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흐름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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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에 올림픽에 나가는 바람에 잠깐 잊고 있었지만, 허하준은 현재 국내 최고 기록 타이인 3연속 완봉승 중이다.
미국과 일본에서 6연속 완봉승이라는 기록이 있지만, 내가 알기론 전부 현대 야구 이전의 시기였다.
즉, 오늘 완봉승을 하면 세계적으로 의미가 있는 기록을 달성하는 거였다.
현재까지 7이닝 무실점 2피안타 1볼넷 12k.
스코어 4대0.
이주학의 실책을 포함해도 고작 4명의 주자만 1루를 밟았었다.
그리고 앞으로 6개의 아웃카운트만 잡아내면 기록 달성이었다.
“이번 이닝부터 체인지업 좀 추가할게요.”
“좋지.”
오늘 스타즈 타자들을 상대하면서 포심, 스플리터, 그리고 슬라이더를 던졌다.
이번 이닝부터 체인지업과 느린 포심을 섞으면 반응하기 쉽지 않을 거다.
8회 초 타석엔 8번 타자 최필주.
“치사한 놈들.”
“예?”
“슬라이더만 4개 연속은 심한 거 아니냐?”
아, 이전 타석에 최필주를 상대로 슬라이더만 요구했었다.
대놓고 포심을 노리는 게 보이는데 굳이 원하는 대로 해줄 필욘 없었다.
“이번 이닝엔 포심으로 갈게요.”
“정말?”
“예.”
거짓말은 안 했다.
다만 7이닝 동안 보여준 150이 넘는 포심 대신 140km 중반의 포심을 바깥쪽으로 요구하니 슬라이던 줄 알았는지 엉거주춤하게 방망이가 나왔다.
거의 번트 성 타구가 내 앞쪽에 떨어졌다.
“아웃!”
“양아치냐?”
“전 거짓말 안 했어요.”
“아오!”
그러더니 뒤에 타자에게 뭐라 말을 하고 더그아웃으로 들어갔다.
타석에는 9번 타자 대신 대타가 나왔다.
최필주가 뭐라 했는진 모르겠지만, 포심에 관한 얘기를 안 할 순 없었을 거다.
-딱.
“아웃!”
체인지업을 섞으니 곧바로 빗맞은 타구가 나왔다.
이주학이 잡아서 1루로 송구하면서 2아웃.
그다음엔 1번 타자로 이어지는 상위타순.
특히 오늘 안타가 있는 1번 타자였지만, 이번 이닝 첫 스플리터로 깔끔하게 삼진.
이제 아웃카운트 3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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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내 성적은 4타수 1안타 1홈런 3타점.
추가 안타를 노렸지만, 쉽지 않았다.
상대 역시 스타즈의 1선발이었으니까.
이제 9회 초 스타즈의 정규이닝 마지막 공격.
2번 타자는 잘 잡아냈지만, 3번 타자에게 안타를 허용했다.
그리고 타석엔 올림픽 결승전에서 만났던 타자, 존 윌슨.
올림픽을 포함해 허하준과 맞상대 기록은 9타수 1안타.
오늘 역시 3타수 무안타로 기록은 12타수 1안타가 됐다.
타자 입장에선 2경기 연속으로 허하준을 만난 셈이니 지옥 같을 거다.
특히 저번 결승에서 존 윌슨을 상대로 던졌던 체인지업.
오늘은 존 윌슨을 상대로 던지지 않았던 체인지업이지만, 그 기억을 과연 떨쳐냈을까?
아마 앞선 타자들이 체인지업을 던지기 시작한다고 말했을 거다.
그러면 초구는 바깥쪽 포심.
“파울!”
약간 몰린 공이 방망이에 맞긴 했지만 타이밍이 한참 느렸다.
150km가 넘는 공에 배트스피드가 못 따라가는 것일 수도 있지만 나름 미국 국가대표까지 나갈 정도의 실력을 지녔다.
‘역시 체인지업을 의식하고 있네.’
2구는 스플리터.
포심처럼 오다 떨어지는 공에 그대로 헛스윙을 유도해냈다.
0-2의 유리한 볼 카운트.
급하게 승부할 이유가 없었다.
바깥쪽으로 슬라이더와 적당한 포심 하나씩 요구했다.
“파울!” “볼!”
볼 카운트 1-2.
다음 공은 바깥쪽 낮은 코스의 체인지업.
땅볼을 완벽하게 유도해내기 좋은 코스와 구종이었다.
아무리 타자가 체인지업을 의식하고 있다 하더라도 이 코스로 오는 공은 좋은 타구를 만들어 낼 수 없다.
방망이는 무난하게 공을 때렸다.
그리고 코스가 완벽했다.
1루수 강주호가 잡고 2루로, 그리고 다시 1루로.
“아웃!” “아웃!”
3-4-3 더블 플레이로 경기가 끝났다.
“허하준! 허하준!”
9회에 들어서 숨죽이고 있던 관중들이 일제히 미친 듯이 소리 지르기 시작했다.
