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능빨로 FA 천억 포수-97화 (97/203)

97화 가을 향기가 난다 - 7

#

한국 야구에서 3위를 한다는 건 외국인 선수 세 명이 제값을 해줬다는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 휴고 버터필드는 좋은 투수였다.

시즌 성적은 평균자책점 3.14, 13승.

3이닝 동안 한 타자도 출루시키지 않았고, 이제 겨우 1실점 했을 뿐이다.

문제는 우리 외국인 선수 웰링턴은 오늘 내려갔고, 아직 버터필드는 건재하다는 거다.

점수는 1대1로 동점이지만 상황만 놓고 봤을 때 우리가 굉장히 불리했다.

그러니까 점수를 뽑을 수 있을 때 뽑아야 한다.

2사 주자 2루, 타석엔 강주호.

점수를 뽑기 가장 안성맞춤인 상황.

이럴 때 주자인 내가 할 수 있는 건 별로 없다.

3루 도루를 할 것도 아니니까.

하지만 신경을 거스르게 하는 거라면 해볼 만했다.

이크, 바로 던지네.

“세이프!”

“마!”

“마!”

투수 심리상 동점까진 괜찮을 수 있지만, 역전은 얘기가 다르다.

2아웃인 만큼 최대한 견제를 통해 리드폭을 줄이고 싶어 할 거다.

그 마음은 이해하지만 벌써 세 번째 견제가 들어왔다.

아까 박은성한테도 이 정도는 안 던졌던 거 같은데.

“저 3루로 뛸 생각 없다고 전달 좀 해주실래요?”

“닥쳐라.”

“넵.”

2루에서 내 몸에 글러브를 대고 있는 최건우가 투수한테 공을 던져···. 아니, 던지는 척했다.

“제가 대신 던질까요?”

“눈치만 빨라서. 자, 진짜 준다?”

최건우가 숨겨놨던 공을 보여주고 진짜로 던졌다.

투수 눈치를 한 번 보고 슬쩍 리드폭을 넓혔다.

적당히 리드폭을 벌려도 홈에 들어갈 자신은 있다.

하지만 날 힐끔힐끔 보는 저 선수의 투구에 1%라도 영향을 줄 수 있다면 절대 포기할 수 없지.

거기에 가끔 이기찬과 눈이 마주치는데 조금 부담스럽다.

갑자기 사인 읽었다고 그러는 거 아니야?

다행히 걱정은 기우였고 드디어 버터필드가 옳게 된 방향으로 투구를 시작했다.

그리고 아까 내게 던졌던 공처럼 밋밋하게 들어간 공이 강주호의 방망이와 정확하게 맞았다.

-따악!

타구는 보지 않고 열심히 팔을 돌리고 계신 3루 코치님만 보고 달렸다.

바로 앞에 공을 받을 자세를 하는 이기찬이 보인다.

공은 이제 내야를 지나 홈으로 들어오는 중.

“세이프!”

포수 뒤로 걸어 들어갈 정도로 여유가 있었다.

“나이스, 킴!”

잭 미켈과 하이파이브를 하고 급하게 더그아웃으로 돌아갔다.

다행히 숨 돌릴 시간은 있었다.

잭 미켈이 홈런을 치면서 아주 천천히 홈에 들어왔다.

이기찬이 항의하는 모습이 보였지만.

“아이고, 무릎이야.”

앞차가 안 가는데 뒤차가 어떻게 빨리 달릴까.

근데 생각해보니 억울하네.

“미켈이 홈런 칠 줄 알았으면 그냥 3루에서 멈출 걸, 아쉽네요.”

“이번엔 어떤 신박한 개소리를 하려고?”

“그냥 저만 열심히 뛰어서 숨차다고요.”

1루에서 홈으로 들어온 강주호는 나보다 평온해 보였다.

거기에 나는 장비를 덕지덕지 차고 그라운드에 나가야 했고, 지명타자인 강주호는 느긋하게 그걸 보고 있고.

