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분위기를 타면 무서운 팀 -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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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런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역시 1군 첫 경기에서 친 끝내기였다.
그 이후 꽤 많은 홈런을 때렸다.
그리고 방금 친 홈런이 프로 데뷔 통산 10번째 홈런.
사실 열 번째 홈런인 건 치고 나서 더그아웃에 들어오고 알았다.
“벌써 열 개 쳤네? 이제 고작 스무 경기 뛴 놈이 내 통산 홈런보다 많냐?”
“열 개요?”
“와, 신경도 안 쓰고 있었어? 허하준 같은 놈.”
박은성이 칭찬인지 아닌지 모를 말을 하면서 혀를 찼다.
“그래서 홈런 치는 비법이 뭔데?”
“그런 게 어딨어요.”
“왜 없어. 솔직하게 말해봐. 나만 알고 있을게.”
“진짜 없어요.”
빈말이 아니라 진짜 없었다.
사실 지금 내 성적이 진짜 시즌 끝까지 갈 거라곤 생각도 안 하고 있다.
18경기 동안 타율/출루율이 각각 0.421, 0.451에 장타율이 0.8이 넘었다.
OPS가 1.2를 넘어 1.3에 가까운 말도 안 되는 수치.
그야말로 미친 성적이었다.
다르게 말하면 이제 떨어질 일만 남았다.
“그래도 잘 치는 비법이 있을 거 아니야.”
“그냥 노림수가 잘 통하더라고요.”
보통 경기가 끝난 후부터 다음 경기 스카우팅 리포트를 읽으면서 볼배합을 구성한다.
그리고 타자뿐만 아니라 투수들이 내게 무슨 공을 던질지도 계속해서 연구하고 있다.
경기가 시작하면 중간중간 강주호의 조언과 상대 배터리의 심리를 예측하며 노림수를 정한다.
방금 친 홈런도 그런 맥락에서 칠 수 있었다.
물론 노림수를 갖는다고 전부 안타가 되고 홈런이 되는 건 아니지만, 정확도가 꽤 괜찮았다.
설명을 듣자 박은성이 고개를 저었다.
“넌 안 쉬냐?”
“아직 체력은 자신 있어서요. 괜찮아요. 우승해야죠.”
물론 몸이 점점 무거워 지는 게 느껴진다.
매일 땡볕에서 쭈그려 공을 받고 밤엔 졸음과 싸우며 스카우팅 리포트를 보는 게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니까.
근데 우승하겠다는 말을 지키려면 더 노력해야 했다.
“역시 홈런은 아무나 치는 게 아니네.”
결국 박은성에게 인정받았다.
아무튼, 내 홈런이 신호탄이 됐는지는 몰라도 투수가 점점 흔들리게 보였다.
이닝 중간에 끊겼고, 거기에 재개 이후 던진 초구가 홈런이 됐으니 멘탈적으로 데미지가 상당할 거다.
결국 잭 미켈과 김민석의 연속 안타, 그리고 이준이 볼넷을 얻어내면서 1사 만루.
이민상의 희생타로 2사 13루가 됐고, 박은성의 안타와 최치호의 홈런이 터지면서 대거 5득점.
“투수 개불쌍하다.”
이호민의 말대로 1회에 완벽한 모습을 보여줬던 상대 투수로선 미친 듯이 억울하겠지만.
“이것도 야구지.”
“그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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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상대 투수를 완벽하게 무너트렸지만, 그게 웰링턴에게 좋은 영향을 줬다는 건 아니다.
어깨가 식은 건 웰링턴 역시 마찬가지.
특히 2회 초 공격도 길어져서 중간중간 계속 어깨를 풀어야 했다.
“오늘 웰링턴은 길어야 5회야. 최대한 맞춰 잡게 유도해.”
“예.”
강기호의 조언을 듣고 최대한 존에 넣는 볼배합을 요구했다.
안타나 홈런을 맞으면 어떡하냐고?
그건 이미 대비책이 있었다.
“레타쿠를 믿는다.”
“뭐라고?”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해본 혼잣말에 투수코치님이 되물었다.
현재 상황은 5회 초 1사 만루.
스코어 8대6.
그리고 타석엔 벌써 세 번째 만루에서 만난 4번 타자 강신이었다.
하필 최악의 위기에 만난 최고의 타자라니.
상황은 좋지 못했다.
“어때, 웰링턴. 상대할 수 있겠어?”
아무리 백인이지만 피부가 저러면 아픈 게 분명할 정도로 창백한 얼굴.
하지만 코치님의 말에 웰링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이번엔 코치님이 나한테 물었다.
“수호야, 네 생각은 어때.”
오늘 강신이는 첫 타석에서 안타, 2번째 만루 기회에선 홈런.
기록만 보면 웰링턴 말고 다른 투수를 올리는 게 상책이었다.
문제는 2사 만루에 강신이 타석에 올라와서 웰링턴보다 잘 던질 만한 투수가 없다는 거였다.
