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처음이라고요? -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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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에서 1대0이란 스코어는 오묘하다.
홈런 한 방에 동점, 혹은 역전까지 바라볼 수 있는 스코어에 선두타자가 출루만 해도 간단하게 낼 수 있는 점수가 바로 1점이다.
특히 돌핀스나 프렌즈 같은 강팀에게 1점은 언제든지 따라잡을 수 있는 점수에 불과했다.
그런 이유에서 되레 앞서고 있는 팀이 쫓기는 듯한 느낌을 받는 건 야구팬이라면 한 번쯤은 느껴본 감정이다.
하지만 상대 투수가 허하준이라는 것만으로 지금까지 했던 얘기는 성립 자체가 안된다.
“스트라이크!”
벌써 세 번째 타석에 선 이규영이지만 초구 몸쪽으로 날카롭게 꽂히는 포심에 몸이 굳어버렸다.
‘어차피 투 아웃인데 그냥 휘둘러?’
하지만 그런 생각으로 휘둘러봤자 좋은 결과로 이어질 리 없다는 걸 스스로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 짧은 생각을 하는 틈을 타 허하준이 다시 투구를 시작했다.
“스트라이크!”
이거다.
허하준의 공이 좋은 건 알고 있었지만, 올 시즌 그야말로 다른 투수가 돼버린 이유.
김수호 이전 허하준과 합을 맞추던 마린스 포수들은 항상 고민이 길었다.
포수들이 뭔 생각을 하는지 이규영이 알 방법은 없지만, 기록이 말해줬다.
고민이 길어지면 스플리터가 나올 확률이 현저하게 떨어졌다.
매번 맞는 건 아니었지만, 이런 정보 하나 하나가 쌓여서 투구수를 늘리고, 안타를 치는 거니 매우 중요한 정보였다.
하지만 김수호와 배터리를 이루고 나서부턴 투구 템포가 일정해졌다.
그리고 아주 빨라졌다.
첫 타석 무기력한 삼진을 당한 것도 그것 때문이었다.
포심, 투심, 스플리터.
이 세 구종이 다른 에이스 투수들 위닝샷, 그 이상급으로 날아오는데 빠른 템포 속에 커브 같은 변화구를 생각하는 건 쉽지 않았다.
거기에 볼도 잘 안 던지니 방망이를 잡고 있어봤자 스트라이크만 늘어나는 꼴이다.
“볼!”
“후우.”
겨우 나가던 방망이를 멈추고 3루심의 판정을 받은 이규영이 한숨을 쉬고 잠시 타석 밖으로 나갔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도저히 저 템포를 끊을 수가 없었다.
물론 타석에 들어서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공을 뿌려서 생각할 틈도 없이 방망이를 내던지듯 공에 갖다 댔다.
-딱!
“파울!”
겨우 걷어내긴 했지만, 바깥쪽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변화구에 이규영의 방망이가 쉴 틈 없이 돌아갔다.
“파울!”
“파울!”
“스트라이크 아웃!”
바깥쪽 공을 걷어내니 아예 땅을 때리는 변화구에 헛스윙 삼진.
혹시 빠졌을까 기대해봤지만, 공을 잡은 김수호와 눈이 마주쳤다.
‘얄미운 새끼.’
차마 입으로 내뱉진 못하고 방망이를 들고 더그아웃에 들어갔다.
6회까지 단 1안타.
특히 3회부터 6회까지 전부 삼자범퇴로 이닝이 끝났다.
3주의 휴식으로 몸이 굳었다? 그딴 건 패배자들이 하는 변명에 불과했다.
돌핀스는 1위를 밥 먹듯이 한 팀이었고 선수들은 한국시리즈에 컨디션을 관리하는 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냥 인정해야 했다.
자존심이 상하지만 허하준이, 그리고 김수호가 너무 완벽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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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라이크 아웃!”
8회를 삼자범퇴로 마무리하고 더그아웃에 돌아가는 길에 투수코치님이 허하준을 붙잡고 말했다.
“하준아. 9회에도 고생 좀 하자.”
“예. 좋습니다.”
허하준도 당연하다는 듯 반응하는 걸 보면 본인이 오늘 얼마나 잘 던진 줄 알고 있어 보였다.
8회까지 1피안타 무실점 10k.
아직 경기가 끝난 건 아니지만, 허하준의 투구는 정말 최고였다.
투구수도 91개로 아직 여유가 있는 상황.
불펜을 보니 누구도 몸을 푸는 선수가 없었다.
물론 9회 초 공격이 끝나면 몸을 풀긴 하겠지만, 오늘 허하준의 공을 받은 내 미트가 다른 투수의 공을 받을 일은 없을 거다.
딱 한 가지 2회에 빗맞은 안타가 아쉽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운의 영역이었다.
허하준에게 다가가 9회 말에 대한 얘기를 했다.
