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배터리의 가치 -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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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스카우팅 리포트를 달고 사는 나라도 모든 선수의 정보를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물론 대부분 선수를 한 번씩 보긴 하지만, 황의중같이 이제 막 1군에 등록된 선수의 정보까지 완벽히 숙지하긴 힘들다.
그래도 황의중의 리포트는 읽어본 적 있었다.
그리고 거기엔 분명히.
‘맞네.’
-... 슬라이딩 상황에선 헤드퍼스트 슬라이딩을 함.
더그아웃에 돌아와 리포트를 보니 확신이 들었다.
어떤 슬라이딩을 하는지 크게 중요하진 않지만, 필요한 정보 중 하나였다.
대부분 헤드퍼스트 슬라이딩을 하는 선수가 하필 오늘 벤트 레그 슬라이딩을 했다.
그것도 발을 상당히 높게 들면서.
그리고 황인재가 두 번이나 경고했다.
이게 우연일 확률이 얼마나 될까?
하지만 당장 해결하기엔 문제가 있었다.
일단 확실한 증거가 없다.
평소에 헤드퍼스트 슬라이딩을 했던 선수가 오늘은 반대로 해서 문제가 됐다고?
그리고 황인재가 경고 해줘서 알았다고 말하기엔 뭔가 부족하다.
제일 중요한 건 동기가 없었다.
‘저 사람이랑 나랑 뭔 관련이 있다고?’
2군에 있을 때 스쳐 지나가면서 본 이후 오늘이 첫 만남이다.
사적으로 얘기 한번 해본 적 없는 사이.
그렇게 리포트를 보고 있는데, 이주학이 다가왔다.
“야, 야! 김수호!”
“아, 어.”
“곧 있으면 네 타석이야. 장비 안 풀어?”
“풀어야지. 고맙다.”
“웬일이냐. 네가 정신을 다 놓고 다니고.”
“아냐. 아무튼 고마워.”
이주학의 말에 정신이 들었다.
해결하는 건 나중 문제.
일단 이 경기에서 이기는 게 우선이었다.
8회 말에 동점을 허용하면서 이번 이닝 반드시 점수를 내야 했다.
아직도 피닉스의 마운드엔 에릭 니콜라스가 있었다.
8회까지 고작 4안타만 허용하면서 완벽에 가까운 피칭 중이었다.
일단 저 투수를 끌어내리는 게 우선이었다.
피닉스라면 불펜 싸움으로 가도 할 만했으니까.
장비를 풀면서 그라운드를 확인했다.
원 아웃에 9번 타자 이민상이 2루에 있었고 최치호가 타석에 들어섰다.
아마 박은성이 번트라도 댄 모양이었다.
서둘러 장비를 벗고 대기타석으로 향했다.
확실히 초반에 비하면 구속이 느려졌다.
그래도 아직 웬만한 투수보다 공이 좋았다.
“아웃!”
결국 최치호까지 잡아내면서 오준혁이 타석에 들어섰다.
하지만 구위에 눌리면서 삼진.
아쉽게도 이번 이닝, 내 타석은 돌아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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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링턴의 역할은 8회까지.
불펜이 먼저 가동된 건 우리였다.
9회, 이용기가 제일 먼저 마운드에 올라왔다.
현재 불펜 중에서 가장 믿을맨이자 마무리 투수.
피닉스 역시 쉽게 볼 수 없는 타자가 들어왔다.
6번 타자 최영준.
오늘 3타수 무안타로 타격감은 그리 좋지 않았지만, 충분히 한 방이 있는 타자였다.
마음에 드는 타자는 아니었다.
일단 약물 논란이 있는 것부터 마음에 안 들었다.
거기에 스스로 그 사실에 대해 별로 반성하는 것 같지도 않다.
그리고 타석에서도 더러웠다.
“칵, 퉷. 오늘 공기가 더럽네. 미세먼지 어떤지 아냐?”
“아뇨.”
들어오자마자 시비네.
