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배터리의 가치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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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이 1루수 채지훈의 미트 속으로 사라진 순간, 2만 명의 팬들이 일제히 함성을 질렀다.
“와아아아!!!”
“허하준! 허하준! 허하준!”
“김수호! 김수호! 김수호!”
“최강 부산 마린스! 오오~ 오오-”
승리에 대한 기쁨, 이런 경기를 직접 봤다는 기쁨, 마지막까지 긴장을 풀 수 없었던 상황 등이 어우러지면서 그 누구도 이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누가 상상이나 했는가.
만년 꼴찌팀이었던 이 팀이 기록의 제물이 아니라 기록을 쓰는 팀이라니!
그건 선수단 역시 마찬가지.
외야에 있던 이준, 박은성, 잭 미켈이 싱글벙글 웃으면서 내야로 뛰어갔고, 내야수들은 곧장 김수호에게 모였다.
주인공은 허하준이지만 김수호에게 모인 건 허하준이 곧바로 김수호에게 갔기 때문이었다.
“네가 그냥 투수해도 되겠는데?”
“그럴까요?”
허하준의 손을 잡고 일어난 김수호가 일어나자 주변에 모인 선수들이 서로 눈치를 봤다.
그리고 순식간에 둘을 덮쳤다.
“미친놈들아! 너네 때문에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다!”
“아오! 2스트에서 스플리터 좀 그만 던져!”
“김수호! 재수 없는 놈! 치사한 놈! 너 혼자 다 해 먹어라!”
마지막은 누가 들어도 이주학의 목소리였다.
아무튼 정말 좋은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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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코치님. 설마 우십니까?”
“... 헛소리하지 말고 꺼져.”
“이렇게 좋은 날 왜 울고 지랄이야. 나이 먹은 거 티 내냐?”
“좋으니까 울지, 그리고 형이야말로 저기로 가야 하는 거 아니야? 왜 청승맞게 여기로 와서 그래.”
“후, 나이 먹은 동생, 형이 챙겨줘야지. 아니면 누가 챙기냐.”
더그아웃도 그라운드 못지않게 축제 분위기였지만, 어쩐지 강기호와 강주호가 있는 공간은 동떨어져 있어 보였다.
“그러는 거 보니 이제 진짜 은퇴할 때 됐나 보네.”
“어. 맞아. 이제 진짜 은퇴해야지.”
“어?”
강주호가 그런 약한 소리를 하는 건 처음이었기에, 강기호가 놀란 눈으로 쳐다봤다.
“그 전에 우승 한 번 하고.”
“평생 안 하겠다는 소리네.”
“저놈들이 우승시켜주겠다는데, 못 믿냐?”
“우승···. 좋지.”
그렇게 둘은 잠깐 그라운드를 멍하니 바라봤다.
“기호야.”
“뭐.”
“미안하다.”
“나이 먹고 주책 부리지 마쇼. 오글거리니까.”
“쯧. 싱거운 놈. 눈물이나 닦아라. 저놈들 온다.”
허하준과 김수호, 그리고 다른 선수들이 하나둘씩 더그아웃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축하한다. 이놈들아.”
“선배님.”
“선배는 무슨, 내가 왜 네 선배야. 코치지.”
그 모습을 보면서 강주호는 이정훈 감독에게 다가갔다.
“감독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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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1호 퍼펙트의 주인공은 허하준!]
[또다시 역사를 쓰다. 기록 제조기, 허하준과 김수호 배터리!]
[퍼펙트게임, 우연이 아닌 이유!]
[김수호, 마지막 아웃카운트를 잡아내는 호수비!]
ㄴ 와 ㅋㅋㅋ 저게 어떻게 20살이냐고.
ㄴ 존나 침착하네 ㄷㄷ 나였으면 손 벌벌 떨면서 던졌을 듯.
ㄴ 걍 2스트 이후에 스플리터 받는 거 보면 심장이 없는 게 확실함. 심지어 본인이 요구한 거얔ㅋㅋㅋ
ㄴ 진짜 마린스에서 첫 퍼펙트가 나올 거라곤 생각도 못 했다.
ㄴ 22
ㄴ 33
ㄴ 나 직관했는데 9회 초에 기침 한 번 했다가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다 노려보더라.
ㄴ 너였냐? 진짜 뒤통수 세게 후려갈길 뻔한 거 겨우 참았다.
ㄴ 만약 퍼펙트 깨졌지? 너 몸 성히 못 돌아옴.
ㄴ 근데 챌린저스 마지막 타구, 나만 불편함? 저게 번트랑 다를 게 뭐야.
ㄴ 그니까. 솔직히 저딴 타구에 퍼펙트 깨졌으면 좀 논란 있을 듯?
ㄴ 에후 ㅉㅉ. 또또 물타기. 그만 좀 해라.
ㄴ 넌 ㄲㅈ
[허하준, 첫 퍼펙트게임 소감 묻자 ‘무슨 시계를 살지 고민이에요.’]
