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약점 -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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챌린저스가 김수호를 피하고 다른 타자들을 상대한다는 사실은 김수호와 강주호만 알고 있었다.
하지만 둘 외에도 나머지 선수들 역시 이미 어느 정도 눈치를 챘다.
그 치욕적인 기억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그나마 그땐 신인이니까, 갑자기 강기호가 빠졌으니까 등의 변명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도 그런 변명을 하기에는 자존심이 상했다.
20살짜리 신인이 무서워 거르면서 본인들과 승부한다고?
“마, 다 와바라.”
그때 치욕을 겪은 채지훈이 박은성과 오준혁을 불렀다.
“니들, 그때 기억하지?”
“예. 당연하죠. 저 그때 밤에 잠도 못 잤어요.”
“하, 저 새끼들은 예전에도 저러더니 어떻게 바뀌질 않냐.”
“은성이. 니는 이번 타석, 무슨 일이 있어도 출루해라. 알긋나?”
“당연하죠.”
“치호한텐 내가 말해둘 테니까 준혁이 니도 출루에 집중해.”
“예? 출루요?”
“그래. 몸에 맞든, 볼넷으로 나가든 어떻게든 세 명 다 출루해서 만루 만들어라. 저 새끼들이 만루에서 수호 거를 수 있나 보자.”
그렇게 시작된 작전에 박은성이 타석에 바짝 서서 들어섰다.
‘갑자기 뭐야.’
챌린저스 포수 추승우가 인상을 썼다.
‘몸쪽 공도 못 치는 놈이 뭐 이리 붙냐.’
박은성의 약점은 몸쪽.
이렇게 붙는다면 본인의 약점만 늘어나는 꼴이었다.
‘오히려 땡큐지.’
몸쪽을 요구한 초구가 박은성 옆구리 바로 옆에 들어갔다.
“볼!”
그러자 박은성이 오히려 더 붙어버렸다.
‘더 붙는다고?’
“이거 너무 붙은 거 아닙니까?”
추승우의 말에 심판이 박은성을 바라봤다.
“타자, 괜찮겠어? 그렇게 붙었다가 맞아도 책임 못 진다.”
“예. 괜찮습니다.”
“뭐, 문제는 없네. 경기하자.”
심판의 말에 추승우는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그래, 몸쪽으로 잡으면 되지. 자, 침착하게 던져봐.’
하지만 방금 박은성을 맞출 뻔한 박민국이 몸쪽을 던지기 꺼려했다.
결국, 여러 번의 사인 끝에 투수가 원하는 대로 바깥쪽에 공을 던졌다.
-따악!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방망이를 내면서 깔끔한 안타로 출루에 성공했다.
그리고 최치호 역시 타석에 서자마자 가까이 붙었다.
‘이 새끼들 뭘 잘못 먹었나? 아니면 몸에 갑옷이라도 둘렀어?’
아무리 선수라도 몸에 맞는 건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는다.
아픔도 아픔이지만, 부상의 위험도 있고, 140km가 넘는 공이 바로 옆을 지나가면 본능적으로 공포를 느끼기 마련.
하지만 마린스 타자들은 갑자기 무슨 공포를 잊는 약이라도 맞은 듯 타석에 붙기 시작했다.
물론 투수 입장에서 맞아봐라 하고 던지면 그만이다.
하지만 투수도 사람이고, 그런 생각을 하기 쉽지 않았다.
결국 최치호가 볼넷으로 출루하면서 추승우가 급하게 마운드로 올라갔다.
하지만 박민국의 제구는 좋아지지 않았고, 가운데 오는 공을 오준혁이 밀어치면서 또다시 안타가 만들어졌다.
2루 주자는 박은성, 분명히 뛸 거로 생각하고 3루를 흘깃 보던 추승우의 눈에 3루 베이스를 밟고 서 있는 박은성이 보였다.
‘왜 안 뛰어!’
당최 이해할 수 없는 상황.
하지만 곧 타석에 들어온 선수를 보자 이해가 됐다.
