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형제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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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플레이오프는 막을 내렸지만, 여전히 많은 팬이 그 여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3대0.
한 경기의 결과가 아니라 시리즈의 결과.
심지어 3이 마린스라는 건 한국 프로 야구를 조금이라도 봤던 사람이라면 도저히 납득하기 힘든 결과였다.
나이츠는 가을 야구를 제집 드나들듯이 거의 매년 참석한 강팀이다.
마린스는 최근 가을 야구가 5년 전, 심지어 2승 3패로 광탈하면서 고배를 마셨다.
그런 두 팀이 맞붙으니 아무리 마린스의 후반기 기세가 매섭다고 해도 마린스의 승리를 꼽는 팬들은 얼마 없었다.
가을은 정규시즌과 완전히 다르다는 게 정설이니까.
따라서 정배는 나이츠, 마린스가 이긴다고 해도 최소 3대2까지 가는 접전 끝에 올라갈 거라 예측한 팬들이 대다수였다.
그리고 마린스가 이 예측을 박살 내자 그 이유로 한 선수를 꼽았다.
시리즈 성적
13타석 12타수 4안타 5타점 2홈런 1볼넷
타/출/장 : 0.333 / 0.385 / 0.917
OPS 1.302
포일 0개 도루 3회 시도 3회 저지.
거기에 치열했던 경기를 끝내는 홈런으로 준플레이오프 MVP에 뽑힌 김수호.
[나 아직도 마지막 홈런 돌려보는데 내가 이상한 거냐?]
ㄴ 나도 돌려보는 중. 뽕 맛 진짜 지린다.
ㄴ 딱 치자마자 잠깐 정적 후에 함성이 역대급임.
ㄴ 진짜 직관을 갔어야 했는데···. 이거 못 가서 와이프한테 개박살남 ㅠㅠ
ㄴ 난 갔는데~ 여사친이랑 둘이 감 ㅎㅎㅎ
ㄴ ㄲㅈ
ㄴ 비틱 쳐내.
ㄴ 그래서 사귐?
ㄴ ㅎㅎ 김수호 허하준 보다가 경기 끝나고 나 보더니 놀라더라···. ㅅㅂ···.
ㄴ ㅋㅋㅋㅋㅋㅋㅋ 해피엔딩 ㅊㅋㅊㅋ
ㄴ 너 때문에 마린스가 이겼다 ㅅㅅ
ㄴ 웃지 마라. 너네도 여사친이랑 갈 땐 허하준, 김수호 안 나오는 경기로 가라···.
ㄴ 그럼 경기 지는데? 그걸 왜 보러 감?
ㄴ 아 가불기 지리네. 에라이.
그리고 그 홈런 장면을 돌려보는 건 비단 마린스 팬들뿐만이 아니었다.
-탁.
“어때? 승부하면 잡을 수 있겠어?”
프렌즈의 포수, 박희준은 감독의 말에 이기찬의 자리에 자신이 있다면 어떨지 생각했다.
“...아뇨.”
저건 못 잡는다.
애초에 저런 공을 홈런으로 만드는 타자가 대체 왜 한국에 있는 걸까.
그것도 20살짜리가 말이다.
박희준에 말에 프렌즈 감독이 고심 끝에 말을 이었다.
“김수호, 거른다.”
“예? 그럼 주호 형님은 어떡합니까?”
“차라리 강주호가 나아. 홈런 치긴 했어도 예전 같진 않아. 우리 투수들이면 충분히 잡을 수 있다. 근데 김수호 저놈은 도저히 답이 안 나와. 어디서 저런 놈이 튀어나왔는지. 아무튼 최대한 승부 피하는 걸로 해. 사인은 그때그때 보내줄 테니까. 다음!”
김수호를 제외해도 분석할 게 산더미였다.
각자 자신이 맡은 경기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준 세 선발 투수나, 다양성을 갖추고 나이츠 타선을 상대로 무실점으로 틀어막은 불펜.
필요할 때마다 점수를 뽑는 타선과 생각 외로 단단한 모습을 보여주는 수비까지.
그리고 그 모든 요소를 교집합 하면 김수호가 나온다.
‘차라리 김수호만 분석하는 게 더 현명할 수도 있겠는데.’
순간 떠오른 생각에 박희준이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갔다.’
아무튼 김수호가 마린스라는 팀의 중심이란 건 두말할 것 없는 사실.
