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흐름 -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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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타석에 들어올 때부터 슬라이더를 생각하고 들어왔다.
카운트를 잡는데 몇 번 던진적 없는 공만큼 효과적인 게 없다.
하지만 몇 번 던지지 않았다는 건, 그다지 좋은 구종이 아니라는 거다.
결국 노림수가 통했고, 1점을 더 내면서 3대1.
그리고 무사 2, 3루의 기회는 계속됐다.
“깔끔하게 잘 쳤다. 무사니까 무리하지 말고 타구 보고 움직이자.”
“옙.”
세이프 콜이 나오고 1루 코치에게 보호구를 건네주며 주의사항을 들었다.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다시 한번 상기시키는 절차다.
그동안 이민수는 결국 강판 됐다.
어쩐지 최필주가 날 노려보는 것 같았지만, 그냥 무시했다.
그리고 강주호는 3루에서 대주자로 교체됐다.
무사 1루에서 단번에 홈까지 들어오는 건 대주자라도 힘든 일이었고, 대신 3루에서 희생타에 홈에 들어오는 건 강주호보단 대주자가 낫다는 벤치의 판단이었다.
-따아악!
그 판단을 옳게 만들어주는 잭 미켈의 우익수 방면의 희생플라이에 나도 무사히 3루에 들어갔다.
그리고 다시 한번 채지훈의 깔끔한 희생플라이로 홈에 들어오면서 이번 이닝 3득점을 만들었다.
스코어는 이제 5대1.
우리 불펜을 생각하면 약간 불안하지만, 오늘 하스의 투구 내용을 생각하면 여유로운 점수 차였다.
맞혀 잡는 투구로 아직 투구수에 여유가 있는 상황.
8회까진 모르겠지만 7회는 충분히 소화할 수 있었다.
“이번에 한국 최고 기록 하나 세우자고요.”
하스의 최다 이닝은 6과 1/3이닝.
7회에 2루타 하나를 맞긴 했지만 결국 무실점으로 막았다.
“스트라이크 아웃!”
마지막 삼진을 잡고 가슴에 손을 올린 뒤 눈을 감은 채 중얼거리는 모습은 좀 멋있었다.
확실한 승리를 위해 8회에 셋업맨 정태석이 올라왔다.
2~3경기마다 1실점씩 하는 투수가 중요한 셋업맨인 마린스의 현실이지만, 연투만 없으면 나름 안정적인 투수였다.
휴식기 이후 첫 등판을 무난하게 처리한 뒤, 9회 초.
스코어는 여전히 5대1인 상황에서 마무리 이용기가 올라왔다.
“후, 좀 떨리네?”
“선배님이요?”
초구 볼을 던지자 이용기가 잠깐 올라오라는 사인을 보냈다.
이용기는 나름 마무리로 FA 경험까지 있는 투수.
물론 구위와 구속으로 찍어누르던 젊을 때와 지금을 비교하면 당연히 실력이 떨어졌다.
그래도 이젠 경험과 연륜으로 매 시즌 꾸준하게 15개 이상 세이브를 기록하는 준수한 마무리였다.
최근에 블론이 많아지긴 했지만, 4점 차의 평범한 경기에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어. 이상하게 떨리네. 포크볼 때문인가.”
마무리투수는 보통 불펜 중 가장 구위가 좋은 투수가 한다.
나이를 먹으면 자연히 구위는 떨어지게 돼 있고, 그런 만큼 마무리로 롱런하는 투수는 흔치 않다.
하지만 마무리는 그 보직에 대한 자신감과 프라이드가 높다.
아무리 뛰어난 투수가 와도 쉽게 그 자리를 내주려고 하지 않았고, 이용기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런 의미에서 장착한 게 바로 포크볼이었다.
이전부터 꾸준히 연습 중이던 걸 휴식기 동안 보완해서 어느 정도 쓸만하다라고 할 정도로 끌어올렸다.
“선배님 포크볼 진짜 좋아요.”
