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끝과 시작 -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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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구를 시작하기에 앞서 허하준은 잠시 주변을 둘러봤다.
이미 가득 찬 팬들이 가장 먼저 보이고 채지훈, 잭 미켈, 최치호, 박은성, 이주학, 이준, 오준혁.
그리고 김수호.
그 모두가 자신을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처음 김수호와 1군에서 합을 맞추며 노히트노런을 했을 때도, 올림픽 결승전에서도, 심지어 퍼펙트게임을 기록했을 때도 떨리지 않았던 심장이, 공을 잡은 손이 떨리는 게 느껴졌다.
‘진짜 여기까지 왔네.’
이제 단 한 걸음, 그렇게 바라던 우승까지 단 한 걸음만 남았을 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마지막 한 걸음을 찍을 사람이 자신이라는 게 기꺼웠다.
생각해보면 왜 그렇게 우승에 집착했는지 모르겠다.
‘어릴 때부터 마린스 팬이라서? 아니면 기호 선배 때문에?’
그것도 아니면 40년간 우승은커녕 한국시리즈에 가지도 못한 팀을 응원하는 팬들 때문에?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명확하게 떠올랐던 것 같은데 오늘 마운드에 서니 불분명해졌다.
하지만 그 흐릿한 생각들 사이에서 명확하게 보이는 게 하나 있었다.
경기 시작에 앞서 공을 받기 전 미트를 두 번 오므리고 주먹으로 미트를 한 번 치고 투수를 바라본다.
눈이 마주치면 미트를 살짝 들면서 투수에게 말을 건다.
‘오늘 여기에 꽂으면 됩니다.’
듣지 않아도 어쩐지 들리는 목소리에 웃음이 절로 났다.
선두타자로 들어온 이규영이 웃음 때문인지, 그게 아니면 3패에 몰린 것 때문인지 인상을 쓰면서 들어왔다.
딱히 상관없다.
어차피 못 나가게 하면 그만이고, 나가도 김수호가 있으니까.
사인을 확인하자 다시 웃음이 난다.
‘낭만 있네.’
포수마스크를 쓴 김수호는 누구보다 냉정해 보이지만, 같이 호흡을 맞추는 투수만 알 수 있는 낭만이 있었다.
선명하게 보이는 미트를 보며 글러브 안에서 자연스럽게 공을 쥐었다.
수만 번이 넘게 그립을 쥐었고, 그 수치만큼 이 공을 던졌다.
그 수많은 순간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날은 아마 오늘 이 공이 되지 않을까.
투구를 준비하자 11월의 찬 바람이 허하준의 몸을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이미 충분히 달아오른 몸에 그저 시원한 바람으로 느껴질 뿐이었다.
기분 좋은 바람을 느끼며 왼 다리를 들었다.
바람이 그의 손을 떠난 공을 스쳐 지나갔지만, 맹렬하게 회전하는 공은 바람을 뚫고.
-퍼어억!
“스트라이크!”
존 한 가운데에 있는 김수호의 미트에 정확히 들어갔다.
바람이 날린 건 마운드에 떨어진 실오라기 하나뿐.
“와아아아아!”
156km의 포심과 동시에 올 시즌 사직 구장의 마지막 경기가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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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이 정확하게 요구한 곳에 온 덕분에 정확히 잡아냈다.
공에서 느껴지는 힘은 묵직했고, 제구도 괜찮아 보였다.
구위나 제구 모두 3일 전과 비교하면 크게 달라진 점을 찾기 힘들었다.
하지만 허하준도 사람이다.
투구수가 늘어나면 어떻게 될 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물론 최근의 마린스는 허하준이 일찍 내려간다고 해서 무조건 진다고 볼 수는 없지만.
‘그래도 약속한 건 지켜야지.’
야구계에는 쓸데없는 불문율이 많다.
예를 들자니 너무 많고, 개인적으로 그중 가장 마음에 드는 한 가지가 있다.
‘우승을 확정 짓는 건 에이스.’
마린스의 에이스는 두말할 것 없이 허하준이다.
그런 허하준이 우승을 확정 짓게 하려면 오늘 반드시 9이닝을 던져야 한다.
물론 오늘 지면 다음 기회가 있긴 한데.
‘그건 마음에 안 드는데.’
허하준이 마지막 공을 던지게 하려고 오늘 초반은 공격적으로, 그리고 맞춰 잡는 볼 배합을 짰다.
-따악!
초구를 그냥 흘려보낸 이규영이 다시 던진 포심에 방망이를 휘둘렀다.
꽤 잘 맞은 타구, 하지만 날카롭게 불어오는 바람에 막혀 더 뻗지 못하고 그대로 박은성의 글러브에 쏙 들어갔다.
‘장타 걱정은 없겠는데?’
마치 하늘도 허하준을 도와주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이어서 타석에 들어선 박광민 역시 초구는 흘려보냈다.
