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형제 -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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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렌즈의 분위기는 모르겠지만, 같은 1승 1패라도 우리 쪽 분위기가 더 좋다고 확신한다.
7대0 완승.
휴식일 직전에 이겨서 여운을 즐길 시간도 길었고, 상대 투·타를 완벽히 공략한 걸 생각하면 프렌즈의 데미지도 상당할 거다.
이제 남은 과제는 이 분위기를 유지하면서 다음 경기에서 반드시 이기는 것.
“드디어 그걸 쓸 때가 왔네요.”
“뭘 말하는 거지?”
“하스, 저번에 주학이 머리를 대가로 한 경기에서 반드시 이길 수 있다고 했죠?”
미안하다, 주학아.
그래도 한국시리즈는 가야 하지 않겠냐?
“...설마 그걸 진심으로 받아들인 건가?”
아니었어?
“아하하, 농담이죠. 그냥 이번 경기에서 주학이 머리털 빠질 때까지 굴리겠다, 뭐 이런 의미였어요.”
“흠, 그렇지?”
세상에서 가장 농담을 안 할 것 같은 남자가 설마 그런 고차원적인 농담을 할 줄이야.
이러면 계획에 차질이 생기는데.
“걱정하지 마라. 오늘 경기는 어쩐지 느낌이 좋군. 다만 한 가지 걱정이 있다면···.”
“걱정이요?”
하스의 입에서 걱정이라는 말을 처음 들어봤다.
항상 누군가 걱정된다고 말하면 웃으면서 레타쿠가 해결해준다고 말했던 하스였는데.
그래서일까, 하스가 입을 다시 열기까지 긴 시간이 걸린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캉의 기운이 안 좋군. 저 정도 존재감을 내뿜는 사내가 부정적인 기운을 내뿜으면 아무리 킴, 자네라 해도 힘들 수 있겠어.”
“그 정도예요?”
최근 강주호가 극심한 빈타에 시달리고 있긴 하다.
거기에 내일 경기에선 좌완 선발이 나와서 채지훈 대신 강주호가 1루수로 들어가는데.
“음. 그래도 캉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많으니 괜찮을 거다. 캉도 대단한 사람이기도 하고, 자네도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라.”
어쩐지 그 말을 들으니까 더 걱정됐다.
아무튼 이런 부담이 짙은 경기에서 선발 투수인 하스가 딱히 큰 부담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만 해도 좋은 일이다.
“자, 그럼 주사위 굴리러 가볼까요? 오늘은 6, 6, 6이 나와야 할 텐데.”
“주사위? 그게 무슨 말이지?”
그야 당신 패스트볼 구위가 어떤지 보겠다는 얘기지.
그렇게 경기 전 하스의 공을 받아본 결과, 아릿한 손바닥의 통증과 상반된 미소를 얻었다.
잭팟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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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그 하스라는 투수를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주사위형 투수의 극에 다른 투수라고 할 수 있다.
주사위형 투수는 쉽게 말해서 긁히는 날은 누구도 칠 수 없을 정도로 공이 좋지만, 그렇지 않으면 배팅볼 수준의 공을 던지는 투수라고 할 수 있다.
사실 고점과 저점은 선수라면 당연히 있는 거다.
하지만 저 말은 고점보다 저점인 날이 압도적으로 많은 투수들을 비꼬는 표현이다.
하지만 하스는 그런 투수들과는 약간 다른 의미의 주사위형 투수였다.
가장 큰 차이점은 고점이든 저점이든 존 안에 공을 넣을 줄 안다.
그런 투수들의 특징은 제구가 흔들리는 날이 많다는 거였다.
하지만 하스는 제구가 흔들리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이것만으로도 다른데 심지어 배짱도 좋다.
포심과 투심, 커터가 전부 포심으로 보일 정도로 밋밋한데도 그 공을 만루에 가운데 꽂을 줄 아는 투수.
그런 투수가 공이 좋다면 어떻게 될까.
-따악!
“아웃!”
정답은 ‘내야수들이 고생한다’ 이다.
빈말이 아니라 오늘 하스의 공은 정말 좋았다.
알기 쉽게 비유하자면 보급형 허하준이라고 해야 할까.
보급형이라는 말이 기분 나쁘게 들릴 수 있지만, 내 기준에서 허하준만큼 완벽한 투수를 본 적이 없었다.
일본을 대표하는 투수 나카무라 준도, 미국전에서 만난 루카스 앤더슨도 허하준과 비교하자면 아쉬움이 느껴졌다.
물론 메이저리그에 허하준보다 뛰어난 투수가 있을 거다.
하지만 개인적인 생각으로 투심을 배운 이후부터 그 수는 다섯을 넘지 못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아무튼 내 말의 의미는 허하준과 하스는 결이 비슷하다는 거다.
