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조언의 결과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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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반부터 분위기를 완벽하게 가져온 경기.
-따악!
높이 뜬 공을 박은성이 펜스 앞에서 잡아내면서 5회 말이 끝났다.
하지만 더그아웃에 들어오는 이호민의 얼굴엔 약간의 아쉬움이 묻어나왔다.
하긴, 잘 던지다가 홈런 맞은 게 아쉽긴 하겠지.
‘공 개수는 괜찮은데, 뜨는 게 문제야.’
4회부터 공이 점점 뜨기 시작하더니, 결국 5회, 4번 타자 김효준한테 홈런을 맞았다.
5번 타자는 다행히 뜬공으로 끝났지만, 조금만 제대로 맞았다면 홈런이 됐을 법한 타구였다.
공이 뜬다는 건 결국 힘이 빠진다는 얘기.
‘6회에 나올 수 있으려나?’
이호민은 오늘 경기 5회까지 3실점하면서 기세가 괜찮았다.
그리고 우리 투수 중에 6회에 올릴 마땅한 투수가 없는 것도 사실이다.
6회를 이호민으로 갈 것이냐, 아니면 새로운 투수를 낼 것이냐.
감독님의 선택은 나를 부르는 거였다.
“호민이 다음 이닝에도 괜찮겠니?”
“예. 아직 공에 힘이 좋습니다.”
1회 150km가 넘던 구속도 140km 후반이 찍힐 정도로 줄었다.
공도 슬슬 뜨긴 했고.
하지만 미트에 들어오는 공의 힘은 아직 괜찮았다.
잠시 고민하시던 감독님이 고개를 끄덕이셨다.
“좋아. 네가 공 받아본 포수니까 제일 잘 알겠지. 1실점까진 오케이니까 마음대로 해봐.”
“감사합니다.”
감독님한테 허락받고 곧장 이호민을 찾아갔다.
“너 6회에도 던진다.”
“정말?”
내심 기대 중이었는지 내 말에 화색 했다.
“6회는 볼 배합 완전 다르게 갈 거야.”
설명을 들은 이호민의 표정이 묘했다.
“이게 될까?”
“어. 걱정하지마.”
“오케이. 너만 믿는다.”
6회 초 공격에선 별다른 소득 없이 끝났다.
장비를 차고 자리에 앉자 우오준이 타석에 들어섰다.
“살살 부탁드려요.”
“꺼져. 내 성적 안 보이냐?”
전광판을 보자 우오준의 사진 옆에 삼진과 뜬공이 각각 하나씩 쓰여있었다.
“이왕 인심 쓰는 김에 후배한테 하나만 더 써주시죠. 이번 이닝만 넘기면 첫 퀄리티 스타튼데.”
“넌 내 후배를 거의 호구로 만들어놓고 뭔 헛소리야.”
“저 안타 2개밖에 안쳤는데요?”
“홈런은 뭐, 안타 아니냐?”
나만 홈런을 친 것도 아닌데 좀 억울했다.
아무튼 우오준 역시 언제든지 한방이 있는 타자.
그런 타자에게 이번 이닝의 볼 배합은 도박이었다.
볼 배합은 간단했다.
공이 높게 뜨면 차라리 높은 공으로 승부하자는 발상에서 나온 볼 배합.
물론 밋밋하게 들어가면 그대로 장타로 연결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아직 미트에서 느껴지는 힘은 괜찮았다.
“볼!” “스트라이크!” “파울!”
우오준이 낮게 들어간 2구를 흘려보내고 높은 3구에 손을 대자 다음 공에 대한 확신이 섰다.
사인을 보내자 이호민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괜찮아. 한 번 보여주자.’
4구는 한 방을 노리는 타자에게 최고의 유인구, 몸쪽에 높은 빠른 공.
하지만 약간이라도 몰리면 오히려 최고의 찬스를 만들어 주는 꼴이었다.
반면 이호민이 이 공을 던질 수 있다면 오히려 분위기를 완전히 흐려놓을 기회.
회심의 4구가 날아오고, 방망이가 기다렸다는 듯이 돌아갔다.
-퍽!
“스트라이크 아웃!”
‘그렇지!’
미트에 꽂히는 감각에 저도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건 이호민도 마찬가지.
이 그라운드에서 유일하게 좋아하지 못하는 우오준이 아쉬워하면서 쉽게 타석을 떠나지 못했다.
이후 볼넷을 하나 내주긴 했지만, 결국 이호민 스스로 이닝을 마무리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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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훈 감독은 경기 전에 투수코치에게 들었던 말을 고민하고 있었다.
‘고작 몇 번 던진 공을 믿고 올리자고?’
6회는 이호민이 잘 막아냈지만, 문제는 7회였다.
7회, 1번부터 시작하는 돌핀스의 공격.
이규영과 박광민은 좌타자기 때문에 박상훈을 내면 된다.
무난하게 잡아낸다 치면 아웃카운트 하나가 남는다.
그 자리에 투수코치는 김동준을 내보내 보자고 말했다.