[Today Photos! 누운 김수호를 일으켜주는 허하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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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경기를 본 건 팬들이나 관계자만이 아니었다.
“Holy shit! 대체 저 공은 뭐야!”
LA다저스의 아시아 스카우터, 에릭 화이트를 비롯한 많은 스카우터들이 이 경기를 보기 위해 경기장을 찾았었다.
사실 허하준에 대한 평가는 예전에 이미 마친 상황.
하지만 올해 7월부터 그 평가는 우상향, 아니 우급등을 이루고 있다.
그 정점이 바로 오늘.
“대충 봐도 65점. 어떻게 하루아침에 저런 구종을 추가하냐고!”
에릭 화이트는 허하준이 새로운 구종을 추가했다는 소식에 급하게 한국으로 들어와 표를 구하려고 했지만, 이미 매진된 상태라 쉽지 않았다.
결국 과거의 인연에게 연락을 할 수밖에 없었다.
기쁨과 비명이 섞인 혼잣말에 옆에 있던 리암 에이전시의 제이슨이 혀를 찼다.
“여전히 네 눈은 옹이구멍이구만.”
“뭐?”
“쯧. 허의 투구도 좋았지만, 이번 경기 내내 지켜봐야 하는 건 그가 아니었어. 킴의 안정감, 저 선수가 고작 20살이 안 됐다고. 무슨 말인지 알아?”
스카우터와 에이전트.
어쩌면 앙숙으로 느껴질 만한 둘이 한자리에 있는 건 그다지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각자의 길에 들어서기 전, 둘은 합이 좋은 배터리였으니까.
그리고 그때부터 이어졌던 논쟁이 오늘 다시 불이 붙었다.
“그때 네가 했던 멍청한 리드 덕에 내 승리가 날아간 기억은 이미 네 머릿속에서 사라진 거야? 하긴, 그딴 기억력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딴 리드를 했겠지.”
“리드? 네가 바깥쪽을 몸쪽으로 헷갈려서 던졌던 그 공들은 기억이 안 나나 보지?”
이후 헤어진 두 사람이 자기 상사에게 보낸 메시지는 비슷했다.
-허는 반드시 영입해야 합니다.
-킴은 최고입니다. 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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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가 어떻게 끝이 났는지 기억이 잘 안 난다.
일단 경기가 끝나고 버스를 타러 가니 팬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엄청난 인파에 당황하긴 했지만, 침착하게 사인을 하고 버스에 돌아왔다.
인터뷰 요청이 많이 들어오긴 했다.
하지만 구단에서 나중에 기회를 만들겠다는 말로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렇게 출발한 버스.
그리고 기절.
“너 코까지 골더라?”
“제가요?”
“어. 방에 가서 허튼짓하지 말고 푹 쉬고, 내일 보자.”
강기호의 말에 멋쩍게 인사를 하고 방으로 들어왔다.
침대에 누워 경기를 떠올렸다.
솔직히, 아직 체감이 잘 안된다.
퍼펙트라.
마지막으로 공을 던지고 나서 터진 함성은 다시 생각해도 소름 돋는다.
신무기가 강력할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그렇게 나도 모르게 눈을 감았는데.
왜 눈을 뜨니 이 두 명이 있는 거지?
“사람 차별하지 말고! 나도 알려줘! 나도 투심!”
“아, 진짜 난 모르는 일이라고!”
“아, 왜!”
여느 때와 같이 방에 와서 땡깡을 부리는 이호민.
보통 여기에 한 명이 추가되지만, 이주학은 어제의 분위기에 아직도 잠식된 상태였다.
“흐흐흐. 나 개쩔었지 않냐? 이거 봐봐. 이 상황에서 침착하게 송구, 캬! 표정 봐라.”
“누가 봐도 울 것 같은 표정인데? 개찌질해보임.”
“솔직히 말해봐. 울었지?”
“뭔 소리야! 딱 봐도 당당하고, 어! 음, 아무튼!”
본인도 표정이 이상했는지, 말을 돌렸다.
그때, 방 밖에서 누군가 벨을 눌렀다.
“어, 형.”
“아, 미안. 내가 방해했나?”
“아니에요. 들어오세요.”
“아니야. 뭐 좀 물어보고 바로 운동하러 갈 거야.”
운동하기엔 너무 이른 시간.
하긴, 허하준의 새 구종을 만드는 데 김동준이 도움을 줬다고 들었다.
그 구종을 써서 퍼펙트게임을 했는데 달아오를 만도 했다.
“그, 태민이랑 같이 만나기로 한 거 기억나?”
“아, 맞다. 죄송해요. 제가 요즘 정신이 없어서.”
“괜찮아. 내일 경기 끝나고 어때?”
“좋죠.”
“그럼 태민이한테 말해놓을게.”
