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가을 향기가 난다 -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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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츠를 상대로 이기면서 우리는 잠깐, 아주 잠깐이지만 5위의 공기를 맡았다.
양 팀 선발투수의 호투로 다른 경기보다 일찍 끝나서 얻은 기회였다.
비록 같은 시간에 열렸던 돌핀스와 챌린저스의 경기에서 챌린저스가 이기면서 다시 0.5경기 차 6위가 됐지만, 가을 야구가 진정 꿈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게 느껴졌던 순간이었다.
여기까지 온 이상 오늘도 반드시 이겨야 했고, 그 전에 한 가지 할 게 있었다.
-설마 오늘도 4타수 무안타는 아니죠?
문자를 보낸 지 1분 만에 순식간에 답장이 왔다.
돌고래 : ㅡㅡ 뒤질래?
-한국 최고의 1번 타자가 두 경기 연속 4타수 무안타는 좀···. 이대로 미국 가면 나라 망신입니다.
돌고래 : ㄷㅊ
-안타는 몰라도 출루는 해야죠. 설마 우리 견제한다고 챌린저스한테 져주는 거예요?
최근 10타수 무안타를 기록하고 있는 이규영.
하필 챌린저스를 만났을 때 이래서 아쉬웠다.
수비는 여전했지만, 웬만한 투·포수는 루상에 이규영이 있기만 해도 부담스러워한다.
근데 왜 답이 안 오지?
장난삼아 보낸 문자에 답장이 늦었다.
거실로 가 물을 마시고 온 사이 답장이 와 있었다.
돌고래 : 우리로선 너네보다 다른 팀이 낫긴 하지.
“오, 이 사람 봐라?”
그 뒷 말이 궁금해져서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
-뭘 또 전화까지 하냐?
“뭐에요 그 말은?”
-뭐가.
“우리가 요즘 잘하긴 했죠? 8연승이 부담스럽긴 하죠?”
-그건 우리 안 만나서 그런거고.
“그래서 선배 혼자만의 생각인 거예요? 아니면 팀 적인 생각?”
-두 개가 뭐 다르냐?
“다르죠? 혼자만의 생각이면 선배가 저한테 당한 게 많으니까 그런거고, 팀 적인 생각이면 진지하게 생각해볼 만하니까 그러죠.”
-뭘 진지하게 생각해?
“우승이요.”
-미친놈. 끊어.
답 없이 끊었지만, 기분이 좋았다.
이젠 꿈이 아니라 진짜 현실이 된 거 같아서.
환기를 위해 창문을 열자, 쌀쌀한 바람이 들어왔다.
아침이라 그런 것도 있지만, 9월도 거의 끝나갔으니까.
“가을이네.”
이제 진짜 얼마 안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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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영의 생각을 듣자 새삼 우리를 보는 시선이 변했다는 게 느껴졌다.
후반기 7할이 넘는 승률을 기록하면서 그 기간 1위인 우리를 견제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니까.
이런 성적을 거뒀음에도 가을 야구를 하네, 마네 하는 걸 보면 어딘가 문제가 있어 보이지만, 분위기가 좋으면 됐지.
좋게 생각해보면 전반기 7할, 후반기 3할 승률로 아슬아슬하게 가을 야구에 가는 것보단 이게 나았다.
조삼모사라고 할 수도 있지만, 전반기 1위에서 4, 5등으로 떨어지는 거랑 10위에서 4, 5등으로 올라가는 건 천지 차이다.
아마 전자의 경우 가을을 가더라도 분노한 팬들을 마주할 거고, 후자의 경우 무슨 짓을 해도 용서해주는 자애로운 팬들을 만나게 될 거다.
초반에 부진한 웰링턴이 후반기에 에이스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하물며 그 두 가지가 모두 조합된 오늘, 팬들의 기쁨이 두 배, 혹은 그 이상을 발하지 않을까?
“스트라이크 아웃!”
웰링턴은 팬들이 좋아하는 모든 요소를 섞은 듯한 선수였다.
일단 가정에 충실했고, 투구폼도 화려하고 역동적이며, 잘생기기까지 했다.
거기에 최근 성적까지 좋으니 그야말로 금상첨화였다.
그런 모습을 증명하듯 오늘도 어김없이 순항 중이었다.
3 2/3이닝 1실점 6k.
허하준이야 현재 한국에서 기준 외라고 쳐도 웰링턴의 각성이 없었다면 가을은 쳐다보지도 못했을 거다.
“스트라이크 아웃!”
아, 성적은 방금 바뀌었다.
4이닝 1실점 7k.
어제 허하준의 빠른 투구 템포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나이츠 타자들이 커브만 던지면 방망이를 내던지듯 돌리고 있다.
더 고무적인 건 오늘 포심의 구속이 150km를 넘지 못하는 상황에서 만들어낸 거였다.
