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야구는 혼자 하는 게 아니다 - 4
#
담장이 낮은 곳에서만 나오는 수비가 있다.
바로 홈런이 될 타구를 건져내는 수비.
1년에 몇 번 나오지도 않을 뿐더러, 그런 수비를 할 수 있는 수비수는 애초에 몇 없다.
근데 심지어 그 수비가 올림픽 결승전에서 나온다?
“이규영 물올랐네!? 나이스!”
“진짜 멋지더라.”
“굿 굿! 이 기세 이어가자!”
그러면 이렇게 분위기가 좋을 수밖에 없다.
“어때? 이제 좀 선배 같냐?”
“예?”
“멋있었냐고.”
“예. 제가 본 수비 중 최고였습니다.”
“됐다 그럼. 어이쿠, 아까 공 잡을 때 부딪힌 곳이 살짝 결리네? 누가 마사지해 줄 사람 없나.”
누가 봐도 나 들으라고 한 소리였지만, 정작 반응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했다.
“제가 해드릴까요?”
“어, 아니, 아니. 괜찮아. 하나도 안 아파.”
허하준이 그렇게 말하자 당황해 하면서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허하준이 이런 장난을 치는 건 처음 봤다.
그만큼 이규영의 수비가 엄청났다는 뜻이겠지.
아무튼, 경기가 중반으로 접어드는 타이밍에 분위기가 끓어오르는 건 아주 좋은 신호였다.
거기에 이 기세를 살리기 딱 좋은 타선이 대기 중이었다.
“규완아! 홈런 하나 치자!”
3번 김규완부터 시작하는 4회 말 공격.
하지만 루카스 앤더슨은 그런 수비가 있다는 것조차 잊은 듯 신들린 투구를 선보였다.
결국 또다시 삼자범퇴.
“쉽지 않네.”
더그아웃에서 들려온 목소리처럼 경기는 팽팽하게 흘러갔다.
#
각 팀의 에이스가 나온 만큼 한쪽으로 기울지 않을 거라는 게 많은 사람의 예상이었다.
하지만 두 투수는 거의 같은 기록을 보여주며 팽팽하게 경기를 이끌어갔다.
허하준 6이닝 무실점 2피안타 1사사구 10k 투구수 81개.
루카스 앤더슨 6이닝 무실점 3피안타 9k 투구수 75개.
올림픽 투구수 제한이 100개라는 걸 생각하면 아마 7회가 마지막 이닝이 될 가능성이 컸다.
[7회가 이번 경기에 분수령이 될 것 같군요.]
[그렇습니다. 저희 허하준, 김수호 배터리가 지금처럼 해주면 됩니다. 할 수 있습니다!]
[타석엔 4번 타자 알렉스 브래드포드 선수입니다.]
[오늘 2타수 무안타거든요? 큰 거 한방만 조심하면 됩니다.]
2회 때 던졌던 몸쪽 높은 공 이후 상대가 편했던 선수였다.
하지만 7회가 되자 다시 타석에 바짝 붙어서 섰다.
‘어떻게든 나가겠다는 건가?’
김수호가 시야를 가득 채운 브래드포드를 보면서 생각했다.
팽팽한 0의 균형이 유지되고 있는 지금, 쉽사리 몸쪽 승부를 걸긴 껄끄러웠다.
그렇다고 이렇게 붙었는데 바깥쪽을 던져도 마찬가지였다.
[원래 타자가 타석에 서자마자 던지는 한국 배터리였는데, 지금 생각이 길어지고 있습니다.]
[긴장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이겨내야 해요.]
장고 끝에 악수라고, 결국 이 상황을 타개해 나갈 수 있는 건 몸쪽밖에 없었다.
허하준을 믿자.
사인을 보내고, 7회가 됐음에도 여전히 날카로운 공이 보였다.
하지만 공은 원래 목적지보다 가운데에 몰려버렸다.
-따아악!
[아, 안 됩니다!]
[넘어갔어요.]
[지금까지 잘 버텨준 배터리가 7회, 홈런을 허용했습니다.]
[아직 한 점입니다! 충분히 역전할 수 있어요!]
홈런을 맞는 순간 온몸에 있는 피가 전부 싸늘하게 식는 느낌이었다.
차라리 바깥쪽 승부를 하는 게 나았을까?
한 방을 노리는 걸 뻔히 알면서 무슨 생각으로 몸쪽 승부를 한 거지?
타자가 베이스를 도는 시간이 억만년처럼 느껴졌다.
“수호야.”
그때 허하준이 마운드에서 살짝 내려와 김수호를 불렀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김수호가 허하준에게 갔다.
‘홈런 맞은 건 내가 아니야 병신아.’
포수의 역할은 투수가 제 공을 던질 수 있게 해주는 것.
근데 홈런 맞고 혼자 이상한 생각이나 하다니.
“죄송해요. 괜히 몸쪽을 요구해서.”
“네 잘못이야?”
“제가 거기로 사인을 안 보냈으면···.”
“우리 잘못이야. 네가 보낸 사인에 공을 던진 건 나고, 애초에 몰리지만 않았으면 좋은 코스였어.”
허하준이 김수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언제나 최상의 결과만 바라는 게 야구야?”
“아니죠.”
“최상의 결과를 만들기 위해서 노력했잖아. 단지 운이 없었을 뿐이야.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아직 경기 안 끝났어.”
허하준 말이 맞았다.
1점.
오늘 단 한 점도 못 뽑은 한국이었지만, 아직 기회는 남아있었다.
“올림픽 끝나도 시즌이 한참 남았는데 홈런 맞을 때마다 널 위로 해줘야 하는 거 아니지?”
“죄송해요.”
