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인연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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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제는 끝났다.
카퍼레이드도, 공약도, 회식도 모두 사고 없이 무사히 잘 끝냈다.
부산 어디를 가도 아직 우승의 잔향이 남아있지만, 우승을 이뤄낸 사직 구장엔 이미 내년 시즌 준비를 위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직원들이 일하다가 가끔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우승 상여금이 통장에 두둑하게 꽂혔는데 웃음이 안 나올 수가 있을까.
그중에서 가장 잇몸을 자주 보이는 사람은 단연코 단장 오민찬이었다.
-푸하하하!
이제는 익숙해진 단장실을 뚫고 나오는 웃음소리를 배경음 삼아 직원들이 일하고 있을 때 단장실 안에선 오민찬이 무언가를 보고 있었다.
“이거지. 이게 야구 단장을 하는 이유지!”
돈? 돈도 중요하지만, 그에게 돈을 더 주겠다는 구단은 많았다.
하지만 그가 굳이 독이 든 성배라 불리는 마린스를 선택한 건 모두가 실패한 이 팀을 우승시킨 단장이라는 타이틀이 탐이 났다.
물론 단장직을 수락한 직후엔 후회도 많이 했지만, 그의 프로세스대로라면 충분히 5년 안에 우승을 노려볼 만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리고 올 시즌 마린스가 우승하면서 그는 KBO 역사에 길이 남을 단장이 됐다.
“아이고, 수호야. 네 얼굴만 봐도 이 형이 웃음만 난다. 크하하하!”
지난 시즌 중 부임했던 오민찬이 첫 번째로 맞닥뜨린 과제가 바로 신인드래프트였다.
거기서 2번 이호민, 12번 이주학, 22번 김수호를 지명한 건 그야말로 인생을 바꿔놓는 선택이었다.
특히 김수호를 픽한 건 지금 생각해보면 신이 도왔다.
“어떻게 네가 22번까지 남아있었냐?”
당시 김수호의 스카우트 리포트를 살펴보면 준수한 타격과 준수한 수비 실력을 지닌 내야수라고 되어있다.
모난 곳 없는 5툴 선수라는 평가다.
다만 클러치 상황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준 건 황인재와의 승부를 피한 일종의 우산 효과를 본 덕분이라고 되어있었다.
아마 이것 때문에 평가가 약간 떨어진 것 같은데.
“황인재가 우리 수호 우산 효과를 본 거지. 흐흐흐.”
김수호의 예상 지명 라운드는 2라운드에서 3라운드 사이.
사실상 타 팀이 2라운드에서 그를 선택할 기회가 있었던 걸 생각하면 아마 시즌 내내 배가 아프지 않았을까.
특히 마지막까지 지명 기회가 있던 피닉스의 경우 김수호를 픽했다면 황인재 – 김수호로 이어지는 막강한 타선을 상대해야 했다.
만약 그랬다면 이번 시즌 우승팀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아니, 달라졌을 거다.
그런 만큼 김수호를 데려온 건 신의 한 수였다.
“보자. 연봉 책정이 다 됐나?”
정신을 차린 오민찬이 선수 한 명 한 명 고과를 확인하면서 최종 점검에 들어갔다.
32년 만에 거둔 우승인 만큼 두둑하게 챙겨주라는 구단주의 허락이 떨어졌다.
물론 주전과 백업의 차이가 큰 마린스인 만큼 어느 정도 인상차가 있겠지만, 대부분 연봉을 보면 도장을 찍을 정도로 책정해놨다.
마린스는 허하준과 강주호 등을 제외하면 고액 연봉자가 없다.
FA를 대비한 샐러리캡 비우기도 굳이 할 이유가 없었다.
유일하게 공백인 선수는 단 한 명뿐이었다.
“수호야. 이 형만 믿으라고 했지?”
언젠가 구단주가 했던 말을 기억해낸 오민찬이 또다시 웃으면서 백지 처리된 김수호의 연봉을 옆으로 빼놨다.
아마 김수호와 연봉 협상은 가장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미뤄질 거다.
하지만 그건 덜 주기 위해서가 아니다.
“동년배 중엔 가장 많이 받아야지.”
액수를 보며 놀랄 김수호를 상상하며 다음 서류를 봤다.
“브릭 웰링턴, 요그 하스, 잭 미켈.”
한 시즌의 성적을 책임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외국인 용병 삼인방.
마린스의 세 외국인 선수를 평가하면 간단했다.
브릭 웰링턴 – 전반기 C, 후반기 S
요그 하스 – 전반기 B, 후반기 B+
잭 미켈 – 전반기 B, 후반기 A
가장 눈에 띄는 건 역시 브릭 웰링턴이었다.
“정확하게 수호 합류랑 일치하네.”
팀에서 일명 김수호빨을 가장 잘 받은 선수였고, 그건 한국시리즈까지 이어졌다.
문제는 후반기에 너무 잘했다는 거다.
“한국에 남을까?”
솔직히 그 커브를 보면 굳이 한국에 남을 이유가 없어 보였다.
이미 메이저리그에서도 꽤 큰 관심을 보인다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일단 제안은 해봐야지.”
