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위기 뒤 기회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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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인 생각이지만 투수전이 펼쳐지면 투수보단 타자의 피로감이 심하다.
경기 자체는 일찍 끝나서 몸은 덜 피곤하지만, 타석에서 1점이라도 내야 한다는 부담과 수비에서 절대 실수하면 안 된다는 생각 때문에 정신적인 피로가 상당했다.
나도 볼 배합 하나하나에 신경 쓰느라 머리가 터지는 줄 알았다.
심지어 두 경기 연속 그런 경기를 펼쳤으니, 다들 피곤할 만했다.
하지만 우리에겐 최고의 피로회복제인 승리가 있었다.
거기에 일요일 홈에서 거둔 승리.
즉, 숙소가 아닌 집에서 푹 쉴 수 있었다.
“다들 고생 많았다. 집 가서 푹 쉬고, 내일 오후에 보자.”
“넵!”
경기가 끝난 뒤 감독님의 짧은 말과 함께 우르르 무리 지어 사라졌다.
난 같은 방향에 사는 선수가 없어 보통 혼자 퇴근하는 편이지만, 오늘은 일행이 있었다.
“다 씻었어 브로?”
“네. 갈까요?”
오늘 퇴근길 동료는 웰링턴과 통역사.
그리고 웰링턴의 가족들이었다.
“엠마, 반가워요. 네가 엘리구나.”
엠마 웰링턴과 엘리 웰링턴.
“킴! 릭(브릭 웰링턴의 애칭)한테 얘기 많이 들었어요. 정말 고마워요. 엘리, 인사해. 네 삼촌이야.”
“꺄아!”
만나자마자 엠마 웨링턴이 너무 반가워해서 당황했다.
대체 와이프한테 무슨 말을 한 거야?
거기에 갑자기 삼촌이 돼버렸다.
하지만 삼촌 자리를 거절하기엔 2살짜리 아기 웰링턴의 미소는 너무 해맑았다.
왜 브릭 웰링턴이 딸 바보가 됐는지 알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웰링턴 패밀리와 광안리까지 택시를 타고 이동하기로 했다.
“광안리 해수욕장으로 가주세요.”
“네.”
택시를 타고 가는 도중 기사님이 계속 힐끔힐끔 나와 웰링턴 가족을 쳐다봤다.
계속 그러다 사고가 날까 봐 나도 기사님을 쳐다봤다.
그러자 눈이 마주쳤고 기사님이 물었다.
“혹시 김수호 선수?”
“예. 맞습니다.”
“아이고! 내가 나이를 먹어서 그런가, 유니폼 벗으니까 알아보기 힘드네! 정말 반가워요.”
살짝 굳어 있던 기사님의 자세가 급속도로 편해지더니, 웰링턴 가족에게까지 인사를 하셨다.
“유, 투데이 굿 피칭, 퍼펙트 피칭, 아주 좋았어, 응? 굿 굿!”
의미는 대충 전해진 것 같고, 아무튼 기사님의 하소연(?)을 들으면서 광안리에 도착했다.
요약하면 그동안 마린스 야구를 보면서 너무 화가 났다는 말이었다.
“그래서 내가 요즘 김수호 선수 덕분에 정말 행복해. 하하하. 어이쿠, 벌써 도착했네.”
택시비를 계산하려고 하자 기사님이 고개를 저었다.
“됐어, 됐어. 안 내도 돼요. 정 내고 싶으면 사인 하나만 해주고 가요.”
“그래도···.”
“됐다니까 그러네! 자자, 웰링턴 굿바이!”
완강한 표현에 결국 사인과 사진을 찍고 내렸다.
하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김수호 아니야?”
“어, 진짠데?”
한 사람이 알아본 순간, 순간 광안리 해수욕장은 순식간에 사인회장으로 바뀌었다.
가뜩이나 드론쇼 때문에 사람이 많던 상황.
나한테 사람이 몰리는 건 괜찮았는데 내 옆에 있던 웰링턴에게도 사람이 몰렸고, 가족들에게 피해가 갈 거 같아 먼저 가기로 했다.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먼저 가서 미안해요.”
“아니야. 얼른 가. 나중에 같이 저녁 먹자. 엘리, 인사해.”
웰링턴이 엘리의 팔을 잡고 흔드는 걸 마지막으로, 다시 택시에 올라탔다.
이번에도 기사님이 알아보시는 바람에 택시비는 사인과 사진으로 대체했다.
그렇게 헤어지고 다음 날.
웰링턴은 드론쇼가 시작되자 재밌게 보고 왔다고 했다.
못 봐서 아쉽긴 했지만, 다음부터 그런 곳에 갈 땐 모자라도 써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으니 괜찮았다.
구단 버스를 타고 우리가 향한 곳은 창원.
우리가 따라잡아야 할 5위 인천 스타즈를 위닝 시리즈로 잡아 준 고마운 팀이 있는 곳.
창원에 도착해서 짐을 내리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도착했냐?