김동준이 사라지고 방 안에 있는 놈들한테 말했다.
“너네, 동준이 형처럼 운동 안 할 거면 꺼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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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외로 이호민과 이주학은 적극적으로 운동했다.
어제 경기로 느끼는 게 좀 있었나?
아무튼 어제 퍼펙트 이후 가뜩이나 좋았던 더그아웃 분위기가 더 끓어오르고 있었다.
“브로. 왼쪽 손목 자리는 놓쳤지만, 오른쪽은 아직 남았지?”
“당연하죠. 먼저 사주는 사람이 임자예요.”
“탐나는걸?”
웰링턴이 그 말을 지켰으면 좋겠지만, 아쉽게도 그 기회는 1회부터 사라졌다.
3번 타자 오기택이 안타로 출루하면서 2사 주자 1루.
마치 강주호가 등장한 사직처럼 대전도 들썩이기 시작했다.
“4번 타자! 황인재! 홈런! 황인재!”
떠들썩한 분위기 속에서 황인재와 눈이 마주쳤다.
딱히 말을 하진 않았다.
고졸 신인으로서 30홈런 고지를 밟은 첫 타자.
황인재.
특히 대전에서 친 홈런만 해도 20개 가까이 됐다.
그만큼 조심스럽게 접근할 수밖에 없었다.
초구는 바깥쪽 낮게.
“볼!”
충분히 방망이를 끌어낼 만한 코스였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사인을 보내고 자세를 잡았다.
-따아악!
“파울!”
공이 중앙에 몰리면서 매서운 타구음이 났지만, 공은 라인을 벗어났다.
이제 코스는 높게.
웰링턴의 특성상 낮은 공은 더 낮게, 높은 공은 더 높게 보이기 때문에 더욱 효과적인 공이었다.
“스트라이크!”
그건 황인재에게도 통했다.
황인재는 공을 지켜봤고, 살짝 눌러서 존 안에 끌어왔다.
이제 볼 카운트 1-2.
빠른 승부냐, 아니면 한 번 돌아가느냐.
결론은 커브였다.
몸쪽에 바짝 붙은 커브가 날아왔고, 황인재가 기다렸다는 듯 방망이를 휘둘렀다.
하지만 중견수 박은성이 거의 제자리에서 잡아내면서 3아웃.
타구를 확인하고 더그아웃으로 들어가는 황인재를 바라봤다.
흠. 근데 아무리 아웃을 당했다곤 해도 반겨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나?
마린스와 팀 분위기가 다르겠거니 하고 급하게 더그아웃에 들어왔다.
1회 공격에 세 타자가 삼자범퇴를 당하면서 이번 이닝의 선두 타자는 나.
빠르게 장비를 벗고 타석으로 향했다.
“내 앞에 밥상 깔아둬라.”
“걱정하지 마세요.”
그렇게 말하는 내 다음 타자는, 강주호였다.
강주호가 복귀한 타선이었지만, 여전히 내 타석은 4번이었다.
강주호가 있는데 4번이라니, 부담스러운 마음에 감독님을 찾아갔지만.
-주호가 먼저 한 얘기야.
라는 말에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이제 그 기대에 보답할 차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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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린스 팬 여러분에겐 많은 의미가 담겨 있는 경기가 연달아 찾아오는군요.]
[그렇죠. 강주호가 타선에 있는데 다른 타자가 4번이라뇨. 의미가 크죠.]
[강주호 선수가 4번을 차지한 이후, 그 누구도 4번의 자리에 이름을 올린 적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오늘, 드디어 그 자리에 새로운 주인이 나타났습니다.]
[재밌게도 양 팀의 4번 타자들이 전부 신인입니다. 황인재와 김수호, 앞으로 한국 프로야구를 이끌어갈 인재들이죠.]
[황인재 선수는 뜬공으로 물러났거든요. 과연 김수호 선수는 어떻게 될지!]
[오늘 에릭 니콜라스 선수가 이를 갈고 나왔다고 합니다.]
[저번에 맞은 백투백 홈런 때문인가요?]
[그렇죠. 팽팽하게 가던 승부가 그 한 방으로 기울었으니까요. 오늘 경기, 참 볼거리가 많습니다.]
[에릭 니콜라스, 초구를 던집니다! 높게 뜬 타구! 아, 외야수들이 걸음을 멈춥니다! 김수호!]
[갔어요.]
[본인의 16번째 홈런으로 마린스의 새로운 4번 타자가 팬들에게 자신이 왔음을 알립니다!]
“밥상을 깔라니까 그냥 들어오네?”
“제가 요리를 잘 못 해서요.”
“아오! 말대꾸는 진짜. 나 때였으면 한 대 쥐어박는 건데.”
홈런을 친 김수호를 대기타석에서 살갑게 받아주는 강주호.
이 장면은 마린스 팬들에게 큰 의미로 다가왔다.
[Today Photos! 왕좌를 물려받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