다음 선수는 요그 하스.
외국인 2선발에 요구하는 기준을 보면 아슬아슬하게 합격이다.
전반기 팀이 무너지지 않게 지탱해준 선발이자 후반기에도 제 몫을 해낸 투수.
내년 시즌 익숙해진 타자들을 압도할 수 있냐는 물음표였다.
“그래도 바꿀 이유는 없지.”
선발 투수에게 중요한 건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현장에서 가장 요구하는 덕목은 바로 이닝이었다.
5이닝 이하 소화 경기가 3경기밖에 되지 않을 만큼 매 경기 제 몫을 톡톡히 해주는 선수를 바꿀 이유는 없었다.
그리고 마린스 최장기 타자, 잭 미켈.
“흐음.”
필요할 때 1점을 내주는 타자.
강견의 어깨는 보너스였다.
“이번에도 같이 가야겠지?”
외국인은 전부 잔류라는 결론을 내린 오민찬이 다음 안건을 집었다.
이제 가장 중요한 게 남아있다.
바로 스토브리그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FA(프리에이전트)시장.
다행히 마린스에서 FA자격을 얻은 선수는 둘밖에 되지 않았다.
유격수 이민상과 좌완 불펜 박상훈.
둘 다 큰 무리 없이 잔류할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외부 FA에 집중할 수 있었다.
이번에 대어가 꽤 많이 나오는 만큼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가장 먼저 포수 최대어 스타즈의 최필주.
“패스.”
마린스에 부임할 때부터 반드시 영입하고자 마음먹었던 선수였지만 이젠 아니다.
“우리 수호가 있는데 헛돈 쓸 필요는 없지.”
물론 김수호 혼자 시즌을 운영하기엔 무리가 있다.
부상의 변수와 체력적인 부담도 컸다.
만약 무리해서 김수호를 출장시키다가 김수호가 부상이라도 당한다면?
“그 즉시 시즌 종료지.”
그런 만큼 이번 스토브리그에 김수호의 백업 포수를 구해야 했다.
물론 백업 포수로 값비싼 최필주를 영입할 생각은 없었다.
어디선가 최필주가 날아간 억 단위 돈에 우는 소리가 들렸지만, 오민찬은 가차 없이 넘겼다.
이미 구단주가 160억이라는 거액을 결제한 상황.
그건 어중간한 B급 선수를 사라고 준 돈이 아니다.
마린스의 약점이라고 볼 수 있는 자리를 채워야 했다.
포수는 말 할 것도 없고 유격수도 이주학이 생각보다 잘 해주는 상황이다.
토종 유격수의 씨가 보이는 데 굳이 영입할 필요도 없었고, 마땅한 선수도 없었다.
두 포지션을 제외하면 가장 뒤떨어지는 부분은 바로 좌익수와 불펜.
후보는 창창했다.
“이규영이랑 오상엽, 거기에 이신영이라.”
이번 FA시장의 가장 최대어라고 볼 수 있는 선수는 총 세 명.
돌핀스 중견수 이규영, 마무리 오상엽, 그리고 프렌즈의 셋업맨이자 홀드왕 이신영까지.
오민찬은 오버페이를 해서라도 셋 중 한 명은 반드시 영입할 계획이었다.
“내년엔 반드시 우승해야 한다.”
2년 뒤 FA자격을 얻는 최치호는 둘째치고 허하준과 강주호가 이탈한다.
올 시즌 후반기에 연약한 마린스 불펜이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허하준의 존재였다.
매 경기 9이닝을 책임지며 불펜의 부담은 최소화해주고 본인도 투심을 장착하고 맞춰 잡으면서 체력 소모도 줄이는 완벽한 투수.
이 투수의 이탈만 해도 뼈아픈데 강주호마저 은퇴한다.
당장 1루수의 자리는 채지훈이 메꾼다고 해도 허하준의 빈자리는 누구를 데려와도 채울 수 없다.
“그건 나중에 생각하고 둘이 있을 때 우승 한 번 더 해야지.”
타선의 극대화냐, 아니면 불펜의 안정감이냐.
가장 좋은 건 저 선수 중 둘 이상을 영입하는 거지만, 현실적으로 무리였다.
거기에 트레이드, 방출 선수 등 할 일이 태산이었다.
지끈지끈한 머리를 감싸며 오민찬이 한 영상을 틀었다.
“후, 이럴 땐 수호 하이라이트지.”
그렇게 본격적인 스토브리그가 막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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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브리그.
야구가 끝난 뒤 야구팬들의 모든 관심이 집중되는 시기였다.
팬들만 관심이 있는 건 아니다.
선수들 역시 본인이 그 당사자가 될 수 있는 만큼 꽤 관심을 보였다.
마무리 훈련을 위해 모인 마린스 선수단도 예외는 아니었다.
“끄으으. 더, 더, 더.”
와일드카드부터 한국시리즈까지 쉴 틈 없이 달려온 선수들이기에 훈련 대부분은 회복 훈련 위주로 진행됐다.
보통 마무리 훈련에 베테랑들은 참여하지 않지만 마린스 선수단은 대부분 참여했다.