그대로 웃으면서 허하준한테 다가가자 갑자기 허하준이 내 손을 잡고 그대로 위로 올렸다.
“김수호! 김수호!”
그러자 갑자기 관중들이 부르던 이름이 허하준에서 나로 바뀌었다.
“오, 이거 좋은데? 우리도 세레모니 하나 만들까?”
완봉승 공을 챙긴 강주호가 뒤늦게 오고, 차례로 최치호, 오준혁, 이주학 등 내야 인원들이 다 모였다.
“좋죠. 경기 끝나면 마운드에 모여서 다 같이 손 위로 하는 거. 손가락은 세 개 어때요? V3.”
“오케이. 좋네. 오늘부터 하자. 자, 손 내리고.”
강주호의 신호 하에 내야수들의 모든 손이 모였다.
“하나 둘 셋!”
동시에 하늘로 올라간 여섯 개의 손.
그렇게 관중들의 환호를 들으면서 성공적으로 경기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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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하준이 던지고 김수호가 친다! 올림픽에서도 통한 승리 공식, 마린스 후반기 첫 승!]
[대기록 달성! 허하준 4경기 연속 완봉승!]
ㄴ 중간에 올림픽 땐 7이닝밖에 못 던졌는데?
ㄴ 7이닝밖에? 나랑 다른 야구 보냐?
ㄴ 진짜 김수호가 얼마나 지리는지 알려 주는 지표, 허하준과 올림픽 포함 5경기 동안 포일 0개.
ㄴ 솔직히 김수호 아니었음 이 기록 절대 못 함 ㅇㅈ?
ㄴ 이재익, 주동훈 하는 거 보면 100%
ㄴ 김수호 유니폼 5개 샀다 파이팅!
ㄴ 너구나? 너 때문에 내가 못 샀잖아
ㄴ 빨리 환불해라 ㅡㅡ 나도 좀 사자고
[내야 세레모니의 의미, 선수들은 3번째 우승을 꿈꾼다.]
[마린스는 용병이 4명? 뜨거운 땀으로 만들어낸 피부색의 의미.]
ㄴ 멋지다.
ㄴ 솔직히 김수호만큼 해주면 좋겠는데.
ㄴ 윗분 양심 ㅇㄷ?
ㄴ 걍 오늘처럼 어려운 타구 좀 잡아주고, 안타 1~2개씩 쳐주면 좋을 듯?
ㄴ 진짜 작년 신인 드랲 미쳤네 ㄷㄷ 1, 2, 3라운드 다 올해 데뷔
ㄴ 이주학 파이팅! 항상 응원합니다!
ㄴ 주학이니?
[마린스 이정훈 감독, ‘허하준과 김수호가 배터리인 이상 당연한 승리.’]
[5년 만에 첫 만원 관중 앞에서 승리를 선물한 배터리, 팬들은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마린스 단장, ‘김수호 선수 부모님 시구는 위에서 제안한 것’, ‘후반기 마린스를 주목해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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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경기 승리의 여파일까?
스타즈와 2차전 역시 만원 관중이 들어왔다.
그리고 오늘의 선발 투수 브릭 웰링턴은 오늘도 경기 전에 나에게 딸 자랑을 하고 있었다.
“곧 딸과 아내가 한국으로 오기로 했어. 다 네 덕분이야. 딸이 한국에 오면 우리 집으로 초대할게.”
“기대하고 있을게요.”
“좋아.”
지난번에 갔던 원정 9연전만 해도 집이 그리웠는데, 낯선 타지에서, 그것도 가족들 없이 혼자 있는 웰링턴은 더 힘들었을 거다.
내가 그의 가족 얘기를 들어주는 게 도움이 된다면 몇 번이고 들을 생각이 있었다.
그리고 이건 경기중에도 꽤 도움이 됐다.
허하준 때문에 완전히 엉켜버린 존 윌슨을 가볍게 범타로 처리하고 시작한 2회 초.
5번 타자에게 볼넷, 그다음 타자에게 홈런을 허용했다.
“저놈 왜 안 바꿨냐!”
“아오! 한 가운데 던지면 누가 못 쳐!”
관중이 많아지니 선수들에게 뭐라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볼넷 후 홈런, 팬들이 가장 싫어하는 콤보 중 하나니까 그럴 만했다.
물론 투수도 그 콤보를 정말 싫어했다.
특히 장타를 맞으면 급격히 불안함을 표출하는 웰링턴이였고, 오늘 경기는 특히 관중이 많아서 더 흔들릴 수도 있었다.
급하게 통역을 부르면서 마운드로 올라갔다.
“괜찮아요?”
“음. 아마도.”
다행히 웰링턴의 상태는 그다지 나빠 보이지 않았다.
약간 굳은 표정 정도?
나도 안심하고 경기 얘기 대신 가족 얘기를 꺼냈다.
“웰, 가족들이 언제 오기로 했죠?”
“다음 주 목요일.”
“오, 타이밍 좋네요.”
“왜?”