“하준이 스플리터랑 비교하면?”
“음···. 그건 좀···.”
차마 그 부분은 거짓말은 하기 힘들어서 말을 흐렸더니 이용기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너는 포수란 놈이 빈말도 할 줄 알아야지. 뭐 그리 딱딱해.”
“허하준 선배 공보다 좋습니다.”
“됐다. 지금 와서 말해봤자 늦었어 인마. 그리고 나도 알아.”
“그래도 확실히 올림픽 전보단 많이 좋아졌습니다.”
“그래?”
내 말에 솔깃한 눈치였다.
이건 빈말이 아니었다.
사실상 포심 슬라이더 투피치에서 쓸만한 구종이 추가된 거니 타자들이 당장 분석하기엔 골치가 아플 거다.
사실 이용기도 알고 있을 거다.
그냥 다시 한번 내 입을 통해 듣고 싶었던 것뿐.
“그래. 한 번 해보지 뭐.”
“예. 블로킹은 걱정하지 마세요.”
“고맙다.”
그 말을 끝으로 다시 돌아와 앉았다.
9회 초 피닉스의 타선은 1번 타자부터 시작이었다.
초구는 볼을 줬기 때문에 불리한 시작.
타자가 노리기 쉬운 카운트지만, 그걸 의식해서 2볼이 돼버리면 더 최악이다.
이용기가 코스가 마음에 들었는지 한숨을 한 번 내쉬고 투구를 시작했다.
바깥쪽 중앙으로 들어오는 공을 미트가 움직이는 그대로 살짝 안쪽에 집어넣었다.
“스트라이크!”
강기호와 연습했던 프레이밍이 점점 완성되는 느낌이 든다.
타자가 불쾌한지 타석에서 발을 빼고 나를 살짝 노려봤지만, 빠르게 공을 던져주고 사인을 보내는 시늉을 하자 급하게 고개를 돌렸다.
‘대놓고 사인 훔친다고 욕먹고 싶진 않겠지.’
다음 구종으로 다시 포심을 요구했지만, 이용기가 고개를 저었다.
슬라이더도 거절, 그렇다면 남은 건 포크뿐.
‘2스트라이크 이후에 던지는 게 부담되나?’
스플리터든 포크볼이든 떨어지는 변화구는 2스트라이크나 주자가 있을 때 던지는 게 쉽지 않았다.
포수가 빠트리면 그대로 출루 혹은 진루니까.
그래도 기분 나쁘진 않았다.
아까 나한테 한 말을 보면 내 실력보단 스스로에 대한 불신 같았으니까.
사인은 바깥쪽 낮은 코스에 포크볼.
아예 부담 없이 던질 수 있게 살짝 바깥쪽으로 빠져 앉았다.
그제야 고개를 끄덕인 이용기가 투구에 들어갔다.
“스트라이크!”
“뭐야, 포크?”
포크에 대한 정보가 있을 리 없는 타자가 시원하게 방망이를 돌리고 어리둥절했다.
이럴 땐 생각할 시간을 주면 안 된다.
곧장 공을 던져줬고 몸쪽에 사인을 보냈다.
“스트라이크 아웃!”
결국 이도 저도 아닌 자세로 삼진을 당한 타자가 급하게 대기타석에 있던 타자에게 무언갈 전해주는 게 보였다.
뭐, 별로 상관없다.
이제 포크는 안 던질 거니까.
포크의 역할은 딱 거기까지였다.
상대 타자에게 혼란을 주는 것.
포크 없이도 마무리 역할을 잘하는 이용기 입장에서 그 정도만 해도 충분했다.
“스트라이크 아웃!”
딱 하나 던진 포크볼로 상대 타자들의 타이밍이 전부 꼬여버렸고 삼자범퇴로 깔끔하게 끝냈다.
“볼배합 죽이는데?”
“쓸만하죠?”
이용기 정도 되는 투수가 사인을 거절하면 나로서는 어찌할 방법이 없다.