참여 못한 소수의 인원도 시즌 간에 참고 있던 부상 때문이었을 뿐, 참가율이 매우 높았다.
그 이유는 단 하나였다.
‘내년에도 우승하고 싶다.’
야구팬이 열광적이라는 건 그만큼 성적이 부진할 때 차게 식는다는 뜻이다.
이미 차가우리만큼 무관심을 받았던 선수들에게 마린스 팬들의 뜨거운 환호와 관심은 끊을 수 없는 마약과 같았다.
특히 이번 시즌은 극적이었던 만큼 팬들의 반응도 격했다.
그걸 다시 느끼기 위해서라도 마무리 훈련에 참여한 선수가 많았다.
그런 만큼 선수들이 FA에 관심을 보이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팀 전력이 강화되면 좋은 거니까.
한창 야수조 훈련이 한창인 곳에서 이주학이 조심스럽게 김수호에게 물었다.
“이번에 구단에서 돈 좀 푸냐?”
“그걸 왜 나한테 물어?”
“네가 잘 알잖아. 어때? 유격수 영입 한대?”
“불안하냐?”
하지만 영입을 한다는 건 기존 선수가 밀릴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거였다.
아직 주전에 확신이 없는 이주학 같은 선수들은 더더욱 불안해했다.
“아씨, 그러지 말고 들은 거 있으면 좀 말해줘.”
“나도 몰라. 근데 잘 아는 사람은 아는데.”
“누군데?”
“김호기 선배.”
“나 안 친한데···. 네가 대신 물어봐 주면 안 되냐?”
“싫어. 귀찮아.”
“치사한 놈아! 넌 이미 주전이라고 그러기냐?”
“이주학이.”
한참 김수호와 대화 중이던 이주학이 들려선 안 되는 목소리에 순간 얼어붙었다.
반면 김수호는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에 반색했다.
“코치님?”
“오랜만이다. 수호야 너 장난 아니더라?”
“코, 코치님? 여긴 왜 오셨어요?”
“나야 구단에서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는 신세지. 아무튼 1군에 가더니 많이 편해졌나 보다? 벌써 그런 걱정을 다 하고?”
“아닙니다!”
“뭐가 아니야 인마. 쯧, 어디 보자. 오랜만에 펑고 한 번 할까?”
그 소리를 듣자 이주학의 몸이 굳었다.
“퍼, 펑고요?”
“왜? 싫나?”
“....”
도저히 대답하지 못하는 이주학을 보던 수비 코치가 크게 웃었다.
“걱정하지 마라. 마무리 훈련은 별거 없으니까.”
“정말요?”
“그래. 대신 스프링 캠프 때 보자.”
순간 밝아졌던 이주학의 얼굴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그때 몸 제대로 만들어 와라. 수호는···. 뭐 하던 대로 하고.”
그렇게 폭풍같이 찾아왔던 수비 코치가 사라지고 이주학이 주저앉았다.
“나한테 왜 그래···.”
“그래도 너한테 좋은 거지.”
“수코님이 온 게? 왜?”
“수코님이 너 좋아하잖아.”
“그런 관심은 필요 없는데.”
“이주학이! 잠깐 와봐라!”
간 줄 알았던 수비 코치의 외침에 이주학이 울상을 지었다.
“같이 가자.”
“안돼. 나 몸 더 풀어야 해.”
“진짜 나쁜 새끼. 벌 받아라.”
“나 벌 받아서 다치면 팬들한테 네 얘기 하면 되지? 네가 저주했다고?”
“와, 진짜 너무하다. 치사한 새끼. 꺼져.”
그렇게 이주학은 수비 코치에게 붙잡혀 어디론가 사라졌다.
시끄럽게 떠들던 이주학 대신 김수호에게 다른 선수가 다가갔다.
“수호야, 좀 도와줄까?”
“감사합니다.”
박은성의 도움으로 스트레칭을 끝낸 김수호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후, 힘드네요.”
“좀 쉬엄쉬엄해. 뭐 네 몸은 네가 더 잘 알겠지만. 그건 그렇고 너 혹시 국가대표 단톡방 같은 거 있냐?”
“예? 있긴 한데 활성화는 안 돼 있어요.”
“그래?”
“예. 왜 그러세요?”
“그냥 FA 들은 게 있나 해서. 이번에 국대 선수들 많이 나오잖아.”
“그건 그렇죠. 근데 딱히 연락하는 사람은 없어요. 그나마 돌···. 아니 이규영 선배 정도?”
“이규영 선배는 뭐래?”
김수호 입에서 이규영의 이름이 나오자 박은성이 흥미로운 표정으로 물었다.
“어, 글쎄요? 이번 주에 만나기로 하긴 했는데 만나봐야 할 것 같아요.”
“그래?”
“근데 잔류하지 않을까요?”
이미 이규영이 메이저리그를 노린다는 사실을 아는 김수호가 괜히 모르는 척 둘러댔다.
FA가 시작하는 건 아직 며칠이 남았다.
그즈음 되면 분명 기사가 나올 터.
그리고 FA 당일, 충격적인 소식이 야구계를 덮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