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기록 -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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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렌즈와 매치는 1승 1패로 끝났다.
첫 경기는 이호민이 8회까지 잘 막아내고 이용기가 세이브를 기록하며 깔끔하게 끝났다.
기세를 살려 다음 경기에서 김호기가 꽤 안정적인 경기 운영을 하면서 프렌즈 타선을 봉쇄했지만, 상대 투수가 너무 잘 던졌다.
그 사이 돌핀스가 2승을 거두면서 우승을 확정.
돌고래 : 위에서 기다림 ㅋ
오랜만에 이규영에게 연락이 와서 보니 이런 내용이었다.
아무튼, 이로써 4, 5, 6위를 제외한 모든 팀의 순위가 정해졌다.
이제 정말 마지막 한 주만이 남았다.
듬성듬성 경기가 잡혀 있어 화요일에 나이츠 원정, 목요일에 스타즈 원정, 그리고 홈으로 돌아와 금요일 스타즈와의 홈 경기를 치른다.
그리고 정규시즌 마지막 날인 일요일에 호올스와 시즌 마지막 경기를 치르면 끝.
이제 경우의 수는 간단하다.
현재 우리는 71승 1무 68패로 4위.
가을에서 탈락하는 경우는 5경기가 남은 챌린저스(67승 72패)와 6경기가 남은 스타즈(66승 1무 71패)가 전승하고 우리가 전패하는 경우의 수밖에 없다.
우린 남은 4경기 중 1승만 거둬도 5위 확정.
특히 그 1승의 상대가 스타즈라면 4위도 확정이다.
더군다나 나이츠 원정의 선발은 허하준.
사실상 가을야구는 확정이라고 보면 된다.
이미 4위가 확정된 분위기였지만 다들 다음 경기에 임하는 각오가 달랐다.
그 분위기를 대변하듯 수원에 도착하고 나서 경기가 시작하기 전, 강주호가 라커룸에 선수단을 불러 모았다.
“지금까지 다들 고생 많았다.”
마린스의 전성기와 자신이 없을 때 점차 힘을 잃어가던 모습, 그리고 끝없는 암흑기.
이 모두를 겪은 노장의 한 마디에 다들 표정이 묘해졌다.
“시즌 중반에 어떤 미친 신인이 올 시즌 우승하겠다고 했을 때, 나는 믿지 못했다. 사실 여기 있는 누구도 믿지 못했겠지. 나도 솔직히 신인의 패기라고 생각했으니까.”
“미친놈인 줄 알았죠.”
모두가 나를 보며 웃는데, 조금 억울했다.
나름 진심으로 한 얘기였는데.
“이제 단 한 경기, 한 경기만 이기면 된다. 설마 우리가 지고 다른 팀이 이겨서 팬들에게 어부지리로 올라갔다는 말을 듣고 싶은 놈은 없겠지?”
“없습니다!”
“좋아. 나가서 깔끔하게 나이츠 놈들을 이기고 당당하게 홈으로 돌아가자!”
“예!”
10개 구단의 목표는 우승.
하지만 그 기회를 얻을 수 있는 건 단 다섯팀뿐이다.
이제 그 출발선에 설 수 있는 티켓을 얻기 위한 마지막 경기가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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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츠는 이미 순위를 확정 지은 지 오래됐지만, 라인업은 주전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게 선수들의 타격감을 위해서든, 허하준의 공을 최대한 보기 위해서든 중요하지 않았다.
오늘 마린스의 에이스는 메이저리그 우승팀이 와도 소용없을 정도의 공을 뿌려댔다.
“스트라이크 아웃!”
“스트라잌 아웃!”
“스트라이크 아웃!”
포심과 투심, 스플리터를 기반으로 가끔 섞는 슬라이더와 커브, 체인지업까지.
이전에 허하준의 공을 상대한 적이 있던 나이츠의 선수들의 방망이는 그저 허공을 가를 뿐이었다.
고작 1회가 끝났을 뿐인데 나이츠 타자들의 머릿속에 예전 경기의 악몽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투수와 포수를 제외한 모든 선수를 들러리로 만들어버리는 완벽한 투구가 끝나고.
허하준과 더불어 나이츠의 타선을 농락했던 포수가 타석에 들어왔다.
평일, 그것도 화요일임에도 외야가 가득 차고, 마린스를 응원하는 팬들이 3루 쪽 좌석을 가득 채운 이유.
[김수호 선수가 타석에 들어섭니다!]
바로 마린스가 승리하는 걸, 특히 허하준이 호투하고 김수호가 홈런을 쳐서 승리하는 걸 보기 위해 모인 팬들이었다.
무사에 주자도 없지만 알 수 없는 긴장감에 나이츠 배터리의 사인 교환이 길어졌다.
분명 경기 시작 전 감독에게 홈런을 맞아도 좋으니 정면 승부하라는 말을 들었지만, 투수의 고개가 계속해서 돌아갔다.
