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약점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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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직장인들에겐 최악의 날이지만, 프로야구 선수들에겐 한 주간 쌓였던 피로를 정리하는 시간.
시즌이 끝나갈수록 훈련보다 휴식을 권장하는 구단이 많았다.
대부분 구단이 그러는 만큼 당연한 일이었다.
결국 선수도 사람이고, 지치기 마련.
한 시즌에 144경기를 치러야 하는 야구에 쉬는 날마저 강제로 훈련을 시킨다면 그건 오히려 역효과를 낳을 뿐이다.
그런 만큼 점심시간을 이용해 구장 안 카페를 찾아온 마린스 팬들도 이 시간에 선수를 만날 거라는 기대는 딱히 하지 않았다.
그때 카페 안에서 밖을 보던 한 남자가 일행에게 말을 걸었다.
“야, 김수호 아니냐?”
“월요일에 여길 왜 와.”
“아니, 진짠데?”
친구의 말에 고개를 든 남자가 김수호의 얼굴을 확인하고 급하게 무언갈 챙겼다.
“야, 어디가?”
“사인받아야지.”
마린스 팬 중 90%는 받았다는 김수호의 사인.
하지만 사내는 그 90%가 아니었다.
오늘 혹시나 해 챙겨온 야구공과 펜을 들고 급하게 김수호에게 달려갔다.
“저, 김수호 선수.”
‘와, 씨. 얼굴 봐.’
순간 김수호의 얼굴을 본 팬은 깜짝 놀랐다.
초췌한 얼굴이었지만 생각보다 큰 덩치와 잘생긴 외모 덕에 추해 보이지 않았다.
“사인 좀 부탁드려요.”
“아, 네. 주세요.”
“감사합니다.”
그렇게 사진까지 찍으며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남자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훈련하러 나오신 거예요? 좀 쉬셔야 하는 거 아닌가···.”
단연 마린스에서 가장 중요한 선수라 하면 누가 뭐라 해도 김수호였다.
말하고 나서 오지랖인 것 같아 아차 싶었지만, 그만큼 걱정이 돼서 한 말이었다.
하지만 김수호는 그저 웃으면서 대답했다.
“우승해야죠.”
“아....”
그렇게 김수호가 떠나고 여운이 남은 남자가 중얼거렸다.
“시발, 존나 멋있네.”
마린스 팬들이 근 몇 년간 가장 행복한 시즌을 보내는 건 맞지만 지금 상황에 우승을 바라는 팬들은 몇 없었다.
김수호가 전에 우승이 목표라 했던 말도 그저 립서비스라고 생각한 팬도 대다수.
그건 사내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개인 팬 한 명을 늘린 김수호가 향한 곳은 훈련장.
그곳엔 김수호보다 먼저 와 있던 사람이 있었다.
“일찍 왔네?”
바로 허하준.
쉬는 날 굳이 따로 만난 건 아직 완벽하지 않은 구종을 연습하기 위해서였다.
“바로 시작할까요?”
“좋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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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부산에서 쉬는 날을 반납하고 훈련 하는 사람은 둘 뿐만이 아니었다.
부산의 한 호텔.
시즌이 거의 끝나가는 이 시기에 아직 순위가 확정된 팀은 거의 없었다.
3위인 수원 나이트와 10위인 서울 호올스를 제외하곤 그 누구도 순위를 예측할 수 없는 시즌.
그건 4위 서울 챌린저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3위 나이트와의 격차는 따라갈 수 없었지만, 아래에서 치고 올라오는 스타즈와 울프즈를 무시하기엔 적은 승차였다.
특히 4위의 어드벤티지를 생각했을 때, 반드시 지켜야 하는 챌린저스였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마린스 원정은 무조건 잡아야 하는 경기.
그걸 위해 챌린저스 분석팀에서 준비한 게 있었다.
“자, 지금부터 마린스 공략법에 관해 설명하겠습니다.”
챌린저스의 자랑, 분석팀장이 선수단을 모아놓고 재생한 장면엔 마린스와 에이스의 3차전 8회 초 상황이 나왔다.
2사 1, 2루에 타자는 김수호.
“지금 한국에서 가장 핫한 타자를 모르시는 분은 없죠?”
당시 양준이 김수호를 거르다시피 해서 만루를 채우고 다음 타자인 잭 미켈과 승부를 했다.
결과는 잭 미켈의 아웃.
“그럼 매 타석에 볼넷으로 내보내라는 말인가요?”
“극단적으로 말하면, 예입니다.”
그 말에 선수단 사이에 약간의 소란이 일었다.
“다들 주목!”
주장 김민주의 말에 분석팀장이 살짝 고개를 숙이고 말을 이었다.
“사실 이 작전은 문제가 많은 작전입니다. 뒤에 잘 치는 타자가 있으면 사용하기 어렵죠. 하지만 지금 마린스의 잭 미켈은 충분히 붙어볼 만한 선수입니다.”
그 말에 맞춰 잭 미켈의 성적이 화면에 나왔다.
