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처음이라고요?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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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렌즈는 이번 시즌 마린스를 상대로 가장 많은 승리를 거둔 팀이다.
10승 6패.
시즌 성적도 승패로 따지면 13경기, 승률로 따져도 거의 10% 가까이 되는 차이였다.
하지만 정규 시즌 동안 착실하게 쌓아온 기록이 전부 무의미해지는 순간이 왔다.
플레이오프 전적 1승 2패.
그리고 4차전 마린스의 0대2 리드.
1점만 내도 이긴다는 사무엘 우즈의 선발 등판도, 1점만 앞서도 이긴다는 최강 불펜도, 그 1점을 만들어내는 서도하를 위시한 타선도 전부 무의미해지는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
그리고 그건 전부 한 선수 때문이었다.
애써 그 이름을 머릿속에서 지운 감독이 선수단을 향해 외쳤다.
“어떻게든 1점부터 만들어내!”
저번 경기에서 2홈런을 쳤지만, 애당초 팀 홈런 9위의 타선은 한방을 기대하기가 힘들다.
특히 이런 경기에선 미친 선수가 나와서 활약해야 했지만.
‘왜 마린스 선수들만 저러냐고!’
시리즈 내내 좋은 컨디션을 보여주는 오준혁, 말이 필요 없는 허하준, 그 외에도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는 다른 선수들.
그리고 14타석 10타수 5안타 2홈런 8타점.
타율이 정확하게 5할에 0.643의 출루율, 그리고 장타율을 무려 1.300을 기록하고 있는 김수호까지.
특히 김수호는 공격에서만 활약하는 게 아니었다.
선취점을 만들어낸 홈런 이후 코너에 몰린 프렌즈 타자들을 약 올리듯 포심과 커브를 적절하게 활용하며 타이밍을 뺏는 볼 배합은 일품이었다.
그런데도 프렌즈 감독은 아직 희망을 놓지 않았다.
‘잠실까지 가면, 아무리 선발이 허하준이라도 불펜 싸움으로 가면 할만하다.’
어제 일은 단순한 헤프닝에 불과했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못 치겠으면 투구 수라도 빼! 선발만 일찍 내리면 아직 할만하다!”
그런 감독의 외침에도 타자들은 웰링턴의 커브에 타이밍을 맞추지 못했다.
결국 3회가 끝나도록 단 한 명의 주자도 1루를 밟지 못했다.
“혁이, 도하! 이리 와봐.”
수비에 나갈 시간이지만 두 선수를 부른 감독의 말은 끊이지 않았다.
그렇게 마린스의 공격을 사무엘 우즈가 잘 막아내고 프렌즈 타순이 한 바퀴 돌았다.
선두타자로 나선 김혁이 감독의 임무를 충실하게 수행해냈다.
-딱!
“세이프!”
기습적으로 번트 모션을 취하면서 코너 내야수들이 다가오게 만들고 기술적인 타격으로 밀어 쳐 3루수 키를 넘겼다.
끌려가는 상황에 만들어낸 천금 같은 기회, 그 기회를 가장 잘 살릴 수 있는 타자가 타석에 섰다.
서도하가 타석에 서기 전, 감독은 서도하에게 작전을 전달했다.
루상에 나가 있는 김혁도 작전을 확인하고 리드폭을 조절했다.
그에 맞서 리드폭을 줄이기 위한 견제가 이어지고 던진 초구.
“뛰었다! 2루!”
“스트라이크!”
웰링턴이 공을 던지자마자 스타트를 끊은 김혁과 오직 포심만 생각하고 큰 궤적에 방망이를 휘두른 서도하가 동시에 생각했다.
‘됐다!’
이번 런 앤 히트 작전은 이론상 실패할 확률이 낮았다.
포심이나 슬라이더가 들어오면 컨택 능력이 뛰어난 서도하가 좋은 타구를 만들어낼 거고 커브라면 김혁이 충분히 2루에 살아 들어갈 수 있다는 판단하에 펼쳐진 작전이었다.
이제 김혁이 무사히 2루에 들어가기만 하면 됐다.
하지만 이론은 어디까지나 이론에 불과했고, 프렌즈의 생각은 단 10초도 걸리지 않고 박살 났다.
“아웃!”
커버를 들어온 이주학이 글러브를 주자의 몸에 대지 않아도 자동으로 태그가 될 정도로 완벽한 송구에 프렌즈 벤치는 얼어붙었다.
반면 그 장면을 본 마린스 팬과 선수들은 말 그대로 난리가 났다.
“김수혼데~ 김수혼데~”
어느 순간부터 김수호가 도루저지를 기록하면 나오는 특유의 응원이 프렌즈 타자들의 멘탈을 건드렸다.
선두타자 출루를 지워버리는 총알 같은 송구.
