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능빨로 FA 천억 포수-118화 (118/203)

118화 형제 - 6

#

9회 말 선두타자로 나가기 전이었다.

“수호야.”

“옙.”

강주호의 부름에 곧바로 달려갔다.

부산으로 내려올 때 강주호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선수단 모두 가장 힘들어할 사람이 강주호 본인임을 알기 때문에 최대한 신경 쓰지 않는 척 부산으로 돌아왔다.

그래도 하루 휴식기 동안 괜찮아졌는지 경기가 시작하기 전엔 소소하게 몇 마디 대화하긴 했었다.

하지만 오늘도 시작된 무안타에 강주호의 입은 닫혔고, 방금 나를 부르는 게 체감상 정말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였다.

잠깐의 정적이 흐르고 이내 강주호의 입이 열렸다.

“이번 타석, 출루만 해라. 내가 어떻게든 진루시킬 테니까.”

홈으로 불러들이는 것도 아니고 진루라.

강주호의 입에서 나왔다기엔 믿기 힘든 단어였다.

그래서일까, 이게 얼마나 큰 각오로 한 말인지 와닿았다.

“선배님.”

“어.”

“제가 홈런 치시면 어쩌시려고요.”

“하, 이 새끼 진짜.”

“너무 걱정하지 마십쇼. 제가 홈런 친다고 경기가 끝나는 것도 아닌데, 선배님이 백투백 치시면 되는 거 아닙니까?”

“꺼져.”

얼른 타석에 나가라는 듯 손짓하는 강주호였지만, 입가에 옅은 미소가 생긴 걸 봤다.

참 저 선배도 이주학과라니까.

그렇게 들어간 타석, 아쉽게 넘어가진 않았지만 2루타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타석에 들어서는 강주호를 바라봤다.

초구, 강하게 돌렸지만 헛스윙.

분명 위화감이 드는 장면이었다.

강주호가 내게 말한 건 진루.

하지만 초구에 보여준 건 대놓고 홈런을 노린 스윙이었다.

강주호는 타구 질은 좋았지만, 갖갖은 이유로 안타가 안 나오는 거였다.

이런 슬럼프의 경우 답도 없었다.

그래서 아예 변수가 없게 한 방을 노려 슬럼프를 극복하려는 타자가 있긴 했지만 아까 본 강주호의 눈빛은 그런 타자라고 생각하기엔 거리가 멀었다.

그리고 2구, 그 수수께끼가 풀렸다.

곧바로 취한 번트 자세, 그리고 전혀 대비하지 못해 순식간에 혼란해진 내야.

내가 한 건 그저 강주호를 믿고 3루로 달린 것밖에 없었다.

1루에서 아웃되긴 했지만 어쩐지 속 시원해 보이는 미소를 보이는 강주호가 보였다.

물론 그 번트가 점수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오히려 안 좋은 수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잭 미켈의 호쾌한 스윙에 여유롭게 홈으로 들어왔다.

“수호야, 나이스 배팅! 나이스 주루!”

“연장 가자!”

“임마! 연장이 뭐야, 지금 끝내야지!”

“아, 그렇네요. 끝내기 치자!”

시시각각 응원 멘트가 바뀌는 이주학을 지나 강주호가 있는 곳에 도착했다.

“뛰느라 고생했다.”

“선배님도 열심히 뛰시는 모습 잘 봤습니다.”

“그거라도 해야지.”

강주호 옆에 앉아서 그라운드를 봤지만, 집중이 되지 않았다.

누구도 그에게 이런 역할을 맡길 수 없었고, 맡기려고 하지 않았다.

그가 이런 판단을 했다면, 그건 스스로 내린 결정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건 꽤 멋진 일이었다.

#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김형주가 채지훈을 삼진으로 잡아내면서 더 이상 실점하지 않고 승부를 연장으로 끌고 갑니다!]

마린스와 프렌즈의 명승부에 흥이 오를 대로 오른 이명준 캐스터가 잠깐 주어진 휴식 시간을 이용해 옆에 있는 오연석 해설위원에게 물을 건넸다.

“형님, 그러다 울겠습니다.”

“크흠, 티나?”

