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팬서비스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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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를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허하준을 아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다.
2028년 올림픽에서 아쉽게 은메달에 그쳤을 때 가장 화제가 됐던 인물이 허하준이었다.
일단 잘 생겼다.
생활도 반듯하고 고작 스무 살의 나이에 국제전에서 인상 깊은 활약을 한 선수를 싫어할 사람은 얼마 없었다.
거기에 일찌감치 허하준을 프랜차이즈 스타로 키우려는 마린스의 지원으로 다양한 CF도 찍으면서 대중들에게 이름과 얼굴을 알렸다.
그 결과 스포츠 스타에 관한 설문조사를 할 때 당당히 상위권에 올라올 정도의 인지도를 갖추게 됐다.
그러다 올해 브리즈번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고, 거기에 올림픽 화제의 선수 1위에 빛나는 김수호와의 케미, 이어지는 화려한 기록 덕분에 더욱더 화제가 된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런 허하준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허하준의 여동생 허하율이었다.
맨날 실실 웃고 다니고, 자신에겐 항상 장난만 치는 그런 허하준이 뭐가 좋다고 그러는지 이해를 못 하는 허하율이었다.
특히 특이한 성씨와 하자 돌림, 그리고 허하준을 닮아 시원하고 예쁜 외모를 가진 덕에 부산에선 이미 허하준의 동생이라고 소문이 자자하다.
아무튼 그런 허하율도 결국 부산 사람.
야구를 사랑하고, 또 마린스를 사랑하는 한 명의 야구팬이었다.
비록 오빠로서 허하준은 별로였지만, 마린스 팬으로선 최고의 선수였다.
그리고 최근 마린스 팬은 김수호 팬과 동의어로 쓰이고 있다.
그래서 말도 안 되는 부탁을 들어주면서 김수호와 한 번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했던 건데.
‘미친놈아! 같이 있다고 말을 했어야지!’
혼자 있으니 유니폼만 갖다주면 된다고 해놓고 갑자기 김수호라니!
‘어떡해. 아무것도 안 바르고 나왔는데!’
그나마 눈썹과 입술을 칠한 게 다행이지.
아무튼 그게 허하율이 괴성을 지르면서 주저앉은 이유였다.
다행히 카페엔 직원을 제외하면 사람이 많이 없었고, 별다른 소란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저 이 사건의 허하준만 이 상황을 즐기고 있을 뿐, 김수호 역시 당황한 건 마찬가지.
“안녕하세요?”
“...네.”
멀쩡한 의자를 내버려 두고 계속 카페 바닥에 앉아있을 순 없는 노릇이라 일단 의자에 앉았다.
그래도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작게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 마실래?”
“...득츠라.”
“제가 사드릴게요. 뭐 하나 드세요.”
차마 김수호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던 허하율은 작게 말했다.
“저 아아 작은 사이....”
“자바칩스노우 휘핑 추가하고 거기에 반미샌드위치 하나.”
“...네. 그렇게 주세요.”
김수호가 웃으면서 주문을 하러 간 사이, 허하율이 허하준의 옆구리를 퍽퍽 때렸다.
“뒤질래?”
쓸데없이 자신을 잘 아는 오빠 덕에 김수호가 사준 샌드위치로 먹게 됐으니 고맙긴 했지만, 이미지라는 게 있다.
‘첫 만남부터 저렇게 얻어먹는 사람이 어딨냐고!’
물론 단순히 만났을 뿐이지만 아무튼 사람 마음이 그렇다.
자신이 응원하던 선수가 바로 앞에 있는데 당연히 잘 보이고 싶은 게 사람 심리였다.
“그래서 싫어?”
“그 말이 아니잖아!”
두 남매가 평소처럼 노는 사이 주문을 마친 김수호가 돌아왔다.
“샌드위치 몇 개 더 시켰어요. 선배도 밥 안 먹었죠?”
“어. 고마워.”
‘역시 수호신!’
최근 마린스 팬들 사이에서 자주 쓰는 김수호의 별명을 생각하며 자신의 오빠와 완전히 다른 김수호의 센스에 감탄할 즈음.
김수호가 아까부터 궁금했던 걸 물었다.
“두 분 사이가 진짜 좋네요. 전 외동이라 형제가 있었으면 했거든요.”
“아하하···. 그렇죠···. 저희 사이좋아요.”
“말 편하게 해도 돼. 둘이 동갑이야.”
“아, 그래요? 말 편하게 해도 돼?”
“어···. 네···.”
훅 들어온 김수호의 말에 허하율은 그저 고개를 숙이고 작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생전 처음으로 허하준의 동생으로 태어난 것에 감사를 느끼면서 혹시 오해할까 봐 한 마디를 덧붙였다.