여기가 올림픽이었다면 바로 대답했겠지만, 안타깝게도 여긴 한국이다.
저딴 새끼한테 대답 쉽게 하나 하지 못하는 곳.
“아, 내가 어제 회에다가 한잔했거든. 구장 근처에 괜찮은 해산물 집 있는데 어때, 갈래?”
“아뇨.”
“아, 그치. 넌 홈에 갈 때마다 해산물 존나 먹겠구나? 그럼 그럼. 대전에서 먹는 것보단 더 맛있게 먹겠지.”
저런 놈들은 무시하는 게 상책이었다.
심판에게 공을 받고 이용기에게 건네줬다.
“하여간, 황인재 친구 아니랄까 봐 싸가지는 존나 없어요.”
“그만. 경기할 생각 있으면 조용히 해.”
“예예.”
듣다 못한 심판이 한마디 하자 드디어 조용해졌다.
조용히 만들기 위해서 몸쪽에 공 하나 꽂을 생각도 했는데, 다행히 공 하날 아낄 수 있었다.
왜 저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저놈의 심리를 예상해보면 멘탈을 흔들려고 하는 것 같다.
근데 경력도 있을 만큼 있는 선수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른다.
“스트라이크!”
초구, 바깥쪽에 약간 빠지는 공.
프레이밍을 하지 않았음에도 스트라이크가 선언됐다.
“아, 이건....”
“불만 있어?”
“아닙니다.”
나름 유쾌한 척 말했지만, 불만이 없을 리가 없다.
결국 심판도 사람이다.
거슬리는 행동을 하는 선수에겐 박한 판정이 섞일 수도 있었다.
가뜩이나 오늘 3타수 무안타인 상황에 존도 평소보다 넓어졌다?
그럼 자연히 급해지는 게 타자의 심리.
“스트라이크!” “스트라이크 아웃!”
0-2 카운트에서 포크볼을 던지니 방망이가 쉽게 끌려 나왔다.
걱정했던 것치곤 혼자 난리 친 덕분에 쉽게 잡아냈다.
이후 이용기가 본인의 저력을 과시하며 삼자범퇴.
걱정했던 것 치곤 별일 없던 이닝이 끝나고 오랜만에 연장으로 진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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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하루, 웰링턴과 함께 위력적인 투구를 선보였던 에릭 니콜라스가 내려갔다.
다음으로 올라온 투수는 피닉스의 필승조 박진영.
나름 괜찮은 공을 던지는 투수지만, 에릭 니콜라스보단 못했다.
김수호가 침착하게 존에 들어오는 공을 때리면서 출루에 성공했다.
한 점이 급한 상황.
벤치에서 사인이 나왔다.
‘히트 앤 런?’
강주호의 컨택 능력과 김수호의 준수한 주력을 이용한 작전.
-따악!
[김수호 뜁니다! 강주호 스윙! 유격수 잡았지만, 2루엔 늦었습니다!]
[자칫하면 병살이 될 법한 타구였거든요. 병살이 주효했네요.]
[1사 주자 2루 상황, 타석엔 잭 미켈 선수가 들어옵니다!]
-따악!
[2루수 잡아서 1루로! 아웃입니다!]
[그 사이에 김수호 선수가 3루에 들어갔습니다.]
[마린스 입장에서 이 기회를 무조건 살리고 싶어 할 텐데요.]
김수호가 3루에 들어가서 3루 코치와 작전에 대해 짧게 얘기하고 베이스에 섰다.
그리고 황인재만 들릴 정도로 얘기했다.
“고맙다.”
그 말에 황인재가 슬쩍 눈짓하더니 말했다.
“아직 안 끝났어.”
“뭐?”
둘이 얘기하는 장면이 카메라에 잡혔다.
[한국 프로야구의 미래인 두 선수가 나란히 서 있으니 보기 좋군요.]
[그렇네요. 무슨 얘기를 하는 중일까요?]
내용을 전달받은 김수호가 표정을 굳혔다.
그것과 별개로 타석에 김민석이 들어서자 더 이상 얘기를 할 수 없었다.
