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가을 향기가 난다 - 2
#
우리가 경기가 없던 이틀 동안 굉장히 흥미로운 경기들이 진행됐다.
바로 1위 창원 돌핀스와 서울 프렌즈, 그리고 인천 스타즈와 광주 울프즈가 맞붙었다.
결과는 두 매치 다 한쪽의 일방적인 승리였다.
창원 돌핀스가 2승을 거두면서 1위는 확정되는 분위기였다.
거기에 인천 스타즈 또한 2승을 거뒀다.
경기가 없던 챌린저스는 스타즈에게 0.5경기 차로 4위 자리를 내줬고 울프즈는 우리와 한 경기차로 좁혀졌다.
울프즈가 내려왔지만 우리 입장에선 그다지 좋은 결과는 아니었다.
결국 우리가 노리는 건 6위 자리가 아니라 5위, 혹은 4위였으니까.
그만큼 이번 스타즈와의 두 경기가 중요해졌다.
만약 두 경기를 전부 진다면, 남은 경기 안에 스타즈를 따라잡기란 요원한 길이다.
최소 1승 1패. 가능한 2승.
그게 우리가 정한 목표치였다.
“다들 푹 쉬었나.”
“예!”
“더 쉬고 싶은 사람, 있고?”
“쉬고 싶으면 은퇴를 해. 내 은퇴식 할 때 껴서 해줄 테니까.”
감독님의 말에 강주호가 덧붙였다.
“이제 20경기도 안 남았다. 근데 고작 이 정도로 만족하기엔 아직 너무 아쉽지 않나? 우리 주호, 한 경기 한 경기가 소중한데 출장 경기 수 좀 늘려 줘야지.”
감독님의 눈빛이 달라졌다.
“이번 원정 네 경기에서 최소 3승 1패. 그 이하를 하면 가을은 끝이라고 생각해도 된다. 가을은 못가도 좋다. 여기까지 온 것도 기적과 같은 일이니까. 하지만 후회는 남기지 마라. 차라리 후회할 것 같다면.”
감독님이 선수들 모두를 둘러보셨다.
“죽을 듯이 일루에 달려보고, 한 구, 한 구 최선을 다해 미트에 꽂아보고 후회해라. 그렇게 했다면 후회가 있다고 한들 다음으로 갈 수 있으니까. 자, 부산 마린스!”
“화이팅!”
#
스타즈 구장은 정말 작다.
에이스 구장 역시 작았지만, 그 원조라고 할 만한 곳이 바로 인천 구장이었다.
스타즈와는 만난 적이 있지만, 인천 구장은 처음이라 몸을 풀면서 주변을 둘러봤다.
그러던 중 이민수와 만났다.
“오랜만이네?”
“선배님, 죄송합니다. 먼저 연락드렸어야 했는데.”
“아냐. 너 바쁜 거 유명한데 뭐. 구장 보고 있는 거야?”
“예. 인천은 처음이라서요.”
그렇게 말하고 잠시 숨 막힐듯한 정적이 이어졌다.
이민수와는 국대에서도 딱히 대화해본 적이 없었고, 저번 시리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미묘하고 어색한 동행이 이뤄지던 중, 멀리서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수호야! 어, 선배님 안녕하십니까.”
“어. 호민이? 맞나?”
이호민은 이민수가 자신의 이름을 아는 게 꽤 놀란 눈치였다.
“저번 주에 던지는 거 봤어. 잘 던지던데?”
“감사합니다.”
“그래서? 수호 데리러 왔니?”
“넵. 감독님께서 부르셔서요. 데리고 가도 될까요?”
“당연하지. 수호야, 반가웠어.”
이민수가 먼저 떠나자 이호민이 옆구리를 팔꿈치로 툭 찔렀다.
“저분, 엄청 착하시네.”
“몇 마디 대화해놓고 알아?”
“말투가 다르잖아. 엄청 나긋나긋하고. 야, 아무튼 빨리 와.”
흠.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착한 건 맞는데 중요한 건 마운드에서의 모습이다.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이민수는 그다지 착한 사람이 아니었다.
#
웰링턴은 이제 완벽하게 한국에 적응했다.
오히려 구단에서 기대했던 모습보다 더 뛰어난 모습을 보여주면서 후반기 약진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었다.
시즌 시작이 4월인데 적응을 9월에 했다니 말이 이상했지만, 그 적응의 결과가 이런 거라면 충분히 기다릴 만했다.
“스트라이크 아웃!”
“아웃!”
“스트라이크 아웃!”
일단 마운드에서 흥분하던 모습이 사라졌다.
볼 카운트 하나하나에 반응을 보이던 예전 모습 대신 마음에 들지 않는 판정에도 점잖게 다음 투구를 이어나가는 모습이 가장 큰 변화였다.
