 빠진 표정으로 침대에 누웠다.
“하, 돌겠네.”
김수호와의 만남으로 해결될 줄 알았던 고민이 더 격해졌다.
그래도 괜찮은 방법 하나를 듣긴 했다.
‘옵트아웃, 꽤 괜찮은데?’
거기에 강주호가 빠른 볼에 고전하다 최현우의 도움을 받고 폼을 교정했다는 건 꽤 매력적인 얘기였다.
이규영의 가장 큰 고민은 출루였지, 그 이후는 자신 있었다.
그렇게 다음 날, 에이전트 없이 차례대로 단장을 만난 이규영은 조심스럽게 옵트아웃 얘기를 꺼냈다.
“으음. 그건 곤란합니다.”
벌써 네 명의 단장이 똑같은 얘기를 하고 있다.
이규영의 FA 등급은 A.
직전 연봉의 200%와 20인 외 보호선수 1명의 출혈을 감수하고 영입했는데 2년 뒤에 떠난다면?
구단으로서는 부담스러운 조건이었다.
그래서 KBO에서 옵트아웃의 계약 형태가 이뤄지지 않은 거기도 했다.
결국 믿었던 돌핀스 단장에게까지 곤란하다는 얘기를 들은 이규영이 마지막 한 사람을 기다렸다.
“오래 기다리셨죠? 반갑습니다. 마린스 오민찬 단장입니다. 이규영 선수.”
“아, 예. 앉으시죠.”
“혹시 옵트아웃 계약도 생각하고 있으신가요?”
오늘 대화는 에이전트도 없었고 사전 탐색 정도로 생각했던 오민찬은 훅 들어온 이규영의 말에 슬쩍 미소를 지었다.
“으흠. 혹시 옵트아웃이라면 몇 년을 생각 중이신가요?”
“2년 뒤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2년이라···.”
처음으로 듣자마자 난색을 보인 것이 아니라 고민에 빠진 단장의 모습에 이규영이 침을 삼켰다.
“예. 옵트아웃, 좋습니다. 대신 뒤에 2년에 연봉을 집중하고 싶은데 괜찮으신가요?”
“이유는 안 물어보시나요?”
“이유요? 뭐 여러 가지가 있겠죠. 근데 만나자마자 옵트아웃 얘기부터 꺼내신 걸 보면 이미 여러 구단에 말해보신 것 같은데 저희는 이규영 선수라면 어떤 계약도 괜찮습니다.”
“그럼 옵트아웃 조건은 어떻게 할까요?”
오민찬은 승부수를 던졌다.
“조건 없이, 2년 뒤 선수가 원하면 바로 FA 어떻습니까.”
“...조건 없이요?”
이규영과 만나기 전 오민찬은 김수호와 잠깐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그가 메이저리그에 관심을 보인다는 건 이미 들어서 알고 있다.
메이저리그? 오민찬의 눈엔 마린스 유니폼을 입은 이규영이 통합우승 트로피를 들고 있는 것밖에 보이지 않았다.
적극적인 오민찬의 말에 이규영이 잠시 양해를 구했다.
“저 전화 한 통만 하고 오겠습니다. 잠시만요.”
자리를 비운 이규영이 돌핀스 단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단장님.”
-예. 이규영 선수.
“정말 옵트아웃은 안 되겠습니까?”
-으음. 아무래도 힘들 것 같습니다. 대신 4년 계약에 연봉은 최대로 챙겨드리겠습니다.
“단장님. 정말 안 되겠습니까?”
-이규영 선수. 그러면 한국시리즈 우승 시 옵트아웃 어떻습니까. 이 정도면 저희도 오케이 하겠습니다.
잠시 머뭇거린 이규영은 허하준과 김수호를 떠올렸다.
2년 뒤에는 허하준은 없을 거다.
하지만 한국시리즈 우승을 옵션으로 걸기엔 너무 부담이 컸다.
“...아닙니다. 다음에 연락 드리겠습니다.”
정확한 액수가 오가진 않았지만, 마음을 굳힌 이규영이 다시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계약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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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부산 마린스, 이규영과 4년 최대 80억 FA 계약 체결]
FA가 개장한 지 첫날부터 충격적인 소식이 들려왔다.
이 소식을 들은 돌핀스 팬들은 모두 패닉에 빠진 채 현실을 부정했다.
이규영이 이번 FA 최대어인 만큼 금액 문제는 아니었다.
돌핀스의 상징과도 같았던 이규영이 얼마 전 돌핀스 팬들을 패닉에 빠트렸던 마린스로 이적한다는 사실 자체가 끔찍했다.
반면 마린스 팬들은 행복할 뿐이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갓민찬 미쳤다!
ㄴ 우리 타선 벌써 미쳤는데? 이규영, 박은성 테이블세터? 와 시발!
ㄴ 센터라인이 진짜 지림. 김수호 – 이주학 – 이규영이면 수비도 와....
ㄴ 근데 2년 뒤 옵트아웃 저건 뭐냐?
ㄴ 2년 뒤에 이규영이 원하면 FA로 풀리는 거.
ㄴ 그럼 개손해 아니야? 20인 외 보호선수까지 주는데?
ㄴ ㄴㄴ 우리 내년에 무조건 달려야 됨. 옵트아웃이건 옵트아웃 할아버지건 아무튼 이규영이 내년에 사직에서 뛴다는 게 중요함 ㅋㅋㅋㅋ
ㄴ 갓민찬.... 그저.... 빛....
ㄴ 갓민찬 업적 : 2032 신인드래프트 1, 2, 3라운드 지명자 전원 주전 + 갓수호 포수 전향 + 이규영 FA 계약!!!!
ㄴ 우리 20인 외 쓰레기 아니냐? 어우 돌핀스 걍 돈 받는 게 나을 듯?
ㄴ 타자는 박은성, 최치호, 오준혁, 강주호, 김민석, 채지훈, 이준, 김수호, 이주학 총 9명. 투수는 허하준, 이용기, 김호기, 이호민, 정태석 총 5명에 응원단장 + 치어리더 5명 하면 총 20명 될 듯? ㅋㅋㅋㅋ
ㄴ 돌핀스 미안하다....
ㄴ 좋아할 일이냐. 뎁스 처참하다.
ㄴ 그래서 FA 데려왔잖아. 일단 즐겨~
ㄴ 아니 규영아 아무리 그래도 첫날은 아니지 ㅠㅠㅠㅠㅠㅠㅠㅠㅠ
마린스 입장에서 이번 FA에 쓸 돈은 충분했고 보호선수도 거리낌 없었다.
거기에 허하준과 강주호가 남는 내년 시즌 반드시 우승에 도전해야 하는 마린스와 옵트아웃을 원한 이규영은 순식간에 계약을 진전시켰다.
마린스야 경쟁자가 늘어나기 전에 계약하고 싶어 했고 이규영이 계약을 서두른 이유는 간단했다.
‘미련을 남기고 싶지 않다.’
시간이 더 끌리면 돌핀스에 미련이 남을 것 같아 빠른 결정을 내렸다.
거기에 적극적이었던 오민찬 역시 한몫했다.
그렇게 모두에게 충격적이었던 첫 번째 계약으로 본격적인 스토브리그가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