이후 김민석의 안타가 나왔다.
김수호가 타구를 확인하면서 홈으로 들어왔다.
2대1.
연장에서 선취점을 뽑았지만, 김수호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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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생각해?”
“아, 별거 아니에요.”
10회 말이 됐지만, 투수는 여전히 이용기였다.
멀티 이닝 시에 성적이 그리 좋은 투수는 아니지만, 9회 말에 적은 공을 던져서 올라올 법했다.
“세이브 대신 승리투수는 오랜만인데.”
“좋은 거죠.”
“그치. 좋은 거지.”
그렇게 그라운드로 나갔다.
타석엔 9번 타자 황의중.
‘이 사람이 본체가 아니라고 했지?’
황인재의 말에 의하면 본체는 최영준.
이 사람은 그냥 최영준의 부하나 다름없었다.
문제는 최영준이 도통 앞에서 나설 생각을 안 한다는 것.
물론 시킨다고 하는 황의중의 잘못이 없는 게 아니었다.
황인재가 해준 말을 떠올리며 차분하게 자리를 잡았다.
타자로서 황의중은 그저 그런 선수.
오늘 공이 좋은 이용기의 공을 치기 쉽지 않을 거다.
‘칠 마음이 있다면 말이야.’
“스트라이크!” “스트라이크!”
순식간에 잡은 두 개의 스트라이크.
그러자 황의중이 잠깐 타석에 빠졌다가 들어왔다.
‘진짜네.’
전 타석과 다르게 타석에서 반 발 정도 뒤에 섰다.
그걸 보자 확신이 들었다.
솔직히 조금 겁났지만,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들어가야 하는 법.
‘포크볼 하나 주세요.’
이용기가 던진 공이 급격한 변화를 겪으면서 바운드가 됐다.
동시에 황의중의 방망이가 헛돌았고, 한쪽 팔이 방망이를 놓았다.
‘온다.’
-퍽!
의식한 상태에서 일어난 일이었지만, 충격이 없진 않았다.
만약 황인재가 말해주지 않았다면?
‘고마움은 나중에 말하고.’
충격과 함께 환해진 시야.
그리고 황의중과 눈이 마주쳤다.
“....”
“....”
순간 대전 구장이 조용해졌다.
하지만 그건 터지기 직전의 화산 같은 상태였다.
“시발 새끼가!”
격한 말과 함께 순식간에 더그아웃에서 양 팀 선수들이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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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호의 안면보호대가 방망이에 닿으면서 풀어지자, 가장 격한 반응을 보인 건 다름 아닌 강주호였다.
양준이 국가대표 경기에서 부상을 당했을 때도 그랬지만, 오늘은 말리는 사람조차 얼마 없었다.
강주호가 먼저 나서고 곧바로 채지훈이 따라갔다.
“마! 뭐하나!”
채지훈의 말에 더그아웃은 물론, 그라운드에 있던 선수들까지 순식간에 영겨 붙었다.
일촉즉발의 상황.
그 와중에 가장 선두에서 강주호를 막은 건 피닉스 최영준이었다.
“선배님, 제가 교육 잘 시키겠습니다.”
“마. 닥쳐라.”
하지만 그조차도 강주호를 막는 게 최선이었다.
일단 김수호는 의료진의 검사를 받는 상황.
그래서인지 정작 당사자인 두 사람 곁엔 그리 많은 선수가 있진 않았다.
그런 가운데, 홈 플레이트에 한 사람이 다가왔다.
“야.”
‘시발 놀래라.’
잔뜩 긴장하던 황의중이 갑자기 들린 말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목소리가 들린 곳엔 허하준이 서 있었다.
‘그 새끼가 허하준은 무시해도 된다고 했지?’
최영준은 벤치클리어링까지 예상했고, 그중에 허하준은 무시해도 되는 사람이었다.
“죄송합니다.”
“사과 말고. 왜 그랬어.”
“제가 실수로 그랬습니다.”