“선두타자 때 대타가 나올 거 같아요. 아마 한방이 있는 오규석 선배나 빠른 한성택 선배가 나올 거 같긴 한데 큰 문제는 없을 거예요. 그나마 가장 위력적인 타자를 꼽으라면 이규영 선배 정도?”
“그렇지.”
오늘 이규영의 성적이 3타수 3삼진이긴 하지만 출루를 허용하면 순식간에 동점 주자가 되는 만큼 특히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가장 좋은 건 추가점을 뽑는 건데....”
우리에게 남은 공격 기회는 9회 초 한 번이었다.
돌핀스 선발인 존 그레이는 8회까지 1실점만 한 채 마운드가 교체됐다.
뒤이어 올라온 투수는 돌핀스의 마무리 투수, 오상엽.
우리도 잭 미켈부터 타석이 시작하니 큰 거 한 방을 기대할 만했다.
하지만 오상엽도 만만한 투수는 아니었다.
잭 미켈, 대타 김민석, 그리고 이준(수비 때문에 대타 기용은 없었다.)을 전부 범타 처리하면서 가볍게 무실점을 기록하고 내려갔다.
아쉽지만 1점도 큰 상관 없다.
1대0이나 2대0이나 9회를 틀어막으면 이기는 건 똑같다.
허하준에게 글러브를 건네고 마지막 이닝을 마무리하기 위해 나왔다.
8번 타자부터 시작한 돌핀스의 마지막 공격, 예상대로 대타가 나왔다.
오규석, 우타자로 장타툴이 있어서 중요한 순간마다 홈런을 쳤던 좋은 타자다.
하지만 그게 허하준의 공을 처음 보고 칠 정도라는 말은 아니다.
-타악.
둔탁한 소리가 들리고 느리게 투수 앞으로 튄 공을 허하준이 잡고 가볍게 1루로 던졌다.
원 아웃.
이어서 한성택이 대타로 나왔다.
좌타자에 주력이 상당히 좋아 코스만 좋다면 2루까지 노려볼 수 있는 타자다.
“스트라이크 아웃!”
하지만 그것도 공이 밖으로 나가지 않으면 큰 의미가 없었다.
스플리터에 삼구삼진을 당한 한성택이 고개를 숙이고 더그아웃으로 돌아갔다.
이제 경기의 마지막 타자가 될 수 있는 타자가 타석에 섰다.
오늘 3타수 무안타 3삼진으로 부진한 이규영의 선택지는 간단했다.
-딱!
방망이를 내던지다시피 바깥쪽으로 빠지는 공에 번트를 댔다.
하지만 워낙 급박하게 댄 거라 살짝 뜬 타구가 뒤로 튀었다.
‘잡을 만한데?’
이 생각이 들었을 땐 이미 타구를 향해 몸을 던진 후였다.
그리고 날 바라보고 있는 더그아웃 선수들을 향해 꽉 닫힌 미트를 들어 올렸을 때.
“아웃!”
그 사람들의 표정을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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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 돌핀스 0 : 1 부산 마린스]
[선발 투수의 완벽투, 안방마님의 다이빙 두 번. 경기를 끝내다.]
[첫 한국시리즈 경기를 완봉승으로 장식한 허하준. 역시는 역시였다.]
[시리즈 첫 승의 주인공은 마린스! 2차전으로 요그 하스 앞세워 2승을 노린다!]
[존 그레이, 8이닝 1실점 호투에도 패전투수. 인터뷰에서 ‘내가 좀 더 잘 던졌어야 했다.’며 자책.]
[마린스 감독, ‘허하준은 언제나 기대 그 이상을 해주는 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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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경기를 이겨야 하는 시리즈에서 고작 한 경기에서 이긴 것에 불과했다.
아직 좋아하기엔 일렀지만, 선수들의 입가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투수 소비도 적었고 에이스간의 대결에서도 승리했다.
심지어 1대0이라는 아슬아슬한 스코어에서 승리했으니 이번에 거둔 1승은 단순한 1승이 아니었다.
“너네 너무 좋아하지 마라. 아직 우승한 거 아니다.”
“선배님이 제일 좋아하시는 거 같은데요?”
그중에서 가장 좋아한 건 역시 강주호였다.
지난 플레이오프 때 축 처진 사람과 같은 사람이라고 하면 못 믿을 정도로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오늘 성적도 4타수 2안타로 끝내기 이후 완전히 감을 되찾은 모습을 보여줬다.
지금도 저렇게 좋아하는데 만약 정말 우승한다면 얼마나 좋아할까.
조금 무섭기도 하다.
저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부산에만 몇만 명이 있을 텐데 만약 정말 우승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표정이 불순한데? 무슨 생각 하냐?”
“음. 세계평화와 꿈 중에 뭐가 더 중요한지 고민 좀 하고 있었어요.”
“또, 또. 영문 모를 소리 한다.”
틀린 말은 아니지 않을까?
아무튼 강주호가 저렇게 좋아하는 것도 전부 1차전의 중요성 때문이다.
한국시리즈에서 1차전 승리 팀이 우승할 확률은 무려 75%.