“예. 이제 짐 풀고 있어요.”
-그럼 주소 보내줄 테니까 거기로 와.
“넵.”
만나기로 한 사람은 돌핀스의 중견수, 이규영이었다.
찍어둔 곳으로 가자 후줄근한 차림의 이규영이 핸드폰을 보면서 서 있었다.
“왔냐? 들어가자.”
“오, 분위기 좋은데요?”
“그치? 나도 몇 번 안 와봤어.”
깔끔하고 룸까지 따로 있는 식당, 그만큼 가격도 살벌했다.
근데 내가 내는 거 아니니까.
“잘 먹을게요.”
“뭔 소리야.”
“네?”
내 말에 이규영이 어이없다는 듯 쳐다봤다.
“국가대표 포수가 보증하는 안정감, 저도 한번 느껴보고 싶습니다!”
“아, 좀!”
내가 찍은 모기업의 자동차 광고.
이규영이 말한 건 광고 멘트였다.
하지만 막상 광고를 보자 도저히 오글거려서 보지 못했다.
그래서 한동안 티비도 안 봤는데, 저걸 여기서 들을 줄이야.
“알겠어요. 제가 낼 테니까 제발 그거 좀 하지 마세요.”
“오케이! 딜!”
그래도 막상 음식이 나오자 맛있게 먹었다.
사사로운 얘기를 하면서 밥을 다 먹어갈 때쯤 이규영이 배를 만지면서 말했다.
“아, 잘 먹었다.”
“최저 연봉 선수한테 밥 얻어먹으니까 좋아요?”
“어, 그래서 더 맛있나?”
아오 약올라.
이규영이 왜 1번 타자를 잘하는지 알겠다.
애초에 이 사람은 1번 타자를 하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이다.
“근데 왜 둘이서 보자고 했어요?”
돌핀스와 마린스에는 국가대표가 많았다.
마린스만 해도 허하준, 강주호가 있고 돌핀스엔 우오준, 최지용, 오상엽 등이 있는데 굳이 둘이 보자고 한 이유가 궁금했다.
“아, 그거....”
이규영이 잠깐 뜸 들이더니 슬쩍 말했다.
“나 올해 끝나고 FA잖아.”
“어? 내년 아니었어요?”
“원래 내년이었는데, 올림픽 우승해서 땡겼지.”
어쩐지, 우승하고 너무 좋아하더라니.
군대 + FA면 그 정도로 좋아할 만했다.
“근데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하, 그냥 요즘 고민이 많아. 뭔가 속 시원하게 털어놓을 사람이 없어.”
“선배 정도면 원하는 팀 골라서 갈 수 있는 거 아니에요?”
“그건 맞지.”
순순히 인정하는 게 재수 없지만, 사실이다.
이규영급이면 솔직히 모든 팀에서 달려들만한 매물이다.
28살의 젊은 나이에 발 빠르고 컨택 좋고 수비 잘하는 1번 타자 겸 중견수.
단순히 보이는 스텟보다 상대할 때 느끼는 피로함은 상상 이상이었다.
근데 뭐가 고민일까.
이어진 이규영의 말에 궁금증이 단번에 풀렸다.
“메이저, 한 번 도전 해보고 싶어서.”
“아....”
“알아, 나도. 내 실력이면 메이저는 무리겠지. 근데 도전 정도는 해볼 만하지 않을까?”
최근 한국 타자 중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한 선수는 오직 강기호와 강주호 둘뿐.
이규영이 메이저에서 성공하리라 확신할 수 없지만 아마 성공 확률보다 실패할 확률이 압도적으로 높을 거다.
물론 도전은 자유고, 메이저리그는 모든 야구 선수의 꿈이니까 이해는 됐다.
“근데 그걸 왜 저한테 물어보세요?”
“원래 포수들이 다른 팀 선수 객관적으로 잘 보잖아.”
“그건 그렇죠.”
특히 어제 웰링턴 패밀리와 일찍 헤어지는 바람에 스카우팅 리포트를 읽으면서 시간을 보냈다.
내일 이규영을 어떻게 잡아낼지 물어보면 바로 말할 수 있었다.
“그래서 어때? 너 메이저 좀 잘 아냐? 내가 성공할 거 같아?”
“아뇨. 하나도 모르는데요.”
이규영에 대해선 어느 정도 안다고 할 수 있지만, 메이저리그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그래? 에후, 됐다.”
“그래도 메이저 도전해 보신다고 하면 진심으로 응원할게요.”
“그래, 고맙다.”
아무튼 모르던 사실을 알았다.
이규영이 FA라, 메이저에 가든 안 가든 이번 스토브 리그는 재밌겠네.
어? 잠깐만.
“잘 먹었다.”
“선배님?”
“어?”
“제가 광고로 번 돈보다 올림픽으로 FA 1년 당겨서 번 돈이 더 많지 않나요?”
“스읍, 그건 아직 들어온 돈이 아니잖아!”
