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형제 -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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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책으로 넘어갔던 분위기를 한 번에 되찾았다.
아니, 되찾다 못해 이미 사직구장을 찾은 팬들은 아직 이닝 교체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신나게 다음 타자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안타! 박은성! 안타! 박은성!”
“와이씨, 출루 못 하면 진짜 욕 오지게 먹겠는데?”
“그럼 출루하면 되겠네요. 팬들한테 한 번 보여주고 오세요.”
“내가 왜 너한테 이런 말을 하겠냐. 저번 같은 팁 없냐?”
“글쎄요. 저도 오늘은 별것 없어요. 제대로 상대해줘야 좀 알겠는데···.”
마음 같아선 당연히 알려주고 싶다.
하지만 딱히 박은성의 타석에서도 특별한 걸 못 느꼈고, 상대 배터리가 나와 아예 상대 자체를 안 해주니 수가 없었다.
“쩝, 그러냐? 그럼 어쩔 수 없지.”
박은성이 대강 수긍하고 타석으로 향했다.
그래도 이번 시리즈 내내 타격감이 괜찮아 보여서 기대를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 류재원의 우타자를 상대로 던지는 서클체인지업이 너무 잘 긁혔다.
-따악!
“아웃!”
빗맞은 타구를 3루수가 잡아서 처리했다.
이어진 최치호 역시 서클체인지업에 속으면서 삼진.
하지만 물이 오를 대로 오른 타격감을 가진 오준혁이 그대로 3·유간을 꿰뚫는 안타를 만들어냈다.
2사 주자 1루 상황, 이 상황에서 나를 피할 리 없었다.
하지만 좋은 공은 주지 않겠다는 듯 초구는 빠지는 볼.
그리고 2구, 높게 오는 공에 그대로 방망이가 나갔다.
“스트라이크!”
“잠시만요.”
잠시 타석에서 벗어나 마음을 진정시켰다.
사실 평소였다면 방금 그 공을 그냥 흘려보냈을 거다.
하지만 지금은 평소와 전혀 다른 상황.
강주호가 극심한 타격 침체를 겪고 있는 와중에 내가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이 앞서서 엉성한 스윙 나왔다.
무조건 멀리 타구를 날려야 한다는 생각에 나온 턱 없는 스윙.
아마 최현우가 이 스윙을 봤다면 한탄하지 않았을까.
‘멍청한 생각 하지 말자.’
강주호는 강주호다.
이런 상황을 수없이 넘게 겪었을 거고, 그걸 극복했기 때문에 지금 이 자리에 와 있는 거다.
나는 그 강주호를 믿고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스윙을 하면 된다.
‘자, 정리하자.’
오늘 프렌즈의 선발투수인 류재원은 우타자 상대로 서클체인지업의 구사율이 37%로 매우 높은 투수.
특히 투심의 구속이 높으면 높을수록 그 경향이 두드러진다.
그 상대가 나라고 한들 무조건 이번 공격에서 서클체인지업을 던질 거다.
문제는 그 타이밍인데.
‘서클체인지업을 노리는 건 무조건 2스트라이크 이후. 그 전엔 생각하지 말자.’
생각을 정리하고 다시 타석에 들어섰다.
“타임 시간이 너무 긴 거 아니냐?”
“죄송합니다. 투수 공이 워낙 좋아서요.”
“쯧, 그래. 조심 좀 하자.”
박희준이 건수를 물었다고 생각했는지 곧바로 말을 걸었다.
하지만 내 대답에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여기서 더 들어오면 나도 딱히 참을 생각이 없었는데 잘 됐지.
이미 배터리간에 사인 교환이 끝났는지 별다른 액션 없이 투구를 시작했다.
“볼!”
바깥쪽으로 날카롭게 들어온 투심이 다행히 볼이 됐다.
박희준이 잠시 미트를 멈춰서 심판에게 무언의 항의를 하고 공을 던져줬다.
2-1에서 던진 4구.
“볼!”
드디어 나를 상대로 처음 던진 서클체인지업이었지만, 땅에 박힐 정도로 제구가 되지 않은 공이었다.
그리고 다음 공은 3구와 비슷한 코스로 들어왔다.
당연히 볼이라 생각하고 나가려고 했는데.
“스트라이크!”
“예?”
“스트라이크라고.”
이번엔 스트라이크 판정을 받았다.
이게 아까 3구와 다른 게 뭐가 있다고 이번엔 스트라이크가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금방 미련을 버렸다.