‘김수호, 어쩔까요?’
추승우가 급하게 벤치를 바라봤다.
무사 만루.
도저히 거를 수 없는 상황.
결국, 벤치에서도 승부를 보라는 사인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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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루에 박은성, 2루에 최치호, 1루에 오준혁.
선배들의 해결방법은 간단했다.
승부를 피한다면 승부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드는 것.
‘이게 되네?’
심지어 오준혁의 안타는 박은성이 충분히 들어올 법한 타구였지만, 애초에 홈까지 뛸 생각조차 없었던 것 같다.
어찌 보면 부담되는 상황이지만, 판을 깔아준다면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볼!”
이틀동안 매 타석 초구는 전부 볼이었다.
하지만 이번 공은 느낌이 달랐다.
피한다기보단, 제구가 안 된 느낌.
“진정해! 괜찮아!”
추승우가 박민국에게 말을 했지만, 투수의 표정은 그리 좋지 못했다.
“볼!”
두 번째 공도 볼이 들어왔다.
완벽한 타격 타이밍에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박민국의 약점은 간단하다.
첫 번째, 많은 이닝을 던질수록 공이 높아진다.
두 번째, 흔들리는 상황에서 제구가 들쑥날쑥해진다.
그리고 3구는 그런 약점이 혼합된 공이 들어왔다.
가운데 높게, 치기 적당하게 들어온 공.
-따아악!
높게 솟은 타구는 한참이 지나서야 외야 관중석에 떨어졌다.
“흐, 쟤네가 왜 너 거른 줄 알겠다.”
“바로 홈런 때려버리네. 무서운 새끼.”
“다 선배님들 덕분에 친 거죠.”
“그건 알아서 다행이네.”
4점 차의 점수.
선발을 생각했을 때, 여유 있는 점수는 아니었다.
그리고 잭 미켈도 똑같은 생각을 했나 보다.
청량한 타격음이 터지고, 공이 우측 담장을 그대로 넘겨버렸다.
“나이스! 잭!”
“그래! 너도 보여줘야지!”
쌓였던 스트레스가 많았는지 평소 하지 않던 빠던까지 선보이며 홈에 들어왔다.
하지만 아직 한 발 더 남았다.
-따아악!
“어, 가냐?”
“어, 어, 어! 와! 미쳤다! 백투백투백?”
채지훈마저 담장을 넘겨버리면서 3타자 연속 홈런.
챌린저스 선발 박민국을 완벽하게 무너트리는 쐐기포였다.
“마! 봤나!?”
“죽입니다! 선배님!”
이후에 이호민이 실점하긴 했지만, 다시 그만큼 더 뽑아내면서 12대5로 완승을 했다.
“캬, 행님. 저노마들 표정 보니까 얹힌 게 싹~ 내려갑디다.”
“보기 좋긴 했어.”
“점마들, 내일도 뒤짓다.”
특히 채지훈이 제일 기분 좋아 보였다.
뜨거운 물을 맞으면서 내일 경기에 관한 얘기를 나눴다.
“내일은 걱정하지 마세요.”
“와?”
“선발이 누군데요.”
“하모. 아, 근데 하준이 몸 좀 괘안나? 요즘 던지는 게 시원찮던데.”
연속 완봉 이후 7이닝 1실점을 두 경기 연속으로 던졌는데 시원찮다는 평가라니.
새삼 허하준의 평가가 대단하긴 했다.
“내일요? 선배님, 긴장하셔야 할 텐데요.”
“어?”
“내일 내야수들 죽어날 겁니다. 진짜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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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인에겐 금기가 있다.
바로 퇴근 이후 연락하는 것.
그건 마린스 단장 오민찬에게도 적용되는 금기였다.
애초에 사장를 제외하면 연락할 간 큰 사람도 없었지만.
“흐흥~ 마린스 김수호~”
그렇게 오늘도 승리의 멜로디를 흥얼거리며 퇴근 중이었다.
-지이잉
흥난 기분을 단번에 식혀버리는 진동음.