무사 주자 2루를 노렸던 프렌즈에게 남은 건 전광판에 들어온 빨간 불 하나와 노란 불 하나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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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실을 홈으로 쓰면서 분명 이점이 있었겠지만, 사무엘 우즈는 그걸 떼어놓고 봐도 좋은 투수다.
“스트라이크!”
1회, 초구부터 홈런을 맞은 날 상대로 다시 초구 스트라이크를 넣을 수 있다는 것만 해도 말이다.
‘기세에서 밀리면 안 된다고 생각하나?’
일리 있는 생각이었다.
야구에서 2점은 스윙 한 번에 동점, 혹은 역전까지 될 수 있는 점수다.
추가 실점을 막으면 언제든지 역전할 기회가 있다는 말이었다.
반대로 우리로선 웰링턴이 잘 던져주고 있지만, 추가점이 필요한 상황이다.
‘공격적으로 들어오면 땡큐지.’
2구에 가운데 비슷하게 들어오면 타격할 준비를 하고 기다렸다.
‘웁스.’
“볼!”
하지만 2구는 몸쪽 높게 바짝 붙어 들어오면서 볼이 됐다.
자칫하면 몸에 맞을 뻔했지만, 사과는 없었다.
애초에 이런 상황에서 받을 생각도 없었고, 받을 만한 상황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건 내 생각이고.
“마! 돌았나!”
“지금 누구한테 그딴 똥볼을 던지는 건데! 어!?”
관중석에서 마구잡이로 날아오는 말에 사무엘 우즈가 ‘한국말 몰라요’로 일관했다.
진짜 모르기도 할 거고, 부산 팬들이 이러는 거야 하루 이틀 일도 아니었다.
“볼!”
그래도 신경이 안 쓰일 순 없는지 다시 볼이 들어왔다.
이제 다음 1구가 정말 중요해졌다.
그리고 프렌즈 배터리가 선택한 공은 다시 한번 몸쪽.
“...볼!”
“아, 이건 스트라이크죠! 여기서 좀만 바깥쪽으로 빼면 가운덴데 이게 어떻게 볼이에요!?”
웬만해선 볼 카운트에 불만을 내지 않는 박희준이 심판에게 따졌다.
하지만 심판은 이런 중요한 경기에서 이슈가 생기는 걸 최대한 피하려고 한다.
“볼이야. 불만 있으면 얘기해.”
“하.”
심판의 압박을 받은 박희준이 낮게 숨을 내뱉고 사무엘 우즈에게 공을 건넸다.
나야 가만히 있었는데 저절로 상황이 좋아졌으니 굳이 기분 나쁠 이유가 없고, 핵심은 투수다.
타자 입장에서 볼 때 3-1이란 카운트는 정말 완벽하다.
3볼에서 한 가운데에 오는 공을 지켜볼 필요도 없고, 풀카운트처럼 스윙 한 번에 기회가 끝나는 것도 아니다.
큰 부담 없이 내 스윙을 가져갈 수 있는 카운트.
물론 굳이 3-1에 휘둘러서 출루를 아웃으로 만든다고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적어도 한 구단의 4번 타자라면 이런 상황에서 가운데 오는 공을 지켜보는 건 말도 안 된다.
-따아아악!
약간 먹힌 느낌이 들었지만, 타구는 목적지에 정확하게 착지했다.
1회에 날렸던 홈런과 거의 같은 위치에 떨어지는 걸 확인하고 베이스를 돌기 시작했다.
‘한 점으론 부족하지.’
점수는 여유로우면 여유로울수록 좋다.
그러기 위해선 지금 마운드에서 버티고 있는 저 투수를 끌어내려야 한다.
홈런 자체도 투수에게 큰 데미지다.
거기에 무언가 액션을 추가하는 것만으로 멘탈을 더 흔들 수 있다.
약간 유치하다고 할 수도 있지만, 타구를 확인하고 베이스를 돌아서 투수의 멘탈을 공격할 수 있다면 백번이고 이렇게 할 거다.
“우와아아아!”
거기에 팬들도 좋아하니까 일석이조다.
확실히 나도 티비에서 선수들이 그런 모습을 보여주면 멋있게 보긴 했다.
하지만 그러다가 담장을 안 넘어가기라도 하면 사고다.
그러다 아웃당하면 쪽팔려서 평생 박제될 거다.
아쉽지만 확신이 들 때만 가끔 하는 걸로 하고.
대기타석에 있던 강주호가 가장 먼저 반겨줬다.
“그러다가 공 맞는다?”
“그럼 공짜로 출루하는 거죠. 그리고 제 보디가드들이 여기 2만 명이나 있어서요.”
이 상황에서 나한테 공을 맞춘다?
상상하기를 포기했다.
“얼른 들어가라. 네 보디가드들 저깄네.”
강주호의 눈짓에 더그아웃을 바라보자 먹잇감을 기다리는 하이에나들이 보였다.
“전 하이에나를 보디가드로 쓴 적 없는데요?”
내가 진짜 더그아웃용 헬멧으로 바꾸고 만다.