‘볼 배합을 보면 내보낼 생각은 없는 거 같은데.’
문제는 방금 스트라이크를 잡은 공이었다.
투수가 저 코스로 계속 공을 던지기 시작하면 끌려갈 수밖에 없다.
지금처럼.
-따악!
“파울!”
-따악!
“파울!”
건수를 잡았다는 듯 집요하게 바깥쪽 코스를 고수하는 프렌즈 배터리.
아직은 쳐 낼만 하지만, 문제는 이러다가 기습적으로 들어오는 서클체인지업이었다.
‘포기할 건 포기하자.’
어차피 이대로 시간이 끌려봤자 불리한 건 나다.
차라리 삼진당하더라도 투심을 생각하고 타이밍에 맞춰 휘둘렀다.
-타악!
빗맞은 타구가 높게 떠서 외야로 날아갔다.
나를 포함한 전부 평범한 뜬공이라고 생각한 그 순간, 변수가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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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루수, 2루수, 우익수가 공을 잡기 위해 모입니다!]
한국 프로야구에서 세 명의 야수가 모이면 무언가 일이 발생한다는 건 너무 유명한 얘기였다.
하지만 그건 피닉스나 마린스 같은 수비가 약한 팀에서 일어나는 일이지, 프렌즈 같은 강팀에서 볼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문제는 오늘 경기가 평범한 경기가 아니라는 거였다.
양 팀 선발투수가 완벽에 가까운 투구를 보여주고 있고, 사소한 실책 하나가 경기를 뒤바꿀 수 있는 경기.
심지어 김수호의 장타를 의식한 외야수는 평소보다 깊숙한 수비를 하고 있어서 급하게 달려와 봤지만 약간 모자랐다.
[아, 세 명의 야수 가운데 공이 떨어집니다! 그사이 주자는 3루까지 들어갑니다!]
그 결과, 이닝이 끝날 상황이 2사 주자 1, 3루가 돼버렸다.
그리고 시리즈 전적 11타수 무안타의 강주호가 타석에 들어섰다.
이정훈 감독은 마지막까지 대타 김민석 카드를 만지작거렸지만, 결국 강주호를 선택했다.
아무리 부진했어도 강주호는 강주호.
팀이 정말 필요할 때마다 보여줬던 선수를 믿은 것이다.
그걸 강주호가 모를 리 만무했다.
하지만 강주호로서도 이 정도로 지독하게 안 풀리는 경기는 처음이었다.
마린스에게도, 그리고 그에게도 반드시 안타가 필요한 상황.
류재원과 박희준 배터리도 긴장을 놓지 않았다.
실책 이후 박희준이 마운드에 올라가 류재원의 멘탈을 확인하기 위해 말했다.
"재원아, 너 오늘 최고인 거 알지? 보여주자 한번."
"예. 걱정하지 마세요."
그렇게 던진 초구.
-따아아악
방망이에 공이 맞는 순간 사직구장의 모든 사람이 장타를 확신한 듯 몸을 일으켰다.
-와아아아아아!
하지만 이어진 함성은 이만 명의 관중이 내질렀다기엔 작았고, 환호하는 건 3루 쪽 프렌즈 팬들이었다.
[서도하 슈퍼캐치!!! 정확한 타이밍에 점프하면서 강주호의 장타를 훔쳐냅니다! 스코어 0대0! 아직 경기는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하···."
그리고 그걸 본 강주호가 탄식을 내뱉는 장면과 함께 이닝이 종료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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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그 하스의 역할은 7회까지였다.
[요그 하스가 7회까지 1실점으로 막고 내려갑니다!]
분명 박수받아 마땅한 성적이었지만, 경기 자체는 프렌즈가 7회 초에 터진 페드로 산체스의 솔로 홈런에 힘입어 1대0으로 이기고 있었다.
고작 1점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프렌즈를 상대로는 아주 큰 점수였다.
1점 차 승률 1위, 7회까지 리드 시 91승 2패라는 어마어마한 기록을 이어가고 있는 무적 프렌즈 불펜이 마린스 타자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기혁 – 이신영 – 김형주로 이어지는 일명 HLK 라인.
그중 가장 먼저 올라온 한기혁이 7회 말을 삼자범퇴로 처리했다.
마린스 역시 불펜을 가동했고, 프렌즈만큼은 아니지만, 최근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김동준이 먼저 마운드에 올랐다.
김동준이 8, 9, 1번 타자로 이어지는 프렌즈 타선을 깔끔하게 막아내자 이번엔 프렌즈에서 홀드왕 이신영이 나왔다.