그걸 코치님도 아는지 나한테 물어본 거겠지.
“제 생각엔···.”
그래도 투수를 바꾸자고 하려 했다.
하지만 그때, 웰링턴과 눈이 마주쳤다.
아, 씨. 이러면 안 되는데.
“자신 있습니다.”
“후, 그래?”
“예.”
홧김에 저지른 말이지만, 오늘 웰링턴은 커브 없이 존에 억지로 공을 밀어 넣으며 5회까지 왔다.
강신이에게 홈런을 맞은 것도 피한 게 아니라 정면 승부하다 맞은 거였고.
그런 투수가 믿어 달라는 데 못 믿는 건 포수 실격이다.
“좋아. 감독님한텐 내가 잘 말해둘 테니까 멋지게 잡고 내려오라고. 알겠지 웰?”
투수코치님이 가볍게 웰과 주먹을 맞대고 내려갔다.
“고마워 수호.”
“고마우면 빨리 잡고 내려가죠. 슬슬 비가 많이 오는데.”
저 멀리 짙은 먹구름을 보니, 아마 6~7회 사이에 비가 더 많이 올 것 같다.
최악의 경우 이번 이닝 역전당하고 우천 콜드 게임으로 패배.
최선은 이번 위기를 막아내고 투수를 아낀 채 승리.
선택지는 최악과 최선뿐.
중간은 없다.
“알겠어. 네 사인대로 던질 테니까 해보자.”
웰링턴과 얘기를 나눈 후 홈플레이트로 돌아가면서 계속 생각했다.
지금 던질 수 있는 공은 거의 없다.
기껏해야 바깥쪽 높은 포심을 던져서 희생플라이나, 우타자 바깥쪽으로 흘러나가는 슬라이더로 삼진 또는 헛스윙을 유도하는 게 전부.
하지만 이미 3회에 이렇게 하다가 실투가 나와 홈런을 맞았다.
확실한 변화가 필요했다.
그러기 위해선 역시 몸쪽, 또는.
‘커브인데.’
오늘 1회를 제외하곤 한 번도 던지지 않았던 커브.
하지만 1회에 못 던진 걸 지금 이 상황에 제대로 던질 수 있을지 미지수였다.
더 고민하고 싶었지만 야속하게도 마운드와 홈플레이트까지의 거리는 너무 짧았다.
“야, 저기서 다 말하고 온 거 아니었어?”
홈플레이트에 앉아도 고민이 길어지자 강신이가 말했다.
“예. 선배님 병살로 잡을 타구 준비 해 놨습니다.”
“그래? 재밌겠네.”
'안 통하네.'
초면에, 그것도 건너 건너 다 아는 사람들 뿐인 한국 야구에서 신인이 이런 말을 했다간 미친놈 소리 듣기 딱 좋다.
그럼에도 조금이라도 흥분하길 바라면서 던진 말이었지만, 강신이가 흘려넘겼다.
이젠 정면승부 말고 남은 수가 없다.
‘바깥쪽 슬라이더.’
“볼!”
초구는 그대로 흘러나가면서 볼이 됐다.
강신이에게 고민할 시간을 주지 않기 위해 곧바로 사인을 보냈다.
2구는 바깥쪽 높은 포심.
“스트라이크!”
스트라이크가 되긴 했지만, 휘둘렀다면 아웃카운트와 점수를 바꿀 수 있는 좋은 공이었는데, 아쉬웠다.
이 공을 안 친 걸 보면 강신이는 1점에서 만족하려고 하는 것 같지 않았다.
최소 동점, 혹은 역전.
그리고 이번엔 몸쪽 높은 공 사인을 보냈다.
‘할 수 있어. 웰링턴.’
잠깐 고민하던 웰링턴이 결정했는지 투구 동작에 들어갔다.
“스트라이크!”
아까 홈런을 맞았던 날카로운 스윙이 이번엔 헛돌았다.
이걸로 1-2.
“병살 잡는다며?”
계속 높은 공만 요구하니 강신이가 말을 걸었다.
“이제 낮게 던지겠습니다.”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사인은 몸쪽, 땅에 박힐 정도로 낮은 포심.
커브도 고민했지만, 결국 제구가 안 되는 공은 쓰지 못했다.
웰링턴의 신장을 살려 떨어지는 포심을 유인구로 쓰기로 했다.
그렇게 제4구.
-딱!
원하던 것보다 높게, 그리고 몸쪽보단 중심에 가깝게 들어왔지만, 그래서 배트 끝에 맞았다.
생각보다 강하게 맞은 타구.
하지만 코스가 좋았다.
유격수 - 2루수 - 1루수로 이어지는 6-4-3 병살 코스.
“아웃!” “아웃!”
“으아아악!”
웰링턴이 포효하는 소리가 빗소리를 뚫고 들렸다.
결국 우리가 이겼다.
“전부 네 덕이야! 가디언!”
근데 그 소리 좀 하지 말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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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록 콜록!
따뜻한 8월의 비였지만, 타격전이 펼쳐진 터라 선수들이 장시간 비를 맞았다.