4팀 중 3팀이 우승한 거니 꽤 높은 확률이다.
물론 우리가 잘해야 하는 게 우선이다.
그걸 위해서 내일 선발 투수인 하스의 컨디션을 점검해보려고 했는데.
“하스 어딨는 줄 아세요?”
마주치는 사람마다 물어봤지만 아무도 모른다고 했다.
워낙 눈에 띄는 사람이라 오며 가며 봤을 법 한데 한 명도 못 봤다니.
뭐, 오늘 경기도 없었으니 먼저 버스에 갔겠지.
나도 다른 선수들을 따라 퇴근했다.
하지만 숙소에서도 하스는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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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호가 요그 하스를 찾지 못한 이유는 간단했다.
“수행은 잘하고 있나?”
바로 그보다 먼저 하스를 찾아온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뇨.”
하스를 찾아온 건 이주학과 구단 통역사.
퇴근 시간에 이주학에게 붙잡혀 끌려온 통역사였지만 흔쾌히 수락한 이유가 있었다.
‘혹시 알아? 얘도 김수호처럼 대단한 선수가 될지.’
일종의 저점매수였다.
이런 시간에 하스를 찾아오는 것도 그렇고, 눈을 불태우는 걸 보면 승부욕이 보였다.
그리고 구단에서 통역 일을 하면서 저런 눈빛을 가진 선수들이 어떻게 커가는지 잘 봐왔다.
아무튼 하스를 찾은 이주학의 목적은 간단했다.
‘나도 활약하고 싶다.’
이주학의 나이를 생각하면 지금도 좋은 활약을 보여주는 건 맞았다.
나름 쏠쏠한 출루를 하기도 했고, 어려운 수비도 척척하니 팬들 사이에선 이미 김수호, 이호민, 이주학 세 명을 마린스의 미래로 칭할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저기에서 이름이 가장 뒤에 있는 게 이주학인 걸 보면 다른 두 명에 비해 임펙트 있는 활약을 펼치진 못했다.
특히 오늘은 심장이 너무 뛰어서 공이 올 때마다 어떻게 잡았는지 기억도 잘 안 났다.
“괜찮다. 수행은 어디까지나 부차적이지, 레타쿠를 믿는 네 마음이 변함없다면 큰 문제는 없다.”
“만약 믿다가 안 믿으면요?”
“그것 역시 큰 문제 없다. 레타쿠는 지키는 신이지, 누군가를 해치는 신이 아니다.”
도대체 레타쿠가 어떤 신인지 감이 안 잡힌다.
하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하스. 저 진짜 내일 경기에서 활약하고 싶어요.”
“급하게 생각하지 마라, 리. 자네는 좋은 청년이고 조금만 기다리면 빛을 볼 날이 있을 거다.”
“조금이 언젠데요?”
“글쎄. 내일이 될 수도 있고 10년 뒤가 될 수도 있지.”
뜬구름 잡는 듯한 하스의 말에 이주학이 답답한지 계속 물었다.
“정말 방법이 없어요?”
“리.”
“하스, 예? 부탁이에요.”
끈질긴 이주학의 부탁에 결국 하스가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대신 어떤 대가가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 그래도 괜찮나?”
“예! 괜찮아요!”
하스가 고민 끝에 통역에게 말했다.
“잠시 자리를 비워주겠나.”
“예? 그러면 대화는 어떻게 하고요?”
그러자 하스가 핸드폰을 툭툭 쳤다.
“PAP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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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스, 어디 갔었어요? 한참 찾아도 안 보이던데요?”
내가 하스를 만난 건 경기장에서였다.
“내일 경기를 위해 리와 함께 레타쿠께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킴, 자네도 같이할 텐가?”
“아, 저는 괜찮아요. 그것보다 주학이랑요?”
요즘 명상도 잘 안 하던데 용케 했네?
“그렇다. 어제 날 찾아와서 활약하고 싶다고 말하더군.”
“그래요?”
어제 수비도 괜찮게 했는데 갑자기 왜 그러지?
“그래서 뭘 했는데요?”
“레타쿠는 내 고향을 수호하던 수호신이다. 알고 있나?”
“네. 조금은요.”
“레타쿠는 기원전보다 전, 그러니까 아직 문명이란 단어가 생기기 전보다 더 오래 전부터 우리 부족을 지켜주고 있었지. 그때는 인간이었다.”
“정말요?”
그렇게 역사가 길다고?
“그리고 부족이 위기에 닥친 순간, 레타쿠는 자기 신체를 제물로 부족을 지켜냈지.”
“제물이요?”
뭔가 섬뜩한데?
“그 이후 우리 부족은 레타쿠를 수호신으로 모시며 신체를 제물로 삼아 위기를 모면하곤 했다.”
신체? 제물?
“혹시 주학이도···?”
“저기 오는군.”
하스의 눈짓에 조심스럽게 뒤를 돌았다.
“...풉.”
“...읏즈므르.”
그리고 거기엔 웬 밤톨이 한 명이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