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변화 -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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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수라는 포지션 상 다른 팀의 타자들과 대화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먼저 궁금한 걸 물어보는 일도 있었고, 나를 흔들기 위해 시비를 거는 경우도 종종 있다.
대놓고 시비 거는 경우는 최영준을 제외하면 없었지만.
물론 내가 먼저 말을 거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신인인 내가 선배들한테 거리낌 없이 말을 거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서 보통 말을 거는 경우는 국대에서 만났던 선수들이거나, 혹은 먼저 내게 말을 걸었던 선수들뿐이었다.
특이한 건 양준과 최필주를 제외한 포수들이 먼저 말을 거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프렌즈 포수인 박희준 역시 대화해본 적이 없었다.
“어제처럼만 하자.”
그래서 이번 타석 역시 노림수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목소리가 들려서 깜짝 놀랐다.
“뭘 그렇게 놀래?”
박희준이 날 놀라게 해서 변수를 만들려고 했다면 성공이다.
“그냥, 먼저 말 거실 줄 몰라서요.”
“그래? 잘됐네. 앞으로 계속 말 걸어야겠다.”
어우, 심장아파.
아무튼 프렌즈는 강점이 명확한 팀이다.
리그에서 압도적으로 강한 투수진을 보유한 팀.
그걸 바탕으로 상위, 중심 타선이 최대한 점수를 만들어내는 승리 플랜을 가진 팀이다.
타격에서 서도하가 그 중심에 있다면, 투수진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선수는 단연 박희준이었다.
박희준이 있고 없고에 따라 투수진의 안정감이 확 다르다는 평가를 받으니까.
특히 프레이밍은 국내 최고였다.
나도 박희준의 영상을 보면서 공부를 한 적이 있을 정도로.
이런 포수를 상대할 땐 존이 평소보다 넓어진 듯한 느낌을 받는다.
물론 심판들도 이 사실을 알기 때문에 최대한 의식하려고 하지만, 오늘 주심은 애초에 존이 조금 넓었다.
“스트라이크!”
초구 역시 약간 빠졌다고 생각했지만, 스트라이크 판정을 받았다.
“왜? 뭐가 이상해?”
“아뇨. 좋은 공이라서요.”
박희준이 찔리는지 먼저 말을 꺼냈다.
뭐, 이해 못 할 상황도 아니고 내 입장에서 마냥 나쁜 것도 아니었다.
“볼!”
2구는 박희준이라도 차마 스트라이크로 만들 수 없는 공이 들어왔다.
“볼!” “볼!”
연달아 볼이 들어오면서 3-1.
“스트라이크!”
“파울!”
“볼!”
마지막 높은 볼을 골라내면서 긴 승부 끝에 볼넷을 얻어냈다.
나가자마자 1루 코치님한테 바로 말을 꺼냈다.
“평소보다 존이 넓어요.”
“그래? 어느 정도?”
“공 반개 이상이요.”
“오케이. 알겠다.”
코치님이 벤치에 사인을 전달했다.
아마 이건 강주호에게 곧바로 전달 될 거다.
저 정도 되는 존에 볼넷을 내보냈다는 건 오늘 투수의 제구가 그리 좋지 못하다는 뜻이다.
즉, 제구가 틀어지면서 한가운데에 대놓고 들어가는 공을 던질 수도 있다는 뜻.
-따아악!
청량한 타구음이 사직 구장을 진동시켰다.
흐, 어마어마하네.
“야! 괜찮아! 잘 던졌어!”
박희준이 투수한테 하는 말을 뒤로하고 홈에 들어왔다.
“오늘은 제가 차려드린 밥상, 맛있게 드셨네요?”
“밥풀까지 싹싹 긁어먹었지.”
좋은 출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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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주호의 홈런으로 석 점의 리드.
넉넉한 점수는 아니었지만, 오늘은 좀 달랐다.
-탁!
빗맞은 타구에 이주학이 잡아서 강하게 1루로 던졌다.
“아웃!”
나는 홈 경기가 좋다.
아까 강주호의 홈런에 미친 듯이 소리지르는 팬들의 함성이 좋고, 집에서 잠을 자는 것도 좋다.
무엇보다 경기 내적으로도 좋다.
홈 경기에선 1회 초에 공을 받으면서 오늘 주심의 존이 어떤지 살핀다.
그건 공을 받을 때뿐만 아니라 타격 시 존을 설정하는 데에도 도움을 준다.
물론 첫 타석 초구처럼 확신하다가 손해 보는 경우도 종종 있었지만, 큰 상관 없었다.
나도 그걸 이용할 수 있거든.
아마 지금쯤 프렌즈 타자들은 골치가 아플 거다.
1회 공격이 끝나고 전달받은 존보다 빠진 공이 스트라이크 판정을 받고 있을 테니까.
그래서 존 근처에 들어오는 공에 전부 스윙이 나오고 있다.
-탁!
