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인연 - 1
#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어느 정도였냐면 제이슨과 나카무라와 헤어지고 집에 도착해 부모님과 밥을 먹으며 축하를 받고 다시 잠을 자고 눈을 뜨니 하루가 지나있었다.
정확히 토요일 00시에 눈을 떠졌으니 우승하고 밥 먹고 잠만 잔 급이었다.
“이 정도로 피곤했나?”
생각해보면 1군에 이름을 올린 이후부터 휴식이 거의 없이 11월까지 달렸으니 그럴 만했다.
그래도 푹 자서 숙취는 그다지 느껴지지 않았다.
“잠은.... 못 자겠네.”
이미 또렷한 정신에 잠은 포기하고 머리맡에 놓아둔 핸드폰을 켜니 부재중과 카톡이 꽤 쌓여있었다.
강주호, 강기호, 이호민, 이주학, 감독님, 2군 감독님 등에게 잠을 못 자서 답이 늦었다고 보낸 뒤 남은 연락을 확인했다.
허하준 선배님 : 미국 안 간다며? 아쉽네. 그럼 어디서 하려고?
돌고래 : 다음 주에 한번 보자.
허하준은 낮에 카퍼레이드 때 만나니까 그때 얘기하기로 하고 먼저 이규영한테 답장을 보냈다.
-언제요?
카톡 답장을 하자 곧바로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너는 카톡한 지 얼마나 됐는데 이제 답을 하냐?
“아, 죄송해요. 어제 회식했는데 방금 일어나서.”
-우승해서 좋겠다? 누군 잠도 제대로 못 잤는데?
“예. 좋네요. 잠도 푹 잘 수 있고.”
-아오! 첫 경기에 기강 한 번 잡았어야 했는데. 내가 괜히 봐줬다.
이 악물고 수비 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래서 무슨 일인데요? 다음 주 언제요?”
-그냥 시즌 끝났으니까 보자는 거지.
“이번에도 둘이 봐요? 메이저 가기 전인데 다 같이 봐야죠.”
-메이저....
이규영이 잠깐 말끝을 흐리고 다시 말을 했다.
-시끄럽고 월요일에서 수요일 중에 괜찮은 날 말해. 이번엔 네가 쏴라. 끊는다.
갑자기 자기 할 말만 하고 끊은 이규영의 행동에 당황했지만 급한 일이 있거니 하고 신경 쓰지 않았다.
그보다 잠도 안 오는데 기사나 봐볼까?
우승 직후 회식을 하고 잠자고 방금 일어난 거라 볼 시간이 없었다.
가장 처음 본 건 허하준이 울면서 나를 껴안고 있는 사진이었다.
“사진으로 보니까 좀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일이 잘 기억나진 않았다.
다만 미트에 들어온 공은 절대 놓지 않겠다는 생각과 갑자기 허하준이 우는 바람에 당황했던 것만 기억이 난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그때 그 격했던 감정이 심장을 요동치게 만든다.
그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인지 다른 기사들을 봐도 전부 마린스 얘기밖에 없었다.
하긴 우리가 이번 시즌에 우승할 거라고 생각한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만큼 우리의 우승은 기적에 가까웠다.
다른 기사들도 보고 있는데 눈에 띄는 기사 하나가 보였다.
[마린스의 다음 성적, 소포모어 징크스에 달려있다.]
-마린스를 우승으로 이끈 선수를 뽑자면 허하준과 김수호가 가장 먼저 나올 것이다.
그중에서 기자는 허하준보다 김수호를 먼저 뽑고 싶다.
마린스는 그동안 전통적인 타격의 팀이었다.
팀이 꼴찌를 할 때도 타격만큼은 제 몫을 하는 경우가 많았고, 7점을 내면 9점을 주는 야구를 해왔다.
가뜩이나 타격 하나로 먹고사는 팀인데 타격 사이클이 저점을 찍으면 팀 성적도 같이 곤두박질했다.
그런 마린스의 팀 컬러를 단번에 바꾼 게 바로 김수호의 등장이었다.
포수 미트를 잡은 지 하루.
하늘이 내려준 포수라고 해도 믿을 법한 실력으로 마린스 팬들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허하준을 에이스 오브 에이스로 만들고, 골칫거리였던 브릭 웰링턴 역시 외국인 에이스의 모습으로 만들었다.
요그 하스, 김호기, 이호민, 이용기 등 다른 투수들도 김수호의 안정된 수비 실력에 자신의 공을 뿌렸고, 그 결과 후반기 팀 평균자책점 2위를 기록하며 후반기 대 약진을 이끌었다.
이뿐만 아니라 타격에서도 후반기 모든 타격 지표에서 1위를 기록했다.
김수호가 팀 전력의 절반이라는 말이 부족할 정도였다.
거기에 유격수 이주학, 5선발과 롱릴리프로 준수한 활약을 보여준 이호민 역시 팀 상승세에 좋은 영향을 줬다.
문제는 이 세 명의 선수가 이제 고작 첫 시즌이라는 것이다.