이런 상황에서 투수의 의견을 무시할 수 있는 포수는 거의 없었고, 이기찬 역시 결국 투수가 원하는 곳에 미트를 가져다 댔다.
바깥쪽 낮은 곳.
김수호를 피하고 싶은 생각과 안타를 맞더라도 장타는 피하고 싶다는 마음이 섞여 내린 결정이었다.
제구만 완벽하게 된다면 그것보다 완벽한 코스는 없었다.
그렇게 이번 이닝의 첫 공이 투수의 손을 떠났을 때, 김수호의 방망이도 움직였다.
-따아아악!
타구음을 듣자마자 움직이려던 좌익수가 곧 걸음을 멈췄다.
-와아아아악!
-김수호! 김수호! 김수호!
그건 곧 팬들이 김수호의 이름을 부르고, 환호한 게 벌써 서른 번째라는 의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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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에 헬멧을 맞출 때 더그아웃용으로 하나 맞춰야 하나.
더그아웃을 뚫고 들어오는데 머리가 남아나지 않는다.
시즌이 다 끝나가는 데 힘도 좋다.
그 힘 좀 아껴서 야구할 때 쓰지.
이런 내 생각을 알았던 걸까.
연속 안타가 터지면서 이번 이닝에 2점을 더 뽑았다.
그에 반해 나이츠 타자들은 영 힘을 못 썼다.
내가 생각해도 오늘 허하준의 공이 좋긴 했다.
좌, 우 가릴 것 없지 방망이를 맞추는 선수 자체가 드물었다.
타선은 3득점에 그쳤지만, 그걸로 충분하다는 듯 8회까지 무실점.
그리고 이어진 9회.
오늘 우리 마운드엔 오직 한 투수만이 서 있었다.
9회 초 공격이 진행되는 사이 허하준과 몸을 풀기 위해 연습 투구를 받고 있었는데 관중석에서 함성이 들려왔다.
“스타즈가 졌다!”
그 말은 즉 오늘 우리가 이기면 4위가 확정이라는 뜻.
“아웃!”
타석에 들어선 이주학이 아웃되면서 이제 남은 정규이닝은 9회 말뿐.
이제 팬들이 뭘 기대하고 있는지 알고 있다.
어서 빨리 이 경기를 끝내고, 온전히 그 기쁨을 느끼고 싶어 할 터.
“빨리 끝내죠?”
내 말에 허하준이 웃으면서 마운드로 올라갔다.
그리고 첫 타자.
나이츠도 이대로 조연이 되긴 싫은지 대타를 기용했다.
하지만 초구, 투심을 건들면서 유격수 땅볼 아웃.
그리고 이어진 스트라이크의 행진.
“스트라이크!”
“스트라이크!”
그리고 삼 구는 한 방을 노리는 타자에게 최악의 공, 몸쪽 하이패스트볼.
“스트라이크 아웃!”
-와아아아!
156KM의 구속에 환호하는 걸까, 아니면 이제 가을까지 단 한 개의 아웃카운트에 환호하는 걸까.
뭐가 됐든 좋다.
이제 단 한 타자만이 남았고.
“스트라이크!”
“스트라이크!”
대타로 타석에 들어선 타자는 어떻게든 맞춰서 나가보겠다는 의지가 가득했지만.
“스트라이크 아웃!”
뚝 떨어지는 스플리터에 허무하게 삼진을 당했다.
“으아아악!”
“가을이다! 해냈다!”
“미쳤다! 하준아! 수호야!”
너나 할 것 없이 모자와 글러브를 던지며 한가운데로 모여들었다.
수원, 머지않아 다시 돌아올 그곳에서 드디어 우승을 향할 출발선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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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린스, 감격의 5년 만의 가을 진출! 마지막은 에이스의 손으로.]
[뜻깊은 날, 마린스 4위 확정과 동시에 김수호의 최소경기 30홈런, 허하준 한 시즌 최다 완봉승 타이 등 기록 쏟아져.]
[인천으로 향하는 가벼운 발걸음, 이정훈 감독 ‘아직 5위가 정해지지 않은 만큼 최선을 다할 것.’]
[똑 닮은 배터리, 김수호와 허하준에게 기록 달성 소감 묻자, ‘가을에 갈 수 있어 기쁘다’]
[승률 7할 5푼. 마린스의 후반기는 정말 뜨거웠다.]
[김수호, 마린스를 찾아온 신(神)인]
[마린스의 현수막 ‘오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반드시 우승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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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츠전의 여운이 끝나기도 전에 버스는 두 개로 나뉘어서 움직였다.
하나는 인천으로, 또 하나는 부산으로.
아직 가을 자리는 하나가 남았고, 그 캐스팅보트는 사실상 우리에게 있었다.
챌린저스가 이기고 스타즈가 지면서 두 팀의 경기 차는 1.5경기.
