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배터리의 가치 -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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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즌 종료까지 30경기가 채 남지 않은 지금.
만년 6위였던 울프즈와 5위 스타즈의 승차가 0이 되면서 가을 야구의 마지막 주인공을 더더욱 알 수 없게 됐다.
울프즈와 스타즈가 서로 발목을 잡는 사이 그들을 추격하는 하위권 팀들은 그저 웃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 웃을 수 없는 팀이 있었으니, 바로 9위 대전 피닉스였다.
5위 광주 울프즈와 5.5경기 차이.
남은 경기를 생각했을 때, 따라잡기엔 너무 큰 격차였다.
반면 라이벌이라 불리던 마린스는 꼴지에서 어느새 3경기 차 7위까지 올라갔다.
거기에 절대 깨지지 않을 것 같은 기록, 이번 시즌 피닉스 팬들의 유일한 위안거리였던 황인재의 기록 마저 김수호가 깨기 직전이었다.
심지어 마린스는 직전 경기에서 퍼펙트게임이라는 전대미문의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이번 경기를 보는 피닉스 팬들은 내심 이런 생각을 하기도 했다.
‘마린스가 했는데? 오늘 선발도 에릭 니콜라슨데?’
하지만 김수호의 홈런이 터지자 대전 구장은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물론 리그에 떨친 명성답게 후속 타자들을 잡아내긴 했지만, 어느새 포수마스크를 쓰고 나온 김수호를 보자 쓰린 속을 참기 힘들었다.
ㄴ 우리 스카우터들은 황인재 볼 때 뭐 한 거야? 3라운드에서 김수호 뽑았으면 됐잖아.
ㄴ 황인재 – 김수호 같이 뽑았으면 올해 가을 야구 했을 텐데. 아니, 우승까지 할 수 있었는데!
ㄴ 꼴닉스들 전반기에 황인재 황인재 노래를 부르더니 꼴 좋닼ㅋㅋㅋㅋ
ㄴ 그래도 아직 김수호보단 황인재지.
ㄴ 네네~ 황인재 정말 부럽습니다~ 축하드려요~
이런 상황과 더불어 2회 터진 김수호의 홈런을 제외하고 양 팀 모두 무득점인 가운데 황인재가 다시 타석에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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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말이었지만 퍼펙트를 자신했던 만큼 웰링턴의 공은 좋았다.
3회까지 안타 1개와 볼넷 한 개만 허용했을 뿐 무실점 피칭을 이어갔다.
4회 역시 첫 타석에 안타를 허용한 오기택을 삼진 처리하며 기분 좋은 출발을 했다.
‘황인재까지 잡아내면 참 좋을 텐데.’
첫 타석은 뜬공으로 잡아냈지만, 커브에 정확한 타이밍을 맞춘 걸 보면 타격감이 상당히 좋은 상태였다.
‘또 바깥쪽으로 갈까? 아니면 몸쪽?’
황인재에게 워낙 약한 웰링턴이었기에 고민이 길어졌다.
“조심해라.”
“...뭐?”
그런 와중 뜬금없이 황인재가 말을 걸었다.
열받는 건 그 이후 아무 말도 없었다.
‘조심하라고? 뭘? 심리전인가?’
왠지 황인재의 심리전에 말린 기분이 들어 얼른 잡생각을 털어냈다.
이전 타석의 좋았던 기억이 있지만, 약간의 변주를 주기로 했다.
“스트라이크!”
초구, 과감하게 커브를 요구했다.
약간 낮게 온다 싶어 그대로 공을 끌어올려 스트라이크를 얻어냈다.
‘다시 커브.’
이번엔 몸쪽에 붙은 커브.
“볼!”
자칫하면 맞을 수도 있을 정도로 바짝 붙어 왔지만, 황인재는 피하지 않았다.
방망이를 끌어내진 못했지만, 상관없다.
두 번째 공은 그 이후 공을 위한 포석.
3구엔 바깥쪽으로 빠지는 슬라이더.
“스트라이크!”
헛스윙을 끌어내면서 이걸로 유리한 볼카운트가 됐다.
‘이 공이 마지막이 됐으면 좋겠는데.’
높은 포심.
-따악!
다시 한번 높게 뜬 타구가 박은성의 글러브에 들어갔다.
후, 한고비 또 넘겼다.
‘그래서 조심하라는 게 뭐지?’
하지만 더그아웃으로 들어가는 황인재는 대답이 없었다.
이후 5번 타자 존 아쉬드를 잡아내면서 이번 이닝 삼자범퇴.
“브로, 역시 완벽한데?”
“웰이 잘 던져준 덕분이죠. 이대로만 가죠.”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머릿속엔 황인재의 말에 대한 의문으로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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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잠깐 돌려 2회 말 피닉스의 공격이 끝났을 때.
일대영으로 지고 있긴 하지만, 충분히 따라갈 수 있는 상황.
