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기록 -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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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를 하다 보면 더럽게 안 풀리는 날이 있다.
이규영에겐 오늘이 그런 날이었다.
분명 눈을 떴을 때 컨디션도 좋았고, 신발을 신을 때 구겨짐 없이 딱 들어간 것이 오늘 하루가 좋을 거라고 말하는 듯했다.
하지만 막상 경기장에 오자 경기는 최악으로 흘러갔다.
두 번째 타석에서 겨우 출루에 성공했지만, 도루 실패.
거기에 평소라면 잡을 수 있을 법한 타구를 놓치면서 선취점의 계기를 내줬다.
그도 나름 7년 차 프로 선수였고, 이런 일을 한 두 번 겪은 게 아니었다.
문제는 타격이 아니라 슬럼프가 없다는 발과 수비 등이 잘 풀리지 않는다는 거였다.
그나마 상대가 상대이니 괜찮다고 생각할 법했지만.
‘시발 내가 언제부터 이런 생각을 했다고.’
이건 자신이 아니라, 자신을 상대했던 선수들이나 할 법한 생각이었다.
적어도 한국 야구에서 이규영이란 존재는 그 정도의 위상은 있었다.
거기에 비밀이지만 메이저리그 진출까지 생각 중인 그로서 마린스 배터리는 반드시 이겨야 할 상대였다.
물론 허하준과 김수호가 메이저리그 선수들과 비교해서 꿀리는 편이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오늘 그 둘을 이기지 못한다면 도전조차 못 하고 꺾일 것 같았다.
‘얄미운 새끼.’
이규영이 포수 마스크를 낀 김수호를 노려봤다.
왜 상대하기 싫은 타자 투표에서 1위를 한 지 알겠다.
아마 선수들을 대상으로 투표해도 결과가 똑같지 않을까.
‘내가 기어서라도 꼭 1루 밟고 만다.’
그렇게 마음가짐을 하고 나온 이규영이었지만.
-따악!
“아웃!”
결국 세 번째 타석도 땅볼로 물러났다.
“아오!”
1루를 지나치고 거칠게 헬멧을 버리면서 감정을 표출한 이규영이었지만, 변하는 건 없었다.
이후 이규영을 포함한 주전들의 이름 세글자가 전광판에서 사라졌다.
어차피 돌핀스 입장에선 오늘 경기 결과와 상관없이 이미 1위가 거의 확정된 상황.
굳이 주전 선수들의 컨디션까지 안 좋아지면서 무리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당사자가 느끼기엔 조금 다를 수 있다는 걸 돌핀스 벤치도 잘 알고 있었다.
“받아라.”
이규영의 멘탈 회복을 맡은 우오준이 앉아있는 이규영에게 물을 던졌다.
“왜 이렇게 죽상이야.”
“후, 성적이 이 모양인데 우는 척이라도 해야지. 지고 있는데 웃고 있다가 카메라에 찍히면 바로 찍 인 거 몰라요?”
이규영이 오버하면서 목에 손을 갖다 대자 우오준이 혀를 찼다.
이규영을 신인 시절부터 봤던 우오준이다.
대충 어떤 심정인지 짐작됐다.
“오늘 진 건 의미 없는 거 알잖냐.”
“알지. 아는데, 그냥 약 올라서 그래요.
“쟤네가 한국시리즈에 못 오면 그걸로 끝나는 거고, 오면 이기면 돼.”
“알아요. 나도. 근데 그냥 아쉬워서 그래요.”
우오준은 아무 말 없이 이규영 옆에 앉아있었다.
돌핀스의 부산 원정은 두 경기.
하지만 두 번째 경기에선 이규영과 우오준 등 주전들의 이름을 찾아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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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린스, 돌핀스마저 꺾다! 시리즈 2연승으로 4위 매직넘버 4! 5위 스타즈와 4경기 차!]
[마린스의 가을이 기다려지는 이유, 허하준 – 브릭 웰링턴의 완벽한 원투펀치. 각각 7이닝 무실점, 6이닝 1실점으로 호투!]
[도장 깨기 시작한 마린스, 포스트시즌 상대 차례로 만난다!]