그나마 중간에 우천 콜드 승리로 끝나서 다행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감기 걸리는 사람은 한둘이 아니었을 거다.
프로 선수가 고작 비를 맞는다고 감기에 걸리진 않지만, 멍청하게도 딱 한 명 감기에 걸린 사람이 있었다.
“괜찮냐?”
“아니, 죽겠다.”
그건 바로 나.
“넌 뭔 개도 안 걸린다는 여름 감기에 걸리냐?”
“그러게. 아무튼, 가져왔어?”
“어, 여기.”
기침만 하면 다행이지만, 열을 재보니 꽤 높았다.
몸살기까지 있으니 당연히 오늘 경기는 출전 불가.
어차피 오늘 등판 계획이 없는 이호민이 내 부탁에 물건을 갖다줬다.
“이번 기회에 그냥 푹 쉬는 건 어때? 감기 걸린 것도 피로가 쌓여서라며.”
“안돼. 그럴 시간이 어딨어.”
부탁한 물건은 스카우팅 리포트.
급하게 나오느라 못 챙기고 나왔다.
오늘 경기는 병원에서 보고 다음 경기에 대비할 생각이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방문객에게 손에 쉬고 있던 걸 뺏기고 말았다.
“...코치님?”
“내가 너 이럴 줄 알았다. 이럴 땐 좀 쉬어야지.”
갑자기 등장한 강기호, 분명 이럴 줄 알고 이호민에게 은밀하게 부탁한 거였는데.
이호민을 째려보자 강기호가 스카우팅 리포트로 내 머리를 가볍게 쳤다.
“쉴 땐 쉬어라 좀. 네 동기가 얼마나 걱정했으면 나한테 같이 와 달라고 했겠냐. 고생했다 호민아. 여긴 내가 있을 테니까 먼저 가봐.”
“예. 감사합니다.”
멀어져가는 이호민의 등을 원망스럽게 쳐다봤다.
“으챠. 밥은 먹었냐?”
“아뇨. 입맛이 없어서.”
“열이 39도가 넘는데 밥도 안 먹고 잘하는 짓이다.”
“금방 나아요.”
“됐다 됐어. 무슨 우승 못해서 죽은 귀신이 붙었냐.”
그러면서 내가 정리 해 놓은 스카우팅 리포트를 천천히 읽었다.
얼마간 시간이 지난 후.
“수호야.”
“예.”
“정리 잘했네.”
갑자기 부른 터라 긴장했는데, 다행이다.
“감사합니다.”
“나중에 은퇴하고 기록분석관으로 들어와라. 내가 잘 해줄게.”
“20년 뒤요?”
“마흔에 은퇴하게? 너무 젊은 거 아니냐?”
“강주호 선배님도 그때 하는데요 뭐.”
“그건 그렇지.”
“그런데요 코치님.”
“왜.”
“강주호 선배님은 은퇴하고 감독, 코치 안 하신대요?”
“하지 않을까?”
“그럼 감독은 누구예요?”
“어?”
반쯤 장난으로 물어 본 건데, 생각해본 적 없는지 강기호의 눈이 사뭇 진지해졌다.
“얌마, 그래도 내가 코치 짬이 얼만데, 당연히 내가 감독이지.”
그렇게 말하면서도 스스로 확신이 없는지 눈이 흔들렸다.
그때쯤 기사 제목에 강씨 형제의 난 같은 게 적혀있을 것 같은데.
아무튼 진짜 간호와 감시를 위해 왔는지 강기호는 계속 내 옆에 있었다.
“잠도 주무시게요?”
“금방 갈 거니까 보채지 좀 마라.”
“넵.”
약을 먹어서 그런가, 슬슬 눈이 감겼다.
“수호야.”
“...예.”
“고생이 많다.”
“예.”
"예?"
고생이 많은 건 사실이니까.
“아무튼 너 때문에 요즘 팀 분위기가 좋아.”
으음....
뭐라 대답해야 하지.
하지만 강기호는 내 대답은 중요하지 않은지 말을 이어갔다.
“그래도 이놈아, 네 몸이 먼저야. 우승은 그 다음이고.”
한국 복귀 인터뷰 때 우승을 바라던 사람 치곤 안 어울리는 말이었다.
그러고 보니 궁금한 게 있었다.
슬슬 해롱거리는 정신으로 강기호에게 물었다.
“...코치님은 메이저에서 돌아온 거 후회 안 하세요?”
“....”
하지만 잠이 들 때까지 강기호의 입은 열리지 않았다.
눈을 떴을 땐 이미 강기호는 없었고, 대신 침대 모퉁이에 스카우팅 리포트와 그 위에 포스트잇만 붙어있었다.
-작작 봐라.
죄송합니다.
그건 못 지키겠네요.
이틀 후, 완전하진 않지만 어느 정도 호전된 몸을 이끌고 퇴원했다.
그리고 내가 없는 이틀 동안 부산 마린스는 2연패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