김수호가 그 이유를 물어보니까 담담하게 대답한 것도 꽤 인상적이었다.
“이제 아빠잖아. 그리고 브로, 너도 있고.”
그렇게 1회 말 공격을 깔끔하게 처리한 뒤 2회 초 공격이 시작됐다.
오늘 스타즈의 선발 투수는 이민수.
이민수 역시 1회를 깔끔하게 막은 상황.
“후.”
“왜 보자마자 한숨을 쉬세요?”
“그럼 적당히 잘 치던가.”
최필주의 칭찬과 함께 김수호가 선두 타자로 타석에 들어서면서 2회 초가 시작됐다.
‘후, 얄미운 놈.’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였지만, 최필주는 김수호가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정확히는 김수호가 마음에 안 드는 게 아니라 등장한 타이밍이 그에겐 최악이었다.
김수호가 등장하기 전엔 마린스 팬들이 최필주가 마린스 유니폼을 입은 모습을 합성하는 등 구단에 최필주의 영입을 요구하는 모습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하지만 김수호가 등장한 이후 그런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오히려 최필주를 영입하려던 돈으로 야수와 투수 각각 한 명씩 영입하자는 의견이 우세해졌다.
최필주 정도 되는 포수가 고작 한 구단이 빠졌다고 갈 곳을 잃는 건 아니었지만, 경쟁자가 한 명 줄었다는 건 그만큼 몸값이 올라갈 여지가 떨어진다는 거였다.
거기에 누가 봐도 마린스는 내년 강주호 은퇴 전 오버페이를 하려고 하는 상황.
대충 생각해도 최소 20억은 손해 본 것 같은 기분이었다.
“20억 만큼만 아웃당해라.”
“예?”
“그런 게 있다.”
영문모를 말을 하는 김수호가 갸우뚱했지만, 이내 다시 집중했다.
이민수의 가장 큰 무기는 언더 핸드로 떠오르는 듯한 포심과 싱커, 그리고 커브.
제구가 되는 날엔 뜬공 하나 보기 힘들 정도로 타자들이 공략하기 어려워 했다.
그리고 오늘 앞서 상대했던 타자들의 말을 들어보면 상당히 공이 좋은 상황.
“볼!”
초구는 볼로 시작.
바깥쪽 공이 많이 빠졌다.
‘갑자기 왜 그래!?’
최필주가 요구한 공은 몸쪽.
하지만 완전히 반대 투구가 돼서 큰일 날 뻔했다.
‘민수야, 민수야! 집중하자! 제발!’
그런 최필주의 바람에도 무색하게 2구 역시 볼이 들어왔다.
‘후. 좆됐네?’
김수호 같은 상대로 카운트가 몰려버리면 답이 없다.
특히 본인들의 홈에서 단순한 뜬공은 홈런이 될 가능성도 컸다.
하지만 그것도 곧 쓸데없는 걱정이 됐다.
3구, 4구 역시 볼이 들어오면서 스트레이트 볼넷.
“야. 갑자기 왜 그래?”
최필주가 급하게 마운드에 가서 물었다.
1회부터 흔들렸으면 이해가 됐다.
하지만 이건 너무 뜬금없었다.
비록 김수호와 상대 전적이 좋진 않았지만, 이민수가 그런 걸 신경 쓰는 투수도 아니었고.
“죄송합니다. 그냥 완벽하게 던지려고 하다 보니까.”
투수가 이렇게 말하는데 포수가 더이상 다그칠 순 없었다.
“일단 수호 쟤, 발이 괜찮긴 한데 도루 시도는 한 번도 없거든? 견제 몇 번 하고 강주호 선배한테 집중하자. 병살로 잡으면 되지. 괜찮아.”
“예.”
“그래. 뭐 던지고 싶은 공 있어?”
“... 없습니다.”
“오케이. 이번 이닝만 잘 넘기자.”
최필주가 이민수의 어깨를 툭툭 치고 내려갔다.
그리고 던진 초구.
“스트라이크!”
“뛴다! 2루!”
강주호는 그냥 공을 지켜봤고 최필주가 공을 잡자마자 곧바로 2루에 송구했다.
하지만 약간 빗나가면서 세이프.
“아오, 저, 저. 개···.”
“개? 뭐?”
“...아닙니다.”
‘이젠 욕도 맘대로 못하네.’
최필주는 그냥 이 상황이 미웠다.
#
강주호와 채지훈의 연속 희생타로 홈에 들어왔다.
도루는 경기 시작 전부터 얘기됐던 거였다.
사실 이전부터 도루에 대한 욕심은 꽤 있었다.
하지만 얘기를 꺼내자마자 강기호 외 코치진들에게 기각당하면서 시도조차 못 했다.