그걸 머릿속에 새기고 전력 분석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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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하준이가 던져야죠. 그 다음이 웰링턴, 하스 순서로 나오고.”
“아니죠. 웰링턴, 하스, 하준이가 맞습니다. 한국시리즈를 위해서 하준이 팔을 좀 아낄 필요가 있습니다. 웰링턴이랑 하스도 좋은 투수입니다.”
“어허, 이제 겨우 플레이오프 왔는데 무슨 소리야! 그리고 만약 2대2로 5차전 가면 하준이가 생각 안 나겠어?”
“그건···.”
나이츠를 3대0으로 이긴 덕분에 행복한 고민거리가 하나 늘었다.
우리에게 주어진 휴식일은 총 4일.
허하준이 첫 경기에 등판해도 문제가 없을 정도의 휴식일이었다.
문제는 허하준이 선발로 등판할 경우 웰링턴과 하스의 휴식일이 너무 길어진다는 것.
첫 경기에 웰링턴이 등판한다 해도 무려 7일 휴식 후 등판이다.
만약 허하준이 첫 경기에 등판해 일정이 꼬이면 웰링턴은 8일, 하스는 무려 9일 후 등판이 예정되어 있다.
오히려 휴식이 길어서 생기는 문제라니 당황스럽지만 아무래도 한 시즌을 일정한 루틴으로 달려온 선수들의 루틴을 최대한 맞춰주는 게 좋았다.
문제는 1, 2차전에 웰링턴과 하스가 나온다면 허하준이 한 경기밖에 나올 수 없다.
물론 준플레이오프 때처럼 3대0으로 이기면 상관없는 일이지만 만약 2대2, 또는 2패로 몰리게 된다면 허하준의 존재는 그리울 거다.
코치님들 간의 의견이 엇갈리자 감독님이 이번엔 나한테 물었다.
“수호야, 네 생각은 어떠니.”
“전 1차전 웰링턴, 2차전 허하준 선배가 맞다고 생각합니다.”
“왜?”
“지금 웰링턴 기세가 좋은데 굳이 4일 휴식한 허하준 선배가 나올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허하준 선배가 2차전에 나오면 나중에 5차전에도 나올 수 있으니까 든든하고요.”
“하스는?”
“하스는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제 공을 던질 수 있는 투수라 3차전에 나서도 충분히 좋은 모습을 보여줄 겁니다.”
내 말을 듣고 고민하던 감독님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셨다.
“오케이. 수호 말대로 하지. 현장에서 직접 공을 받는 포수가 한 말인데 충분히 일리 있어. 다들 불만 없지?”
“예. 전 괜찮습니다.”
“저도 괜찮습니다.”
대립각을 세웠던 투수코치와 강기호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뭐야, 부담스럽게 갑자기 왜들 이러시는 거지?
그렇게 선발이 정해지자 나머지는 순식간에 진행됐다.
타자들은 워낙 주전과 백업의 격차가 커서 뛸 수만 있으면 주전으로 가는 게 맞았다.
하나 긍정적인 소식이 있긴 했다.
“주호가 1루 볼 수 있다고?”
“예. 최근에 푹 쉬어서 통증이 좀 줄었답니다.”
“흠. 알겠어.”
아마 채지훈이 계속 1루수로 출전할 테지만 좋은 소식이었다.
그렇게 회의는 끝이 났고 강기호와 함께 프렌즈 분석까지 마치자 어느새 밤이 됐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 문자 하나가 도착했다.
-Bro. 네가 날 허 대신 1차전 선발로 추천했다며? 오, 내가 꼭 네 기대에 보답할게. 고마워.
약간의 오해가 있는 것 같긴 하지만 굳이 풀 필요는 없는 오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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꿀 같은 삼일을 취하고 나와 감독님, 허하준은 먼저 잠실로 출발했다.
다음 날 오전에 있을 플레이오프 미디어데이에 참석하기 위해서인데, 이미 준플레이오프 때 해본 터라 그리 긴장되지는 않았다.
프렌즈에선 서도하, 마무리 김형주와 프렌즈 감독님이 나왔다.
“김수호가 준플레이오프 MVP 인터뷰에서 프렌즈와의 경기를 세 경기 만에 끝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서도하 선수, 이 발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도 똑같이 생각합니다. 마린스를 3대0으로 이기고 올라가겠습니다.”
