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능빨로 FA 천억 포수-91화 (91/203)

91화 가을 향기가 난다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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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프즈와 시즌 마지막 경기.

사직 구장에 관중들이 빼곡히 들어서기 시작했다.

“으, 어제 저 정도로 사람들이 왔으면 그렇게 못 던졌을 것 같은데?”

10일간 백수 신세인 이호민이 괜히 옆에서 호들갑을 떨었지만, 엄살이 아니었다.

모든 선수가 그런 건 아니지만, 2만 명이 한목소리로 선수의 이름을 부르는 건 그 자체가 부담일 수도 있다.

특히 오늘 같은 낮 경기에 이렇게 많은 팬이 찾아오는 건 특별한 이벤트가 있는 날이 아니면 경험해보기 힘든 일이었다.

예를 들어, 오늘같이 누군가의 복귀라던가.

“안 그래도 훤한 얼굴이 더 펴진 것 같다?”

“저 없는 동안 호민이가 잘 던진 덕분이죠. 어제 진짜 잘 던졌더라고요?”

“어···. 어···. 감사합니다.”

허하준의 칭찬에 이호민이 어안이 벙벙한지 당황해했다.

“하여간 말도 잘해요. 쯧, 아무튼 푹 쉬다 왔으니까 오늘 경기는 쉽게 쉽게 가자.”

“그럴까요?”

강주호의 말에 허하준이 싱긋 웃었다.

허하준이 돌아오자 더그아웃에 더 활기가 도는 것 같다.

에이스란 그런 존재다.

팬들도, 선수들도 존재만으로 큰 힘을 얻는 존재.

아무튼 이런 만원 관중 낮 경기라는 특수한 상황은 프로선수 중에서도 극소수만 경험해 볼 수 있는 거였고, 그 말은 평소 경기와 많이 다른 환경이라는 거였다.

다른 투수라면 걱정이 앞섰겠지만, 다행히 허하준은 이런 경험이 많은 극소수에 속했다.

“허하준! 허하준! 허하준! 허하준!”

허하준이 몸을 풀기 위해 모습을 드러내자 팬들이 벌써 그 이름을 부르며 흥을 돋우고 있다.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이 정도면 이따 어쩌려고 저러지?

팬들의 목 상태를 걱정하는 것도 잠시, 몸을 푼 허하준이 다시 더그아웃에 들어왔다.

“컨디션 좋아 보이는데요?”

“역시 사직에서 공 던지니까 좋네.”

“어? 근데 그건 뭐예요?”

“아, 이거?”

잠깐 못 보던 사이에 손목에 뭐가 생겼다.

이틀 전에 봤을 때 못 봤었는데?

“선물 받은 거야.”

실로 여러 번 매듭지어 만든 얇은 팔찌.

딱 봐도 엉성한 게 기성 제품은 아니다.

분명 직접 만든 건데, 설마 남자가 저런 선물을 할 리 없고.

“여자가 선물해줬죠?”

“어? 음, 그렇지?”

뭐지 저 애매한 반응은?

실력이야 어찌 됐든 저런 정성을 쏟은 선물을 준 걸 보면 보통 사이는 아닐 거다.

허하준이 몸에 뭘 하고 다니는 성격도 아닌데 몸에 차고 다니는 걸 보면 여자친구인가?

허하준도 연애라니, 하긴 허하준 정도면 별로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거기에 경기장에도 이런 걸 하고 올 정도면 이젠 숨길 생각도 없다고 봐야지.

묻고 싶은 게 많았지만, 아쉽게도 곧 경기가 시작할 시간이다.

나중에 따로 물어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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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찌에 관한 생각은 금방 사라졌다.

원체 얇은 팔찌였고, 왼손에 껴서 글러브에 가려 멀리서는 보이지도 않았다.

공을 받아보니 미트에 묵직하게 들어왔다.

그래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어제 이호민에 막혀 초반에 꽉 막힌 모습을 보였던 울프즈 타선.

하지만 이호민이 내려간 후부터 투수들을 두들겨 결국 5점을 뽑았다.

경기는 이기긴 했지만, 타자들의 타격감을 살려준 것이 마음에 걸렸다.

특히 1번 타자 조지 애서튼이 문제였다.

이호민 상대로 1볼넷, 1안타.

이후 안타를 추가하면서 4타수 2안타 1볼넷 1도루.

다섯 타석 중 세 번 출루에 성공한 만큼 오늘도 경계 1순위였다.

거기에 허하준도 긴 시간 동안 실전 등판이 없었던 만큼 경기 초반을 가장 주의해야 했다.

하지만 그런 걱정은 본격적으로 초구를 받자 순식간에 사라졌다.

-퍽!

“스트라이크!”

타자가 꼼짝도 하지 못하는 완벽한 코스.

-와아아아!

처음부터 팬들을 환호하게 만드는 공에 분위기는 삽시간에 달아올랐다.