ㄴ 일정 누가 짰냐? 마린스 남은 대진 돌핀스 – 프렌즈 – 나이트 – 스타즈임 ㅋㅋㅋㅋ
ㄴ 걍 가을 야구 하는 팀들한테 마린스 보약 주려고 했는데 역으로 당해버렸곸ㅋㅋㅋ
ㄴ 그 와중에 악질인 건 시즌 마지막 경기는 호올스임 ㅋㅋㅋㅋㅋ 마지막 기억은 좋게 남겨 주겠다는 거지.
ㄴ 1위부터 5위까지 역순으로 상대했다가 가을 가면 5위부터 1위까지 올라가네. 재밌긴 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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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린스의 홈인 사직구장을 제외하고 마린스 팬들이 가장 많이 찾는 구장인 잠실구장.
부산과 서울은 거리상으로 멀리 떨어진 곳이었지만, 어차피 대한민국 안에 있는 곳이라면 기차로 세 시간 안에 도착할 수 있다.
거기에 황금 같은 주말 경기.
그 상대는 항상 마린스와 붙으면 서로 수준 높은 경기를 보여준다는 프렌즈였다.
예를 들면 간단한 내야 플라이도 떨어트리고, 포수가 공을 빠트려 주자가 공짜로 홈을 밟는 그런 수준의 야구.
한때는 개그콘서트가 망한 이유랍시고 두 팀의 경기를 보여줬던 때도 있었지만, 이젠 그 두 팀이 2위와 4위라는 순위표를 들고 만나게 됐다.
그런 만큼 잠실구장은 가득 들어찼고, 정확히 반반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마린스와 프렌즈 팬으로 갈라졌다.
해가 내리쬐지만 따뜻하게 느껴지는 선선한 날씨.
그렇게 속속들이 입장한 마린스 팬들이 프렌즈의 라인업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은혜를 원수로 갚네. 프렌즈 양아치들.”
현재 1위인 돌핀스의 매직넘버는 2.
오늘 경기에서 프렌즈가 지고, 돌핀스가 이긴다면 사실상 1위는 확정이나 다름없었다.
가을 야구에서 전승한다고 해도 최소 11경기를 치러야 하는 마린스 입장에선 주전들에게 조금이라도 휴식을 주길 바랐다.
하지만 프렌즈는 돌핀스를 두 번 연속으로 잡아내며 1위 희망을 살려준 마린스에게 주전 라인업이라는 선물을 줬다.
마찬가지로 승리가 필요한 마린스 역시 백업 선수를 내세울 수 없는 상황.
“오늘도 김수호 선발이네. 내가 다 미안하다.”
“하루 풀로 휴식을 준 게 언제가 마지막이었지? 기억도 안 나는데?”
“그래도 표정은 꽤 밝은데? 다행이다.”
그중에서도 마린스 팬들이 가장 신경 쓰는 건 단언 김수호.
주전으로 도약한 이후 단 한 경기도 빼지 않고 선발로 나왔던(심지어 올림픽에서도) 김수호였기에 휴식을 바라는 마음이 있었다.
마린스 팬들에겐 김수호는 희망이다.
언젠가 강주호, 강기호를 보면서 저 두 선수만 있으면 언제고 우승을 할 수 있겠다는 감정을 이젠 김수호를 통해 느끼고 있다.
다만 팀 포수 사정이 이래서 휴식을 주지 못하는 것이 아쉬울 뿐.
“수호야! 오늘 깔끔하게 30홈런 치고 쉬자!”
마린스 팬의 함성에 더그아웃에서 하스와 얘기 중이던 김수호가 고개를 빼꼼 내밀고 손을 흔들었다.
“와아아아아아!”
“김수호! 김수호! 김수호!”
아직 경기 시작까진 멀었지만, 잠실 구장엔 김수호 이름 세 글자가 퍼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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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4위 경쟁에서 유리한 건 사실이지만, 그게 방심할 정도의 차이라는 건 아니다.
언제나 도전자로서 열심히 올라온 마린스였다.
하지만 이젠 도전자가 아니라 도전받는 입장이 됐다.