“김수호 선수는 방금 서도하 선수의 발언에 대해 하실 말씀이 있으신가요?”
“이기고 말하겠습니다.”
서도하를 보자 살짝 웃는 모습이 보였다.
그 이후로 여러 질문이 오고 가고 드디어 가장 중요한 질문이 들어왔다.
“이제 1차전 선발 투수를 발표해 주시죠.”
“저희는 브릭 웰링턴 선수입니다.”
“에이스 사무엘 우즈 선수가 출장합니다.”
그러자 허하준에게 질문이 쏟아졌지만, 시간은 한정돼있었고, 그렇게 미디어데이가 끝났다.
숙소에 돌아가기 전 잠깐 남은 시간, 서도하가 다가왔다.
“이기고 말해? 벌써 창원에 간 거야?”
“계속 서울로 올라오려니까 힘들더라고요. 창원이 좋죠. 가깝고.”
“원래 한국시리즈는 잠실에서 하는 게 전통이었어. 모르냐?”
“언제적 전통이에요. 이제 경남에서 할 때도 됐죠.”
“하준아. 얘 왜 이렇게 머리가 커졌냐?”
“맞는 말만 하고 있는데요?”
그러자 서도하가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 것처럼 표정이 찡그려졌다.
“아오, 저 배터리를 어떻게 하냐.”
그 대화를 마지막으로 서도하는 프렌즈 쪽으로 돌아갔고 다음에 서도하를 본 건 다음 날 경기장에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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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링턴은 불펜과 마운드에서 피칭이 안 좋은 의미로 차이가 크게 났던 투수였다.
그래도 가족들이 한국에 들어오고 나서 마운드에서 안정을 되찾았고, 그건 준플레이오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오늘은 다시 예전의 웰링턴이 다시 돌아온 기분이었다.
“볼!”
벌써 두 번째 볼넷.
서도하가 날 보며 웃곤 1루로 걸어 나갔다.
경기가 시작하고 나서 단 하나의 스트라이크도 잡지 못했다.
마운드에 올라가는 동안 마스크를 벗고 얼굴을 따라 흐르는 물을 닦았다.
땀은 아니다.
물의 정체는 바로 비.
심지어 비가 오자 어제 따뜻했던 날씨와 다르게 순식간에 추워졌다.
경기가 시작하자 내린 비에 상대 선발 투수인 사무엘 우즈도 고전을 겪었다.
그 덕분에 한 점을 내긴 했지만, 곧바로 웰링턴이 연속 볼넷을 내준 상황.
“많이 춥죠?”
“하···. 미안. 마음처럼 안 되네.”
“저한테 미안할 건 없죠. 일단 이 상황을 벗어나는 것부터 생각해요.”
루상에 있는 김혁과 서도하는 모두 빠른 주자.
제구가 안 되는 상황에 1점도 안 주겠다는 건 욕심이었다.
“점수 줘도 괜찮아요. 오늘 상대 선발도 못 하던데요? 저한테 스트라이크 하나도 못 꽂는 거 봤죠?”
“상대가 브로잖아. 당연한 거지.”
“타자들 생각도 똑같아요. 상대가···.”
크흠. 좀 그런데···.
“왜 그래?”
“아니에요. 상대가 브로잖아요? 그러니까 가운데 꽂아봐요. 결과는 제가 책임질게요.”
“브로? 지금 브로라고 한 거야?”
“예. 브로.”
한 번 하니까 두 번은 쉬웠다.
웰링턴의 반응을 보니 잘한 것 같다.
이렇게 효과가 좋은지 알았으면 진작에 해볼 걸 그랬나.
“오케이! 우리 형제의 힘을 보여주자고!”
아무튼 어두웠던 표정은 사라지고 다시 내가 알던 웰링턴으로 돌아왔다.
아까까진 너무 얼어붙은 게 보였다면 이젠 너무 불타는 게 걱정이 될 정도였다.
다시 자리에 돌아와 사인을 보냈다.
‘시원하게 하나 꽂자고요.’
곧 웰링턴이 자세를 잡고 특유의 높이에서 공이 꽂히듯 미트를 향해 날아왔다.
-퍼어어억!
“스트라이크!”
타자, 오대현이 예상했다는 듯 방망이를 냈지만 헛돌면서 헛스윙.
‘큰일 날 뻔했네.’