“그래서 불만이야?”

“아뇨, 그냥 제 노력을 알아달라는 거죠.”

그나마 다행인 게 있다면 내가 그라운드로 나선 건 한참 후의 일이었다.

#

잘 던지던 투수가 무너지는 일은 종종 있으니 새삼스러울 만한 일은 아니다.

어찌 보면 이제 좀 공평하다고 해야 하나?

우리는 5회부터 불펜이 가동되니까.

잭 미켈의 홈런 이후 2명의 주자가 나갔지만 추가 득점은 없었다.

그래도 숨 돌릴 시간은 벌어줬고, 점수도 4대1로 역전.

이제 오늘 경기에서 가장 중요한 이닝이 시작됐다.

선발투수가 갑자기 내려가게 됐고, 이제 막 점수를 역전한 상황.

다음에 올라올 투수가 점수를 내주면 분위기를 단번에 뺏길 수도 있었다.

이호민도 그걸 아는지 연습 투구부터 150km가 넘는 포심을 던질 정도로 의지를 보여줬다.

공 하나하나 던질 때마다 찍히는 구속에 팬들마저 환호를 지를 정도였으니, 그 기대감이 얼마나 큰지 짐작이 됐다.

이호민도 우리 팀의 코어 유망주니까.

그리고 팬들의 기대에 걸맞은 모습을 보여줬다.

타석엔 8번 타자 성민환.

어제부터 오늘까지 출루가 없는 선수다.

그 이유는 명확했고, 이번 타석 역시 마찬가지였다.

“스트라이크!”

초구부터 152km의 포심이 들어왔다.

그리고 다시 한번 포심.

“파울!”

걷어내긴 했지만 라인 바깥쪽이었다.

빠른 볼에 타이밍을 전혀 못 잡는 모습.

하긴 성민환이 어제부터 출루도 못 한 건 빠른 공에 대한 대처가 전혀 안 됐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엔 바깥쪽 슬라이더.

-퍽!

‘후, 빠질 뻔했네.’

손에 힘이 들어갔는지 생각보다 더 바깥으로 휘어져 나갔다.

하지만 원했던 결과는 이뤘으니, 뭐.

“스트라이크 아웃!”

가볍게 삼진을 잡고 이호민을 쳐다보자 미안하다는 제스처가 돌아왔다.

마찬가지로 빠른 공에 대처가 안되는 9번 타자를 잡아내고 1번 타자마저 삼진 처리하면서 깔끔하게 이닝 종료.

“나 좀 멋있냐?”

“어어.”

“아, 대충 대답하지 말고!”

내 대답 대신 팬들이 박수를 치면서 이호민을 환영했다.

나름 성공적인 복귀였다.

#

경기는 우리가 추가점을 내면서 5대1로 9회까지 왔다.

그 말은 이호민이 맡은 바 임무를 잘 소화해냈다는 거고, 그 외의 불펜도 좋은 모습을 보여줬다는 거였다.

문제는 9회였다.

오늘 나이츠 타선은 어제에 이어 주춤했고, 9회엔 이용기 대신 8회를 무사히 막은 투수가 이어서 올라왔다.

140km의 투심과 체인지업, 커브 등을 던지는 최준서.

8회에도 나쁘지 않게 던졌고, 가을 야구를 하려면 한 명의 투수라도 더 필요한 상황이니 이해 못 할 상황은 아니었다.

문제는 갑자기 제구가 흔들리면서 도저히 잡을 수 없는 공들이 날아왔다.

결국 선두 타자를 볼넷으로 내보내고 교체됐다.

이용기는 몸을 풀 시간이 필요했기에 미리 대기 중이었던 좌완 박상훈이 등판했다.

연달아 좌타자들이 들어오니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문제는 박상훈도 오늘 상태가 안 좋았다는 거였다.

-딱!

초구부터 받아 친 타구에 최치호가 몸을 날렸지만, 타구는 1, 2간을 뚫고 외야로 향했다.