하지만 이내 떠오른 이름을 보고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아, 단장님.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아이고, 아니에요. 김수호 선수는 언제든지 전화해도 상관없습니다. 그래서 무슨 일로?”
-혹시 어제 있었던 일 아시나요?
“아, 그 김수호 선수 피해서 하는 거요? 오늘 홈런으로 시원하게 깨부쉈지 않았습니까?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제가 오늘 경기 전에 생각난 게 있어서요.
김수호의 얘기를 들은 오민찬이 고민 끝에 말했다.
“괜찮아 보이네요. 내일도 안 그럴 거라는 보장도 없고. 오케이. 좋습니다. 나머진 제가 처리할 테니 편히 쉬세요.”
-감사합니다.
전화를 끊고 슬쩍 웃었다.
“이런 면도 있었네?”
마냥 순둥이인 줄 알았는데 이런 생각을 하다니.
아무튼, 무리한 부탁도 아니고, 별로 문제 될 건 없었다.
도리어 지금까지 이런 기사가 왜 안 나왔는지 의문일 정도.
“어. 서기자, 난데. 기사 하나만 쓰자.”
그렇게 김수호의 전화 한 통으로 아닌 밤중에 기사 하나가 올라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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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마린스 팬들에겐 큰 문제가 하나 생겼다.
바로 마린스에 관련된 걸 보느라 여가 시간이 부족하다는 것.
특히 승리한 날, 거기에 김수호나 허하준이 활약해서 이긴 날에는 더더욱 부족했다.
챌린저스와 2차전이 끝난 수요일 밤 역시 마찬가지.
어제와 다르게 화끈한 타격을 보이면서 승리한 만큼 살필 기사가 많았다.
“후, 슬슬 다 봤나?”
자정.
슬슬 자야 할 시간이 되자 마린스 팬 박민수가 마지막으로 인터넷을 새로고침 했다.
그러자 새로운 기사 하나가 떠있었다.
[신인 최소경기 15홈런 고지, 앞으로 치는 홈런마다 신기록이다!]
누구를 뜻하는지 제목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마린스 팬이라면 도저히 안 눌러보곤 못 배길 제목.
뭐에 홀린 듯 기사를 클릭했다.
-올 한해가 아직 끝나지 않았지만, 2032년의 프로 야구를 요약해보자면 전반기의 황인재, 후반기의 김수호라고 할 만하다.
같은 고등학교 출신의 두 선수는 신인 선수로서 나란히 올림픽에 진출해 금메달을 따는 등 빛나는 한 해를 보내고 있다.
더욱 기대되는 사실은 올해가 고작 프로 데뷔 1년 차라는 점이다.
시작은 황인재였다.
시범경기에서 4할이 넘는 타율로 피닉스 팬들의 기대를 받은 황인재는 결국 최소경기 20홈런 기록을 54경기로 경신했다.(종전 기록 : 부산 마린스 강주호 – 65경기)
이후 약간 주춤하긴 했지만, 전반기를 24홈런으로 마무리하며 올림픽 국가대표로서 선발되는 영예를 누렸다.
반면 김수호의 시작은 황인재에 비해 좋지 않았다.
2군에서 시즌을 시작한 김수호는 운명처럼 포수 마스크를 쓰게 된다.
1군으로 올라온 건 7월.
돌핀스전에서 강주호의 만화 같은 대타 동점 만루홈런이 터졌을 때 포수로 데뷔했다.
그리고 그 경기, 첫 타석에서 연장 끝내기 홈런을 치면서 세대교체를 선언했다.
그 이후 대단한 활약을 펼치며 김목근 감독의 눈에 들어 올림픽 예비 포수로 발탁, 양준의 부상 이후 주전으로 맹활약하며 올림픽 MVP까지 차지한다.
이후 한국 복귀 후 자신의 활약이 절대 우연이 아니었음을 증명하며 황인재가 세웠던 최소경기 20홈런 기록에 도전하고 있다.
데뷔 후 30경기 만에 15개의 홈런을 쳤고, 올림픽을 포함하면 벌써 20개가 넘는 홈런을 쳤다.