소포모어 징크스.
다른 말로 2년 차 징크스라고 부르는 말로 첫 시즌 좋은 활약을 보인 선수가 2년 차엔 부진하는 현상을 말한다.
이런 용어가 있을 만큼 소포모어 징크스는 꽤 흔한 일이었고, 그건 마린스의 세 신인 선수 역시 조심해야 한다.
상대 팀의 집요한 분석, 성적에 대한 부담, 풀시즌 첫 경험, 그에 따른 체력 부담까지에 무너진 선수가 한둘이 아니다.
이 모든 걸 이겨내야 진정한 프로 야구 선수로서 긴 시간 동안 활약할 수 있다.
과연 세 선수, 특히 김수호가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벌써 기대가 된다.
ㄴ 우승한 다음 날에 이딴 기사 써놓고 기대? 걍 망하라고 제사 지내는 거 아니냐?
ㄴ 근데 틀린 말은 없음. 주전 셋이 20살인 건 ㅈㄴ 좋긴 한데 그만큼 위험한 건 팩트지.
ㄴ 한국시리즈에서 하는 거 보고도 아직도 이딴 똥 글을 싸지르네. ㅉㅉ
ㄴ 우리 수호는 데뷔 때부터 올림픽, 후반기, 포스트시즌 할 때마다 이런 글 쏟아짐 ㅋㅋㅋ 걍 쿨 돈거지 머. 내년 첫 타석 홈런보고 싹 다 닥칠 듯?
ㄴ 그래서 님들 왜 안 잠?
ㄴ 나 한국시리즈 풀 경기로 다시 보는 중 ㅋㅋㅋㅋ 다시 봐도 존나 좋넼ㅋㅋㅋ
ㄴ 엌ㅋㅋㅋ 나돜ㅋㅋㅋ
ㄴ 낼 카퍼레이든데 이제 자셈.
ㄴ ㅇㅋㅇㅋ 다들 낼 봐여
ㄴ ㅂㅂ
기사 다 읽고 댓글까지 보니 웃음이 났다.
하이라이트도 아니고 풀 경기로 다시 본다고?
“역시 대단하네.”
내일 저런 팬들을 만날 생각을 하니 벌써 기다려진다.
“슬슬 다시 잘까.”
쉽게 잠이 올 것 같진 않지만, 기사에서 한 말처럼 내년에도 잘하려면 억지로 자는 것쯤은 일도 아니다.
그래도 잠이 든 건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였다.
#
마린스의 우승으로 2032시즌 KBO는 막을 내렸지만, 마린스 구단은 이제부터 본격적인 시작이었다.
다음 시즌을 준비하면서 미래를 준비하는 것도 중요했지만, 그토록 바라던 32년 만에 우승을 팬들과 함께 나눌 시간을 갖기로 했다.
그 첫 단계가 바로 카퍼레이드를 성공리에 마치는 것이었다.
“자, 다들 빨리빨리 움직입시다!”
날이 추운 날에 야외 근무였지만 마린스 직원들의 얼굴은 밝았다.
매년 이 시기에 성적 부족으로 각종 스트레스에 시달리던 것에 비하면 천국이나 다름없었다.
거기에 카퍼레이드는 2008년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점점 시간이 다가오고 선수들이 준비를 마치자 드디어 시작할 시간이 됐다.
첫 번째 차량이 천천히 출발했다.
총 10개의 버스 중 가장 선두에 있는 선수는 바로 강주호였다.
“강주호! 강주호! 강주호!”
처음엔 마린스의 희망이었고 다음은 마린스의 중심이었고 이제는 마린스 그 자체가 돼버린 선수.
강주호가 손을 흔들며 흘리는 눈물의 의미는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팬들에게 전해졌다.
“너무 늦게 우승해서 죄송합니다!”
이어서 출발한 두 번째 차량.
그 차에 타 있는 선수, 아니 코치를 보자 더욱 크게 소리를 질렀다.
“강기호! 강기호! 강기호!”
이제는 경기장에서 부를 수 없는 추억이 돼버린 강기호의 응원가를 부르며 마린스의 영원한 안방마님을 추억했다.
선수들의 양보로 이루어진 강기호가 탄 차가 떠나고 다음은 허하준이었다.
자신들의 에이스를 향해 환호를 보낸 팬들이 다음 차를 맞이했다.
“김수호 선수가 나옵니다!”
“와아아아!”
앞선 세 선수 모두 마린스의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선수였지만, 임펙트만큼은 절대 뒤지지 않는 김수호가 나타나자 어마어마한 함성이 뒤따랐다.
그 모습을 본 마린스 직원들과 치안을 위해 나온 경찰들이 침을 삼켰다.
‘제발 아무 일 없어야 할 텐데.’
다행히 술에 취한 몇몇 사람들을 제외하면 문제가 생기진 않았다.
그렇게 퍼레이드는 사직구장에 이르러서 끝이 났다.
이제 마지막 하이라이트 차례.
마린스의 응원단장이 마이크를 잡고 외쳤다.