그리고 이신영 역시 대타로 나온 김민석, 박은성을 범타로 처리하면서 8회 말을 깔끔하게 막아내는 줄 알았다.
하지만 최치호가 친 타구가 1루수 키를 넘기면서 2사 주자 2루 찬스가 찾아왔다.
그리고 오늘 마린스 타자 중 가장 기세가 좋은 오준혁의 타석.
하지만 홀드왕 타이틀을 거저먹은 게 아니라는 듯 깔끔하게 땅볼로 처리하면서 무실점.
장군 멍군하듯 양 팀 불펜들이 연이어 호투를 펼치자 애가 타는 건 타자들이었다.
“숨 막힌다.”
그건 이 경기를 보는 팬들도 마찬가지였다.
경기가 9회까지 온 이상 마무리 투수를 아낄 팀은 없었다.
마지막 9회 말 희망을 살리기 위해 나온 마린스의 마무리 투수 이용기.
선두타자로 나온 서도하에게 안타를 허용, 오대현이 번트를 대면서 1사 주자 2루 상황에 오늘 홈런이 있는 페드로 산체스가 타석에 섰다.
페드로 산체스는 자신의 임무가 어떤 건지 잘 이해했다.
투수 너머 보이는 서도하를 반드시 홈으로 불러들이는 것.
그걸 위해 초구 카운트를 잡으려고 던지는 공에 강하게 휘둘렀다.
“스트라이크!”
하지만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공은 아래로 뚝 떨어졌고, 김수호가 무난하게 막아냈다.
이어진 제2구, 바깥쪽에 휘어지는 슬라이더가 방망이 끝에 맞았다.
최치호가 공을 잡고 1루로 공을 보낸 사이 서도하가 3루까지 들어갔다.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지만, 포크볼을 던지는 이용기를 상대로 주자를 3루에 보낸 건 의미가 있었다.
‘대단하다, 진짜.’
공이 빠지면 곧바로 실점인 상황.
김수호는 주저 없이 이용기에게 포크볼을 요구했다.
큰 경기에, 1실점이 엄청난 부담으로 느껴지는 상황에 아랑곳하지 않고 포크볼을 요구하는 패기에 덩달아 이용기의 심장도 뛰었다.
튀어나올 것같이 뛰는 심장 소리를 느끼며 던진 초구는 방망이를 피하면서 땅에 닿고 튀었지만, 김수호가 침착하게 막아냈다.
‘후, 살 떨리네.’
하지만 곧바로 공을 줍고 3루 주자를 살짝 견제하는 김수호의 모습에 웃음이 났다.
아마 저놈은 한국시리즈 7차전 9회 말 만루에서도 저 공을 요구할 놈이다.
한 마디로 정상이 아니란 소리.
‘그런 포수한테 맞추려면 나도 미쳐야겠지?’
사인을 확인하고 견제차 3루에 있는 서도하를 노려봤다.
잠시 타이밍을 재고 2구를 던졌다.
-따악!
“파울!”
몸쪽 높은 공에 타자의 방망이를 끌어냈다.
그리고 이어지는 김수호의 포크볼 사인.
“볼!”
타자는 처음엔 참아냈지만.
“스트라이크 아웃!”
두 번은 참지 못했다.
“하, 이 짓도 두 번은 못하겠다.”
날이 춥지만, 이용기의 온몸이 땀으로 젖을 정도로 긴장됐던 9회 초가 끝났다.
프렌즈의 1대0 리드.
이제 경기는 마린스의 정규이닝 마지막 공격만이 남았다.
9회 말, 선두타자는 김수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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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렌즈는 당연하다는 듯 김형주를 마운드에 올렸다.
각기 다른 특색을 지닌 프렌즈 불펜 3인방 중 끝판왕인 김형주의 기록은 대단하다.
시즌 40세이브, 1.13의 평균자책점, 0.97의 WHIP.
거기에 맞춰 잡는 투수인 한기혁과 이신영과는 다르게 삼진을 잡는 파워 피쳐.
특히 평균 154.2km, 최고 구속 158km의 포심과 최고 154km까지 나오는 고속 싱커는 타자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로 위력적인 공이었다.
이미 메이저리그 구단에서도 큰 관심을 보이며 지켜보는 만큼 김수호와 김형주의 맞대결은 흥미로웠다.
현재 메이저리그 구단들이 가장 관심을 보이는 투수는 한국의 허하준과 일본의 나카무라 준.