‘말도 안 되긴 하는데···.’
어쩐지 느껴지는 강렬한 데자뷔에 한 선수의 얼굴이 떠올랐다.
‘김수호.’
충격적인 김수호의 데뷔전.
그때도 과감한 결단을 내렸기에 지금의 김수호가 있을 수 있었다.
‘동준이 공도 수호가 만졌다지?’
고민은 계속됐고, 결국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7회 말이 시작됐다.
박상훈이 마운드에 오르고 이규영을 상대했다.
“볼!”
결과는 볼넷.
다행히 박광민은 잡아내면서 1사 주자 1루.
이제 결단을 내려야 할 시간이 왔다.
돌핀스의 3번 타자 한상욱은 좌투수 킬러로 악명 높은 선수.
박상훈으로 끌고 가는 건 너무 위험했다.
차라리 정태석을 조금 일찍 내보내는 것도 생각했지만, 이번 주에 남은 경기가 많았다.
“동준이 어때.”
그 말에 투수코치가 곧바로 대답했다.
“그 공을 마운드에서 던질 수만 있으면 충분히 통합니다.”
“... 준비시켜.”
차마 못 던지면? 이라는 말은 하지 못했다.
이번 투수 교체는 이정훈 감독이 직접 올라갔다.
“상훈아, 고생했다.”
“예.”
자신의 임무를 반밖에 성공 못한 박상훈이 아쉬워하면서 내려가고 불펜에서 김동준이 뛰어나왔다.
“누구야?”
“김동준? 신인인가?”
“오늘 1군 첫 등판이라는데?”
“첫 등판? 이 상황에? 감독이 미쳤나?”
관중석에서도.
[아, 지금 김동준 선수가 마운드에 올라왔습니다.]
[예. 의외의 선택이네요. 전 백기수 선수나 정태석 선수를 좀 일찍 올리지 않을까 생각했거든요.]
[1군 기록이 없는 선수입니다. 하지만 이런 중요한 상황에 올렸다는 건 분명 숨겨진 한 수가 있다는 거죠.]
[확실히 덩치는 좋습니다. 과연 어떤 모습을 보여줄까요?]
경기를 중계하던 해설진도.
ㄴ 감독 미침? 갑자기 2군 4점대 선수를 왜 올려?
ㄴ 와 다 이긴 경기 그냥 갖다 버리네.
ㄴ 대체 뭔 생각이냐?
ㄴ 마린스 불펜 꼬라지 보면 이해는 되는데, 아무리 그래도 첫 경긴데 너무한 거 아님?
이 경기를 보고 있던 팬들도 전부 의아해하는 등판.
어쩌면 자신이 젊은 투수를 사지로 내몬 게 아닐까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내린 결정에 미련을 두지 않기로 했다.
“홈런 맞아도 되니까 후회 없이 던지고 와.”
“옙!”
씩씩한 목소리에 만족하고 고개를 돌려 김수호를 바라봤다.
“볼 배합은···. 수호, 네 알아서 하고.”
‘딱히 할 말이 없네.’
새삼 김수호의 존재가 얼마나 힘이 되는지 깨달은 이정훈 감독이 김수호의 어깨를 두어 번 치고 내려갔다.
이제 마운드에는 배터리만 남았다.
“사인은 다 알죠?”
“당연하지.”
“아까 삼진 3개로 잡자는 건 기억나요?”
“...그것도 알지.”
“오케이. 그럼 한 번 보여주죠.”
“수호야.”
“네?”
“넌 안 떨려? 이런 상황에서 투수가 난데?”
“음. 아니죠. 투수가 형이라서 안 떨리는 거예요.”
“어?”
“이제 가봐야 해요. 파이팅.”
미트를 맞대고 김수호가 자리로 돌아왔다.
몸을 풀기 위한 연습 투구가 시작됐고, 그 모습을 타석에서 대기 중인 한상욱이 지켜봤다.
‘신인이라고? 별다를 건 없는데?’
벤치에서도 의아해하면서 알려준 정보를 떠올렸다.
끽해야 140km 중반의 포심과 밋밋한 변화구 몇 개.
‘이래야 마린스지.’
최근 기세가 좋다 좋다 그러더니 제 본분을 잊고 깝치는 게 짜증 났는데, 이제야 마음에 들었다.
연습 투구가 끝나고 타석에 들어섰다.
[7회 말 1사 주자 1루, 하지만 1루 주자는 이규영입니다! 장타에 홈까지 들어올 수 있어요! 타석엔 한상욱, 점수는 2점 차!]
[김동준 선수, 떨지 말고 자신의 공을 던져야 합니다.]
‘후, 떨지 말자.’
김동준 역시 갑작스러운 등판에 어안이 벙벙한 건 마찬가지.
자신이 생각했던 데뷔와 너무 달랐다.
5점 이상 차이 나는 점수에 8회 즈음 올라오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2점 차 접전이라니.
울렁거리는 속을 부여잡고 김수호를 바라봤다.