근데 한 가지 걸리는 게 있다.
“웰. 잠깐 얘기 좀 할까요?”
“물론. 무슨 문제라도 있어?”
“전혀요. 문제가 있다면 어제 나이츠 타선처럼 1점도 내지 못한 우리 타선이 있죠.”
“괜찮아. 브로, 아직 공격 기회는 6번이나 남았잖아?”
처음 봤을 때 그 예민했던 투수는 어디 가고 모든 포수가 꿈꾸는 투수가 내 앞에 있는 거지?
아무튼 할 말은 이게 아니었다.
“오늘따라 커브 던질 때 반 박자씩 늦는 데 무슨 문제 있어요?”
평소 웰링턴의 투구 템포는 구종이 뭐가 됐든 던질 때 큰 차이가 없었다.
커브의 투구 메커니즘 상 폼이 약간 다른 건 어쩔 수 없다 쳐도 투구하기 전에 타이밍이 늦는 건 다른 문제였다.
“정말?”
“예. 아마 제 눈이 정확하다면요.”
딱히 증거는 없다.
하지만 지난 시간 동안 웰링턴의 공을 수없이 받은 감각이 이상하다는 걸 말해줬다.
확실한 건 경기가 끝나고 영상을 되돌려보면 알겠지만, 당장 할 수 없는 작업이다.
“네 말이라면 맞겠지.”
다행인 건 웰링턴은 내 말을 쉽게 믿어줬다.
“당장은 괜찮아요. 타자들은 아직 눈치 못 챈 거 같거든요. 일단 알고 있어야 할 거 같아서.”
“고마워.”
“근데 왜 그런지 몰라요?”
“음, 글쎄?”
어쩐지 눈을 못 마주쳤다.
“웰? 혹시 몸이 불편한 건 아니죠?”
“그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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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훈 감독은 김수호의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
“웰링턴, 네 마음은 알겠지만 이런 걸 숨기면 안 된다.”
사건은 며칠 전, 엘리의 생일 파티였다.
파티가 끝나고 짐을 치울 때 무거운 걸 높게 드는 바람에 생긴 통증.
풀어서 말하면 담 걸렸다.
투구를 못 할 정도로 심한 건 아니었다.
실제로 오늘 호투 중이기도 했고.
그래도 아무런 말이 없는 건 잘못된 행동이었다.
“별거 아닙니다.”
통역을 통해 웰링턴의 말을 들은 이정훈 감독은 단호했다.
“정 코치. 가서 호민이 준비하라고 해.”
“예.”
투수 코치가 급하게 이호민에게 갔다.
“웰. 오늘 경기만 경기가 아니야. 오늘 고생했고, 바로 병원부터 가봐.”
미련이 남은 듯 머뭇거렸지만, 오더는 바뀌지 않았다.
“얼른!”
웰링턴이 떠나자 이정훈 감독의 다음 상대는 김수호였다.
“잘했다 수호야. 별거 아니라고 생각할수록 더더욱 조심해야 한다.”
문제는 투수였다.
휴식일도 길었고 어제 허하준이 완봉한 덕에 대체 투수가 없는 것도 아니었지만 갑작스럽게 일어난 상황.
특히 바로 출장해야 할 이호민이 몸을 풀 시간이 필요했다.
“수호야! 너 나가야 돼!”
멀리서 김수호를 찾는 목소리가 들렸다.
4회 말, 이번 이닝 선두 타자인 박은성이 출루하면서 무사 주자 1루.
이정훈 감독이 급하게 사인을 내면서 말했다.
“수호야. 이번 타석에서 최대한 시간 좀 끌어줄 수 있겠니? 대기 타석 갈 때 준혁이한테도 말해 주고.”
“예. 해보겠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지금이라도 알았다는 것 정도.
김수호가 빠르게 타격을 준비하는 사이 이정훈 감독이 고개를 저으면서 중얼거렸다.
“선수들이 착해도 문제네.”
그 사이 사인을 받은 최치호가 침착하게 공을 고르기 시작했다.
평소라면 동점을 만들기 위해 번트를 댈 타이밍이지만, 작전은 최대한 타격을 길게 하라는 것.
최치호는 충실하게 작전대로 움직였다.
“스트라이크 아웃!”
결국 풀카운트에서 삼진을 당했지만, 마린스 선수 누구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대기 타석에서 상황을 전달받은 오준혁 역시 공을 고르면서 2-2.
“스트라이크 아웃!”
‘얘네 갑자기 왜 이래? 뭐 잘 못 먹었나?’
이기찬이 잠시 포수 마스크를 고쳐 쓰는 척 일어나서 마린스 더그아웃을 쓱 훑어봤다.
못 본 걸 수도 있지만 마린스 선발투수인 브릭 웰링턴이 안보였다.