솔직히 방금 공은 위험했다.
제대로 노렸다면 장타, 혹은 홈런까지 나올 법한 코스.
그래도 볼만 꽂는 것 보단 낫다.
2구 역시 몰린 공이 들어왔다.
-따악!
“파울!”
제구가 안 되는 것뿐이지 구위는 살아있는 만큼 쉽게 정타를 허용하지 않는 상황.
‘어차피 정교한 제구는 무리야.’
다음 공은 커브.
“볼!”
바깥쪽을 요구했지만, 타자 몸쪽으로 바운드가 됐다.
다행히 블로킹이 잘 됐고, 순간 역모션에 걸린 1루 주자를 보고 바로 공을 던졌다.
“세이프!”
정확하게 갔다면 접전이었겠지만, 나도 손이 언 탓인지 정교하게 송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래도 주자들의 리드폭을 조금이나마 줄이는 효과가 있다면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었다.
다시 타자에게 집중할 차례.
요구한 공은 다시 커브.
포심보다 제구가 안 되는 느낌을 받았는지 웰링턴이 주저했지만, 내 사인을 받아줬다.
투구와 동시에 뛴 두 주자들.
그리고 타자의 방망이가 나왔다.
“스트라이크 아웃!”
늦게나마 던져보려 했지만, 안 그래도 커브가 바운드가 돼버려 던지진 못했다.
그래도 아웃 카운트 하나를 잡았다.
이제 타석엔 4번 타자 페드로 산체스.
이 타자만 넘기면 희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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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
자신의 인생을 바꿔줬다 해도 과언이 아닌 김수호.
처음에 가디언이라 부르자 싫어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방금도 브로라고 하고 표정이 웃겼지.’
물론 싫어서가 아닌, 그냥 민망해서 그런 건 웰링턴도 잘 알고 있었다.
애초에 마린스 내에서도 그가 브로(형)이라 부르는 사람은 김동준밖에 없었고, 완벽한 호흡을 보여주는 허하준과도 선배라고 할 뿐 저런 호칭이 아니었다.
사소하다면 사소한 문제지만, 그게 웰링턴에겐 큰 힘이 됐다.
‘브로가 1차전 선발로 선택한 건 나야. 여기서 내가 못 던지면 그건 믿음을 저버리는 거고.’
그런 의미에서 이번 이닝, 반드시 무실점으로 막고 싶었다.
웰링턴에 타석에 들어선 타자를 노려봤다.
그리고 김수호를 보며 사인을 확인했다.
‘역시 브로.’
지금껏 그가 호흡을 맞춰본 포수들은 이런 상황에서 항상 도망가는 볼 배합을 보여줬다.
하지만 김수호는 당당하게 존 가운데에 미트를 들어올렸다.
거절할 이유가 없다.
곧장 고개를 끄덕인 웰링턴이 투구를 시작했다.
비에 젖어 축축한 손가락에 제대로 실밥을 채지 못했지만, 공은 미트와 비슷한 곳으로 날아갔다.
-따악!
“마이! 마이!”
최치호가 콜을 하고 그대로 내야에 높이 뜬 공을 잡아냈다.
“와아아아!”
이제 남은 아웃카운트는 하나.
그리고 다시 한번 김수호의 사인을 확인하고 투구를 준비했다.
“스트라이크!”
몸쪽에 붙은 공에 타자가 방망이를 내지 못했다.
‘굿.’
사인은 바깥쪽이었지만 마치 처음부터 몸쪽 사인을 낸 것 같은 부드러운 포구에 웰링턴이 감탄했다.
다음 사인은 커브.
“볼!”
다시 한번 김수호가 바운드를 안정적으로 막아낸 후 새 공을 받아서 웰링턴에게 던져줬다.
‘미안 브로.’
커브를 던질 때마다 몸을 던지는 김수호를 보면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그걸 위해서라도 이번 이닝을 빨리 끝내는 게 중요했다.
김수호의 사인을 보자마자 곧바로 투구에 들어갔다.
“스트라이크!”
바깥쪽 공에 휘둘렀지만 맞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 공.
“스트라이크 아웃!”
분명 빠지는 공이었지만, 슬쩍 존에 집어넣는 프레이밍에 웰링턴이 포효했다.
“Brooooo!”
무사 1, 2루 무실점.
아직 남은 이닝이 많지만, 분명 큰 의미가 있는 이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