특히 허하준보다 나카무라 준에 대한 평가가 더욱 높았다.
허하준은 2~3선발, 나카무라 준은 무리 없이 1선발이 충분히 가능할 거라는 평가가 많았다.
물론 허하준의 평가가 날이 갈수록 바뀌고 있지만, 그런 나카무라 준의 완벽한 공을 친 김수호와 김형주가 붙는다는 건 김형주가 메이저리그에서 얼마나 통할지 알 수 있는 충분한 자료가 됐다.
이 사실을 김형주 역시 의식하고 있었다.
‘거긴 너보다 더 괴물 같은 놈들로 가득할 텐데 여기서 피할 수 없지.’
팀을 위해서라도, 김형주 개인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이겨내야 하는 상황.
그리고 피할 생각이 없는 건 김수호 역시 마찬가지였다.
두 선수의 생각이 일치하자, 이제 남은 건 하나밖에 없었다.
존 안에서의 정면승부.
먼저 기세를 잡은 건 김형주였다.
-퍼어억!
“스트라이크!”
자신의 최고 구속인 158km를 선보이면서 스트라이크를 가져갔다.
‘타이밍이···. 이 정돈가?’
물론 김수호가 그냥 지켜본 건 아니었다.
워낙 구속이 빠른 투수다 보니 초구를 지켜보면서 타이밍을 익혔다.
그리고 두 번째 공.
-따아악!
청량한 소리와 함께 사직구장이 들썩였다.
타구가 담장을 넘었지만, 아쉽게도 폴 바깥쪽이었다.
“미친놈.”
그 타구를 보자 김형주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금방 정신을 차리고 집중했다.
어차피 방금 공이 잘 맞았어도 파울.
카운트가 유리한 건 자신이었다.
‘신중하게 가죠.’
아직 싱커도 보여주지 않았다.
유리한 카운트에 숨긴 무기도 있다.
굳이 정면승부를 고집할 필요는 없었고, 박희준의 사인에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볼!”
152km의 낮은 싱커에 반응하지 않은 김수호, 그리고 그걸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뱉는 마린스 팬들.
어차피 이번 공은 간을 보는 거였다.
휘두르면 좋고, 아니면 말고.
진짜 승부구는 바로 이것.
몸쪽 하이패스트볼.
-퍼어억!
하지만 김수호의 방망이는 나오다가 멈췄다.
“...볼!”
1루심의 사인을 확인한 주심이 나지막하게 외쳤다.
‘이걸 참아?’
절로 그런 생각이 날 정도로 완벽한 공이라고 생각했는데.
이걸로 2-2의 카운트.
그리고 승부를 끝내기 위한 마지막 공을 던졌다.
혼신의 힘을 다해 던진 싱커.
-따아악!
하지만 그 귀신같은 궤적에 정확히 맞춘 타구가 그대로 중앙 담장을 향해 날아갔다.
‘넘어갔다.’
홈런을 직감한 김형주가 차마 뒤를 돌아보지 못했다.
“세이프!”
하지만 2루에서 들리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김수호가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2루에 들어가 있었다.
“어떻게 된 거야?”
“담장 끝에 맞았어요.”
공을 주러 온 유격수의 말을 듣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그래, 아직 끝이 아니다.
아직 점수는 앞서고 있었고 무사 주자 2루 정도는 수없이 이겨냈다.
거기에 최악의 타격감을 보여주는 강주호의 타석.
충분히 이겨낼 수 있다.
그리고 존에 초구를 꽂자 확신이 들었다.
‘방망이가 공에 못 따라온다.’
한 방을 노린 스윙이었지만, 공의 궤적과 한참 차이 났다.
그렇게 다시 공을 던진 김형주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번···트!?’
내야수들은 안타를 대비해 이미 뒤쪽으로 빠진 상황.
급하게 공을 잡은 김형주가 3루를 확인하고 강하게 1루로 공을 뿌렸다.
“아웃!”
워낙 느린 주자라 강주호는 아웃됐지만 동점주자가 3루에 들어갔다.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강주호의 번트에 이 경기를 보고 있는 모든 사람이 혼란한 와중, 타석에 들어선 잭 미켈.
-따아악!
그리고 그가 외야로 보낸 타구는 김수호를 홈에 불러드리기 완벽한 타구였다.
“아웃!”
“세이프!”
1대1 동점.
치열한 승부는 정규이닝만으로 끝을 맺지 못하고 연장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