나이가 많아지면서 덩달아 눈물도 같이 많아지는지 강주호의 번트 이후 목이 멘 오연석 이 말을 거의 하지 않자 이명준 혼자 오디오를 채웠다.

어쩌면 방송사고에 가까운 상황이었지만, 벌써 오연석을 안 지도 10년 가까이 됐다.

오연석이라는 사람이 부산 마린스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특히 강주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아는데 어떻게 뭐라 할 수 있을까.

“다음 이닝부턴 제대로 하세요.”

“고맙다.”

그리고 이건 비단 오연석만 해당되는 얘기가 아니었다.

이 장면을 보고 있던 팬 중 강주호가 신인일 때부터 봐왔던 사람들은 찡한 마음을 느꼈다.

고작 한 선수가 번트를 댄 게 무슨 큰일이냐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마린스 팬들에게 강주호는 단순히 한 명의 선수가 아니다.

팀이 못할 땐 유일한 자랑거리로, 팀이 잘할 땐 언제나 앞에서 팀을 이끄는 선수로 그야말로 20년간 부산 마린스 상징으로 뛰었던 강주호.

그 선수가 동점을 만들기 위해 9회 말에 번트를 댄 건 말로 할 수 없는 감정을 느끼게 했다.

그리고 그 장면을 바로 옆에서 본 선수들도 마찬가지.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이긴다.’

‘시발, 어차피 쟤도 투수 아냐? 공 치면 어떻게든 되겠지.’

‘내 쪽으로 공 보내봐. 다 잡아줄 테니까.’

그리고 마린스의 마운드에 오른 투수는 다시 이용기였다.

‘오늘 내 팔이 부서지는 한이 있어도 무조건 막는다.’

그 각오처럼 프렌즈의 타자들을 깔끔하게 요리했다.

“스트라이크 아웃!”

허를 찌르는 몸쪽 포심으로 삼진.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전매특허 포크볼로 헛스윙을 유도하며 삼진.

그리고 8번 타자를 대신해 타석에 들어선 타자, 한기수.

‘전형적인 공갈포.’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김수호는 변화구로 두 개를 요구하면서 헛스윙을 유도했다.

“스트라이크!”

“스트라이크!”

순식간에 몰린 타자, 조심해야 하는 건 실투밖에 없다.

하지만 오늘 이용기는 최고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고, 그 중 가장 위력적인 공은 바로 포크볼이었다.

‘빠르게 정리하죠.’

김수호의 사인에 고개를 끄덕인 이용기가 포크볼을 던졌다.

하지만 공은 떨어지지 않았다.

-따아아아악!

-우오아아아아아!

너무 허망한 실점.

스코어 2대1.

균형이 곧바로 무너졌다.

#

“나이스! 잘했다! 굿 수비! 아직 경기 끝난 거 아니다. 이제 보여주자!”

남은 아웃카운트 하나를 정리하고 돌아오는 마린스 선수들을 강주호가 가장 앞에 나서서 반겨줬다.

그 모습을 본 선수단, 특히 이용기가 고개를 푹 숙이고 들어왔다.

“용기야.”

“...예.”

“잘했다.”

“하···. 죄송합니다.”

투수들에겐 가장 고참인 이용기지만, 그도 강주호 앞에선 그저 후배일 뿐이다.

“얌마. 너네 선배가 지금 이러고 있는데 경기 이대로 질 생각이냐?”

“아닙니다!”

“가서 보여주자! 우리 아직 진 거 아니다!”

10회 말 선두타자는 대수비를 들어간 김보경 대신 대타 이민상이었다.

그 사이 이주학이 김수호를 불렀다.

“나 손 떨려....”

“쫄았냐?”

“이 상황에서 어떻게 안 쪼냐고!?”

최대한 소리 죽여 말했지만, 주변 선배들은 전부 듣고 있었다.

“뭐가 쫄리는데?”

“내가 저 공을 어떻게 쳐!?”

이미 김형주와 2번의 승부가 있었던 이주학이었고, 두 타석 모두 삼진이었다.

“당연히 못 치지.”

“그렇···. 아니 그렇다고 진짜 못 친다고 말하냐?”

“너도 알잖아. 김형주 선배는 국내 최고 마무리 투수야. 저 공 칠 수 있는 사람 별로 없을걸?”