심지어 1루 주자가 3루까지 가면서 최악의 순간이 찾아왔다.

“2번 타자! 최! 건! 우!”

소수지만 원정 응원을 온 팬들의 응원을 받으며 들어온 최건우.

“볼!” “볼!” “볼!”

세 개의 공이 연달아 볼이 되면서 최악의 시작.

“스트라이크!”

겨우 변화구로 카운트를 잡긴 했지만.

“볼!”

“와아아아아!”

볼넷이 되면서 무사 만루가 됐다.

결국 감독님이 직접 마운드에 올라갔고, 박상훈이 고개를 숙이고 내려갔다.

다음으로 마운드에 오른 투수는 마무리 이용기.

“용기야. 볼넷만 주지 마라.”

감독님이 하신 말씀은 그게 전부였다.

4점 차에 무사 만루.

타석엔 3번 타자 페르난도 알론소.

중장거리형 타자로 한 개의 홈런만 더 치면 20-20클럽에 가입하는 강타자.

하지만 약점이 분명한 타자였다.

떨어지는 공에 약하다.

허하준의 스플리터도, 웰링턴의 커브도 대처하지 못했다.

이용기의 구종은 포심, 슬라이더, 그리고 포크볼.

이 중 초구엔 빠른 공을 노릴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요구한 포크볼이었는데.

-따아악!

높게 들어간 밋밋한 포크볼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게 해주는 한 방이었다.

한 번의 스윙으로 동점.

사직 구장은 얼어붙었고, 오늘도 없을 거라 생각했던 9회 말 공격이 시작됐다.

#

이후 실점 없이 9회 초를 마무리하긴 했지만 이용기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최근 블론세이브가 없었던 만큼 아쉬움이 컸다.

이용기를 제외한 다른 선수들도 마찬가지였다.

아쉬움에 계속 전광판을 바라보는 선수들.

그나마 강주호, 오준혁, 김민석 등 나이가 어느 정도 있는 선수들은 괜찮았지만, 상대적으로 젊은 선수들이 문제였다.

최근 승리밖에 없다 보니 충격이 더 크게 다가왔다.

그리고 그런 분위기를 깨는 박수 소리가 들렸다.

-짝!

“아직 경기 안 끝났다.”

주장 최치호의 말처럼 이제 동점이었고, 아직 정규이닝 공격도 남아있었다.

“아쉬워할 시간에 방망이라도 한 번 더 휘두르고 어떻게든 출루할 생각이나 해. 이주학, 알겠어?”

“넵!”

굳이 최치호가 이주학을 말한 건, 대기 타석에 나가야 할 타자가 이주학이기 때문이다.

8번 타자 이준부터 시작하는 타선.

항상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킨 이준인 만큼 기대 어린 눈으로 쳐다봤다.

하지만 이준이 상대하기엔 당장 마운드를 지키는 투수가 너무 잘 던졌다.

나이츠의 마무리, 강우진.

국가대표는 오상엽, 김형주 등 우완 불펜이 많다는 이유로 선발되지 못했지만, 한 이닝 정도는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선수였다.

위력적인 구위로 이준을 깔끔하게 삼진으로 잡은 강우진은 이어서 타석에 들어온 이주학을 상대로 초구 스트라이크를 잡았다.

그리고 두 번째 공.

-탁!

“뛰어!”

불리한 카운트에서 기습번트를 댄 이주학이 공도 보지 않고 1루로 달려갔다.

3루수가 내려오면서 공을 잡고 러닝스로를 했지만, 발이 조금 더 빨랐다.

“세이프!”

“이주학! 이주학! 이주학!”

“센스 좋았다!”

“이주학 미쳤다! 나이스!”

한 점만 내면 되는 상황.

주자가 살아서 나간 건 정말 큰 수확이었다.

이어서 박은성이 깔끔한 안타를 뽑아내면서 끝내기 주자가 득점권까지 간 상황.

주장인 최치호가 타석에 서자 나이츠의 야수들이 전부 앞으로 나왔다.