전반기에 꼴찌를 탈출해 9위가 된 후부터 지금 이 자리까지 오는 동안 우리 자리를 노린 팀들은 많았다.
그리고 단 한 개의 팀도 성공하지 못했다.
선수단 역시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이번에도 별 반 다를 것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행동으로 증명했다.
하스가 1회부터 투런을 맞으면서 선취점을 내줬지만, 곧바로 따라가는 점수를 만들었다.
박은성의 2루타와 최치호의 안타로 1득점, 그리고 오늘 오랜만에 3루수로 출장한 김민석의 희생번트.
그리고 오늘 나의 첫 타석.
-따악!
강하게 맞은 타구에 유격수가 반응했지만, 잡지 못했다.
비록 최치호가 홈으로 들어오진 못했지만 1사 주자 1, 3루.
강주호의 가볍게 친 플라이에 총 2득점.
하지만 하스도 연속된 등판에 슬슬 지치는지 연타를 허용하기 시작했고, 5이닝 5실점을 기록하고 내려갔다.
물론 명불허전 승리 요정 하스답게 승리투수 요건은 맞췄다.
하스가 5회 말을 끝으로 내려가고 시작된 6회 초, 2사 주자 1, 2루.
타석엔 김민석.
그동안 나는 대기타석에서 타이밍에 맞춰 방망이를 휘둘렀는데.
-따아아악!
“오, 가겠는데?”
타이밍이 워낙 똑같아서 순간 내가 친 줄 알았다.
타구는 계속 살아 날아가면서 그대로 담장을 넘었다.
스코어 7대5의 리드.
“선배님, 너무 좋았습니다.”
“좀 멋졌냐?”
“예. 장난 아니었습니다.”
김민석은 오랜만에 맛본 손맛에 기분이 좋은지 연신 웃었다.
방금 그 타이밍을 보면 나도 한 방 칠 준비가 됐는데, 아쉽게 투수가 교체됐다.
바뀐 투수를 상대로 땅볼을 치면서 이닝 종료.
이제 본격적인 불펜 싸움이 시작됐다.
하스를 이어 등판한 선수는 김동준.
이전 등판에서 2이닝 무실점이라는 좋은 기억이 있었다.
그리고 오늘도 그 기억을 이어갔다.
1번부터 시작하는 상위타선을 상대로 삼진 2개를 섞으며 삼자범퇴.
특히 서도하의 방망이를 부러트려 땅볼로 잡아낸 커터는 예술이었다.
프렌즈도 아직 경기를 포기할 수 없는지 필승조를 내면서 7회 초 공격은 무실점.
이제 7회 말.
원래라면 김동준이 이어서 등판했겠지만, 우리에겐 불펜이 한 명 더 있다.
-퍼어억!
이번 주 단 한 번의 등판도 없었던 이호민이 마운드에 올라와 공을 뿌렸다.
오랜만에 등판이라 공에 힘이 들어갈 거라고 생각한 것과 달리 연습 투구에서의 모습은 꽤 괜찮았다.
타석에 오늘 홈런이 있는 4번 타자 페드로 산체스가 들어섰지만, 자신 있었다.
이호민은 선발로 등판할 때부터 1~2회 성적이 좋았다.
팀 사정과 본인의 성적으로 선발로 갔지만 만약 꾸준하게 불펜으로 나왔으면 아마 우리 불펜 중에서 가장 믿을맨으로 활약했을 거다.
물론 순전히 나 혼자만의 생각이었다.
애초에 5회에도 150km가 넘는 공을 던지는 선발 투수를 불펜으로 쓴다는 건 이런 특수한 상황이 아니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퍼억!
이 공을 마지막으로 연습 투구를 마치고 심판에게 사인을 보냈다.
점수 차는 2점, 한 방을 맞아도 괜찮다.
그리고 오늘 이호민의 공은 힘 대 힘으로 붙어도 충분히 방망이를 이겨낼 만큼 힘이 좋았다.
-따악!
바뀐 투수의 초구를 노리라는 야구계의 명언을 실천한 산체스였지만, 그대로 잭 미켈의 글러브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아웃!”
