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가을 향기가 난다 - 4
#
시즌이 끝나갈수록 야구팬들은 크게 세 분류로 나뉜다.
첫 번째는 가을을 준비하는 팬들.
이미 진출이 확실시된 돌핀스, 프렌즈, 나이츠 팬들이 이쪽에 속해있다.
두 번째는 마지막까지 가을 야구의 희망을 놓지 못하는 팬들.
챌린저스와, 스타즈, 마린스, 울프즈 팬들이 여기.
그리고 마지막은 탈락이 확정됐거나 혹은 탈락 직전에 놓인 팀의 팬들.
에이스와 피닉스, 그리고 호올스가 그렇다.
이 중 가장 관심이 집중되는 팀들은 역시 두 번째 그룹에 속한 팀이다.
올해는 네 팀 중에 특히 한 팀이 가장 큰 주목을 받았는데, 바로 마린스였다.
상위권 팬들은 최근 기세가 무서운 마린스가 떨어지길 바랐고, 중위권은 강력한 후보인 마린스를 견제했다.
그리고 가장 아래에 있는 팀 팬들은 언제나 자신들과 함께, 혹은 아래에 있던 마린스가 올라가는 걸 그다지 원치 않았다.
그래서일까? 마린스 경기가 있는 날이면 채팅창에 다수의 타 팀 팬과 비교적 소수의 마린스 팬들의 싸움을 볼 수 있다.
오늘 열린 경기는 마린스와 챌린저스의 시즌 마지막 경기.
챌린저스의 홈에서 열린 경기는 1회 말, 선발 투수인 김호기가 1실점 하면서 시작했다.
ㄴ 꼴린스 멸망 ㅊㅊㅊㅊㅊ
ㄴ 김호기 쟨 진짜 타 팀 가면 쓰지도 못함. 마린스니까 선발이지 ㅋㅋㅋㅋ
ㄴ 얼마 전에 퍼펙트 당한 팬들이 말이 많네?
ㄴ 응~ 그건 허하준이었고~ 지금은 김호기죠?
ㄴ ㅉㅉ 맨날 퍼펙트, 퍼펙트. 그래서 지금 몇 위?
ㄴ 네 다음 6연승 팀 대 6연패 팀.
ㄴ 어제 연패 탈출했는데? 오늘 연승 ㄱㅅ
하지만 김호기가 추가 실점 없이 이닝을 마치자 채팅창은 잠시 소강상태에 들어섰다.
곧이어 새로운 주제가 나왔다.
그건 바로 김수호가 올 시즌 30홈런을 칠 수 있느냐, 없느냐에 대한 얘기.
ㄴ 오늘 딱 40경기째 출장인데 벌써 23홈런임. 남은 17경기에서 2경기당 하나씩 치면 널널한데?
ㄴ ㅋㅋㅋㅋㅋ 2경기당 하나씩 치는 게 널널한거라고? 와, 진짜 생각하는 거 봐라.
ㄴ 그럼 144경기 다 나오면 70홈런 치겠네? ㅋㅋㅋㅋ 제발 야구를 그렇게 보지 마셈.
ㄴ 내가 봤을 때 많이 쳐봤자 28개임. 이제 김수호도 슬슬 힘 빠질 때 됐지.
2회 초, 선두타자로 나선 김수호의 카운트가 0-2까지 몰리자 사람들의 반응은 더욱 격해졌다.
ㄴ 이거 봐. 30홈런은 무리라니까?
ㄴ 응~ 개같이 멸망~
ㄴ 깔끔하게 삼진 가즈아!
ㄴ ㅋㅋㅋㅋ 삼진? 너 눈엔 저게 삼진으로 보임?
ㄴ 와 그냥 제대로 넘겼는데?
ㄴ 40경기 자축 홈런포 ㄷㄷ 이제 6개 남았닼ㅋㅋㅋㅋㅋ
ㄴ 응~ 수까새끼들 멸망~~~ 개꿀~~
ㄴ 아니 저 새끼는 무슨 홈런을 안타 치듯 치냐?