하지만 피닉스의 분위기는 험악하기 그지 없었다.
“아오, 저 싸가지 없는 새끼들.”
“왜 그래요. 또.”
“시발. 내가 만만하냐? 어? 아오, 요즘 새끼들 싸가지하고는. 야. 물 좀 가져와 봐.”
피닉스엔 간판타자가 두 명 있다.
한 명은 올해 혜성같이 등장한 황인재였고, 다른 한 명은 최영준이었다.
3할의 타율, 한 시즌에 10홈런은 거뜬히 넘기는 파워, 준수한 수비.
그런 타자가 국가대표에 선출이 못 된 건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서였다.
바로 약물.
피닉스 팬들이 황인재의 등장에 열광적이었던 건 황인재의 실력 때문만은 아니었다.
자신들의 스타가 떳떳하지 못했던 것에 대한 실망.
그리고 타 팀 팬들에게 항상 당당하게 말할 수 없는 존재가 그다지 달갑진 않았다.
그래서일까?
피닉스 팬 중에도 호불호가 갈리는 와중에 등장한 황인재에 모든 시선이 쏠리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사실을 최영준도 잘 알고 있었고, 그건 곧 황인재에 대한 질투로 이어졌다.
문제는 피닉스가 젊은 팀이라는 거였다.
최영준보다 선배는 한 명뿐이었고, 그마저도 흔히 말해 최영준에게 먹힌 지 오래였다.
즉, 대놓고 황인재에게 뭐라 해도 최영준에게 뭐라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시발놈. 아주 들은 척도 안 해요. 응?”
“선배님. 여깄습니다.”
“그래. 우리 으중이! 하, 이 귀여운 새끼. 형이랑 오늘 한잔할까?”
“전 항상 준비돼있습니다!”
“오케이. 저번에 갔던 곳으로 가자.”
끼리끼리 논다는 말이 잘 어울리는 상황.
이번 9월 엔트리 확장으로 1군에 올라온 황의중은 최영준의 곁에 딱 붙어서 떨어질 줄 몰랐다.
‘어떻게든 1군에 붙어있어야지.’
지긋지긋한 2군 생활 끝에 겨우 1군에 왔다.
문제는 이후에도 1군에 있을 수 있다는 확신이 없다는 거였다.
하지만 피닉스의 실세인 최영준에게 붙어있으면 내년 시즌에도 1군에 있을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누군가는 야구 선수에게 실력이 전부라곤 하지만, 그건 어느 정도 급이 되는 선수들에게만 적용되는 말이다.
‘드럽고 치사하지만 어쩔 수 없지.’
28자리 중 마지막 한자리 정도는 정치질로 충분히 얻어낼 수 있는 자리였다.
“후, 그래서 으중아. 형이 어떡해야 할까.”
“저놈이요?”
하지만 최영준도 함부로 건들지 못하는 선수가 있었으니 바로 황인재였다.
구단주가 직접 찍은 픽.
잘못 건들면 아무리 최영준이라도 피를 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고작 왕따나 시키면서 꼽을 주는 게 전부였다.
물론 황인재는 전부 무시로 일관했지만.
“제가 한마디 하겠습니다!”
“오, 네가?”
“예!”
‘시발. 설마 진짜 시키진 않겠지?’
“음. 아니야. 아무리 그래도 후배한테 그러는 건 아니지.”
‘후. 다행이다.’
그때 최영준이 목소리를 낮춰서 얘기했다.
“근데 그건 같은 팀일 때 얘기고, 싸가지 없는 새끼가 하나 더 있는데. 어때?”
“예?”
“저기 있잖아. 지가 잘난 줄 아는 새끼.”
최영준의 턱짓에 황의중이 그라운드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타석에 서 있는 8번 타자 김신이 보였다.
“김신 선배요?”
“아니, 그 옆에.”
‘설마, 아니겠지.’
“이 형이 저 싸가지 없는 포수 새끼 때문에 한동안 술도 못 마셨던 기억이 있어. 어때, 형의 분노를 좀 풀어주지 않으련?”
‘시발, 미친 새낀가?’
아무리 다른 팀이라지만 상대를 보고 말해야지.
김수호.
자신이 건들기에 너무 거물이었다.
“왜? 못하겠어?”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후. 자, 으중아. 생각해봐.”
“예?”
“너 어디 선수야.”
“저야 피닉스 선수죠.”
“그치. 피닉스 팬들이 가장 소중한 피닉스 선수지. 근데 요즘 팬들한테 가장 큰 골칫거리가 뭘까?”
“그건 저희가 성적이 안....”
“아니지 병신아. 우리 대단하신 황인재 선수님 기록을 바로 저기 앉아있는 분께서 깨기 직전이라는 거야. 어?”
“그건....”
