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형제 - 2
#
브릭 웰링턴과 사무엘 우즈.
두 선수가 플레이오프 1차전 선발로 지명되자 팬들은 투수전을 예상했다.
하지만 막상 까보니 매 이닝 주자를 내보내는 건 기본이고 실점도 자주 나왔다.
두 선수 모두 이름값에 어울리지 않은 투구 내용임은 분명했다.
하지만 타자들이 출루해도, 점수를 내줘도 꾸역꾸역 공을 존에 집어넣고 공을 던졌다.
그 결과 4회가 끝났을 때 점수 4대3.
마린스가 한점 뒤처진 채로 5회를 맞았다.
5회에 벌써 세 번째 타석에 들어선 최치호가 차분하게 공을 지켜봤다.
‘급할 필요 없지.’
이미 선발투수들이 제 컨디션이 아닌 건 타자들도 알고 있다.
타자들도 손이 시려서 핫팩을 달고 사는 판국에 투수들은 말할 것도 없다.
“볼!”
“볼!”
연속으로 볼이 들어오자 최치호가 고민했다.
‘칠까? 하나 더 봐?’
오늘 보여준 모습이라면 분명 여기서 공을 집어넣을 건데.
“볼!”
하지만 최치호의 예상과 전혀 다르게 공이 완전히 빠졌다.
“스트라이크!”
“볼!”
이후 투수가 스트라이크를 잡긴 했지만, 볼넷으로 출루에 성공했다.
이어서 오준혁한테 연속으로 볼 2개를 넣자 프렌즈 벤치도 바빠지기 시작했다.
사무엘 우즈의 제구가 마음처럼 안 되긴 했지만, 볼넷은 고작 1개뿐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연속으로 볼을 준다는 건 무언가 문제가 생겼다는 뜻.
시간을 끌기 위해 박희준에게 마운드로 올라가라는 사인을 보내고 준비시켜뒀던 불펜을 점검하기 시작했다.
그사이 박희준이 다시 자리로 돌아왔고, 투수가 곧 공을 뿌렸다.
-따아악!
비를 뚫고 존을 비집고 들어오는 공이 그대로 오준혁의 방망이에 강타당했다.
[우익수와 중견수 사이에 떨어지는 안타! 1루 주자 3루까지, 아, 타자주자 2루를 노립니다!]
손이 얼어붙은 건 투수뿐만 아니라 야수들도 마찬가지였고, 그 틈을 노린 공격적인 주루플레이가 펼쳐졌다.
[세잎! 세잎입니다! 오준혁, 김수호 앞에 주자들을 잔뜩 깔아놓습니다! 2루타!]
우익수가 급하게 공을 던져봤지만, 공은 2루와 한참 떨어진 곳에 도착했다.
그사이 오준혁이 여유롭게 2루에 들어가면서 무사 주자 2, 3루.
대기타석엔 김수호가 있었다.
누가 봐도 이번 경기의 승부처가 분명한 타이밍, 이 타이밍에 프렌즈의 승부수도 던져졌다.
“피쳐 체인지!”
사무엘 우즈가 아쉬운 듯 공을 건네주지 않았지만, 박희준이 달래면서 겨우 공을 받아냈다.
이어서 들어온 투수는 바로 프렌즈가 자랑하는 세 명의 필승조 중 한 명, 한기혁이었다.
거기에 프렌즈의 승부수는 아직 끝이 아니었다.
“타자, 1루로.”
“예?”
“고의 사구 나왔다.”
순간 김수호가 멈칫했다.
머리로는 이해가 됐다.
아무래도 무사 2, 3루보다 무사 만루가 수비 하긴 편하니까.
거기에 최근 강주호의 성적도 안 좋은 것도 사실이었고.
그래도 강주호를 상대로 만루 작전이라.
‘선배님. 보여주시죠.’
따로 강주호를 쳐다보거나 그러진 않았다.
이미 충분히 자존심이 상했을 강주호다.