외야수마저 전진하면서 전원 전진수비.

-따악!

그리고 그 수비를 뚫어내는 최치호의 안타가 터졌다.

“와아아아!”

아쉽게도 전진수비 때문에 이주학은 3루에서 멈췄고, 공은 중간에 커트가 됐다.

“최! 강! 부! 산!”

이미 분위기는 걷잡을 수 없을 만치 타오르기 시작했다.

1사 만루.

수비는 정상 위치로 돌아갔고, 노리는 건 병살.

반면 오준혁의 노림수는 간단했다.

‘어떻게든 띄우기만 하자.’

그리고 그 작전은 반만 성공했다.

-딱!

“아웃!”

높이 뜬 공이 떨어지기도 전에 2루심이 아웃 선언을 했다.

인 필드 플라이.

나이츠로선 한숨 돌릴 수 있는 상황이었고, 마린스로선 답답한 상황.

하지만 이내 타석에 한 선수가 모습을 드러내자 다시금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4번 타자! 김수호!”

“홈런! 김수호!”

#

부담이 안 된다면 거짓말이다.

만 명이 넘는 관객이 나를 바라보고, 내 이름을 외치고 있으니까.

팬들이 원하는 건 간단하다.

투수가 던진 공을 때려서 글러브가 아닌 땅에 닿거나,

혹은 누구도 잡지 못하는 곳으로 공을 날리거나.

한 점이면 끝나는 상황.

쫓기는 건 내가 아니라 투수다.

그걸 되새기면서 타석으로 향했다.

“수호야.”

“예.”

이기찬이 말을 걸 거라는 건 예상했다.

내가 이기찬 상황이었어도 무조건 걸었을 테니까.

“요즘 야구장 푯값이 얼만지 아냐?”

“2만원 정도 하죠.”

“그치. 근데 같은 값을 주고 10회도 보면 이득 아니겠냐? 일종의 팬 서비스지.”

“글쎄요. 저희 팬들은 칼퇴를 좋아해서.”

가장 최근의 연장 경기라, 언젠지 기억도 잘 안난다.

아마 내 데뷔가 있던 날인 거 같은데.

아무튼 대화는 이걸로 끝.

강우진의 구종은 포심과 슬라이더, 그리고 스플리터.

커브도 던지긴 하지만, 거의 안 던진다.

특히 이런 상황에서 떨어지는 공은 못 던진다고 보면 된다.

사인을 교환한 강우진이 잠시 숨을 고르는 게 보였다.

그리고 던진 초구.

“볼!”

-와아아아!

날카롭게 꺾인 슬라이더였지만, 존 아래로 들어가면서 볼.

두 번째 공 역시 볼이 되면서 2-0의 유리한 카운트.

“시발....”

이기찬의 나지막한 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했다.

이미 유리한 상황.

여기서 3볼이 된다면 투수는 더 이상 갈 곳이 없게 된다.

그렇다면 이번 공은 반드시 집어넣으려고 할 터.

-따악!

-와아아아아!

순간 거대한 함성이 구장을 잠식했다.

하지만 3루심이 두 팔을 쭉 펴자 함성은 탄성으로 변했다.

제대로 당겨쳤는데, 공이 좌측 폴대를 넘어버렸다.

이미 지나간 기회에 미련을 갖지 말자.

작게 중얼거린 뒤 다시 강우진을 바라봤다.

고개를 젓는 것도 잠시.

사인이 정해졌는지 투구 동작을 취했다.

그 모습을 보자 땅을 디딘 우측 발에 힘이 들어간다.

확신이 들었다.

이번 타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은 지금이라고.

그리고 던진 네 번째 공.

투수의 손을 떠난 공이 타자에게 도달하는 시간, 단 0.4초.

눈으로 좇기도 어려운 속도.

하지만 이번 타석에선 눈이 언제나 공을 쫓아갔다.

-따아악!

공이 방망이에 맞아 담장 너머로 사라지는 그 순간까지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