“타율 3할 1푼 1리와 ops 0.811. 이렇게 보면 좋은 타자처럼 보이지만, 후반기 성적은 이렇습니다. 2할 3푼 9리의 타율과 ops 0.659. 지난해에도, 지지난해에도 역시 후반기에 성적이 급감하는 모습을 보였었죠.”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선수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처럼 김수호의 기세가 뜨거운 건 사실입니다만, 굳이 상대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점, 모두 기억해두시길 바랍니다.”
그렇게 마린스와 챌린저스의 시리즈 첫 경기가 시작했다.
[김수호 선수, 세 타석 연속 볼넷을 얻어냅니다!]
[김수호 선수의 표정이 묘하죠? 이 정도면 선수도 느낄 겁니다. 볼넷으로 나갔다기보단 챌린저스에서 내보냈다는 게 맞죠.]
[아, 그렇습니까?]
[이번 경기, 챌린저스에서 김수호를 상대 안 하기로 작정하고 나온 것 같네요.]
[하지만 볼넷으로 내보내는 게 무조건 좋은 방법은 아니지 않나요?]
[지금 이 상황을 비유하자면 종종 좌측이나 우측 방면을 완전히 비워두는 극단적인 시프트가 종종 나오잖아요?]
[그렇죠.]
[그럴 때 팬분들이 그쪽으로 번트를 대면 되는 거 아니냐라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있어요. 근데 구단에서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다만 그 정도의 타자가 단타를 치는 게 타석에 기회를 주는 것보다 낫다 이렇게 결론을 낸 거거든요. 그래서 타자들도 시프트가 있는 상황에서도 타격하는 거고요.]
[김수호 선수도 비슷한 느낌이라는 거죠?]
[예. 김수호 선수가 서른 경기에서 홈런을 총 14개를 때렸거든요? 그중에서 승부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홈런이 무려 10개입니다. 거기에 왼쪽 담장을 넘긴 홈런이 4개, 중앙이 3개, 우측이 7개로 좌우 상관없이 골고루 때렸고요.]
[어마어마하네요.]
[심지어 장타율이 아직도 0.7이 넘습니다. 이런 타자와 상대하는 것보단 차라리 볼넷으로 내보내는 게 낫다는 판단인 거죠.]
[하지만 매 타석 김수호 선수를 내보내기엔 챌린저스도 부담을 느낄 텐데요?]
[그렇죠. 그래서 그동안 다른 팀에서 이 방법을 사용 안 한 거죠. 하지만 지금, 딱 한 가지가 다릅니다.]
[아, 강주호 선수가 없군요.]
[예. 물론 잭 미켈도 좋은 선수지만, 승부처에서 약한 경향이 있습니다. 거기에 김수호가 포수치곤 빠르긴 하지만, 도루하는 선수는 아니거든요. 아, 지금도 잭 미켈 선수가 급해요.]
[초구, 강하게 휘둘렀지만 유격수 잡아서 2루로, 아웃! 강하게 1루로, 아웃입니다! 잭 미켈의 병살타! 챌린저스의 작전이 완벽하게 성공합니다!]
[김수호 선수가 아무리 잘하고 있다곤 하지만 아직 어린 선수입니다. 계속 이런 상황이 나오면 언제 타격감이 떨어질지 모릅니다.]
[마린스로선 강주호의 빈자리가 크게 느껴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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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타석 1타수 1안타 1타점.
결과만 놓고 보면 괜찮은 활약을 한 것처럼 보이지만, 경기 내용은 영 아니었다.
안타마저 경기 후반에 5점 뒤지고 있을 때 나온 거라 큰 의미가 없었다.
경기에서 진 것도 진 거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는 게 문제였다.
상대가 작정하고 볼만 던지는데 거기에 휘두를 순 없으니까.
거기에 나만 영향을 받은 게 아니었다.
5번으로 나선 잭 미켈은 4타수 무안타 2병살로 최악의 경기를 치렀다.
오죽하면 그리 대화를 안 했던 미켈이 다가와서 다 본인 때문이라며 나한테 미안하다고 했을까.
문제는 근본적인 원인을 해결할 방법이 없다는 거였다.
상대한테 왜 볼만 던지냐고 뭐라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오늘 경기가 끝나고 심각성을 느낀 감독님과 코치진, 심지어 분석팀장까지 와서 얘기를 해봤다.
가장 좋은 건 강주호가 복귀하는 거였고, 강주호 역시 먼저 나서서 복귀하겠다고 했지만 아직 몸상태가 정상이 아니었다.
심지어 내 타순을 1번으로 옮기자는 의견이 나왔지만, 기각.
결국 고민 끝에 타선의 변동 없이 경기가 시작됐다.
잭 미켈을 믿겠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고작 한 경기만으로 판단하기엔 이르긴 했다.
아무튼 경기 시간이 다가왔고, 오늘 경기 전 짧은 행사가 있었다.
바로 8월 리그 월간 MVP 시상식.
수상자는 나였다.
8월에 경기가 얼마 없긴 했지만, 그 상대가 허하준이라는 걸 생각하면 의미가 깊은 상이었다.
“... 김수호 선수는 신인 최소경기 10홈런이라는 엄청난 대기록을 세우기도 하고···.”
수상 전 짧게 소개를 듣고 있는데 무언가 내 머리를 훅하고 지나갔다.