그리고 5번 타자 역시 초구부터 과감하게 꽂아 넣으면서 헛스윙.
“스트라이크!”
이어서 던진 포심에 다시 방망이가 끌려나왔다.
-탁!
둔탁한 소리와 함께 이호민이 가볍게 잡고 1루로.
“아웃!”
공 3개로 투아웃.
그리고 마지막은.
-따아악!
“아웃!”
거의 타격하는 소리와 동시에 아웃 선언이 됐다고 느낄만한 타이밍이었다.
채지훈의 엄청난 점프캐치로 깔끔하게 공 4개로 이닝이 마무리됐다.
“오늘 공 미쳤고~ 수비 미쳤고~”
이호민이 그 모습을 보자 신나는지 흥얼거리면서 들어왔다.
“좋긴 하더라.”
“웬일이냐? 순순히 인정하고?”
“내가 언제는 인정 안 한 적 있냐?”
좀 억울한데?
구린 공에 자신감을 주려고 거짓말한 적은 있어도 좋을 땐 항상 말했다.
그때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수호야, 감독님이 찾으신다.”
“넵!”
장비를 대충 풀어두고 달려갔다.
감독님이 부르신 이유는 간단했다.
“호민이 오늘 2이닝 괜찮겠니?”
안 그래도 먼저 말하고 싶었는데 잘 됐다.
“예. 오늘 3이닝 해도 됩니다.”
“3이닝까진 괜찮고, 오케이. 호민이 계속 던지라고 해. 불펜에 상훈이 준비시켜놓을 테니까 문제 있으면 바로 말하고. 9회엔 용기로 간다.”
“넵! 알겠습니다!”
아마 포스트시즌을 대비해 실험을 해보려고 하시는 것 같은데 이호민한테는 좋은 일이었다.
“너 2이닝이래.”
“진짜?”
내심 기대했는지 돌아오자마자 날 바라보는 이호민에게 원하던 답을 얘기해줬다.
“하, 부럽다. 나도 나가고 싶다.”
옆에 있던 벤치 신세인 이주학이 투덜거렸다.
그 말을 감독님께서 들으신 걸까.
“이주학! 다음 이닝부터 유격수 들어간다!”
“넵!”
금세 표정이 바뀌며 싱글벙글하는 모습에 헛웃음이 나왔다.
아무튼 단순해서 좋다.
“혹시나 해서 말해주는데 대타로 노정호 선배 나오면 3루에 붙어서 수비 해라.”
노정호는 프렌즈의 대표적인 대타 요원.
좌타자인데 밀어 치는 걸 좋아해 수비가 약한 김민석에게 맡기기엔 부담이 있었다.
“노정호? 오케이.”
이후 공격에서 추가 득점은 없었고, 8회에도 올라온 이호민에게 팬들이 환호하며 이닝이 시작됐다.
선두타자는 잘 잡아냈지만 8번 타자에 안타를 허용하면서 주자가 1루에 있는 상황.
“대타! 노정호!”
예상대로 프렌즈에서 대타 카드를 꺼내 들었다.
그 모습을 보던 이주학이 평소보다 3루 쪽으로 깊게 위치를 잡았다.
그리고 초구.
-따악!
강렬한 소리와 함께 3루수 김민석이 다이빙을 시도했지만, 공은 유유히 외야로 빠져나가는 듯 보였다.
“2루!”
하지만 이주학이 다이빙으로 건져 내는 걸 보고 빠르게 소리쳤다.
함성에 뒤덮여 내 목소리가 들릴까 싶었지만, 이주학은 침착하게 2루로 송구.
워낙 빠른 타구였기에 아직 2루 주자가 도착하지 못하고 아웃.
그리고 느린 주자, 노정호 역시 1루에서 잡아내면서 6-4-3 병살타.
“야! 미친! 수호야!”
“이주학! 미쳤네!”
본인도 놀란 이주학이 나한테 달려들었고, 이호민 역시 그런 이주학을 따라 나한테 왔다.
“미친놈들아, 아직 경기 안 끝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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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day Photo – 마린스를 가을로 이끄는 루키 3인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