“너 그러다 부상 당하면 무슨 욕을 먹을 줄 알고.”
하지만 오늘은 상황이 좋았다.
이민수는 리그에서 가장 긴 투구 동작으로 공을 던지는 투수였고, 최필주 역시 리그 평균 정도 되는 어깨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시도해본 거였는데 결과가 좋아서 다행이다.
“근데 오늘 민수 공 살벌한데?”
“그러게요?”
나를 제외하면 누구도 출루조차 못 한 상황.
그런 투수가 왜 나한테만 볼넷을 준 걸까.
아무튼 경기는 1대0의 스코어로 순항하고 있었다.
하지만 스타즈 홈에서의 경기에서 1점이란 언제든지 뒤집을 수 있고, 뒤집힐 수 있는 점수.
-따아악!
선두 타자를 내보냈지만, 이후 두 타자를 무난하게 처리한 웰링턴이 4번 타자 존 윌슨에게 홈런을 맞았다.
그것도 담장을 아주 살짝 넘기는 홈런.
박은성이 점프를 해봤지만, 잡는 데 실패했다.
“웰, 다른 구장이었으면 그냥 플라이였어요.”
“알지. 그래서 내가 이 구장을 싫어해.”
그나마 다행인 건 웰링턴은 그다지 신경 쓰는 모습은 아니었고 5번 타자를 잡아내면서 이닝을 끝마쳤다.
물론 그런 홈런을 우리가 칠 수도 있는 거니까 불만은 없었다.
문제는 오늘 이민수가 도통 뜬공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거였다.
땅볼로 내야를 뚫어야 했는데, 촘촘한 스타즈의 내야 수비에 걸리기 일쑤였다.
“스트라이크 아웃!”
오늘만 삼진 2개를 당한 이주학이 허탈하게 들어왔다.
“선두 타자란 놈이 초구에 죽냐.”
“아니, 후. 아오! 얄미워.”
이주학이 아무 말도 못 하는 게 오늘 내 성적은 2볼넷.
비교하면 극과 극이었다.
“저 선배는 왜 너한테만 그러는데?”
“글쎄?”
이민수의 투구는 챌린저스전에서 느꼈던 그런 모습은 아니었다.
말로 표현하기 어렵지만, 오히려 승부하고 싶어 하는 느낌을 받았다.
근데 내 타석에만 제구가 안 잡히는 건지 스트라이크를 한 번도 못 봤다.
이민수의 투구 수는 6회 초에 58개.
이대로 가면 완투할 기세였다.
그때 3루에 짧은 타구를 친 박은성이 1루에 살아나갔다.
최치호가 아웃되긴 했지만, 오준혁이 안타를 치면서 2사 주자 1, 3루.
최필주가 급하게 마운드로 올라갔다.
‘이거 어째 본 적 있는 거 같은데?’
저번에도 이러지 않았나?
내 기억이 맞다면 그때 슬라이더를 노려서 안타를 만들어냈다.
얘기가 좀 길어지는지 결국 심판이 나서서 내려오라고 할 때까지 배터리끼리 대화를 나눴다.
“미안하다.”
“괜찮습니다. 더 하고 오셔도 됐는데.”
진심이다.
올림픽에서 포수들끼리 마운드에 올라서 무슨 얘기를 하는지 말했던 적이 있었다.
최필주는 나처럼 실없는 소리보단 투수에게 확답을 듣는 스타일이었다.
특히 이민수에겐 더더욱 그렇다고 했던 기억이 있다.
이런 상황에서 그런 대화가 길어진다는 건 나로선 좋았다.
이민수가 1루를 힐끔 바라보더니 특유의 투구 폼으로 공을 놨다.
이번 경기, 나한테 던진 첫 번째 스트라이크.
하지만 쓸데없이 너무 정직했다.
-따아악!
날카롭게 날아간 공이 2루수 키를 넘기고 우익수와 중견수 사이에 떨어졌다.
공이 펜스까지 굴러가는 사이 스타트를 빨리 끊은 1루 주자 오준혁이 그대로 3루를 지나 홈까지 노렸다.
접전이 이뤄지는 상황.
3루 코치님의 사인에 따라 곧바로 3루까지 내달렸다.
결과는 홈에서 세이프.
3루에 곧바로 공이 날아왔지만 살아서 들어갔다.
스코어 3대2.
역전과 동시에 강주호 앞에 주자가 있는 상황.
3루 코치님과 주먹을 맞댔다.
“수호, 민수 상대로 너무 잘 치는 거 아냐?”
“예?”
3루 코치님의 턱짓에 포수 뒤편에 커버플레이를 들어간 이민수를 바라봤다.
때마침 이민수 역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