아오, 내 머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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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쉽게도 멘탈이 흔들리지 않은 사무엘 우즈는 그 이후로 호투하며 6회 1아웃까지 책임지고 마운드에서 내려갔다.
왜 애매하게 1아웃이냐면.
“4번 타자! 김수호! 홈런! 김수호!”
내 바로 앞 오준혁까지 상대하고 내려간 거였다.
하긴, 이런 상황에서 홈런 2방을 맞은 투수를 고수하긴 어렵지.
미련이 남는지 계속 내 쪽을 바라본다.
오늘이 그의 KBO 마지막 등판일 테니까 이해는 된다.
이미 시즌 중에 메이저 구단들의 러브콜을 받는 저 투수가 굳이 한국에 남을 이유는 없다.
근데 왜 오늘이 마지막이냐고?
당연히 우리가 한국시리즈에 갈 거니까.
아쉬워하는 사무엘 우즈를 뒤로하고 올라온 투수는 이신영이었다.
국가대표에서 몇 번 공을 받아본 적이 있긴 하지만 상대하는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그때 분명히 처음 만나는 타자를 상대로 초구 싱커를 좋아한다고 말했다.
에이, 그래도 나한테 그렇게 말해놓고 설마 초구에 싱커를···.
“스트라이크!”
“꽂네?”
“뭐?”
“아, 별거 아닙니다.”
한껏 날카로운 박희준의 대답이 들렸다.
왜 저렇게 반응하는지 이해는 한다만, 우리도 딱히 여유로운 상황은 아니다.
이닝마다 어떻게든 출루하겠다는 프렌즈 타자들을 상대하는 건 어간 골치 아픈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실점은 최소한으로 틀어막아서 3 대 1로 앞서는 중이었다.
3일 휴식의 여파인지 슬슬 웰링턴의 공도 맞아 나가는데 느껴졌다.
다음 이닝부턴 투수가 바뀔 거다.
그럼 이제 불펜 싸움인데.
어젠 무실점으로 틀어막긴 했지만, 객관적으로 우리 불펜은 프렌즈에 비하면 부족하다.
이미 허하준과 하스를 제외한 모든 투수가 대기 중인 상황, 그래도 2점 차는 약간 불안했다.
딱 1점만 더 뽑으면 괜찮을 것 같은데.
“볼!”
“볼!”
두 개의 볼을 골라내고 2볼 1스트라이크.
이젠 시간이 꽤 흘러 흐릿하지만, 이신영의 공을 받을 때의 궤적이 슬슬 눈에 들어온다.
-탁!
“파울!”
-타악!
“파울!”
-따악!
“파울!”
타이밍을 조금씩 앞당기자 효과가 좋았다.
결과는 모두 같은 파울이지만, 소리가 달라졌다.
점점 제대로 맞아 나가고 있다는 거였고, 그건 나만 그렇게 생각한 게 아니었다.
“볼!”
프렌즈 배터리도 그걸 의식했는지 공을 하나 뺐다.
이제 풀카운트.
투수는 절대 내보내고 싶지 않아 하고, 나는 출루만 기록하면 되는 상황.
-따아아악!
홈런도 출루지, 안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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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를 보는 프렌즈 팬들은 생각했다.
이건 말이 안 된다고.
시즌 내내 저 밑에 박혀있다가 갑자기 치고 올라와서 자신들이 응원하는 팀을 이기고 올라간다고?
“서도하! 서도하!”
하지만 팬들이 할 수 있는 건 지금 타석에 선 타자를 목 놓아 응원하는 것밖에 없었다.
4대1, 3점 차.
자신들의 팀은 1점을 뽑기 힘든데 마린스는 고작 몇 번의 스윙만으로 점수를 만들어냈다.
그것도 단 한 명의 선수가.
-따아악!
청량한 소리에 정신을 집중한 것도 잠시, 이내 좌익수가 가볍게 잡아냈다.
이걸로 남은 아웃카운트는 단 한 개.
“오대현 제발!”
“스트라이크!”
지금 공을 받는 포수는 150km가 넘는 공도 손쉽게 담장 밖으로 넘기는데 고작 140km 중반의 공도 치지 못하는 타자들이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볼!”
“파울!”
몰려버린 카운트, 그리고 와인드업에 들어간 투수가 던진 공이 땅바닥을 때렸다.
그런 어처구니없는 공에 스윙한 타자가 혹시 하는 마음으로 공이 뒤로 흐르길 기대했지만, 공은 김수호의 프로텍터에 막혀 흐르지 못했다.
그대로 공을 잡고 태그.
“아웃!”
“와아아아아!”
숨죽여 경기를 보고 있던 2만 명의 마린스 팬들이 그제야 밀린 함성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여긴 마린스의 집.
더 이상 초대받지 못한 손님인 프렌즈가 설 자리는 없었다.
그게 팬이 됐든, 선수가 됐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