담담하게 말하는 김수호 때문에 이주학은 속이 타들어 가는 기분이었다.

“내 말은 그게 아니라···.”

“그러니까 주학아.”

“어?”

“그냥 휘둘러. 그리고 존나 뛰어. 어떻게든 1루에 살아서 들어가.”

‘이 새끼, 눈이 왜 이래?’

처음 보는 김수호의 눈빛에 이주학이 움찔했다.

“어떻게든 살아나가서 나까지 오게 만들어. 그럼 내가 알아서 할게.”

그걸 몰래 듣고 있던 주변 선배들까지 움찔하게 만드는 말이었다.

“알았어···.”

원하던 답은 아니었지만, 자신이 해야 하는 걸 깨달은 이주학이 대기타석으로 향했다.

그리고 곧 이민상 타석의 결과가 나왔다.

“스트라이크 아웃!”

공 3개 만에, 그것도 방망이 한 번 내보지 못하고 순식간에 아웃이 됐다.

‘시발, 저게 내 미래 아니야?’

침을 꿀꺽 삼키고 김형주를 쳐다봤다.

그리고 초구, 방망이를 휘둘렀다.

“스트라이크!”

타이밍을 가늠해 본 이주학의 표정이 굳었다.

‘그냥 휘두르면 삼진인데?’

도움을 청하는 듯 김수호가 있는 곳을 바라봤지만, 김수호는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래. 일단 맞추자. 맞추면 어떻게든 되겠지.’

방망이를 최대한 짧게 잡고 다음 공에 대비했다.

-타악!

“파울!”

‘와씨, 무슨 공이 이러냐.’

손을 울리는 진동에 인상을 쓴 이주학이 곧 한 가지 사실을 깨닫고 절망했다.

‘벌써 투 스트라이크야?’

이대로라면 자신도 이민상처럼 삼구삼진으로 물러날 게 뻔히 보였다.

‘이제 어쩌지?’

하지만 프렌즈 배터리는 이주학이 고민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방망이를 냈지만, 갑자기 휘는 궤적에 온 힘을 다해 방망이를 가져다 댔다.

-툭.

정말 방망이 끝, 그것도 아주 미세하게 맞은 공이 그대로 3루 라인을 타고 굴렀다.

그리고 그걸 보자마자 이주학이 죽기 살기로 1루를 향해 달렸다.

1루 베이스를 밟고도 한참 달려서 겨우 멈춘 이주학이 급하게 뒤를 돌아봤다.

“어떻게 됐어요?”

심판이 뭐라 말한 것 같은데 함성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함성?’

그리고 1루 코치가 이주학에게 결과를 말해줬다.

“세잎. 잘했다, 주학아.”

“프하, 하아, 하아. 와, 저 죽는 줄 알았어요.”

이주학이 그제야 겨우 숨을 몰아쉬었다.

“잘했는데 이제 시작인 거 알지? 절대 견제사당하면 안 된다.”

“옙.”

그렇게 정신을 차린 이주학이 더그아웃을 향해 세리머니를 날렸다.

이제 동점주자가 루상에 나갔다.

그리고 연달아 터진 박은성의 안타.

우익수가 급하게 공을 3루로 던졌지만, 이주학이 가속을 살리며 3루까지 들어갔다.

1사 주자 1, 3루.

그리고 한때 나이츠 팬들에게 가을의 사나이라 불렸던 최치호가 자신의 별명을 증명했다.

-따아악!

높이 뜬 타구.

“아웃!”

그리고 이주학이 아까와 다른 의미로 미친 듯이 질주하기 시작했다.

-쓰아아악

흙이 몸을 훑는 소리가 들리고 연이어 들린 소리에 곧장 몸을 일으켰다.

“세이프!”

다시 동점.

“이주학이! 빨리 온나!”

“이야아아아아! 나이스!”

“새끼, 일 한번 냈네! 좋았다!”

그리고 마지막 김수호에게 다가갔다.

“계산해보니까 동점 아니면 너 타석까지 못가더라? 그래서 존나 뛰었는데, 어때?”

“어떻긴, 개멋있었지.”

실실 웃는 이주학의 어깨를 툭툭 친 김수호가 대기타석으로 향했다.