오히려 담담하게 나가는 게 강주호에게 더 좋을 것이다.
[루상이 전부 채워졌습니다! 5회 초, 주자는 노아웃 만루! 타석엔 마린스의 상징, 강주홉니다!]
[프렌즈의 작전은 1점을 주더라도 반드시 2개의 아웃카운트를 잡겠다는 거거든요? 여기서 강주호 선수가 보여줘야 합니다. 또 항상 보여줬던 선수고요!]
앞 타자를 거르고 자신을 선택하는 건 낯선 상황이었지만, 강주호는 이 상황을 타개하는 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공을 높게, 멀리 보내면 된다.
희생플라이만 나와도 동점이었고, 안타, 홈런이 나오면 역전이다.
전혀 욕심낼 필요 없는 타석이다.
동점만 만들어도 충분히 의미 있는 기회였다.
그 생각으로 초구가 오자 그대로 방망이를 냈다.
-따악!
하지만 한기혁의 공은 강주호의 생각보다 더 가라앉았다.
그래도 힘이 실린 타구가 내야를 꿰뚫을 듯 빠르게 날아갔다.
하지만 위치가 좋지 못했다.
[2루수! 잡았습니다! 홈 선택!]
“아웃!”
공을 받은 박희준이 걸음이 느린 강주호를 확인하고 2, 3루를 힐끔 쳐다본 후 1루로 던졌다.
“아웃!”
[아웃! 치명적인 4-2-3 더블플레이가 나옵니다!]
[이게 바로 프렌즈가 정규시즌 2위를 할 수 있었던 이유죠! 환상적인 수비입니다!]
촘촘한 내야에 걸린 타구에 강주호가 아쉬움을 삼키고 더그아웃으로 돌아갔다.
천금 같은 기회에서 동점도 만들지 못했고, 순식간에 아웃카운트가 2개나 잡혀버렸다.
하지만 아직 기회는 남아있었다.
앞 타석, 1타점 적시타를 쳤던 잭 미켈이 타석에 섰다.
-따아악!
시원한 소리와 함께 힘있게 날아가는 타구, 하지만 광활한 잠실의 벽을 넘기엔 약간 부족했다.
“아웃!”
“아, 미친!”
“와아아아! 한기혁! 한기혁! 한기혁!”
펜스 앞에서 서도하가 가볍게 잡자 마린스 팬들은 탄식을, 프렌즈 팬들은 기쁨의 함성을 질렀다.
그 이후 마린스는 추가점을 뽑지 못했다.
#
[서울 프렌즈 7 : 4 부산 마린스]
[마린스 돌풍을 잠재운 최강 프렌즈 불펜!]
[치명적인 무사 만루 무득점, 강주호라 더 뼈아프다.]
[2차전 선발투수 다넬 제이스 vs 허하준]
#
-오늘 경기에서 기대만큼 못 던져서 미안.
돌겠네.
문자를 보자마자 어지러웠다.
웰링턴의 이번 경기 성적은 5이닝 4실점.
웰링턴이 평소보다 못 던진 건 맞지만, 환경이 워낙 안 좋았고, 상대 선발인 사무엘 우즈보다 훨씬 잘 던졌다.
저렇게 자책할 만한 경기력은 아니었다.
아마 내가 아는 웰링턴이라면 지금쯤 ‘내가 실점을 안 했다면 이겼을 텐데.’라며 우울해하고 있지 않을까.
그나마 다행인 건 엠마 웰링턴에게 연락이 왔었다.
남편은 자신이 케어할 테니 다음 경기에 집중하라는 내용이었다.
진 건 진 거고, 아직 탈락한 것도 아니다.
아쉽지만 아쉬움으로만 남겨야지, 그게 다음 경기에 영향을 주면 안 된다.
하지만 포스트시즌에서 진 게 처음이라 그런 걸까, 경기 직후 분위기는 침울하기 그지없었다.
