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끝과 시작 -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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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무대는 정규시즌엔 당연했던 어떠한 것도 장담할 수 없는 곳이다.
등판 때마다 불펜진의 부담을 덜어주고, 상대 타자들을 압도했던 에이스도 1이닝 만에 무너질 수 있었고 매 타석 홈런을 칠 수 있다는 자신감에 찬 타자도 공을 맞히기 급급할 정도로 무너지는 곳이었다.
반대로 매 이닝 실점을 하는 투수가 에이스로, 삼진만 당하던 9번 타자가 4번 타자급 활약을 펼치는 것도 역시 가을 무대였다.
하지만 적어도 마린스의 두 선수만큼은 정규시즌에 비견되는, 아니 정규시즌보다 더 인상 깊은 활약을 펼치고 있었다.
7회 초, 김수호의 홈런으로 3점의 리드를 안은 허하준이 마운드에 올랐다.
우승까지 남은 아웃카운트는 단 9개.
팀의 승리라면 퍼펙트게임 직전 9회 말 2아웃에도 아쉬움 없이 마운드에서 내려갈 수 있는 허하준이었지만, 오늘만큼은 저 9개의 아웃카운트를 양보하고 싶지 않았다.
그건 오롯이 이번 시즌 마린스를 지탱한 에이스의 것이었고, 그걸 공유할 수 있는 건 오직 한 명밖에 없었다.
‘수호야.’
허하준은 홈플레이트 뒤에서 마스크를 쓰고 공을 받을 준비를 하는 김수호를 보고 잠깐 생각에 잠겼다.
첫 만남은 우연의 연속이었다.
때마침 복귀를 위해 2군 경기를 뛰게 됐고, 하필 2군에 포수가 없어 임시 포수를 뛰게 된 김수호와 만나게 됐으니.
임시, 말 그대로 임시일 뿐이었다.
지금껏 단 한 번도 포수를 서본 적 없던 선수가 단번에 좋은 수비를 펼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냥 불가능이라 말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
하지만 김수호라는 존재가 나타난 순간부터 불가능은 쓸 수 없는 말이 됐다.
2군 경기를 시작으로 여기까지 오자 이제 팬이든 선수든 김수호가 없는 마린스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건 허하준도 마찬가지였다.
우승까지 남은 아웃카운트 9개, 그리고 해외 진출까지 남은 1년.
어떤 결과가 남을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후회는 남지 않는 순간이 됐으면 좋겠다.
생각을 정리할 즈음, 김효준이 타석에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분명 까다로운 타자였다.
돌핀스는 디펜딩 챔피언답게 빈틈이 없기로 유명한 팀이었다.
구멍이라고 부를 만한 곳은 존재하지 않았고, 김효준은 그 돌핀스의 중심에 있는 타자였다.
특히 최근 3년간 마린스 전체 투수 상대 타율이 3할 5푼이 넘는 등 마린스에게 특히 강점을 보였다.
하지만 오늘은 그저 3타수 무안타의 타격감이 좋지 않은 타자일 뿐이었다.
김수호의 사인을 보고 초구를 준비했다.
1회 첫 공을 던졌던 그 감각 그대로 손을 떠난 공이 원하던 궤적을 그리며 김효준의 몸쪽을 파고들었다.
“스트라이크!”
언제든 한 방을 칠 수 있는 타자에게 초구 몸쪽 포심은 부담스러울 수도 있지만, 허하준은 대수롭지 않게 공을 던졌다.
그가 던진 공을 믿었고, 그 코스를 요구한 김수호를 믿었다.
거기에 장타를 허용해도 상관없었다.
2루타 또는 3루타라면 주자가 못 들어오게 막을 자신이 있었고, 홈런이라면 김수호가 하나 더 쳐줄 거다.
가뜩이나 쉽게 칠 수 없는 공을 던지는 허하준이 망설임까지 없자 김효준은 죽을 맛이었다.
팀의 4번 타자로서, 그게 아니더라도 선두타자로서 반드시 출루 이상을 해야 하는 타석.
하지만 생각이 복잡했던 탓에 놓친 초구 몸쪽 포심이 아른거렸다.
‘시발, 이런 상황에서 저 공이 말이 돼?’
그도 프로 인생이 벌써 10년이 넘어가지만, 이런 배터리는 처음이었다.
겁이 없다.
아니, 겁을 넘어 심장이 없다.
황당함을 넘어 어이가 없을 지경이지만 굳이 밖으로 티를 내진 않았다.
아직 경기는 끝나지 않았다.
곧이어 2구가 들어왔고, 김효준의 방망이는 허공을 갈랐다.
“스트라이크!”
“후, 공 좆같네.”
포심의 잔상이 남아있는 상황에 저렇게 떨어지는 스플리터는 반칙 아닌가?
문제는 저 두 공 말고도 생각해야 할 구종이 너무 많다는 거였다.
유일한 희망이라면 커브인데.
‘웃어?’
기회가 왔다.