괜찮다는 듯 미트를 두어 번 두드리고 사인을 보내는 모습에 속이 조금 편해졌다.
‘넌 떨리지도 않냐?’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듣고 든 생각은 하나.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다.
마음을 다잡은 뒤 김수호의 손가락을 쳐다봤다.
초구 사인은 바깥쪽 포심.
‘힘 빼자.’
그렇게 던진 초구.
분명 힘을 뺐다고 생각했는데, 도저히 아까 그 느낌이 안 났다.
하지만 공은 이미 던졌고, 곧 살벌한 타구음이 들렸다.
-따악!
“파울!”
다행히 파울이 되긴 했지만 안심하기엔 일렀다.
다시 한번 힘을 뺀 상태로 포심.
-따악!
“파울!”
이번에도 아까 그 공을 던질 순 없었지만, 공에 실린 힘으로 방망이를 이겨냈다.
한상욱 역시 방망이가 밀리는 걸 보고 잠깐 타석에서 나와 전광판을 바라봤다.
‘뭐야 이거.’
분명 전광판에 찍힌 구속은 145km.
하지만 체감되는 건 훨씬 빨랐다.
거기에 정확하게 쳤다고 생각했는데 방망이가 밀렸다.
‘재밌네?’
만만히 보던 생각은 잠시 접어두고 진지하게 김동준을 바라봤다.
자고로 투수란 이런 모습이 있어야 했다.
힘과 힘으로 맞붙는, 그런 모습.
‘덩칫값 하네.’
승부욕이 끓어오른다.
하지만 이게 전부라면, 저 투수는 자신을 이길 수 없다.
사인을 교환한 김동준이 다시 공을 던졌다.
‘몸쪽!’
몸쪽에 오는 포심.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코스의 궤적을 읽은 한상욱이 방망이를 돌렸지만, 원하는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빠각!
‘빠각?’
부러진 배트에 완전히 힘이 죽은 공이 초라하게 유격수를 향해 굴러갔다.
이주학이 공을 잡고 최치호에게, 최치호가 다시 1루로.
뒤늦게 뛰어봤지만, 1루에서 아웃.
돌핀스에겐 최악인 결과가, 마린스에겐 최상의 결과가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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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민 시즌 첫 QS! 돌핀스를 또 잡아낸 마린스! 부산 마린스 6 : 4 창원 돌핀스]
[김수호의 4번 타자 데뷔와 뉴페이스의 등장! 마린스의 세대교체는 진행 중!]
[2/3이닝 무실점 김동준, ‘김수호의 조언에 새 구종을 얻었다.’며 고마움 전해]
ㄴ 김수호 : 마린스 불펜이 좆 같아서 새로운 투수 데려다 구종 추가시킴 ㅅㄱ.
ㄴ ㅋㅋㅋㅋㅋ 이젠 불펜까지 만드네.
ㄴ 아니 시발 이게 말이 되냐고.
ㄴ 김수호를 이해하려고 하지 마라. 걍 신임.
[운명의 3연전, 원년 팀 대구 에이스 VS 부산 마린스.]
ㄴ 이번 3연전 위닝 따면 7등이다!
ㄴ 드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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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준의 깜짝 등판은 마린스 코치, 선수들도 놀란 일이었다.
심지어 한상욱을 상대로 방망이를 부러트리고, 병살타를 만들어내다니.
“너 이번에 뭔 짓 한 거냐?”
“별거 안 했어요.”
대구로 가는 길, 옆에 앉은 강기호의 말에 김수호가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그냥 딱 한마디 한 건데 저도 이런 결과가 나올 줄은 몰랐죠.”
‘그건 네가 제일 잘하는 거 아니냐?’
아무튼 혼낼 일은 아니니 강기호는 그렇게 넘어갔다.
하지만 선수들은 아니었다.
“진짜? 그냥 수호가 시키는 대로 하니까 된 거야?”
“예예.”
김동준의 말에 투수들이 되물었다.
“뭐라고 했는데.”
“그냥, 힘 빼라는 말 정도···?”
그렇게 말하고 김동준이 투수들의 눈치를 봤다.
‘이 새끼도?’
‘설마?’
‘김수호과?’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김수호 같은 괴물은 이미 투수 버전으로 존재한다.
버스 맨 앞자리에서 눈을 감고 있는 괴물.
허하준.
그거에 비하면 김동준은.
‘귀엽지.’
‘암. 이정도야, 뭐.’
‘그래도 한 번 물어나 볼까?’
“다 자리에 앉아! 무슨 애들이냐! 이런 말까지 하게 만들고!”
“넵!”
투수코치의 호통에 다들 자리에 돌아갔다.
주변을 둘러싼 투수들이 돌아가자 겨우 한숨을 돌렸는데.
“동준아.”
“네, 넵?”
버스에서 내리자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김동준이 긴장했다.
언젠가 대화를 꼭 해보고 싶었던 사람.
“잠깐 얘기 좀 할까?”
싱긋 웃는 허하준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