“스트라이크!”
공 한 개라도 더 보겠다는 생각인지, 아니면 생각하던 것과 달라서 그런지는 모른다.
아, 한 가지는 알고 있다.
“스트라이크!”
허하준에게 초구부터 카운트를 내주는 건.
“스트라이크 아웃!”
타자에게 좋을 게 하나도 없다는 것.
이어서 한상욱을 대신해 오늘 3번으로 출전한 스티브 오웬에겐 초구 스플리터를 요구했다.
“스트라이크!”
바운드 된 스플리터에 스티브 오웬의 방망이가 시원하게 허공을 갈랐다.
이어서 2구는 투심.
-타악!
누가 들어도 빗맞은 소리를 낸 타구가 이주학에게 굴러갔다.
가볍게 잡아서 1루로.
“아웃!”
바람도 불고 추운 상황에 이주학이 깔끔한 수비를 선보였다.
이 정도면 가장 완벽한 1회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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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회 초가 끝나자 포수 뒤편 관중석에서 감탄 어린 목소리들이 흘러나왔다.
“하준이 오늘 공 쥑이네!”
“공 7개로 삼자범퇴? 오늘 15이닝 퍼펙트 페이슨데?”
“마! 말이 씨가 된다 모르나! 입조심 해라!”
신이 난 관중들 사이로 팔짱을 끼고 경기를 보는 한 남자가 있었다.
훤칠한 키와 화려한 선글라스, 1회 초가 끝날 때까지 거기에 한마디도 하지 않는 묵직함까지.
주변에 있던 많은 사람이 생각했다.
‘안 춥나?’
‘존나 추워 보이는데?’
곧 그 남자에게 이목을 끄는 요소가 하나 더 추가됐다.
“나카무라 상. 여기 핫팩입니다.”
백인 남자가 유창한 일본어로 남자에게 말을 걸자 모르는 척 귀 기울여 듣던 사람들이 흠칫했다.
‘나카무라? 일본?’
평범한 한국인은 모르겠지만,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마린스의 자랑스러운 세 선수가 활약했던 올림픽을 실시간으로 봤던 사람들.
그 조합만으로 나카무라 준을 떠올렸다.
하지만 이내 신경을 껐다.
‘나카무라든 나가사키든 우리 하준이가 더 잘 던진다.’
‘일본 이번에 4등 하지 않았나? 마린스가 일본 가도 우승할 수 있겠는데?’
최근 마린스의 활약에 국뽕을 넘어 팀뽕까지 치사량에 중독된 마린스 팬들에게 나카무라 준은 그냥 일본인 1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애초에 진짜 나카무라 준이 맞는지도 잘 모른다.
아무튼 제이슨의 말에 나카무라는 묵묵부답했다.
정확히 말하면 대답을 안 한 게 아니라 못한 거였다.
‘인정하기 싫다.’
자신의 라이벌이자 동료라고 생각했던 김수호가 다른 팀에서 뛰는 것까진 이해했다.
그는 한국인이었고 자신은 일본인이라는 사실은 어쩔 수 없으니.
하지만 저 허하준이라는 투수.
분명 김수호 하이라이트를 보면서 띄엄띄엄 봤을 때보다 훨씬 좋은 공을 던졌다.
‘물론 나보다는 못하지만.’
김수호와 허하준의 조합이라면 어쩌면 자신이 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갔다.
“제이슨, 저 투수도 메이저에 오나?”
“아, 예. 내년 시즌이 끝나고 포스팅으로 진출 예정입니다.”
“김수호는 7년 남았고?”
“그렇죠.”
미간을 찌푸린 나카무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주저 없이 밖으로 나갔다.
‘갑자기 왜 저래?’
급하게 따라간 제이슨이 나카무라를 잡았다.
“갑자기 어디 갑니까?”
“일본으로 돌아간다.”
“예? 경기가 이제 시작했는데요?”
“경기는 볼 필요 없다.”
제이슨이 굳이 나카무라를 데리고 이 경기에 온 건 허하준과 존 그레이, 메이저리그에서 노리는 두 투수의 경기를 보면 좋을 것 같아서였다.
나카무라도 관심을 보여서 겨우 데려왔더니 갑자기 간다라.
엉뚱한 걸 알았지만 이건 도가 지나쳤다.
“나카무라 상. 그래도 이번 경기는···.”
“어차피 마린스가 이기겠지.”
“예?”
“존 그레이라는 투수, 허하주느보다 잘 던지나?”
“그건 아닙니다.”
“그럼 더더욱 볼 필요가 없어졌군.”
제이슨이 나카무라를 안 지는 꽤 됐지만, 이렇게 살아있는 표정을 본 건 처음이었다.
그 감정은 이를테면, 투정.
장난감을 뺏긴 아이들이 주로 보이던 걸 나카무라의 얼굴에서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꽤 정확했다.