“아니, 양아치 아니에요?”
“뭐? 하늘 같은 선배한테 양아치?”
“같은 팀도 아닌데 뭐 어때요. 선배 대접 받고 싶으시면 내년에 마린스 오시던가!”
“와, 진짜 이래서 검은 머리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라더니. 됐다. 치사해서 내가 사고 말지. 얼마야?”
그러면서 계산서를 보더니 슬쩍 내 눈치를 봤다.
“엔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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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을 다 먹고 숙소에 돌아오자 이규영에게 문자 하나가 날아왔다.
이규영 : 오늘 밥값 만원당 볼넷 하나다.
결국 계산은 이규영이 했다.
애초에 나한테 얻어먹을 사람이 아니긴 했다.
아마도.
아무튼 객관적으로 봐도 이규영은 정말 좋은 선수였다.
메이저리그에 도전한다고 하면 혹시라는 생각이 드는 선수.
만약에 마린스에 온다면 두 팔 벌려 환영할 선수였다.
문제는 당장 내일부터 3일간 지겹도록 그 얼굴을 봐야 한다는 거였다.
돌핀스 역시 갈길 바쁜 팀.
2위 프렌즈와 격차를 다시 벌렸지만, 아직 가시권인 만큼 총력전으로 나올 가능성은 99%였다.
우리도 총력전이지만 돌핀스가 1위 팀인 만큼 상대 전적은 처참했다.
한 시즌에 팀별로 만나는 횟수는 총 16번.
보통 3연전을 5번을 하고 취소 경기와 남은 한 경기를 추후 편성한다.
지금까지 돌핀스와의 4번의 시리즈가 있었다.
성적은 11경기 동안 3승 8패.
지난번에 거둔 위닝 시리즈 이전엔 1승 7패로 그냥 승점 자판기 수준에 불과했다.
불행 중 다행인 건 이번 돌핀스와 3연전을 치르고 나면 2경기밖에 안 남는다.
어쨌든 이번 돌핀스전에 선발로 내정된 선수는 요그 하스와 김호기.
이호민은 저번 경기에서 성적이 안 좋았던 터라 잘 모르겠다.
거기에 내일 경기가 끝나면 9월이 시작돼 확장 엔트리가 적용된다.
생각지도 못한 새로운 투수가 선발로 올 수도 있다.
아무튼 내일 선발 예정인 하스는 내가 본 투수 중 가장 별난 투수라 볼 배합을 미리 짜는 게 쉽지 않았다.
객관적으로 공의 위력을 보면 다섯 선발 중 3~4번째.
김호기와 구위 면에서 놓고 봤을 때 그다지 큰 차이가 없다.
하지만 팀에서 유일하게 10승을 거둔 투수다.
누군가는 운이라고 하지만 확실한 무기가 있었다.
마운드에서 항상 일정한 템포와 멘탈을 유지한 채 자신의 공을 뿌리는 투수.
아마 모든 포수가 꿈꾸는 투수 아닐까?
그런 하스와 볼 배합이 까다로운 건 들쭉날쭉한 제구 때문이다.
하스의 구종은 포심과 투심, 커터, 그리고 슬라이더.
네 구종 중 어떤 구종이 제구가 잘 잡히는지에 따라 볼 배합이 달라진다.
그래서 보통 하스가 선발이면 당일 아침에 공을 한 번 받아봤다.
그래야 볼 배합에 어느 정도 윤곽을 잡은 채 경기에 들어갈 수 있었다.
돌핀스와 경기 당일 역시 날이 밝자마자 불펜에 곧바로 출근해 하스의 공을 받았다.
그 결과, 좀 놀랐다.
“오늘 공이 다 좋은데요?”
“전부 레타쿠의 가호다.”
본인도 그게 느껴지는지 살짝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거기에 하스는 불펜에서 던진 공 그대로 마운드에서 던질 수 있는 투수.
오히려 공을 던진 하스보다 내가 더 흥분됐다.
좋은 소식을 안고 아침부터 바쁘게 볼 배합에 대해 생각하는 동안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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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라인업은 상대 투수에 맞춰 약간 조정이 이루어졌다.
상대 투수는 최지용.
상대해 본 적은 없지만, 지난 일본 전에서 직접 공을 받아본 만큼 얼마나 영리한 투수인지 잘 알고 있다.
오늘 경기에서 다시 5번에 복귀했다.
라인업에서 한 가지 의외인 건 4번 지명타자에 강주호, 그리고 6번 1루수에 채지훈이 들어간 거였다.
“원래 점마 내 밥이다, 밥.”
놀랍게도 최지용 상대 채지훈의 통산 성적은 27타수 9안타 3홈런 3볼넷으로 굉장히 좋았다.
어찌 됐든 좋은 일이었다.
채지훈의 성적이 좋으면 내 타석에 공격적인 볼 배합을 가져갈 테니까.
그렇게 8월의 마지막 날.
“플레이 볼!”
돌핀스와의 경기가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