“거기에 형이 들었는데, 저 새끼 성격도 순해서 뭐라 하지도 못해. 그냥 네가 한마디 하면 아무 말 못 할걸?”
“....”
황의중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렇게 3회 말 공격이 끝나갈 즈음, 입이 열렸다.
“뭐하면 되나요?”
“응? 아, 그거.”
최영준이 황의중의 말에 씨익하고 웃었다.
“별건 아니고···.”
그리고 황인재가 그 둘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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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수란 생물들은 당최 알면 알수록 어렵다.
웰링턴이 역대급 호투를 선보이면서 7회를 마쳤지만, 8회가 되자마자 다른 투수가 된 것처럼 제구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첫 타자 볼넷, 번트, 그리고 다시 볼넷.
승부처라고 생각했는지 2루엔 대주자가 들어가 있었다.
타석엔 3번 타자 오기택.
뒤에 황인재가 대기하고 있단 걸 생각하면 무조건 승부해야 했다.
그 전에 일단 마운드로 올라갔다.
“어때요? 제가 알기론 웰이 8이닝 무실점 한 건 처음인데?”
“그래? 그 정도면 시계는 무리지만, 가족 파티에 초대해줄 만하네.”
“파티요?”
“어. 곧 엘리의 생일이거든.”
“오, 진짜요? 저도 곧 생일인데.”
“그건 당연히 알고 있지. 전광판에 대문짝만하게 나오잖아.”
“그건 그렇죠.”
더그아웃에선 내게 판단을 맡기기로 했다.
냉정하게 봤을 때, 공에 실린 힘은 아직 괜찮았다.
문제는 제구인데, 웃는 걸 보면 한 타자 정도는 더 해볼 만하다.
“초구 스트라이크 가능하죠?”
“당연하지. 한 번 보여주자고.”
미트로 가볍게 툭 치고 마운드에서 내려왔다.
동시에 더그아웃에 사인을 보냈다.
‘이번 이닝까지 가능.’
이번 이닝 두 타자에게 볼넷을 내준 투수.
하지만 최근의 웰링턴은 다르다는 걸 알고 있다.
초구는 마운드에서 얘기한 대로 존에 들어오는 포심.
한참 높은 곳에서 떨어진 공이 정확히 미트에 들어왔다.
“스트라이크!”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말해주듯 미트에 감기는 공의 느낌이 좋았다.
“볼!” “스트라이크!”
그리고 4구째.
-따악!
평범한 타구가 그대로 2루수 최치호가 있는 곳으로 굴러갔다.
하지만 마지막 바운드가 갑자기 튀면서 최치호가 공을 잃어버렸다.
“뒤에! 바로 뒤!”
급하게 주변에 있던 이주학과 강주호가 말을 했지만, 이미 주자들은 모두 세이프가 된 상태.
이닝이 끝날 타구가, 최악의 결과가 돼버렸다.
그리고 타석에 들어온 타자는 오늘 3타수 무안타지만 위압감을 드러내고 있는 황인재.
그나마 웰링턴이 최치호한테 괜찮다고 하는 제스처가 보였다.
벤치 역시 그걸 확인했는지 움직임은 없었다.
하긴, 이 상황에 황인재를 상대할만한 불펜은 없었다.
‘만루에 황인재라니.’
좀 빡센걸?
이전 세 타석의 볼 배합을 떠올리고 있을 때, 황인재가 다시 말을 꺼냈다.
“3루 주자, 조심해라.”
그 말에 눈이 자동으로 3루를 향했다.
누군진 알고 있다.
황의중.
이번 9월 확장 엔트리로 1군에 올라온 선수.
주력이 꽤 괜찮지만, 나머지가 수준 이하.
근데 조심하라고?
설마 3루 주자 달리기가 빠르니까 조심하라는 건 아닐 거고.
황인재 성격상 헛소리를 할 놈은 아니었다.
일단 타석에 집중했다.
‘빠르게 가죠.’
초구는 낮은 포심.
하지만 제구가 틀어져 바깥쪽 높게 공이 날아왔다.
-따악!
다행히 우익수가 잡을 수 있는 위치.
그리고 승부를 걸어볼 만한 위치였다.
자세를 잡고 3루 주자와 잭 미켈을 번갈아 가면서 확인했다.
“아웃!”
사인과 동시에 주자가 뛰고 잭 미켈도 곧바로 송구했다.
그리고 그때, 3루 주자와 눈이 마주쳤다.
‘설마?’
조심하라는 게?
공을 받는 동시에 몸이 반사적으로 홈에서 멀어졌다.
뒤늦게 태그를 했지만, 이미 주자의 발이 홈에 닿았다.
‘발?’
“세이프!”
“황인재! 황인재! 황인재!”
심장이 차게 식는 게 느껴졌다.
무언가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기분.
그리고 그건 다음 타자를 삼진으로 잡아낸 후, 더그아웃에 들어가자 확실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