오늘은 그래도 포크볼을 제외한 사인에 잘 따라와 줬고, 결과도 좋았으니 신용이 약간 생기지 않았을까?
“마! 퍼뜩 온나!”
“갑니다~”
이용기와 얘기하는 사이 내야수들이 그새 모여있었다.
오늘은 강주호 대신 채지훈이 선창하면서 세레모니를 했다.
-와아아아!
그거에 맞춰 환호하는 관중들.
이걸로 5연속 위닝시리즈.
부산의 뜨거운 여름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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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린스, 5년 만에 첫 5연속 위닝시리즈]
[요그 하스, 한국에서 첫 QS+, 김수호 효과 증명!]
[쾌조의 출발! 마린스는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하위권 마린스와 피닉스의 이유 있는 질주]
[동료 울린 김수호, 다음 상대는?]
ㄴ 먼 동료야 ㅋㅋㅋㅋ 국대 끝나면 적이지.
ㄴ 딱 대라. 이제 국대 한 명씩 꺾어준다.
ㄴ 9등 따리가? 피닉스부터 꺾고 와 ㅋㅋㅋㅋ
ㄴ 이미 이규영, 우오준, 김민주, 최건우 닦았는데?
ㄴ 그건 국대 전이고. 지금은 다르지.
ㄴ 아니, 그래서 김수호 유니폼 언제 풀리냐고 ㅡㅡ 좀 팔아! 사준다고!
ㄴ 응~ 나는 또 샀는데~
ㄴ 너 저번에 5개 샀다는 놈 아니냐? 시발 주소 불러라 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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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야구팬들에게 뜨거운 주제가 있다.
[솔직히 김수호 vs 황인재, 데려갈 수 있으면 누구 데려가냐?]
-일단 난 황인재 한 표
ㄴ 닥치고 김수호 아님? 거포 포수 자질이 보이는데?
ㄴ 신인 전반기 20홈런이 죠스로 보이냐? 신인 최다 홈런 갱신 페이슨데?
ㄴ 그럼 넌 올림픽 4홈런이 죠스로 보임?
ㄴ 올림픽은 솔직히 플루크지.
ㄴ ㅋㅋㅋㅋ 올림픽 끝난 지 얼마 됐다고 벌써 플루크래. 나카무라랑 앤더슨 질질 짜겠다.
ㄴ 근데 솔까 지금까지 보여준 건 황인재가 더 많음 ㅇㅇ
ㄴ 당장 타격은 황인재 > 김수호고 수비는 김수호 > 황인재 아님?
ㄴ 황인재 수비도 개잘하는데?
ㄴ 김수호 타격도 개잘하는데?
마린스와 피닉스 팬들은 물론, 타 팀 팬들까지 나서서 싸움을 부추기고 있다.
고등학교 때 나란히 4, 5번을 쳤던 선수.
항상 꼴찌를 했던 두 팀을 앞장서서 이끄는 신인 선수.
신인이 올림픽에 나가 실력을 증명하는 등 서로 엮을만한 일이 너무 많았다.
하지만 당장 무언가 판별하기엔 IF가 많았고, 결국 결론은 하나로 귀결됐다.
ㄴ 이번에 둘이 만나니까 알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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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기사를 보고 알았는데, 5년만에 5연속 위닝 시리즈를 달성했다고 한다.
거기에 주말 홈경기까지 겹쳐 사직 구장엔 경기 시작 전부터 사람이 바글바글했다.
심지어 상대도 상대이다 보니 열기가 더 뜨거운 것 같다.
그들만의 결승전, 그들만의 한국시리즈 등으로 불렸던 마린스와 피닉스의 경기.
어느 팀이 이기든 치열했고, 또 수준이 낮았기에 붙은 별명이다.
물론 그 범위를 올 시즌으로 한정시키면 피닉스의 일방적인 우위였다.
2승 6패.
우천 취소가 된 한 경기를 제외하면 세 번의 시리즈에서 완패당했다.
스윕 패는 없었지만 1승 2패, 1승 2패, 그리고 2패.