최근 기세를 생각하면 기록 경신은 사실상 시간문제.
과연 김수호가 자신의 친구인 황인재의 기록을 몇 경기 단축할지 귀추가 주목된다.
서상길 기자.
“오, 그러네?”
마린스 구단주뿐만 아니라 팬들도 피닉스가 황인재를 지명하고, 활약하면서 쓰린 속을 달래던 게 고작 몇 달 전이였다.
하지만 이제 김수호가 있으니 괜찮았다.
심지어 그 황인재의 기록을 깬다고?
“보자, 어제 홈런 하나 쳤고, 그저께 3볼넷?”
당시엔 좋게 느껴졌던 볼넷이 어쩐지 그 기사를 보고 나니 그리 유쾌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팬은 박민수뿐만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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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하준은 그냥 에이스가 아니다.
상대 에이스를 잡아내는 에이스 오브 에이스.
1득점만으로 승리를 가져다줄 수 있는 선수였다.
올림픽 전에도 허하준의 경기라면 사람이 들이찼던 사직이지만, 후반기 이후 허하준의 등판일엔 연일 매진이었다.
그건 목요일인 이번 경기도 마찬가지.
물론 허하준만 보고 온 게 아니었다.
팬들이 입은 유니폼 중에 가장 많은 이름을 차지하는 건 바로 김수호와 허하준, 그리고 강주호였다.
특히 어린이들이 유니폼을 입고 있는 경우, 100중 99는 김수호였다.
한창 관중들이 들어서는 사이, 경기가 시작했다.
1회 초는 챌린저스의 공격.
-따악
빗맞은 타구음이 들리고 유격수 이주학이 천천히 잡아서 1루로 송구.
“아웃!”
“바로 그기지! 깔끔하니 좋네!”
“점마도 수비 좀 한다 아이가.”
“밉상이보단 낫제.”
2번 타자는 삼진.
“나이스!”
“오늘 삼진 20개 가즈아!”
3번 타자마저 채지훈이 땅볼로 잡아내면서 무난한 시작을 거뒀다.
“흐, 안정감 쥑이네!”
그리고 1회 말 마린스의 공격이 시작되자 팬들이 하나둘 일어서기 시작했다.
응원 단장의 선창에 맞춰 라인업을 부르는 와중 터진 박은성의 안타.
그리고 선취점을 위한 최치호의 번트가 이어졌다.
1사 주자 2루.
오준혁의 플라이에 아쉬움이 이어졌지만, 이내 타석에 들어선 김수호를 보자 분위기가 뜨겁게 끓어올랐다.
이제는 익숙해진 4번 타자, 김수호.
초구는 볼.
“역시 수호가 공도 잘 본다. 캬.”
2구 역시 볼이 나왔다.
“투수 쫄았네.”
아직까진 분위기가 평화로웠다.
하지만 3구마저 볼이 되고, 결국 스트레이트 볼넷으로 1루에 나가자, 곧 참지 못한 팬들이 투수를 향해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마! 새끼가! 승부해라 승부!”
“쫄았나! 느그가 프로가!”
“그럴 거면 그냥 때리치라!”
‘갑자기 왜 저래?’
며칠 전에 김수호가 볼넷으로 나가면 박수 치던 사람들이 이젠 욕까지 하면서 뭐라 하고 있다.
솔직히 추승우 역시 투수에게 스트라이크 사인을 내고 싶었다.
‘시발. 아무리 김수호라도 맨날 홈런 치겠냐고.’
하지만 벤치의 사인은 거르라는 것뿐.
반면 마린스 타선에서 어제 좋은 모습을 보여준 건 김수호뿐만이 아니었다.
잭 미켈의 좌중간을 가르는 2루타에 김수호가 홈까지 파고들면서 2대0.
겨우 이닝이 끝나고 김민주가 추승우를 불렀다.
“이제 그딴 작전 때려치우고 승부해.”
“그래도....”
“내가 책임질 테니까 해 그냥.”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