“자! 이제 올 시즌 우승 공약을 지키기 위한 추첨이 있겠습니다!”
시즌이 시작하기 전 열리는 미디어데이.
그때 참가한 선수들은 우승 공약을 걸어야 했다.
그리고 이번 미디어데이에 걸었던 마린스의 공약은 바로.
“선수들과 함께하는 드라이브입니다!”
“와아아아!”
우승을 하면 팬들을 태우고 선수들이 직접 운전을 하겠다는 거였다.
“자, 면허가 없는 선수들은 안타깝지만 팬 분들이 직접 운전을 해주셔야 합니다. 그럼 추첨 시작하겠습니다!”
그렇게 행사가 마무리되고 마지막으로 선수들에게 마이크가 쥐어졌다.
“내년에는 통합우승을 하기로 강주호 선배님과 팬분들께 약속했기 때문에 약속을 지킬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김수호의 말까지 끝나자 이제 단 한 명만 남았다.
“강주호! 강주호!”
강주호는 마이크를 잡고 트로프와 팬들을 번갈아 가면서 바라봤다.
“크흠, 안녕하십니까. 부산 마린스 선수 강주호입니다. 이렇게 팬 분들에게 인사를 드릴 때까지 무려 30년이 걸렸습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괘안타! 이제 매년 올 거 아이가!?”
강주호의 말에 함성을 뚫고 한 팬의 목소리가 울리자 팬들이 너도 나도 목소리를 냈다.
“맞다! 우린 진짜 괘안타!”
“우승 못하면 뭐 어때요! 강주호 선수 덕분에 행복했습니다!”
“울지마라 강주호! 우린 진짜 괜찮다!”
강주호나 팬들이나 겨우 멈췄던 눈물이 다시 쏟아지고 한참 후에 다시 말을 이었다.
“감사합니다. 저도 이제 한 명의 마린스 팬으로 돌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팬분들과 같이 야구를 즐기기 전에 아까 수호가 얘기했던 것처럼 내년에 멋진 모습으로 보답하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렇게 구십 도로 접힌 허리는 한참이나 펴질 줄을 몰랐다.
#
퍼레이드가 끝나고 남은 건 회식이었다.
“마셔!”
우승 당일은 플레이오프에서 약속했던 강주호가 쏘는 거였고 오늘은 구단 차원에서, 무려 구단주의 사비로 열린 회식이었다.
단장부터 코치진, 볼보이나 구단 직원들까지 전부 참여한 회식인 만큼 선수단 자리는 따로 있었다.
그리고 그새 간이 치유가 됐는지 어김없이 마시기 시작한 선수들이 각자 무리를 이뤘다.
“마! 수호야 행님은 내가 챙길 테니까 느그들끼리 마셔라!”
나는 채지훈의 배려(?)로 이주학, 이호민 등과 마시게 됐다.
“짠! 크으, 이게 얼마 만에 술이냐!”
“이틀 전에 마신 건 술 아니었냐?”
“그땐 우승 때문에 실감이 안 나서 기억도 잘 안 나!”
“작작 마셔라. 내일부터 훈련 시작해야지.”
내가 한마디 하자 갑자기 테이블 분위기가 싸해졌다.
“뭐, 왜 그렇게 보는데? 농담이야.”
“진짜 농담이냐?”
“아니. 저거 백퍼 진심이었어.”
“미친놈. 여기서까지 훈련 얘기를 한다고?”
“나도 쉴 거야. 그래서 너네 개인 훈련은 어떻게 하냐?”
“이번에 최치호 선배님이 같이하자고 하시던데?”
“나는 아직 계획 없어.”
“그래? 수호 넌?”
“수호는 나랑 해야지.”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전 미국 안 갈 건데요?”
“미국? 너 미국 가? 와, 스케일 미쳤네.”
“선배님! 여기 앉으세요.”
“고마워.”
이주학이 호들갑을 떠는 사이 허하준이 이호민 옆자리에 앉았다.
“그래서 진짜 미국 안 가게?”
“예. 가보고 싶긴 한데 헛바람만 들 것 같아서요. 가도 개인적으로 가려고요.”
“아쉽네. 재밌을 것 같은데.”
“다음에 또 기회가 있겠죠.”
“이번에 꽤 유명한 선수들도 온다는데?”
허하준이 나도 들어본 선수들의 이름을 언급하자 이호민의 눈이 초롱초롱해졌다.
“야! 이걸 왜 안가!? 나였으면 바로 갔다.”
나도 혹하는 이름들이 있긴 했지만 이미 오늘 최현우한테 말을 해놨다.
“그 얘기는 그만하고. 그래서 선배, 봉사는 언제에요?”
“아, 맞다. 내가 미국 일정 때문에 못 갈 거 같아. 그래서 둘이 가야 하는데 괜찮아?”
“봉사? 무슨 봉사?”
이주학이 궁금한지 물어봤지만 내 눈에는 허하준의 입 밖에 안 보였다.
굉장히 재밌는 걸 발견한 사람처럼 휘어진 입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