세 번째 아웃카운트도 이주학이 잡아내면서 깔끔한 삼자범퇴.
“오늘 땅볼 엄청 나오는데? 죽겠다.”
“앞으로 더 잡아야 할걸?”
“뭐? 얼마나?”
“오늘 경기 내내.”
예상대로 이 현상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사실상 이 정도가 되면 심판도 존이 뭔가 이상하다는 걸 안다.
하지만 이미 자신의 손을 떠난 상황.
차라리 일관성을 유지하는 게 욕을 덜 먹는 방법이다.
“...스트라이크!”
4회 말 공격, 내 타석에 심판이 고민 끝에 스트라이크를 선언했다.
아마 저 판정엔 이번 경기를 이렇게 만든 책임을 묻는 것도 있을 거다.
조금 억울하긴 했다.
박희준이 먼저 시작했는데.
결국 이번 타석에선 삼진.
하지만 나 말고 다른 타자들도 비슷했다.
마린스나, 프렌즈 가릴 것 없이 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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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주호의 결승 홈런. 마린스 3대0 승리로 2연패 탈출!]
ㄴ 오늘 주심 태평양 존 ㅅㅂ.
ㄴ 그래도 일관성 있게 넓긴 했음 ㅋㅋㅋ
ㄴ 와, 김수호 루킹 삼진당한 공은 진짜 에바 아니냐?
ㄴ 서도하 삼진당한 공은 또 빼놓고 말하네 ㅉㅉ.
ㄴ 강제 투수전 역겹긴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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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나긴 4연전의 마지막 경기.
어제 저지른 것이 있어서 1회 초 공격엔 절대 미트를 움직이지 않기로 했다.
주심은 바뀌었지만, 어제 주심을 섰던 1루심이 오늘 주심에게 얘기를 안 했을 리 없으니까.
첫 번째 타자, 김혁을 상대해보니 느낌이 딱 왔다.
‘오늘 존 미쳤는데?’
주심이 어지간히 각오했는지 확실한 공이 아니면 손이 올라가지 않았다.
“볼!”
최악의 시작, 첫 타자부터 볼넷으로 내보냈다.
벌써 신경이 쓰이는지 김호기가 1루를 힐끗 쳐다봤다.
가뜩이나 주자가 있으면 예민한 투수인데 존까지 좁다니.
‘오늘 피터지겠네.’
오늘 경기는 어떤 투수가 잘 던지냐가 아니라, 어떤 투수가 수비진과 바빕신의 도움을 받느냐의 싸움이 될 것 같다.
안타깝게도 김호기는 둘 다 도움을 받지 못했다.
1회에만 안타 2개, 볼넷 2개를 내주면서 2실점.
“오늘 존 쓰레기네.”
“그러게요.”
김호기의 말에 지분이 있는 나로서는 조금 찔리긴 했지만, 그건 타석에서 갚기로 했다.
우리도 주자가 차곡차곡 쌓이면서 1사 주자 2, 3루에 타석에 들어왔다.
들어오면서 힐끗 보니까 박희준의 표정은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1루가 비어있지만, 어제 홈런을 친 강주호가 기다리는 상황.
존도 좁고, 승부를 걸 게 확실하다.
이런 기회는 흔치 않았다.
초구는 흘러나가는 슬라이더.
“볼!”
박희준이 살짝 존에 넣어봤지만 단호한 심판의 선언에 결국 투수에게 공을 던져줬다.
생각이 많은 듯 사인을 교환하는 게 길어졌다.
하지만 프렌즈 배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건 두 가지뿐이다.
1루로 내보내거나, 여기서 승부를 보거나.
“볼!”
이번에도 날카로운 공이었지만, 또다시 볼.
한 번 정도 크게 돌려봐도 괜찮은 타이밍이 왔다.
천천히 몸에 힘을 빼고 투수를 바라봤다.
이내 투구에 들어가는 투수.
다리가 올라가고 땅을 찍을 때 공이 손에서 빠져 나왔다.
‘포심.’
그와 동시에 올라갔던 다리가 내려가고 그 반동으로 상체가 움직이며 이내 자연스럽게 팔이 움직였다.
내가 예상했던 궤적에 공과 방망이가 맞는 순간, 손을 울리는 짜릿한 진동에 맞춰 함성이 들리기 시작했다.
이래서 내가 홈을 좋아하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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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점수 내줄 거지?”
김호기가 5회까지 7실점 한 것 치곤 멀쩡해 보였다.
아니, 그냥 순응한 것 일수도?
그래도 실점치곤 공 개수가 적었다.
타자들이 조금 빠진다 싶으면 치지 않으니 어쩔 수 없이 적극적으로 승부해야 했고, 그게 이런 결과를 낳았다.
그건 상대 투수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아니, 상대 투수보단 나았다.
적어도 김호기는 타선이 9점을 내면서 승리 투수 요건을 만족했으니까.
“고생했어요.”