‘이러면 퍼즐이 맞는데.’
오늘 마린스 타자들은 나이츠 선발투수인 휴고 버터필드의 공을 적극적으로 공략했다.
4회 시작 전 투구 수가 30개가 안 됐으니 그 적극성을 짐작할 만했다.
하지만 이번 이닝에 들어서 갑자기 공을 지켜 보기 시작했다.
물론 그럴 수 있다.
첫 타석 때 답답했던 분위기를 환기하려는 목적이든, 아니면 투구 수를 늘려 조금이라도 빨리 끌어내리려는 목적이든 충분히 할 만하다.
하지만 무사 1루에서 그런다?
최근 마린스의 공격 패턴을 보면 어울리지 않았다.
특히 박은성이 1루에 나가면 오준혁 – 김수호 – 강주호로 이어지는 중심 타선에서 점수를 뽑기 위해 번트를 대는 게 대부분이었으니까.
근데 최치호와 오준혁 둘 다 번트도 안대고 2스트라이크 이전엔 방망이도 안 냈다.
거기에 2아웃인데 몸을 풀러 안 나온 선발투수까지.
‘오케이. 퍼즐 맞춰졌고.’
대충 상황이 그려졌지만 아직 100% 확신은 아니었다.
그럼 확신을 얻기 위한 미끼를 던져주면 된다.
위험성이 있지만 해볼 만한 도박.
‘적극적으로 가자. 초구 가운데.’
그의 사인에 버터필드가 당황해했다.
아무리 첫 타석에 잘 잡아낸 김수호라도 과감한 승부를 하기엔 부담스러운 상대였으니까.
‘나만 믿어. 이거면 된다고.’
결국 강압적인 사인에 버터필드가 순응하고 공을 던졌다.
일단 오늘 이기찬의 사인대로 던져서 결과가 나쁜 적이 없었으니까.
“스트라이크!”
‘거봐! 월척이다!’
[나이츠 배터리, 변화구로 스트라이크를 잡습니다. 볼 카운트 노볼 원스트라이크.]
[김수호를 상대로 굉장히 과감한 초구를 던졌습니다. 김수호 선수도 생각지도 못했나 본데요? 정말 좋아하는 코스인데 방망이를 내지 못했습니다.]
[그만큼 오늘 휴고 버터필드의 공이 좋다는 거죠.]
씨익 웃은 이기찬이 다음 사인을 보냈다.
[스트라이크! 이번에도 과감한 몸쪽 승부가 통했습니다!]
[어후, 제가 투수라면 못 던졌을 것 같습니다. 좋은 공이었어요.]
순식간에 2스트라이크를 잡은 나이츠 배터리였지만, 문제는 지금부터였다.
‘여기서 변화구 하나 정도는 던져야겠지?’
-따악!
“파울!”
바깥쪽으로 떨어지는 변화구였지만, 김수호가 방망이를 내면서 커트.
이어서 약간 빠지는 속구 역시 커트를 해냈다.
김수호가 손을 울리는 진동을 느끼면서 잠시 타석에서 빠졌다.
‘후, 빡시네?’
카운트는 몰렸고, 공은 많이 봐야 했다.
즉, 존에 비슷하게 들어오는 것 같으면 전부 방망이를 내야 한다는 말이었다.
“파울!”
다시 타격에 임했고, 존과 비슷하게 들어오는 공을 커트해냈다.
그때, 벤치에서 사인이 나왔다.
이제 원래 타격대로 해도 된다는 사인.
‘어지간히 근질근질했나 본데?’
그 말인즉슨 이호민이 벌써 몸을 다 풀었다는 거였다.
하긴, 며칠 전에 불펜 피칭을 한 걸 제외하면 무려 11일 만에 등판이니까.
이미 몰린 카운트는 변하지 않았지만, 마음이 가벼워졌다.
거기에 때마침 들어온 다음 공은 치기 너무 좋은 코스로 들어왔다.
[김수호를 상대로 6번째 공입니다! 쳤습니다! 우익수, 우익수! 아, 잡지 못합니다! 그사이 주자, 계속 돕니다! 홈으로! 득점! 따라잡는 부산 마린스! 역시 해결사는 김수호였습니다!]
[이번 타석에서 5구까지는 걷어내려는 듯한 타격이었거든요? 그게 전부 이걸 위한 거였나요? 초구에 놓쳤던 코스를 완벽하게 쳐 냅니다!]
“김수호! 김수호! 김수호!”
마린스 입장에서 3회까지 출루도 없어 답답했던 공격이 확 트이는 순간이었다.
이기찬이 2루에서 세레머니를 하는 김수호를 바라봤다.
‘아오! 저 얄미운 새끼.’
순식간에 투수의 신용을 잃은 이기찬이었지만 화풀이할 곳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