이 분위기를 단번에 뒤집으려면 한방이 필요하다.
그게 승리든, 홈런이든 뭐든 좋다.
하지만 잠실 구장에서 홈런을 기대하긴 힘들고, 오늘 하는 걸 보니 프렌즈는 나랑 승부를 보는 걸 피하는 느낌이다.
덕분에 강주호에게 기회가 많이 갔지만 오늘 강주호는 5타수 무안타.
특히 5회에 나온 병살은 치명적이긴 했다.
하지만 매번 잘할 수 있는 선수는 없다.
아, 아닌가?
“왜?”
“아뇨. 그냥 궁금한 게 생겨서요.”
“뭔데?”
“선배는 경기를 망친 날이 있어요?”
“갑자기? 흠, 글쎄.”
내일 선발 투수한테 이딴 질문을 하는 걸 알면 아마 야구계가 뒤집히지 않을까.
“아, 생각났다.”
아무튼 저런 질문을 하는 나도 나지만, 그걸 또 진지하게 받아주는 이 양반도 정상은 아니다.
“기호 선배 부상당하고 다음 경기였나. 7이닝 동안 5실점한 경기가 있어.”
“선배가 5실점이요?”
“어. 근데 전부 비자책. 기호 선배한테 던지던 대로 던지니까 포수들이 못 받더라고? 내 잘못이지. 조절해서 던졌어야 했는데.”
“아, 그렇군요.”
“뭐야 그 말투는?”
“그냥 뭐라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요.”
“싱겁긴. 아무튼 그 경기가 제일 망쳤던 경기 같네.”
포수가 공을 못 잡아서 전력으로 던질 수 없다니.
참 대단한 팀이었다. 마린스.
“그래서 넌 언젠데?”
“예?”
“너도 망친 날이 있을 거 아냐.”
“음....”
사실 바로 떠오른 경기가 있다.
“딱히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경기가 있긴 해요.”
“그래?”
“인제 와서 별건 아니고, 고3 때 드래프트 지명받고 황인재랑 얘기한 게 있거든요? 그날 경기 집중이 안 돼서 망쳤죠.”
“지금은 어떤데?”
“선배가 물어보기 전까지 기억도 안 났어요. 어차피 걘 가을도 못 왔는데 굳이 생각할 필요가 있을까요?”
불만이면 5위 안에 들던가.
“그것도 그렇지. 오케이. 수다는 이쯤하고, 다시 시작할까?”
“옙. 바로 시작하죠.”
다시 집중할 시간이 됐다.
#
다음 날 경기장에 출근한 웰링턴의 표정은 나쁘지 않았다.
“잘 쉬었어요.”
“물론이지 브로. 걱정해줘서 고마워.”
당장 출전 경기가 없다고 해도 4차전에 다시 올라올 투수다.
지금부터 기분이 나아진다면 안 좋을 게 없었다.
오늘도 잠심을 가득 채우는 팬들을 바라보는 허하준이 보였다.
“컨디션 어때요?”
“좋아. 어제 몸 좀 풀 겸 던졌던 게 도움이 됐나 봐.”
“날씨는요?”
어제처럼 비가 오는 날씨는 아니지만, 기온이 확 낮아지긴 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주말 낮 경기라 온도가 아주 낮지는 않았다.
“이 정도면 됐지. 핫팩 만지면 괜찮아.”
괜찮다고 말은 했지만, 아무리 허하준이라도 손이 얼면 제구가 마음처럼 안 될 수 있다.
최대한 마운드에서 있는 시간을 줄이는 게 중요했다.
어제 경기를 교훈 삼아 준비한 것도 있으니 오늘 마린스 팬들은 프렌즈 팬들보다 더 환하게 웃으면서 홈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다.
왜, 1승 1패라도 일요일에 1승 하는 게 좋다는 말도 있으니까.
슬슬 관중들이 가득 찰 때쯤, 감독님이 모두를 불렀다.