초구 때문이든, 아니면 팬들의 함성 때문이든 조지 애서튼은 별다른 활약 없이 삼진으로 물러났다.

그건 후속 타자들 역시 마찬가지.

공백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모습에 타자들의 방망이는 너무 쉽게 끌려 나왔다.

돌아온 에이스의 모습에 영향을 받은 건 팬들만이 아니었다.

-딱!

동기의 복귀를 축하하는 박은성의 깔끔한 안타가 시작이었다.

이후 최치호의 안정적인 번트.

허하준의 투구를 보자 1점만 내면 이길 수 있다는 전략적인 판단이었다.

그리고 돌아온 3번 타자, 오준혁의 깔끔한 적시타까지.

오늘 울프즈의 선발, 리처드 닉슨이 마음에 안 드는 게 있는지 뭐라 소리치는 게 보였지만, 함성에 파묻혀 들리지 않았다.

1사 주자 1루.

에이스가 돌아왔고, 상대 투수는 흔들리고 있다.

거기에 4번 타자의 타석에서 팬들이 무엇을 기대하는지 너무 잘 안다.

최소한 이 분위기를 이어가길 바라겠지.

리처드 닉슨은 좋은 투수였지만, 좋은 기억이 있었다.

울프즈를 상대로 스윕 했던 마지막 경기, 허하준은 완봉, 나는 홈런을 치면서 웰시코기의 저주를 박살 냈으니까.

거기에 낮 경기, 특히 어린이날 경기에서 항상 부진한 모습을 보였다.

어린이날 경기의 특징을 꼽으라면 낮 경기라는 점과 항상 매진된다는 점.

오늘 경기와 판박이었다.

-따아아악!

초구, 높게 형성된 포심을 그대로 잡아당겼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타구.

“Damn it!!!”

오, 2루를 지나가는 와중에 함성을 뚫고 리처드 닉슨의 목소리가 들렸다.

목소리 좋은데?

다음 타석에도 똑같은 말을 들으면 좋겠네.

투수를 조금이라도 더 흔들기 위해 천천히 홈에 들어오면서 3대0.

아주 좋은 출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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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쉽게도 리처드 닉슨의 목소리를 들을 기회는 없었다.

최치호의 번트를 제외하곤 단 하나의 아웃카운트를 잡지 못하면서 무너졌다.

1/3이닝 5실점.

거기에 책임 주자가 루상에 가득 있는 상황

박은성에게 밀어내기 볼넷을 던지자 결국 울프즈 벤치가 교체를 단행했다.

하지만 바뀐 투수를 상대로 최치호가 본인만 출루하지 못한 설움을 갚으면서 2타점 적시타.

이후 오준혁이 볼넷으로 출루했다.

그리고 1회에 벌써 두 번째 타석.

바뀐 투수가 누군지 안다.

김재호라고 고등학교랑 2군에서 몇 번 만난 적 있는 투수다.

얼굴이 까무잡잡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새하얗게 질린 걸 보니 순간 기억이 잘못됐나 싶었다.

하지만 초구가 몸쪽에 바짝 들어오자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마!”

“마!”

“마!”

단 한 글자의 단어였지만, 그 파괴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그런 상황에서 정상적인 공을 던지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볼!” “볼!” “볼!”

결국 또다시 밀어내기 볼넷.

이후 강주호 역시 볼넷으로 나가면서 결국 투수가 다시 바뀌었다.

어찌어찌 막아내긴 했지만 1회가 끝난 순간 11대0.

뒤집기도, 뒤집히기도 힘든 점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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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회 초, 울프즈의 선두 타자는 김규완.

“후. 쟤 안 내려가냐? 너도 좀 쉬고.”

“이제 곧 있으면 끝나는 데 좀 있다 쉬려고요.”

이미 점수가 15점이나 난 경기.

초반부터 완벽하게 승기를 가져온 경기의 선발 투수는 보통 6이닝 정도를 책임지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지금처럼 시즌 후반엔 체력관리도 할 겸 다른 신인 투수들에게 기회를 주는 목적도 있다.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법은 없고, 가능한 그렇다는 얘기다.

오늘 허하준의 성적은 8이닝 무실점 2피안타 1볼넷.

이미 타선은 주전들에게 휴식을 주기 위해 대거 교체가 진행됐다.

오늘 선발 라인업에서 바뀌지 않은 선수는 나와 허하준, 그리고 타자 세 명이 전부였다.

누가 봐도 가장 먼저 바꿔야 할 나와 허하준이 바뀌지 않은 건 간단했다.

일종의 스탯 쌓기라고 할까.

스탯이라기엔 하나하나가 큰 건이긴 했지만 말이다.

일단 나부터 얘기하자면 홈런을 칠 때마다 최소 경기 기록이 경신된다.