허하준의 가장 위력적인 무기는 포심, 투심, 스플리터다.
그걸 더욱더 강하게 만들어주는 게 바로 가끔 던지는 체인지업, 슬라이더, 커브 같은 변화구.
하스도 비슷하다.
포심, 투심, 커터 세 가지 구종을 중심으로 그를 뒷받침해주는 슬라이더.
거기에 두 투수 모두 승부를 보는 것에 두려움이 없다.
그런데 오늘 하스의 공은 미트에 공이 들어오기 전까지 전부 포심처럼 보였다.
내가 그렇게 느낄 정도였으니, 타자들은 더했다.
심지어 프렌즈의 상징이라고 불리는 서도하마저 바깥쪽으로 꺾이는 커터에 3루 땅볼로 물러났으니 말 다했다.
물론 주사위가 6, 6, 6이 뜨는 날은 거의 없었지만, 몸에 문신이 잔뜩 새겨진 덩치 좋은 투수가 던지는 공은 그야말로 사탄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였다.
어? 666? 사탄?
“갑자기 왜 그래?”
“아니, 갑자기 무서운 이론이 생각나서.”
사실 레타쿠는 사탄의 다른 이름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 말이다.
그리고 그때 정확히 나를 바라보고 있는 하스와 눈이 마주쳤다.
아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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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탄이든 뭐든 사실 중요하지 않았다.
우리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건 오늘 경기에서 이기는 거였고, 기회는 빠르게 찾아왔다.
하스가 삼자범퇴로 1회를 마무리한 뒤, 1회 말 공격.
프렌즈의 선발 투수는 류재원.
좌투수에 140km 중반의 포심을 중심으로 서클 체인지업을 주로 사용하는 투수다.
꽤 까다로운 투수지만 시작이 좋았다.
박은성의 출루와 최치호의 진루타, 그리고 오준혁이 삼진당하면서 2사 주자 2루.
안타 하나면 선취점을 뽑을 수 있는 좋은 찬스가 경기 초반부터 찾아왔다.
“볼!”
“볼!”
“파울!”
“볼!”
“볼!”
중간에 존을 살짝 벗어나는 공을 건드려봤지만, 그다음부턴 아예 존에 들어오지도 않는 변화구만 던졌다.
힘들이지 않고 1루로 나가긴 했지만, 기분이 찝찝했다.
1루에 나가 타석을 바라보자 담담히 타격을 준비하고 있는 강주호가 보였다.
나한테 볼넷을 준 건 사실상 고의사구나 마찬가지였다.
그걸 강주호가 모를 리가 없을 터.
그리고 프렌즈 배터리는 그 생각이 맞다는 듯 적극적인 승부를 시작했다.
“스트라이크!”
내 타석일 땐 들리지 않았던 심판의 우렁찬 스트라이크 콜이 들렸다.
최근 강주호가 뜬 타구를 거의 못 만들어내는 탓에 수비수들은 거의 내야 바깥쪽까지 나가서 수비를 하는 상황.
적당한 리드폭을 유지한 채 언제라도 달려 나갈 수 있도록 투수에게 집중했다.
-따아악!
그리고 2구, 타구음과 동시에 스타트를 끊었다.
평소라면 충분히 내야를 빠져나갈 만한 빠른 타구 속도였지만, 뒤쪽에서 수비 하던 유격수의 글러브에 공이 빨려 들어갔다.
그 사이 1루수가 커버를 들어오고 뒤쪽을 힐끔 보니 강주호가 최선을 다해 뛰는 모습이 보였다.
“아웃!”
1루에서 나름대로 접전이 이뤄졌지만, 결과는 들린 대로 아웃.
이걸로 강주호의 플레이오프 성적은 10타수 무안타.
우리의 플랜이 꼬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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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렌즈가 김수호를 심각하게 경계한다는 건 야구를 보는 사람이면 전부 알고 있었다.
딱히 신기한 것 없는 전술이었다.
김수호가 단기전에서만 잘했던 것도 아니고 그냥 잘하는 선수다.
정규시즌에서도 챌린저스가 그런 전술을 썻던 적이 있었고, 프렌즈 역시 김수호를 만만히 보다가 홈런을 허용한 적도 많았다.
하지만 다른 팀들이 그런 수를 쉽게 쓰지 못했던 이유는 간단했다.
그의 뒤에서 버티고 있는 존재가 바로 김수호가 태어날 때부터 야구판에 짙은 존재감을 내뿜고 있는 강주호기 때문이다.
은퇴가 가까이 다가오면서 성적이 나빠지긴 했지만 그래도 강주호는 강주호였다.
하지만 항상 기대에 부응하던 선수였기 때문에 그의 부진은 더욱 크게 다가왔다.