“좋아. 다들 표정이 밝군. 마음에 들어. 우리가 지금까지 4승을 했는데 고작 1패에 주눅 들면 안 되지.”
감독님이 주변을 쓱 훑어봤다.
“인정할 건 인정하자. 어제, 우리보다 프렌즈가 더 잘했다. 점수를 낼 때 냈고, 막을 땐 막았다. 그걸 부정하는 사람은 여기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옆에 있던 이주학이 큰 소리에 놀라 움찔거렸다.
“오늘의 우리는 어제의 우리보다 더 잘 할 수 있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그렇게 우리는 여기까지 왔고, 또 앞으로 더 나아갈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감독이 질문 하나만 하겠다. 이 중에 플레이오프에서 지려고 여기까지 온 사람은 거수.”
잠시 선수들을 둘러보더니 말을 이었다.
“아무도 없나!?”
“예. 없습니다!”
“좋아. 그럼 나가서 보여주자. 우리가 보여줄 건 어제의 복수가 아니라 내일로 나아갈 힘이다!”
“예!”
말을 마친 감독님은 살짝 상기돼 보였다.
“야, 조금 오그라들지 않냐?”
“시끄러워. 경기 준비나 해.”
이주학의 속삭임과 함께 플레이오프의 행방을 결정할 2차전이 시작됐다.
#
마린스의 공격이 항상 그렇듯 선두타자로 나선 박은성부터 시작이다.
박은성의 역할은 간단하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반드시 출루에 성공할 것.
물론 그걸 매번 성공할 수 없었고, 오늘 상대의 선발 투수도 그다지 만만한 선수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도 준비해 둔 게 있었다.
‘언제 그런 걸 다 조사했대?’
정확하게 말해서 그가 준비한 게 아니라 김수호가 일러준 거지만.
‘선배님, 어제 타석에서 전부 초구 지켜본 거 아세요? 오늘 첫 타석에 상대 투수가 적극적으로 들어올 가능성이 크다고 봅니다.’
꽤 그럴듯한 말이었다.
물론 그 말을 듣고 무작정 휘두를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투수를 뚫어져라 바라보자 손을 떠난 공이 가운데로 향하는 게 보였다.
김수호의 말 때문에 박은성의 몸은 언제든지 반응할 수 있게 준비된 상태, 공이 가운데로 온다 생각하자 그대로 공을 퍼 올렸다.
-따아아악!
‘아오, 잠실만 아니었어도 넘기는 건데.’
자신의 포스트시즌 첫 홈런은 아쉽게 넘어갔지만, 좌측 담장을 적격한 타구에 여유롭게 2루에 들어갔다.
이후 최치호의 뜬공에 움직이지 못했지만, 오준혁의 짧은 안타로 3루에 들어갔다.
그리고 박은성에게 조언을 해줬던 김수호의 타석이 됐다.
‘수호면 여유롭지.’
김수호가 이 상황에서 병살을 치는 건 본 적 없다.
그리고 그 기대에 부응하듯 강한 타구를 날렸다.
-따아악!
2루수가 급하게 글러브를 가져다 댔지만, 이미 공은 2루수 옆을 뚫고 외야로 빠져나간 이후였다.
박은성이 여유롭게 홈으로, 오준혁은 가속을 살리며 3루까지 들어갔다.
“나이스! 은성아, 타구 죽이더라. 홈런 아깝다?”
“어우, 제가 수호도 아니고. 전 이 정도면 만족합니다.”
이후 강주호가 내야 뜬공으로 아웃됐지만, 잭 미켈의 적시타가 터지면서 2대0.
“수호야, 너 촉 장난 아니다?”
“그래요? 다행이네요.”
“어디 다음 패 한번 까봐. 다음은 뭔데?”
“글쎄요. 그건 다음에 써야죠?”
“어?”
“선발이 하준 선밴데 전부 다 까기 아깝잖아요? 그죠?”
순식간에 설득이 된 박은성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이 맞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