ㄴ 하, 시발 존나 부럽다.
단 한 번의 스윙과 진심 어린 타 팀 팬의 한마디와 함께 논쟁이 끝났다.
#
오늘 경기는 반드시 이겨야 했다.
져도 되는 경기는 존재하지 않지만, 오늘 상대가 4위 싸움을 하는 챌린저스다 보니 그 중요성이 더 높았다.
그건 챌린저스 역시 마찬가지기에 한 점을 내면 따라붙고, 또 내면 따라붙는 팽팽한 경기가 이어졌다.
그 결과 김호기는 5이닝 4실점, 상대 선발인 박민국은 6이닝 3실점 하면서 6회 말 3대4로 지고 있는 상황.
김호기가 자신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 다시 마운드에 올랐다.
우릴 상대했던 스타즈 이민수가 그랬던 것처럼 김호기 역시 이닝이 지나면 지날수록 타자들이 익숙해지는 타입.
항상 6회 이후가 고비였고, 특히 오늘 홈런을 기록한 김민주가 있는 이번 이닝은 위기였다.
아마 이 타이밍에 왜 선발을 안 바꾸냐는 말이 많을 거다.
정확하게 말하면 안 바꾸는 게 아니라 못 바꾸는 거다.
이틀간 김동준, 박상훈, 정태석, 이용기 등 필승조란 필승조는 다 나왔다.
내일부터 이틀 동안 경기가 없어 3연투를 할 수도 있지만 일단 김호기에게 최대한 많은 이닝을 맡기는 게 벤치의 판단이었다.
문제는 김호기도 지칠 대로 지친 상태.
이쯤 되면 사인은 간단했다.
바깥쪽, 아니면 몸쪽.
“스트라이크!”
존에 살짝 걸치는 절묘한 공이 들어왔다.
사실 김호기는 힘이 빠지면 제구가 올라가는 타입이었던 걸까?
-따악!
하지만 2구는 한 가운데에 몰렸고, 그대로 유격수와 3루수 사이를 가르는 안타가 나왔다.
주자가 있는 상태에서 이제 4번 타자 김민주가 타석에 들어섰다.
이전 두 타석에서 한마디도 안 했다.
분명 이를 악물고 나온 게 분명했다.
퍼펙트 당한 것도 있고, 그 이후 팀 자체가 내리막이었으니까 충분히 이해됐다.
김민주만 넘으면 그래도 괜찮을 거 같은데.
‘볼넷은 최악.’
지금 이 상황에서 볼넷은 홈런과 다를 게 없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홈런을 맞더라도 가운데 쑤셔 넣는 게 상책.
문제는 김호기가 그런 투구를 할 수 있냐는 건데.
초구는 바깥쪽을 요구했다.
하지만 김호기가 고개를 저었다.
의외였지만 종종 있는 일이었다.
그럼 남은 선택지는 몸쪽인데.
당연히 몸쪽을 던질 수 있으면 좋다.
하지만 지금처럼 제구가 흔들리는 상황에서 몸쪽은.
-따아악!
이런 상황을 초래할 가능성이 컸다.
좌중간에 높이 뜬 타구.
“오.”
나도 모르게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박은성이 좌측으로 뛰다가 중간에 점프하면서 잡아냈다.
빠졌으면 최소 2루타가 될 법한 타구를 그냥 플라이로 만들어버렸다.
거기에 힘입어 5번 타자를 상대로 땅볼을 유도하면서 병살.
김호기가 박은성이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엉덩이를 때렸다.
“어땠냐?”
“쩔었죠. 오늘 경기 이기면 선배님 덕분입니다.”
박은성이 수비에서만 좋은 모습을 보여준 게 아니었다.
“볼!”
7회 초 이닝의 선두타자로 나서서 볼넷을 얻어냈다.
이어서 오늘도 2번 타자로 출전한 이주학이 대놓고 번트 모션을 취했다.
일단 동점을 만들어놓고 생각하겠다는 건데.
-딱!