연달아 홈런으로 점수를 낸 프렌즈와 희생플라이로 점수를 낸 마린스.

정규시즌에 보여줬던 두 팀의 컬러가 완전히 바뀐 듯한 득점 과정이었다.

동점에 미친 듯이 흥이 오른 마린스는 아직 끝나지 않은 공격을 이어갔다.

타석엔 오늘 타격감이 좋은 오준혁.

-따악!

그리고 그걸 증명하듯 초구부터 경쾌한 소리와 함께 타구를 외야로 보냈다.

이미 1루 주자 박은성은 스타트를 끊은 상황.

뒤늦게 공을 잡은 서도하가 홈으로 강하게 송구했다.

하지만 박은성은 3루 코치의 멈춤 지시에 3루에서 숨을 고르는 중이었다.

그리고 이제 프렌즈에게 가장 피하고 싶은 타자가 타석에 들어섰다.

“김수호! 보여줘라!”

이주학의 목소리에 씨익 웃으면서 타석에 섰다.

그야말로 프렌즈 입장에선 비상과도 같은 상황.

언제나 믿고 맡겼던 김형주가 연달아 안타를 맞는 건 계산에 없었다.

급하게 투수코치와 박희준이 올라가 대화를 나눴다.

그동안 김수호는 더그아웃에서 강주호와 했던 대화를 떠올렸다.

#

“아오, 얄미운 놈.”

“왜요, 이번엔 또 뭔데.”

강주호가 대기타석으로 가기 전에 한 혼잣말에 근처에 있던 채지훈이 물었다.

“그런 게 있다.”

‘이번에도 진루시켜 달라고?’

이미 2대2 동점 2사 주자 1, 3루인 상황.

진루라는 말은 결국 김수호가 루상에 나가야 하고, 또 살아서 2루를 밟아야 한다.

즉, 본인은 볼넷으로 나갈 테니 끝내기를 치라는 걸 돌려서 한 말이다.

당연히 좋은 뜻으로 말한 거겠지만 이전에 겪었던 고의사구의 잔상이 아직 남아있었다.

그때 쳤던 홈 병살, 그건 평생을 가도 잊지 못할 타구였다.

그때 김수호가 뒤를 돌아보더니 강주호와 눈이 마주쳤다.

‘그냥 마음 편하게 네가 끝내라.’

그런 의미로 보낸 눈짓이었지만, 김수호는 그냥 웃고 다시 마운드를 쳐다봤다.

‘속 모를 놈.’

그사이 프렌즈는 김형주에게 마운드를 맡기는 걸 선택했다.

어떤 투수를 내도 이런 상황에 올라오기엔 부담스러웠고 공도 괜찮았다.

그리고 아직 선택할 게 남아있었다.

바로 김수호와 승부를 보느냐, 혹은 만루를 채우고 강주호와 승부를 보느냐의 선택.

프렌즈의 선택은 김수호인 것처럼 보였다.

“스트라이크!”

“볼!”

“볼!”

“볼!”

초구 스트라이크까진 좋았지만 연달아 들어간 세 개의 볼에 김수호가 꿈쩍도 안 하면서 카운트가 몰린 상황.

“볼!”

결국 다섯 번째 공이 볼이 되면서 2사 주자 만루.

“강! 주! 호!”

팬들의 함성과 함께 강주호가 천천히 타석으로 들어섰다.

현 리그 최고의 마무리투수와 최고였던 타자의 만남.

그리고 던진 초구.

-따아악!

그 타구를 보는 모든 사람이 숨을 죽이고 타구가 떨어지는 곳을 바라봤다.

가장 가까운 야수인 서도하가 마지막에 몸을 날렸다.

하지만 이번엔 글러브가 닿지 못했다.

[끝내기! 강주호 끝내기!!!]

-와아아아아!

“강주호! 강주호! 강주호!”

“행님!!! 와아아악!”

“이겼다! 이겼다!”

쏟아지는 물줄기 사이로 김수호를 발견한 강주호가 달려드는 선수들을 뚫고 김수호 앞에 섰다.

“선배님, 역시 최고십니다.”

그리고 강주호는 말없이 김수호를 끌어안았다.

-뿌우우우

뱃고동 소리가 기나긴 경기의 끝을 알렸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