“진짜 저 주심 내가 꼭 기억한다.”
음. 역시 진실은 숨기는 게 맞겠다.
이제 김호기의 역할은 끝났고, 다음 투수가 올라올 차례.
배턴을 받은 첫 투수는 김동준이었다.
표정이 굳은 걸 보면 아마 끔찍한 미래를 상상하는 것 같은데.
“형, 괜찮죠?”
“어, 어? 어···.”
잔뜩 굳어있는 김동준이었지만, 이런 상황은 오히려 김동준에게 득이 될 수도 있다.
“저랑 내기할래요?”
“어···. 어?”
“만약 형이 실점하면 제가 밥 살게요. 그 반대면 형이 쏘고. 어때요?”
“너가 너무 불리한 거 아니야?”
“아뇨? 전 불리한 내기 안 해요.”
어쩐지 날 바라보는 표정이 오묘했다.
뭐, 힘을 돋우는 말이라고 생각하려나?
근데 이건 진심이었다.
제구보단 구위로 누르는 투수인 김동준이 제대로 활약할 수 있는 상황.
“하는 거죠?”
“그래 뭐....”
6회, 프렌즈의 첫 타자는 서도하.
“좋은 공으로 하나 꽂아봐라.”
“이미 많이 쳤으면서 또 치려고요?”
“난 네가 아니라서 칠 수 있을 때 몰아서 쳐놔야지.”
이미 장타 2개를 쳤으면서 욕심도 많다.
하지만 나쁘지 않다.
손맛을 봤으면 자연스럽게 스윙이 커지는 게 사람 심리였고, 특히 오늘같이 존이 좁은 특수한 상황은 더더욱 그랬으니까.
초구, 한가운데 포심.
김동준이 정말이냐는 듯 날 쳐다봤다.
‘예. 맞습니다. 한가운데 포심.’
약간 고민하더니 결국 내 뜻대로 따라주기로 했다.
-탁.
둔탁한 소리와 함께 공이 머리 뒤쪽으로 날아갔다.
“파울!”
“뭐냐 이거?”
“왜요?”
“모르는 척하네.”
아쉽다.
굳이 한가운데로 요구하면서 모험을 한 건 이왕이면 서도하를 빠르게 잡아내기 위해서였다.
김동준의 공은 처음부터 타이밍에 맞추기 쉽지 않으니까.
뭐, 아직 괜찮았다.
“파울!”
2구도 파울.
그리고 3구 역시 방망이가 나왔다.
-딱!
2루수 최치호가 안전하게 잡아서 1루로.
“아웃!”
서도하가 굳은 표정으로 뒤의 타자와 얘기하는 모습이 보였다.
-딱!
하지만 김동준의 커터(편의상 변형 포심을 이렇게 부르기로 했다)에 빗맞으면서 채지훈이 잡아서 그대로 베이스를 찍었다.
이어서 페드로 산체스가 2루타를 치긴 했지만, 후속 타자를 잘 처리하면서 무실점.
거기에 그치지 않고 멀티 이닝을 책임지면서 2이닝 2피안타 무실점.
“저 비싼 거 먹을 거예요.”
“먹고 싶은 거 다 먹어.”
이 정도면 패자 없는 내기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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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연패 뒤 2연승.
마린스가 뒷심을 발휘하며 시리즈를 동점으로 만들었지만, 유독 한 선수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하아....’
이호민이 침대에서 지끈거리는 머리를 식히고 있었다.
김수호의 합류 이전과 이후는 거의 다른 투수가 됐다고 봐도 될 정도로 투수진이 강해졌다.
허하준이야 말할 것도 없고, 웰릭스도 거의 1선발급 포스를 내뿜고 있다.
하스야 원래 좋은 선수였고, 김호기마저 무너지지 않으면서 오늘 경기에서 승리를 따냈다.
이 정도야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가장 충격적인 건 오늘 김동준의 투구였다.
‘나였으면 2이닝을 막을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이 끊임없이 났다.
마린스 선수로서 좋은 투수가 나타난 건 분명 좋은 일이었지만, 반대로 경쟁자가 늘어난 것이기도 했다.
이제 모레면 허하준이 돌아오기도 했고, 이호민에게 주어진 선발 기회는 내일이 마지막이었다.
다시 주어진 기회.
비록 4일 휴식 후 등판이라는 모험이었지만, 놓치고 싶지 않았다.
이걸 기반으로 언젠가 떠날 허하준의 자리에 자신의 이름을 올리고 싶었다.
그때 전화가 울렸다.
-호민아. 빨리 가게로 와봐라.
항상 침착하셨던 아버지가 급한 목소리로 그 말만 하고 끊으셨다.
영문도 모른 채 밖으로 나오자 소란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안녕?”
“야. 빨리 와서 먹어. 아버지, 오늘도 엄청 맛있어요.”
“허하준 선배님? 김수호?”
방금까지 생각하던 두 사람이 대뜸 이호민네 가게로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