“다음 주 주말에 광안리에서 드론쇼를 하거든요. 주말 경기 끝나고 같이 보러 갈까요?”
“드론쇼? 좋지.”
로테이션상으로 웰링턴의 다다음 등판은 다음 주 일요일.
타이밍도 딱 맞았다.
“자세한 코스는 이따 경기 끝나고 같이 알아볼까요?”
“그럼 나야 좋지. 고마워 브로.”
슬슬 표정도 괜찮아진 것 같아서 마운드를 내려갔다.
그리고 다음 타자를 삼진, 후속 타자를 범타로 처리한 뒤 당당하게 마운드에서 내려갔다.
그 대가로 황금 같은 주말에 약속을 잡긴 했지만, 어차피 경기 끝나면 할 것도 없었으니까 잘 됐다.
웰링턴은 그 후 꽤 안정된 모습을 보여주면서 6이닝 3실점으로 끝마쳤다.
“마! 할 수 있는데 아깐 와 그렇게 했노!”
“뭐래?”
“잘 던졌대요.”
“그래? 땡큐!”
더그아웃에 들어가는 길에 번역도 해줬다.
웰링턴이 초반 홈런에도 불구하고 QS를 기록하면서 나쁘지 않은 모습을 보여줬지만, 오늘 타선이 영 아니었다.
스코어 3대1.
2점 차이라면 충분히 역전할 만한 점수였지만, 결국 추가점을 내지 못하면서 그대로 경기가 끝났다.
1승 1패.
서로 주먹을 한 번씩 주고받은 뒤, 시리즈의 성패를 가리는 마지막 경기가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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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식기가 너무 길었나.’
어제 경기를 되돌려 보는 이정훈 감독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이틀 동안 5득점.
고작 두 경기 가지고 벌써 고민이냐고 할 수 있지만, 점수 외에도 타선의 흐름을 판단할 구석은 많았다.
흐름이 좋은 팀은 2아웃에도 점수를 뽑지만, 반대의 경우 무사 만루에도 점수를 못 낸다.
어제 마린스가 그랬다.
2번의 만루 찬스에서 고작 1득점.
벌써 걱정할 단계는 아니지만, 전체적으로 침체되어있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타선이란 건 원래 흐름이 있는 법이었다.
마린스는 전통적으로 그런 흐름에 예민한 팀이었고, 누군가 기폭제 역할을 해주면 순식간에 불타오를 게 분명했다.
‘그 역할을 해줄 선수가 필요한데.’
제일 처음 떠오르는 건 역시 강주호.
하지만 되돌려 보던 화면이 멈춘 건 강주호와 달리 아주 젊은 선수였다.
‘김수호.’
비록 어제 경기에서 무안타를 기록하며 리그 재개 후 그다지 좋은 모습은 아니었지만, 연신 날카로운 타구를 만들어내며 상대를 흔들었다.
다시 말해 운이 안 좋았다.
야구에 운이라는 요소가 얼마나 큰 영향을 주는지에 대한 논쟁은 아직도 이어지고 있지만, 여느 스포츠든 운과 실력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젊은 선수이니만큼 흐름을 타기 시작하면 무섭게 불타오를 것이다.
올림픽에서 그랬고, 전반기 막판에도 그랬듯이 말이다.
더군다나 오늘 선발 투수는 운이라면 빠지지 않는 투수, 요그 하스.
두 선수의 시너지를 기대하며 라인업을 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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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상대 선발 투수는 올림픽 동료인 이민수.
올림픽 기간 중 이민수와 그다지 말을 많이 하지 않았다.
일단 전담 포수가 최필주이기 때문에 나랑 겹치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리고 이민수 자체가 소심한 성격이라 나를 좀 어려워하던 경향이 있었다.
담당 투수라면 그래도 먼저 말을 걸었겠지만, 담당도 아니니 굳이?
아무튼 투수마다 편차가 있지만, 마운드 위와 내려왔을 때 성격이 같은 투수는 거의 찾기 힘들었다.
“음? 왜 날 봐?”
“아니에요.”
물론 허하준 빼고.
하스도 거의 변화가 없는 투수였고, 내가 느끼기에 이민수 역시 그런 투수였다.
마운드 밖에서도 소심하고, 또 위에서도 그런 성향이 드러난다.
한 번 제구가 꼬이기 시작하면 완전히 엉킨 실타래처럼 아예 잘라버려야 한다.
반대로 꼬이지 않는다면 멋진 작품이 나온다.
마치 도미니카 타선을 상대로 무실점 했던 그때처럼 말이다.
거기에 긁힐 때 공이 워낙 좋다 보니 다른 선수들을 제치고 3선발로 활약 중이다.
이틀 동안 5득점 한 나를 포함한 우리 타선이 얼마나 힘을 낼진 모르겠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최선을 다할 수밖에.
4위 권을 추격하는 인천 스타즈와 그런 스타즈를 목표로 삼은 마린스.
“플레이 볼!”
시리즈의 승자를 가리는 마지막 경기가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