허하준은 경기에서 커브를 거의 던지지 않지만, 던질 때 미소를 짓는다는 걸 돌핀스 전력 분석원이 발견했다.
갑자기 들어온 커브에 반응도 못 하는 타자들의 반응 때문인지 뭔지는 몰라도 아주 중요한 정보였다.
빠른 공의 잔상이 남아있지만, 김효준은 무슨 구종이 온다는 걸 아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담장을 넘길 수 있는 타자다.
‘제발 가운데.’
방망이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리고 허하준의 손에서 공이 떠난 순간 김효준은 느꼈다.
‘이래서 웃은 거냐?’
“스트라이크 아웃!”
손을 떠날 때 이미 커브가 아니란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이미 머릿속엔 커브가 가득 찬 상황, 어떻게든 맞추려고 노력했지만, 공은 홈플레이트 근처에서 뚝 하고 떨어졌다.
또다시 스플리터.
힘줄이 튀어나올 정도로 강하게 방망이를 잡은 그가 터덜터덜 더그아웃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대기 타석에 있던 한상욱에게 한 마디를 꺼냈다.
“낚였다.”
도저히 잠을 이룰 수 없을 것 같은 이 감정에 그에게 다시 한번 기회가 오기를 기도하며 더그아웃으로 돌아갔지만.
“스트라이크 아웃!”
“아웃!”
그에게 다시 기회가 찾아오기란 요원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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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아웃카운트가 6개로 줄어들자 더그아웃에 점점 다리를 떠는 선수들이 늘어났다.
이주학은 연거푸 물을 마셨고 이호민을 위시한 투수들은 불펜에서 나올 생각을 안 했다.
-퍼어억!
-퍼어엉!
다만 들리는 포구음에 투수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양보할 생각은 없는데.”
허하준이 그 소리를 듣더니 싱긋 웃었다.
한국시리즈 마지막 아웃카운트를 잡는 건 투수라면 누구나 원하는 자리다.
하지만 그 자리에 오를 수 있는 투수는 단 한 명뿐이다.
“저도요.”
그리고 그 투수의 공을 받는 것 역시 단 한 명의 포수뿐이다.
내 말에 웃는 허하준을 보자 휑한 손목이 눈에 들어왔다.
“어, 팔찌 끊어졌어요?”
“아니.”
“예?”
끊어진 게 아니라면 어디 간 거지?
“내가 끊었어.”
“그래도 되는 거였어요?”
“글쎄?”
자기도 모르겠다는 반응에 어이없었지만, 그 결과가 7이닝 무실점이니 딱히 뭐라 할 말은 없었다.
이번 7회 말 공격은 이준부터 시작이었다.
투수는 이전 이닝에 올라왔던 최진하.
-퍼어억!
“스트라이크!”
경쾌한 투구와 포구음이 아직 경기가 끝나지 않았다는 걸 말해주는 듯했다.
하지만 올 시즌 마린스에서 가장 주목받지 못했던 이준은 가장 중요한 무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냈다.
-따악!
우중간을 가르는 타구에 2루까지 들어간 이준이 한껏 상기된 표정으로 더그아웃에 세레머니를 하자 선수들이 반겨줬다.
“준이! 좋았다!”
“그거지! 멋있다!”
“저 이준 선배가 저런 표정 짓는 거 처음 봐요.”
“나도 그래.”
존재감이 없던 이준도 흥분케 할 만큼 좋았던 타구 이후 이주학이 타석에 섰다.
-딱!
이제는 번트 하나는 안정적으로 맡겨도 될 만큼 자신의 역할을 완벽히 완수한 이주학이 더그아웃에 돌어왔다.
“깔끔했다! 나이스!”
“마, 이제 번트 하나는 기깔나게 대네.”
이제 1사 3루, 타석엔 박은성.
더 이상 점수를 내주면 답이 없다는 걸 아는 돌핀스에 새로운 투수가 올라왔다.
이솔찬이 마운드에 오르고 내야는 전진 수비를 하는 상황.
-따악!
자신의 역할을 정확히 이해한 박은성이 내야를 뒤흔드는 페이크 앤 슬레쉬로 내야를 살짝 넘기는 타구를 만들어냈다.
“선배님, 최고였습니다!”
“그래? 고마워.”
아까 상기된 표정은 사라지고 다시 무뚝뚝한 이준으로 돌아왔지만, 흥분은 가시지 않았다.
이어서 최치호의 2루타가 터졌다.
추가점을 기록한 것도 모자라 더 도망갈 기회를 마련했다.
1사 주자 2, 3루.
오준혁은 적극적으로 타격하면서 기회를 노렸지만, 내야 뜬공으로 타석을 마무리했다.
그리고 이제 내 타석이 돌아왔다.
“선배님.”
“어. 말해라.”
그리고 내 뒤에서 타격을 준비하던 강주호에게 말을 걸었다.
“저 너무 뛰면 남은 두 이닝 수비하기 힘듭니다. 제 말 무슨 말인지 아시죠?”