-따악!
[2루수 잡아서 유격수에게, 유격수 1루로! 더블 아웃! 이번에도 기회를 놓치고 마는 강주홉니다!]
[아, 이러면 마린스 입장에선 답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강주호 선수가 이런 성적을 내는 건 예상 밖이었을 텐데 말이죠.]
4회 말, 선두타자로 타석에 나선 김수호.
아무리 김수호와 승부를 피한다는 작전을 세운 프렌즈라도 선두타자를 그냥 내보내는 건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그렇게 도망가는 승부 끝에 안타를 허용한 상황, 하지만 강주호의 병살타로 사직 구장은 차갑게 굳어버렸다.
시리즈 11타수 무안타, 치명적인 병살타 2개.
[아직 요그 하스 선수가 잘 던지고 있어서 괜찮지만, 그게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모르는 거거든요. 마린스 벤치에서도 결단을 내려야 할 순간이 올 겁니다!]
그 사이 프렌즈 타자들도 슬슬 요그 하스의 공에 적응이 되는지 정타가 나오는 빈도가 잦아졌다.
물론 정타가 나온다고 전부 안타로 연결되는 건 아니지만, 삼진을 잡는 투수가 아닌 이상 인플레이 타구는 언제나 변수를 동반한다.
그 변수는 마린스에게 안 좋은 방향으로 작용했다.
6회 초 프렌즈의 공격.
[아, 2루수 잡지 못합니다! 마지막 바운드가 엉뚱한 곳에 튀었습니다!]
[하필 주력이 좋은 김혁 선수가 1루로 살아나갑니다. 올 시즌 34도루, 도루 실패는 고작 다섯 번입니다!]
마린스는 살리지 못했던 무사 1루의 찬스.
그리고 타석엔 프렌즈의 상징, 서도하가 들어왔다.
양 팀 투수가 전부 무실점으로 호투하는 상황이라 선취점이 필요한 상황, 프렌즈 벤치가 활발하게 움직였다.
서도하가 받은 사인은 인플레이 타구를 만들어내 1루 주자를 반드시 진루시키라는 내용.
그리고 서도하는 KBO의 모든 타자 중 작전 실행 능력이 가장 뛰어난 선수였다.
[주자 뛰었습니다! 타자 타격! 유격수가 잡았지만, 2루 대신 1루로 공을 던집니다.]
[타구가 워낙 빨라서 더블 플레이를 만들만한 공이었는데, 스타트가 좋았어요. 마린스 입장에선 아쉽겠네요.]
[자, 타석엔 오대현 선수가 들어섭니다. 오늘 안타 하나 있는 오대현!]
-따악!
곧바로 던진 초구에 오대현의 방망이가 순식간에 공을 강타했다.
[안타! 안타입니다! 우익수 앞에 떨어지는 안타! 2루 주자 홈으로! 공도 홈으로!]
약간 짧은 안타였지만, 김혁의 발을 믿은 3루 코치의 사인대로 김혁이 가속을 살려 홈으로 질주했다.
‘이 정도면 충분하지!’
그렇게 생각한 김혁이었지만 마린스의 외야수, 잭 미켈은 강견을 자랑하는 선수.
[백홈! 아웃! 아웃이에요! 잭 미켈의 보살! 아, 곧바로 포수가 2루로 던집니다! 아웃! 와, 이게 무슨 일이죠?]
그 틈을 노린 타자 주자가 공이 홈으로 간 틈을 노려 2루를 노려봤지만, 김수호의 재빠른 송구에 정확하게 걸렸다.
허망한 표정을 짓고 있는 김혁과 오대현, 그리고 환호하는 잭 미켈과 김수호의 얼굴이 번갈아 가면서 화면을 채웠다.
그 사이 프렌즈 벤치에선 홈에서의 비디오 판독을 신청했다.
[와, 잭 미켈 선수의 송구도 좋았지만, 바로 앞에서 튄 바운드를 정확하게 잡는 김수호 선수의 포구도 좋았습니다.]
[자칫 공을 못 잡았으면 득점과 1사 주자 2루 상황이 이어졌을 수도 있었겠네요! 두 선수 정말 대단합니다.]
[화면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김수호가 2루 주자를 아웃시키고 다음 수를 알고 있다는 듯 주저 없이 2루로 공을 쐈거든요? 거기에 송구까지 완벽한 거 보세요. 자신과 공격에서 승부를 피하니까 수비에서 완벽하게 갚아주는 김수호 선수입니다.]
[아, 판정이 그대로 인정됩니다! 마린스, 환상적인 두 개의 송구로 이닝을 삭제합니다!]
[경기는 0대0의 팽팽한 상황 속에 6회 말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