“실수?”
허하준과 눈이 마주친 황의중이 순간 움츠러들었다.
‘저 사람 눈이 원래 저랬나?’
그리고 그건 둘을 바라보는 김수호 역시 같은 생각을 했다.
‘저런 표정을 지을 줄도 알았나?’
항상 웃고 다녀서 몰랐지만, 허하준의 굳은 표정을 보자 김수호조차 소름이 돋았다.
“실수. 그래. 실수.”
‘후. 다행이다. 이걸로 됐나?’
허하준의 말에 황의중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최영준의 말이 맞았다.
하지만 그는 보지 못했다.
자신의 얼굴을 향해 날아오는 허하준의 왼 주먹을.
-퍼억!
“어....?”
둔탁한 타격음이 들리고 설마 하면서 그 장면을 보고 있던 모두가 놀랐다.
‘그 허하준이?’
‘먼저 주먹을?’
그래서일까.
-퍼억!
연달아 황의중의 얼굴에 주먹이 꽂혀도 누구도 쉽게 움직일 수 없었다.
가장 정신을 먼저 차린 건 김수호였다.
“선배! 잠깐만요!”
다행히 큰 충격이 없던 터라 멀쩡했고, 그 모습을 본 다른 선수들도 급하게 달려들었다.
“야! 말려!”
“하준아! 그러다 죽는다!”
‘힘이 뭐 이리 쌔!?’
그렇게 선수 다수가 붙고 나서야 허하준이 떨어졌다.
“아니! 야! 아무리 그래도 우리 애 얼굴을 이렇....”
“불만 있냐.”
“어···. 그게···.”
최영준이 틈을 타서 큰소리를 내봤지만, 강주호의 말 한마디에 아무 말 하지 못했다.
“하준아, 잘했다.”
물론 모두가 강주호와 같은 생각을 한 건 아니었다.
“퇴장!”
이 광경을 바로 옆에서 지켜봤던 주심은 심판으로서 퇴장을 내릴 수밖에 없었고, 허하준은 순순히 구장을 떠났다.
김수호 역시 선수 보호 차원에서 교체가 됐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이용기가 경기를 잘 마무리 지으면서 마린스의 승리로 끝났다.
문제는 지금부터였다.
[야구장에서 일어난 난투극, 이래도 괜찮은가?]
먹잇감을 노리던 언론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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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으, 술맛 죽이네.”
“한 잔 받으시죠.”
경기가 끝난 뒤, 어수선한 분위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술집에 온 최영준과 그 일행들.
“캬. 오늘 안주 왜 이리 맛있냐?”
“제가 안주 더 맛있게 해볼까요?”
일행의 말에 최영준이 해보라는 듯 끄덕였다.
“야구장에서 일어난 난투극, 이래도 괜찮은가. 전대미문의 그라운드 폭력 사태, 징계로 끝날 일이 아니다. 캬. 이거 일이 커지겠는데요?”
“김수호 그 새끼 조지려다가 월척이 걸려버렸네?”
“참. 그나저나 황의중은 어쩝니까?”
“갑자기 걱정하는 거야?”
“아뇨. 그 새끼가 입 열면 귀찮아지잖아요.”
그 말을 들은 최영준이 피식 웃었다.
“입 여는 순간 지도 나락인데 과연 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 새끼 말을 누가 믿어.”
“크크크. 그렇죠. 아무튼 마린스 새끼들 잘나가는 거 꼴 보기 싫었는데 잘 됐습니다.”
“짠 한 번 하자.”
하지만 아까 기사를 읽었던 한 명이 표정이 굳은 채 계속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야. 영준 선배가 제일 싫어하는 게 술자리에서 핸드폰 보는 거 모르냐? 이제 집어넣어.”
“선배님. 이거 좀 보셔야 할 거 같은데요.”
“뭔데.”
핸드폰을 가져온 최영준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이 새끼가 여기 왜 있어!?”
화면 안에는 긴급 기자회견이라는 글자 밑에 황의중이 앉아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