‘이거 잘하면 되겠는데?’
의외의 곳에서 힌트를 얻은 해법.
이게 될까 싶었지만, 시도해볼 법했다.
하지만 당장 쓸 방법은 아니었고, 그렇게 경기가 시작됐다.
챌린저스의 선발 투수는 박민국.
이전에 내가 홈런을 쳤던 투수이자 챌린저스의 4선발을 맡은 투수.
우리 선발은 이호민이었다.
이전에 불펜으로 등판해 김민주를 포함한 타선을 무실점으로 막았던 기억이 있었다.
“와씨. 나 아직도 손 떨려.”
“너무 긴장한 거 아니야?”
이해는 됐다.
이번 시즌 이호민의 사실상 마지막 선발 등판.
로테이션상, 다음 주 화요일 선발이었지만 이제 중간중간 비는 날이 생긴다.
그래서 허하준, 웰링턴, 하스, 김호기가 선발, 이호민은 오늘 경기 이후로 불펜으로 보직을 변경한다.
우리로서도 마지막 승부수를 던진 거였다.
김동준이 합류했어도 이호민 정도면 1이닝을 책임지는 불펜으로 괜찮았고, 네 명의 선발진은 나름 탄탄한 편이니까.
물론 중간에 대체 선발로 투입될 수도 있었다.
아무튼 일단 마지막 선발 경기인 만큼 긴장되는 건 어쩔 수 없을 거다.
그 부담을 덜어주는 게 내 역할이지만, 내 마음과 다르게 좋은 공은 들어오지 않았다.
1회 말, 첫 타석 2사 주자 3루.
“볼!”
노골적으로 바깥쪽에 뺀 초구.
휘두르자니 좋은 타구가 나올 수 없는 위치였고, 그렇다고 가만히 보내자니 어제와 비슷한 꼴이 될 게 뻔했다.
하지만 2구 역시 도저히 칠 수 없을 만큼 빠져서 들어왔다.
결국 또다시 볼넷.
대기타석에 있는 잭 미켈의 얼굴을 보니 눈에 띄게 굳어있었다.
부디 미켈이 한 방을 쳐서 복수하길 바랐지만, 결과는 삼진.
안 풀린다, 안 풀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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챌린저스에 국대가 여러 명 있긴 했지만, 친분이 있는 건 김민주뿐이었다.
“저 다음 타석부터 방망이 안 들고 나가려고요.”
“다 네가 잘해서 그런거니까 참아.”
“그래도 칠 만한 공은 던져줘야죠.”
“볼!”
이호민이 긴장했는지, 초구부터 어처구니없는 볼이 들어왔다.
“쟤는 이걸 치라고 던진 거냐?”
“선배님이 제 마음을 이해 못하시는 것 같아서 제가 요구했어요.”
“난 출루하면 좋지. 왜, 이번 타석에 그냥 걸어갈까?”
“선배님도 방망이 두고 오면 볼넷으로 내보내 드릴게요.”
물론 서로 그럴 일이 없다는 건 당연히 알고 있다.
초구가 볼이 되긴 했지만, 이호민은 씩씩하게 다음 공을 존에 꽂아 넣었다.
-따악!
힘 대 힘으로 맞붙은 싸움.
한 치의 망설임 없이 김민주의 방망이가 나왔고, 곧 승자가 결정됐다.
“아웃!”
우익수 잭 미켈이 가볍게 잡으면서 아웃.
이후 2루타 하나를 허용했지만, 나머지 타자를 잡아내면서 2회를 마쳤다.
이번 이닝에 나갈 일은 없을 것 같아 장비를 조금 풀고 의자에 기댔다.
“후우.”
“답답하냐?”
“아, 뭐. 조금요.”
“그래도 네가 잘하니까 그런 거지.”
“그쵸.”
“나 때도 그랬어. 저기 박은성이랑 채지훈, 오준혁까지. 지금은 그나마 낫지, 어후. 4년 전에 출루율 기록 경신했다니까?”
나도 알고 있다.
강기호 부상 이후 타선에 구멍이 생기면서 강주호가 집중적으로 마크당한 사건.
“그래도 그때 선배들 성적이 좋아지지 않았나요?”
“그건 맞지.”
방금 강주호가 말한 세 명과 FA로 온 최치호, 그리고 잭 미켈의 합류 이후 강주호에 대한 집중 견제가 사라졌다.
“조급해하지 말고 조금만 기다려.”
“예?”
“네 선배들도 그렇게 호락호락한 놈들은 아냐.”
강주호의 말처럼 자신들의 흑역사나 다름없는 일이 또 일어나려고 하고 있었다.
2회 말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3회 말 공격.
선두타자로 나선 이주학이 느껴지는 시선에 몸을 떨었다.
‘와, 출루 못하면 죽겠는데?’
특히 제 동기들처럼 순둥이나 다름없던 박은성의 눈빛이 제일 무서웠다.
“우악!”
다행인지, 불행인지 팔뚝에 공을 맞으면서 출루에는 성공했다.
이제 타순이 한 바퀴 돌아 1번 타자 박은성이 타석에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