공이 방망이에 맞자마자 전력으로 1루를 향해 뛰었다.
근데 코스가 예사롭지 않았다.
1루 라인 선상으로 굴러간 타구를 포수가 잡고 1루로 던졌지만, 이주학에 가려 송구가 정확하지 못했다.
1루수가 점프해서 공을 잡는 사이 1루에 살아 들어가면서 무사 주자 1, 2루.
결국 실책으로 투수가 교체됐다.
챌린저스의 필승조 중 한 명인 고석민.
타석에는 오준혁이었다.
대기타석에서 지켜보고 있는데 오준혁이 기습번트를 댔다.
투수가 잡아서 3루를 바라봤지만, 박은성과 이주학은 우리 팀에 몇 없는 빠른 주자.
선택지는 1루뿐이었다.
“아웃!”
두 개의 번트로 1사 주자 2, 3루.
슬쩍 챌린저스 벤치를 보니 무언가가 급박하게 돌아가는 듯했다.
“볼!” “볼!”
그리고 2구 연속으로 볼이 들어오자 결국 결정했는지 말이 나왔다.
“타자 1루로 가.”
#
강주호가 타석에서 3루부터 1루까지 쭉 훑어봤다.
현재 루상에 있는 세 명은 전부 자신이 미국에서 돌아왔을 때 없던 선수들.
김수호와 이주학은 올해 데뷔했고, 박은성도 1군 붙박이가 된 지 3년밖에 되지 않았다.
거기에 고의사구라.
‘늙긴 늙었네.’
새삼 세월이 흐른 게 느껴졌다.
챌린저스가 김수호한테 전략적인 볼넷을 내준 적이 꽤 있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강주호가 없을 때였다.
나름 신선하긴 했다.
강주호에게 고의사구란 본인이 1루에 나가는 거였지, 그 다음 타자가 된 적은 없었으니까.
30년 야구 인생에서 처음 겪는 경험.
의외로 다른 선수들의 말과 다르게 기분은 썩 나쁘지 않았다.
20살에 오늘 홈런이 있는 타자와 곧 은퇴를 앞두고 병살이 있는 느린 타자.
상대할 타자를 고르라고 하면 자신도 후자를 고를 거다.
고석민을 대신해 올라온 투수는 차호영.
관리를 받으면 충분히 1이닝 정도는 깔끔하게 막는 불펜.
자신과 함께 늙어가는 주제 마지막 불꽃을 태우고 있는 투수였다.
한때 에이스 소리를 달고 살았던 투수의 말년치곤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이 상황에 꽤 어울리는 투수였다.
평범한 투수가 1사 만루에 자신을 상대로 제 공을 뿌리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니까.
초구는 한 가운데 낮게 떨어지는 변화구.
“스트라이크!”
‘체인지업?’
초구는 지켜봤다.
‘재밌네.’
시간은 두 투타를 많이 바꿔놨다.
만약 젊었을 때 이 상황에서 만났다면 차호영은 포심을 던졌을 거고, 자신은 주저하지 않고 때렸을 거다.
하지만 한 가지 바뀌지 않은 게 있다면, 둘 다 이 승부에서 피하고 싶지 않다는 것.
‘뭘 던질래?’
워낙 많은 변화구를 던지는 투수라 구종을 짐작하기 어렵다.
하지만 나이가 나이인 만큼 구속이 빠르지 않기 때문에 속구 타이밍만 잡고 있어도 충분히 변화구에 대처할 수 있다.
“볼!”
그런 강주호의 마음을 아는지 이번엔 더 느린 변화구를 던졌다.
바깥쪽에 빠지는 커브.
아무리 늙었어도 대놓고 빠지는 공에 휘두를 만큼 늙진 않았다.
볼 카운트 1-1.
-따악!
“파울!”
강주호가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잠시 타석에서 물러났다.
결국 승부를 보려면 던질 수밖에 없는 포심이었고, 잘 노렸다고 생각했는데 타이밍이 어긋났다.
이유야 잘 알고 있다.
레그킥을 할 때 몸을 찌르르 울리는 통증이 시작되는 곳.