“시끄러 인마. 누가 보면 무조건 출루할 줄 알겠다?”
강주호의 말처럼 바로 고의사구가 나온 건 아니었다.
하지만 존에 한참 떨어진 볼 2개가 나오자.
“타자 1루로!”
그제야 고의사구가 나왔다.
이제 이번 경기, 아니 이번 시즌의 마지막이 될 수 있는 강주호의 타석.
1루에서 바라본 강주호는 여전히 거대했다.
그리고 부드러웠다.
-따아악!
모두를 숨죽이게 하는 한 번의 스윙.
그리고 짠 듯 한 번에 터져 나오는 함성.
“와아아아!”
“강주호! 강주호! 강주호!”
천천히 베이스를 돌고 홈에서 강주호를 기다렸다.
“역시 최곱니다. 선배님.”
대답은 말없이 가볍게 주먹을 맞대는 거로 충분했다.
이걸로 8대0.
최고의 무대에서 내 어린 시절 영웅과 맞댄 주먹은 최고로 짜릿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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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상 승부는 끝났다고 봐도 무방했다.
하지만 사직에 자리한 마린스 팬 중 그 누구도 자리를 비우지 않았다.
정확히는 비울 수 없다고 하는 게 맞았다.
지금 보는 이 아웃카운트 하나 하나가 늘어날 때마다 꿈꾸던 그 순간이 다가오는 거였으니까.
8회 초는 간단했다.
“스트라이크 아웃!”
“아웃!”
“아웃!”
돌핀스가 자랑하는 우익수, 최강민부터 시작한 타순은 순식간에 삼자범퇴로 물러났다.
대타까지 쓰면서 변수를 노려봤지만, 소용없었다.
이어진 8회 말 공격에서 2점을 추가한 마린스 야수들은 떨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그라운드로 나섰다.
이제 정말 마지막이다.
꿈에도 그리던, 아니 꿈에서 그려도 보이지 않았던 우승까지 남은 아웃카운트는 단 3개뿐.
그리고 그 영광된 순간에 자신이 마지막 공을 잡을 수 있기를 바라며 자신들의 자리로 향했다.
마운드에는 여전히 에이스가 서 있었고, 그 공을 받는 포수 역시 김수호였다.
돌핀스의 9회 초 공격의 선두타자는 이규영.
한 이닝에 10점을, 그것도 오늘 8이닝 동안 고작 세 명의 출루를 허용한 허하준을 상대로 내는 건 요원한 일이다.
하지만 한껏 굳은 얼굴로 타석에 선 그는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고 방망이를 휘둘렀다.
“스트라이크!”
초구 바깥쪽 포심에 헛스윙.
-따악
“파울!”
2구 몸쪽 투심을 쳤지만, 라인 밖으로 나갔다.
이어진 3구.
“볼!”
떨어지는 스플리터를 골라냈지만, 두 번 연속은 참을 수 없었다.
“스트라이크 아웃!”
떨어지는 공에 허무하게 돌아간 방망이에 혹시 공을 빠트리지 않을까 잠시 김수호를 바라본 이규영은 곧 그 행동을 후회했다.
너무 당연하게도 공은 미트에 들어가 있었고, 곧 미트가 엉덩이에 닿았다.
‘차라리 보지 말걸.’
그렇게 원 아웃.
“스트라이크!”
타석에 선 박광민을 바깥쪽 스플리터로 환영한 배터리는 이어서 강하게 압박하기 시작했다.
-따악!
“파울!”
힘껏 노려봤지만,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갈 생각이 없는 공에 박광민은 그저 방망이를 꽉 쥐었다.
“스트라이크 아웃!”
하지만 결과가 바뀌는 일은 없었다.
이걸로 투 아웃.
이제 이번 시즌의 마지막이 될 수 있는 타자, 스티브 오웬의 타석.
사인을 보낸 김수호도, 사인을 확인한 허하준도 동시에 미소를 지었다.
‘악랄하네.’
‘누가 할 소린데요.’
“스트라이크!”
초구, 방망이를 유혹하듯 홈플레이트에서 뚝 떨어지는 스플리터에 헛스윙.
“스트라이크!”
2구, 다시 비슷한 코스로 들어온 스플리터에 헛스윙.
그리고 3구.
“스트라이크 아웃!”
같은 코스에 비슷한 속도.
하지만 떨어지지 않은 포심에 마지막 주심의 콜이 들렸다.
멈춰버린 스티브 오웬과 공을 잡자마자 허하준에게 달려가는 김수호.
아주 잠시, 배터리에게 허락된 시간에 김수호가 허하준을 향해 외쳤다.
“약속 지켰습니다!”
모두가 지킬 수 없다고 생각했던 약속.
그게 이루어진 순간 허하준은 자신도 모르게 흐르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그리고 곧 그라운드를 향해 뛰쳐나온 선수들이 두 배터리를 덮쳤다.
[2032시즌의 우승은 부산 마린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