오늘 이미 홈런을 치면서 경신하기도 했고, 추가 홈런이 나올 수도 있으니 최대한 타격 기회를 주기로 하셨다.

허하준이 노리는 기록은 바로 한 시즌 최다 완봉승 기록.

이미 5연속 완봉승으로 기록 하나를 경신했지만, 한 시즌 최다 완봉승은 무려 8경기로 아직 3경기가 부족하다.

오늘 경기가 끝나면 잔여 경기는 19경기로 로테이션상 허하준은 최대 4경기 정도 나올 수 있다.

그럼 최다 완봉승 기록을 경신하는 것도 혹시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허하준과 나는 아직도 마운드에 있었다.

“스트라이크!”

힘은 좀 빠졌지만 날카로운 공이 들어왔다.

오늘 김규완의 성적은 3타수 무안타로 역시 포심, 투심, 스플리터 세 가지 선택지에 고생하는 중이다.

세 번 틀렸으면 한 번쯤은 맞출 법도 했지만, 안타깝게도 보기는 4번도 있었다.

“파울!”

투심이 파울이 되면서 카운트는 0-2.

“스트라이크 아웃!”

쫓기듯 스윙하는 김규완에게 갑자기 던진 슬라이더란 어떤 느낌일까.

“하. 선 넘네?”

뭐, 칭찬이겠지?

아무튼 이후 타자들은 쉬웠다.

이미 복잡한 머릿속을 헤집어놓는 슬라이더 한 스푼.

딱 그 한 스푼으로 경기를 끝냈다.

“스트라이크 아웃!”

“스트라이크 아웃!”

9회 세 타자를 전부 삼진 처리하면서 경기 끝.

허하준의 시즌 6번째 완봉승이자 복귀는 화려한 마무리를 거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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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이 쏟아진 경기였다.

선발 전원 안타, 이번 시즌 한 이닝 최다 득점, 거기에 울프즈전 5연승까지.

거기에 내 홈런과 허하준의 완봉.

우리가 축제인 것에 비하면 아마 울프즈는 굉장히 우울할 거다.

잔인할 수도 있지만, 가을 야구 경쟁 팀의 에이스가 완전히 무너진 건 좋은 일이었다.

아마 후유증이 꽤 길지 않을까?

오늘 이 경기가 다음 경기에만 영향을 줘도 큰 수확이었다.

그것 외에도 3경기에서 도저히 줄어들지 않았던 울프즈와의 격차가 드디어 2경기로 줄어들었다.

스타즈는 2.5경기.

그리고 또 하나 있다.

“잘만하면 4위까지 갈 만한데?”

아직 순위는 4위지만, 무슨 일인지 최근 챌린저스가 완전히 내리막을 걸으면서 우리와 단 3경기 차.

정확히는 허하준에게 퍼펙트게임을 허용했던 그 이후부터 연패 중이었다.

4위부터 6위까지 단 1경기 차이였고, 그 밑을 우리가 바짝 쫓고 있는 상황.

정말 가을이 보이기 시작했다.

물론 잔여 경기가 19개로 경기 수가 제일 적어서 불리한 건 사실이었다.

당장 다음 경기가 목요일 스타즈 원정 경기이니 그전까진 다른 경쟁팀 경기를 보면서 그 상대 팀을 응원할 수밖에.

일단 월요일까지 푹 쉬고 화요일엔 마음 맞는 사람들과 같이 경기를 보기로 했다.

인천으로 가는 건 수요일.

그전에 짧은 자유시간을 즐기기로 했다.

“주학아. 오늘 논다고 하지 않았냐?”

“어. 나도 그렇게 들었는데?”

“아니, 애초에 난 왜 부른 건데? 스타즈 경기에 나갈 수도 없잖아.”

“이럴 때 같이 공부하면 언젠간 쓸모가 있으니까 그러지. 만약 스타즈랑 같이 가을 가면 만날 수도 있는데? 그럼 그때 가서 하게?”

월요일엔 이주학과 이호민을 불러서 같이 공부했다.

아마 이주학이 선발 출장할 거 같은데, 스타즈 구장은 워낙 작아서 홈런이 자주 나온다.

홈런은 어쩔 수 없지만 그 홈런이 1점이 되느냐, 아니면 2점, 3점이 되느냐는 이주학의 활약 여부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다음 날.

“이게 뭐예요?”

“이거 부러워하는 거 같아서 선물.”

허하준이 왼손을 살짝 흔들자 실로 만들어진 팔찌가 흔들렸다.

하지만 그런 팔찌가 담겨 있다고 하기엔 너무 고급스러운 상자.

바로 퍼펙트게임 시계였다.

그렇게 선물을 받고 궁금하던 걸 물어봤다.

“그래서 그 팔찌는 누가 만들어 준 건데요?”

“궁금해?”

“예.”

“그래? 다음에 같이 만나자. 시간 될 때.”

허하준의 여자친구라, 누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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