바로 무릎.
“이러다 올해 은퇴하는 거 아닌지 몰라.”
“예?”
“혼잣말, 혼잣말.”
챌린저스 포수 추승우가 되묻자 손을 저었다.
이제 불리한 건 강주호였다.
4구는 흘러나가는 슬라이더.
“볼!”
아직 카운트 상으론 강주호가 불리했지만, 투수라고 넉넉한 건 아니었다.
풀카운트가 되면 불리한 건 투수다.
그 전에 승부하고 싶은 게 투수의 마음.
-따악!
“파울!”
-탁!
“파울!”
-따악!
“파울!”
존에 들어오는 공마다 족족 건드려서 파울을 만들었다.
벌써 8번째 공이 차호영의 손에서 떠났다.
-따악!
타구는 1루수 키를 넘기면서 떨어졌고, 주자들이 전부 두 베이스씩 움직였다.
발 빠른 타자였다면 2루도 노려볼만한 타구였지만, 강주호의 발로는 1루가 최선.
3루에 서서 자신에게 엄지를 치켜세우는 김수호를 보면서 더그아웃으로 돌아왔다.
대주자가 들어가면서 그의 역할은 여기까지.
김수호가 잭 미켈의 희생플라이에 홈으로 들어오자 강주호가 물었다.
“어땠냐?”
“당연히 최고죠.”
그 말에 웃은 강주호는 굳이 젊었으면 홈런이라는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
‘늙어도 여전하시네.’
내가 과연 강주호의 나이가 되더라도 저렇게 잘할 수 있을까 물으면 조금 회의적이긴 하다.
내가 야구를 한 세월보다 프로에서 야구를 한 세윌이 더 긴 강주호가 이룩한 걸 판단하기엔 아직 일렀다.
경기는 9회 말, 챌린저스의 정규이닝 마지막 공격이 시작됐다.
오늘도 마운드에는 경기를 끝내기 위해 이용기가 올라왔다.
점수는 두 점 차.
불펜에서 가장 고생한 투수를 말하라고 하면 단연코 이용기가 제일 먼저 언급될 거다.
팬들의 말을 빌리자면 투수 같지도 않은 불펜 놈 중 유일하게 사람 구실을 했던 투수니까.
하지만 그간 피로가 누적된 탓일까.
제구가 흔들리면서 연달아 볼넷을 내줬다.
무사 주자 1, 2루라는 최악의 상황.
포크 사인을 내봤지만 이용기가 계속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힘이 빠져버린 포심과 슬라이더로 이 상황을 헤쳐 나가는 건 너무 어렵다.
어쩔 수 없이 포심을 요구하고 공을 받을 준비를 했다.
이용기가 공을 놓은 순간 타자가 번트 모션을 취했다.
-딱!
하지만 공은 높이 떴고, 낙구 지점은 홈플레이트 바로 앞.
그 순간 타자가 움직이지 않는 게 보였다.
도박이었다.
만약 한 번에 포구를 못 해서 파울 라인을 벗어난다면 공짜 아웃카운트를 놓치는 거였고, 그게 어떤 스노우볼이 될지 몰랐다.
짧은 시간 안에 판단해야 했고, 결정했다.
공은 미트가 아닌 그대로 그라운드에 떨어졌다.
땅에 닿자마자 공을 잡고 곧바로 3루에 던졌다.
뒤늦게 타자가 1루로 뛰어갔지만 이미 1루 주자, 2루 주자마저 출발조차 하지 않은 상황.
“아웃!”
“아웃!”
“아웃!”
챌린저스 벤치에서 인필드 플라이에 대해 항의했지만, 번트 타구에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말이 돌아왔다.
이후 파울 라인을 가리는 비디오판독까지 진행해봤지만, 결과는 유지됐다.
이용기가 머쓱한 얼굴로 다가왔다.
“세이브 축하드려요.”
“얼떨떨한데?”
“날로 먹는 날도 있어야죠.”
다 타자가 열심히 안 뛴 탓이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