“저 오늘 공강이에요.”
“아, 그래···요?”
허하준 때문에 평일에 백수 차림으로 나왔지만, 학생임을 어필한 허하율과 말을 편하게 하라 해놓고 정작 허하율은 존댓말을 해서 뭐가 맞는지 고민 끝에 요를 붙인 김수호.
그리고 그 모든 걸 보면서 웃는 허하준까지.
다행히 음식이 나오고 계속 대화하면서 분위기가 괜찮게 흘러갔다.
“저 팔찌 진짜 하율이 네가 만들어 준 거야?”
아직도 김수호 입에서 나오는 자신의 이름이 적응이 안 됐지만, 음료를 한 모금하고 차분하게 말했다.
“응···.”
“그래? 잘 만들었더라.”
누가 봐도 허접했지만, 그렇게 말해주는 김수호가 고마울 따름이었다.
그리고 허하준이 이에 얽힌 비하인드를 말해줬다.
“내가 고등학생 때 학교에서 배웠다고 나한테 만들어줬거든. 청룡기 결승이었나? 2사 만루에서 삼진 잡고 내려가는데 팔찌가 끊어져 있더라. 그리고 그다음에 우승했고. 그래서 이번에도 하나 만들어 달라고 했지.”
“오, 정말요?”
김수호가 꽤 흥미가 생기는지 팔찌를 쳐다봤다.
그간 허하준을 봐왔지만, 따로 루틴이나 징크스 같은 걸 신경 쓰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허하준의 새로운 모습이 신기했다.
하긴 한국만 좀 덜한 거지, 메이저리그엔 별의별 징크스를 가진 선수들이 많다고 들었다.
흥미가 생긴 김수호가 허하율을 바라봤다.
“혹시 내 것도 하나 만들어 줄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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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하준이 허하율에게 팔찌를 받기 위해 내준 것은 상당했다.
어릴 때 장난으로 해줬던 것과 달리 커서 그런 걸 하기엔 오글거리기도 했고, 특히 자신의 오빠가 자신이 만든 팔찌를 차고 다닌다는 생각에 도저히 만들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허하준이 건 조건은 고작 실로 팔찌를 만드는 것 치곤 과했다.
특히 언젠가 김수호와 만나게 해준다는 말에 고민도 없이 바로 수락했다.
물론 이런 만남을 원한 건 아니었지만.
아무튼 김수호의 부탁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손 좀 줄래?”
허하율로서는 허하준의 팔찌를 만들 때보다 몇 배의 정성을 쏟아서 만들었다.
하지만 저주받은 재능과 근처 가게에서 산 싸구려 실의 조합의 팔찌는 대충 봐도 엉성한 티가 났다.
그래도 김수호는 꽤 만족한 모습이었다.
“고마워.”
반대로 김수호의 손을 가까이서 본 허하율이 감탄했다.
‘손 엄청 크네.’
자기 손과 살짝 비교했을 때 대략 두 배 차이.
심지어 손바닥 곳곳에 있는 굳은살은 김수호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말해주는 듯했다.
“수호는 공짜로 해주는 거야?”
그 모습을 지켜보던 허하준이 말했다.
“어? 뭐 줘야 해요?”
“어. 나 이거 받으려고 얼마나 고생했는데. 공짜는 안 되지.”
“아니! 괜찮....”
“유니폼에 사인해주는 거 어때? 아, 괜찮다고?”
“...사인으로 해줘.”
올해 마린스 경기를 직관한 팬 중 김수호의 사인이 없는 사람이 없다지만 허하율은 꽤 많은 경기를 직관했음에도 사인이 없었다.
‘사인받다가 저 인간 만나면 무슨 말을 들을 줄 알고.’
하지만 그 생각도 잠시.
“나 근데 유니폼 집에 있는데···.”
특히 김수호의 국가대표 유니폼은 김수호의 사인만 받으려고 아직 포장도 뜯지 않은 상태였다.
‘이 씨. 미리 말했으면 유니폼도 챙겨왔지!’
괜히 허하준을 한 번 노려보고 말았다.
“그냥 마린스 샵에서 하나 살게! 잠시만!”
하지만 최근 김수호의 유니폼을 구하는 건 하늘의 별 따기에 가까웠다.
심지어 김수호 본인이 왔음에도 구할 수 없었다.
결국 구매에 실패한 허하율이 어쩔 수 없이 마킹은 나중에 하고 무지 유니폼을 구매하려고 할 때였다.
“잠깐만.”
김수호가 구장 안으로 들어가더니 곧 무언가를 들고나왔다.
“이거 한 번밖에 안 입은 건데 이 정도는 괜찮지? 아니면 한 번 더 빨아서 줄까?”