참고로 저 2승은 전부 하스가 챙겼다.
시리즈 첫 경기의 선발은 김호기.
이전 두 경기에서 모두 승리를 챙기며 기분 좋은 분위기를 이어 가고 있었다.
그런 김호기를 만나기 위해 가고 있었는데, 중간에 황인재와 만났다.
“....”
“....”
그 사건 이후 처음 보는 건데, 미치도록 어색했다.
그때 대체 서로 무슨 생각이었을까.
아무튼 술이 문제다.
그렇게 잠깐 대치 아닌 대치를 하고 있을 무렵.
“너네 뭐 하냐? 청춘 드라마 찍냐?”
만나기로 했던 김호기가 등장했다.
그제야 황인재가 김호기한테 고개를 숙이고 가던 길을 갔다.
“어후, 숨 막혀. 남자들끼리 뭐가 좋다고 서로 쳐다본 건데.”
“그런 게 있어요.”
차마 그때 일을 말하기엔 너무 오글거렸다.
사춘기 흑역사를 들춰내는 것 같은 기분.
“난 또 기사보고 의식했나 했네.”
“기사요?”
“어. 이거.”
김호기가 보여준 화면엔 차마 내 입으로 말하기 어려운 제목이 쓰여있었다.
[2032 최고의 신인을 가린다! 황인재 vs 김수호!]
“... 이런 건 아니에요.”
“그래? 그럼 됐고.”
김호기가 다시 핸드폰을 가져갔다.
“그래서 오늘 홈런 칠 준비 됐지?”
“맨입으로요?”
“올림픽 갔다 오더니 강도가 다 됐어. 날강도가 여깄네.”
그렇게 말한 김호기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조용히 말했다.
“이번에 높으신 분이 직관 온대.”
“높으신 분이요?”
“어. 좀 많이 높은 분. 언젠진 모르겠는데 그래서 직원들이 더 바쁜가 봐.”
대체 이 사람은 어떻게 이런 정보들을 꿰고 있는 걸까 생각해봤다.
가장 합리적인 의심은 여자친구가 구단 직원인 경우.
그러면 정보를 좀 쉽게 알 수 있지 않을까?
“뭘 그렇게 봐?”
“아니에요. 근데 홈런으로 거래하기엔 너무 애매한데요?”
이 말을 하면 김호기가 발끈할 줄 알았다.
“음···. 그럼 이루타 하나로 하자.”
“네?”
상상도 못 한 대답에 벙쪄있을 때, 김호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안타 하나?”
“갑자기 왜 그래요, 무섭게.”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당연히 그땐 내가 갑이었지. 넌 고작 1군에 온 지 며칠밖에 안 된 포수였으니까.”
“그건 맞죠.”
“근데 알고 보니 개쩌는 재능에 한 달 만에 올림픽까지 가서 캐리하더니, 당당히 금메달을 걸고 돌아왔는데 네가 갑이지. 아니, 갑이죠.”
“제발 그러지 마세요.”
진심이 아니라 날 놀리는 거라는 걸 알지만 도저히 맞받아 치기 힘들었다.
“그럼 홈런 하나 콜?”
“후, 오케이 콜.”
내 말에 갑자기 핸드폰을 만지더니 내 귀에 가져다 댔다.
-그럼 홈런 하나 콜?
-후, 오케이 콜.
“그새 녹음 한 거예요?”
“어. 당연하지. 이런 건 원래 꼼꼼....”
-자기야, 뭐해?
어?
“하하. 그럼 훈련하러 갈까?”
김호기가 급하게 핸드폰을 가져가고 말했지만, 이미 늦었다.
나와 김호기 목소리 다음에 들린 여자 목소리.
아마 다음 영상이 틀어진 것 같은데.
이 목소리, 어디서 많이 들어봤는데?
“빨리 가자니까?”
“리포터?”
내 말을 듣자 김호기가 순간 멈칫했다.
“뭔 리포터?”
찾았다. 정보의 원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