우리는 어느 팀이 올라오든 상관없다는 입장이었지만, 가장 좋은 건 두 팀 모두 시즌 마지막 경기까지 최선을 다하면서 힘을 빼는 거였다.
겸사겸사 휴가도 줄 겸 일부 주전 선수들은 먼저 부산으로 향했다.
등판 계획이 없는 허하준, 웰링턴, 하스와 강주호와 나, 그리고 몇몇 선수들까지.
어차피 수요일엔 경기가 없어서 푹 쉬고 목요일 경기 때 같이 모여서 보기로 하고 헤어졌다.
근데 오랜만에 아무것도 안 하고 쉬려고 몸이 근질거려서 결국 밖으로 나왔다.
먼저 최현우를 찾아가 타격폼에 이상이 없는지 점검을 했다.
“완벽합니다.”
“그래요?”
“예. 현재 컨디션만 유지하셔도 가을에서 분명 좋은 성과가 있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간단한 체크 이후 택시를 불렀다.
근데, 갈 곳이 없다.
“어디로 갈까요?”
“어.... 일단 사직 야구장으로 가주세요.”
“어? 오늘 경기 없는데?”
“그냥 구경 좀 하려고요.”
“요즘 마린스가 너무 잘해서 기분이 좋아요. 특히 김수호 그 친구! 하, 진짜 내가 딸만 있었어도 바로 소개해 줄 텐데.”
“하하···.”
마린스 얘기에 신이 나신 택시 기사님의 수다를 라디오 삼아 도착했다.
저번 교훈으로 마스크와 모자를 쓴 덕에 나인 걸 들키진 않았다.
만약 들켰다면 또 계산도 못 하고 내렸겠지.
“근데 이제 뭐 하냐.”
아무 생각 없이 온 터라 할 게 없었다.
지금 이 시각에 만날만한 친구도 딱히 없고, 야구 말고 취미도 없다.
이왕 온 김에 구장이나 한 바퀴 둘러볼 겸 걸었다.
한 바퀴를 돌 동안 지나가는 사람이 고작 열 명 안팎일 정도로 평일 낮에 사직 구장은 한산했다.
근데 그 와중에 내가 아는 사람을 만날 확률이 얼마나 될까.
“어?”
“선배?”
나처럼 모자와 마스크를 꼈지만 누가 봐도 허하준이었다.
“여기서 뭐 해요?”
“그냥 할 게 없어서. 너는?”
“저도요.”
이런 곳에서 보니 참 반갑기도 하고, 뭔가 묘했다.
서로 휴가 때 할 게 없어서 구장을 돌다가 만나다니, 이건 뭐냐.
“카페나 갈까?”
“그러죠. 뭐.”
그래도 동지가 있음에 감사하며 구장에 있는 카페로 갔다.
그리고 하는 얘기는 온통 야구 얘기.
특히 와일드카드 첫 경기에 허하준의 등판은 거의 기정사실이라 스타즈 타자들에 관한 얘기가 주를 이뤘다.
“5년 전에도 스타즈랑 만났었죠?”
“그렇지. 결국 지긴 했지만.”
최종 2위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던 마린스.
그 상대는 스타즈였고, 시리즈 전적 3대2로 패배했다.
심지어 홈에서 전패를 한 터라 당시 부산이 난리가 났었다.
물론 그중에 나도 있었고.
몇 년 만에 간 가을인데 광탈, 그것도 패패승승패로 홈 전패라니 당시에 팬들이 멀쩡한 게 이상한 거였다.
“그때 강기호 선배가 병살 쳤잖아.”
“아, 그거요?”
심지어 그때 짤은 아직도 돌아다녔다.
정신없이 과거 얘기를 하다 보니 궁금한 게 생겼다.
“오랜만에 휴간데 그 팔찌 만들어준 사람 안 만나요?”
“아, 오늘 아침에도 만나고 왔는데?”
아침에도 만나는 사이?
출근하기 전에 찾아가서 만난 건가?
“왜? 만나보고 싶어?”
“예? 지금요?”
“어. 부를까?”
뭐지? 갑자기 머릿속에 혼란이 오기 시작했다.
“어. 너 있다고 하면 바로 나올걸? 잠시만.”
허하준이 실실 웃으면서 카페 밖에 나가 전화하는 사이, 더 생각하기를 포기하고 커피나 마저 빨아 마셨다.
그리고 곧 허하준이 돌아와서 말했다.
“금방 온대. 잠깐만.”
대략 30분 정도 흘렀을까.
“왔다.”
“아이씨, 왜 오라 마라야. 야, 네 유니폼.”
살짝 늘어난 티셔츠, 무릎이 튀어나온 추리닝, 그리고 눌러 쓴 모자와 뒤쪽으로 나온 묶은 머리.
“왔어? 수호야, 인사해. 내 동생. 허하율.”
허하준의 말에 허하율과 눈이 마주치자 허하율의 눈이 심각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꺄아아악!”
괴성이 카페 안에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