괜히 신경 쓰이는 듯 유니폼의 냄새를 맡은 김수호였지만, 허하율은 순식간에 유니폼을 채 갔다.
“아니! 괜찮아!”
너무 급하게 말한 터라 삑사리가 났지만, 그래도 이건 중대 사항이었다.
‘실착 유니폼?’
언젠가 김수호의 첫 번째 사인을 받았다는 사람의 글을 본 적이 있다.
그때 그 글을 보고서 얼마나 부러웠던지.
하지만 지금까지 실착 유니폼을 받았다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그래? 다행이다.”
그렇게 실착 유니폼에 사인까지 받은 허하율이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믿기지 않는지 유니폼을 자꾸 쳐다봤다.
그사이 김수호와 허하준이 내일 어디서 볼지 얘기를 하면서 인사를 마쳤다.
“그럼 하율아, 다음에 또 보자.”
“응! 수호야, 잘 가!”
아쉽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또 보자는 말에 허하율이 밝게 웃으면서 김수호를 배웅했다.
김수호가 택시를 타고 사라진 뒤.
“할 말 없냐?”
허하준이 특유의 미소를 지으면서 동생을 바라봤다.
“... 감사합니다.”
그저 90도로 인사하면서 감사함을 표현했다.
허하율의 20년 인생 중 허하준의 동생으로 태어나길 잘했다고 생각한 몇 안 되는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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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하다 하다 커플 팔찌냐?”
“예? 아, 이거요?”
강주호의 물음에 어제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그래? 동갑이라고?”
“예. 왜 그러세요?”
“스읍, 아니다.”
얘기를 들은 강주호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튼 가장 먼저 와있던 강주호 이후 선수들이 속속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웰링턴 가족, 하스, 허하준, 그리고 채지훈 등등.
“아이고, 어서 오세요.”
이호민네 부모님께서 직접 나오셔서 우리를 반갑게 맞이해주셨다.
오늘 모이기로 한 곳은 부모님께서 운영하시는 정육 식당.
내 입으로 하기 좀 그렇지만 최근 그냥 길을 걸어도 알아보는 사람이 워낙 많다 보니 평범한 가게에 가기 좀 부담스럽다.
거기에 누가 봐도 시선이 끌리는 조합이다.
덩치 큰 남자들만 여럿에 외국인 가족, 거기에 알 수 없는 문신이 가득한 흑인 남성.
딱 봐도 마린스 선수단이었다.
그래서 혹시 몰라 연락을 드렸더니 다행히 흔쾌히 허락해 주셨다.
우리가 부담스러울까 봐 다른 손님들도 안 받는다고 하셨으니 고마울 따름이다.
그렇게 시작한 경기.
오늘 선발 투수는 이호민이었고, 부모님께서 궁금하신 게 있으신지 옆에서 계속 물어보셨다.
정성껏 대답해드리는 사이 이호민이 깔끔하게 1회를 마무리했다.
“호민이 잘 던지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홈런이 많이 나오는 구장인 인천 구장에서 3이닝 1실점 무피홈런으로 무사히 등판을 마치자 옆에서 안도의 한숨이 들려왔다.
“수호야, 네가 있었다면 실점 안 했겠지?”
“아이고, 형님. 당연하죠.”
어느새 이호민 아버지와 형 동생 사이가 된 강주호가 당연하다는 듯 큰소리쳤다.
알고 보니 이호민네 아버지께서 강주호의 고등학교 7년 선배셨다.
거기에 프로는 못 하셨지만, 야구부 출신.
부산 좁다, 좁아.
아무튼 강주호가 그런 말을 한 건 실점 과정 때문이다.
이호민의 슬라이더가 완전히 바깥쪽으로 빠져버렸고, 그걸 이재익이 잡지 못하면서 주자가 1루에서 3루까지 가버린 상황.
이어진 희생플라이로 실점한 거니 블로킹에 성공했다면 실점은 없었다.
근데 그 공은 나도 잡기 버거워 보이는 공이었다.
근데 또 부모님께 ‘이호민이 못 던져서 그래요’ 라고 말할 순 없는 노릇이다.
“예. 저였으면 무실점이었죠.”
이젠 얼굴에 철판 까는 것도 익숙하다.
그렇게 웃고 떠드는 사이 경기는 어느새 막바지로 흘러갔다.
결과만 말하자면 우리가 졌다.
하지만 동시에 챌린저스를 꼴찌 호올스가 잡아내면서 두 팀의 격차는 다시 0.5경기.
우리의 패배가 오히려 최상의 결과로 이어졌다.
우린 누가 올라와도 상관없다.
“응? 안 먹어?”
“먹고 있어요.”
저기 고기 먹고 있는 허하준이 선발인데 뭔 걱정이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