‘김수호, 너와 합을 맞춰야 하는 건 나뿐이다.’
최고의 투수에 어울리는 최고의 포수.
나카무라의 생각에 최고의 포수 자리는 이견이 없다.
하지만 오늘 경기에서 최고의 투수를 위협하는 선수를 만났다.
한 포수가 합을 맞출 수 있는 에이스는 단 한 명뿐.
그 자리를 뺏길 생각은 추호도 없다.
‘김수호가 메이저에 오는 건 7년 뒤.’
그때쯤이면 나카무라와 허하준은 이미 메이저에 자리 잡고 있을 터.
‘네가 선택해라. 김수호.’
물론 지극히 혼자만의 생각에 불과했다.
그러는 와중 갑자기 어마어마한 함성이 들렸다.
제이슨이 나카무라 눈치를 보더니 살짝 경기장을 보고 돌아왔다.
“김수호 타석입니다.”
제이슨은 나카무라의 눈이 순간적으로 흔들리는 걸 놓치지 않았다.
“저 타석만 보고 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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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하준이 3일 휴식 후 등판인 것처럼 존 그레이 역시 마찬가지였다.
체력적인 부담에 더불어 팀이 3패에 몰렸다는 심리적인 부담도 있을 텐데 박은성과 최치호를 깔끔하게 잡아냈다.
“그냥 느낌이지만 1차전보다 공이 더 좋아. 투심 노리다가 체인지업 들어오니까 타이밍이 아예 안 잡혀. 조심해라.”
최치호의 조언을 듣고 오준혁의 타석을 지켜봤다.
돌핀스 배터리 역시 우리와 비슷한 생각인지 존에 공을 연속으로 집어넣으면서 구위로 누르려는 모습을 보였다.
3구까진 좋았지만, 4구에 덜 떨어진 체인지업이 오준혁의 스윙에 제대로 걸렸다.
“아, 까비. 저게 안 넘어가네.”
평소였다면 안 봐도 홈런이었겠지만, 바람이 강하게 분 탓에 비거리가 줄어 담장 상단에 맞고 떨어졌다.
바람이 마냥 우리 편은 아니었다.
그래도 2루까지 들어가면서 2사 2루.
따악!
“파울!”
초구에 체인지업을 노렸는데 생각보다 타이밍이 더 늦었다.
아까 대기 타석에선 꽤 정확했는데?
‘존 안에 들어온 걸 보면 내보낼 생각은 아닌 것 같고.’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유력한 건 역시 특별 대우일 거다.
특별히 내 타석엔 전력투구하겠다는 뜻.
“부담스러운데.”
“뭐?”
“혼잣말입니다.”
짧게 내뱉은 혼잣말에 포수마스크를 쓰고 있는 최민규가 예민하게 반응했다.
후,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말도 편하게 못 하는 걸까.
거기에 존 그레이도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본다.
대화 한 번 해본 적 없는데 저렇게 노려보다니.
‘무섭다, 무서워.’
겁먹은 김에 하나 지켜보기로 했다.
그래도 가만히 서 있기만 하면 그러니까 방망이를 반쯤 내면서 타이밍을 점검했다.
“볼!”
2구는 낮게 들어오면서 볼, 1-1의 카운트.
‘내가 생각해도 나랑 상대하고 싶진 않긴 해.’
다른 기록은 그렇다 쳐도 포스트시즌 10홈런은 내가 봐도 부담스럽다.
언제 10개나 쳤지?
물론 이제 고작 1회고, 뒤에 강주호가 버티고 있는 한 승부를 피하진 않을 거다.
“볼!”
하지만 어렵게 가고 싶겠지.
‘또 낮은 볼.’
앞선 세 타자에겐 높은 공도 종종 던졌지만, 나한텐 3구 연속 낮게 들어왔다.
어떻게든 땅볼을 유도해내겠다는 집요함이 느껴지는 투구였다.
그래도 바람이 이렇게 부는데 높게 하나 정돈 던질 만하지 않나?
“볼!”
다시 낮게 들어온 볼을 골라내면서 3-1.
에라이, 이 정도로 대접해준다고 하면 내가 맞춰야지.
-따악!
다시 낮게 들어오는 공을 노리고 강하게 때렸다.
존 그레이가 급하게 글러브를 뻗어봤지만 잡지 못했다.
이제 유격수와 2루수만 뚫으면 되는데.
둘 중 더 가까운 건 유격수.
“나이스! 빠졌다!”
“홈! 홈!”
2루 베이스 위를 통과한 타구에 이규영이 급하게 달려 나왔지만, 타격 직후 스타트를 바로 끊은 오준혁이 여유롭게 홈으로 들어왔다.
홈런은 못 쳤지만, 오늘 선발을 생각했을 때 선취점은 정말 기분 좋았다.
팬들의 말을 빌리자면, 허하준 선발 경기에 1점은 뭐다?
이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