“죄송은 됐고, 빨리 끝내고 내려가자. 피곤하네. 그리고 귀 좀 열고. 너 경기 중반부터 너무 긴장했어.”
“예.”
자리에 돌아와 앉아 허하준의 말 대로 잠시 주변 소리에 귀를 기울이니 관중석에서 열띤 함성이 들려왔다.
“대한민국 화이팅!”
“USA! USA! USA!”
“허하준 화이팅! 김수호 화이팅!”
“아직 할 수 있다!”
양 팀을 응원하는 열띤 응원과 더그아웃에서 소리치는 선수들.
“얌마! 기죽지 마!”
“잘하고 있다! 하던 대로 해!”
“다음에 점수 내면 돼지! 힘내자!”
다시 마운드에 선 허하준이 늘 그래왔듯이 사인을 보자마자 곧바로 투구에 들어갔다.
[좋습니다! 절대 기죽지 말고 공격적으로 승부 해야 합니다!]
[초구! 스트라이크!]
공이 날카롭게 미트를 파고들자 무언가 하나 깨우친 기분이 들었다.
야구는 혼자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 아니라는 아주 중요한 사실 말이다.
#
7회 초가 끝나고 강주호가 다가왔다.
“울었냐?”
“제가요? 아닙니다.”
“괜찮아. 막내는 울어도 돼. 저번 WBC 때 이규영이···.”
“선배님! 그 얘기는 저희끼리의 비밀로 남기기로 하시지 않았습니까!”
급하게 이규영이 강주호와 나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래그래. 알겠다.”
“절대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절대!”
“알겠다고.”
확답을 받아낸 이규영이 가긴 했지만, 여전히 걱정되는지 계속 힐끔힐끔 쳐다봤다.
“마, 왜 그렇게 의심이 많아!”
결국 강주호가 소리치자 그제야 관심을 끊었다.
“이번 이닝, 타격 준비해라.”
“예?”
4번부터 시작하는 이닝.
내가 7번 타자니 4, 5, 6번 중 누구 한 명은 출루하겠다는 말이었다.
아마 본인이겠지.
“리틀 강주호 울린 새끼 한 번 보고 와야겠다.”
“저 진짜 안 울었습니다.”
애초에 홈런을 친 알렉스 브래드포드는 지명타자였다.
아무튼 그 말을 하고 강주호가 타석에 나갔다.
그리고 자신이 한 말을 지켰다.
“봤냐?”
“멋있습니다.”
강주호는 곧장 대주자로 교체됐다.
“아부는, 됐다 임마. 타격 준비나 해.”
“야, 대체 몸에 맞는 공이 뭐가 멋진 거냐?”
“야이씨. 뒤질래?”
“아니, 형님 말은 똑바로 해야죠.”
우오준의 딴지가 들어왔지만, 아무튼 출루는 출루니까.
이제 5번 타자 김민주 차례.
그리고 그 뒤에서 황인재가 맹렬하게 방망이를 휘두르고 있었다.
벤치의 판단은 번트였다.
번트를 대기 쉽지 않은 상황이다.
저번 경기에서 김민주가 번트에 실패한 경험이 있기도 했고, 야수들이 깊숙이 수비를 하면서 압박을 주고 있었다.
하지만 번트를 안대기엔 오늘 경기 유일하게 루카스 앤더슨을 상대로 날카로운 타구를 보낸 황인재가 대기 중이었다.
주자를 2루로 보내면 충분히 동점을 만들 수 있는 상황.
그런 압박 속에서 김민주는 침착하게 번트에 성공, 주자를 2루에 보냈다.
“나이스 번트!”
“인재야! 한 건 하자!”
1사 주자 2루.
1점 차로 지고 있는 상황에서 이번 경기 처음으로 득점권에 주자가 나갔다.
그리고 중요한 순간에 황인재가 볼넷을 얻어냈다.
“그렇지!”
“수호야! 가자!”
“한 방 치자!”
1사 주자 1, 2루.
볼넷이 나오자 이번 경기에서 처음으로 상대 더그아웃이 움직였고, 그 틈을 타 다음 타자인 우오준이 내게 다가왔다.
“긴장하지 말고, 울지 말고. 뒤에 이 형님이 있으니까 그냥 편하게 쳐.”
“무조건 홈런 쳐야겠네요.”
“와, 진짜 리틀 강주호란 별명 누가 지은 거냐? 진짜 별명 잘 지었네. 내가 처음 국대 왔을 때 그 양반이랑 똑같아, 똑같아. 선배 우습게 아는 건 진짜.”
“제가요? 전 안 그랬는데요?”
“없기는, 방금 그랬으면서.”
“제 말은 홈런 치고 인터뷰에서 우오준 선배님 덕에 홈런 칠 수 있었다 라고 말을 하겠다는 건데요?”
“아오, 말이나 못 하면. 이걸 확 한 대 팰 수도 없고.”
우오준이 괜히 열 받는지 내 헬멧을 두어 번 치고 돌아갔다.
때마침 상대 포수와 투수코치도 마운드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하지만 마운드에 루카스 앤더슨은 그대로.
결국 에이스를 믿기로 한 것이다.
오늘 내 성적은 2타수 1안타.
1안타도 억지로 만든 안타니 사실상 정타는 없었다.
냉정하게 상황을 살펴봤다.
1사 주자 1, 2루.
‘무조건 병살을 노리려고 하겠지.’
반대로 나로선 최악의 상황.
하지만 그다지 걱정되지 않았다.
투심도 땅볼 유도에 효과적인 공이지만, 결국 최고의 땅볼 유도 구종은 싱커다.
이 상황에서 그런 싱커를 포기하고 투심을 던질까?
생각이 정리되고, 노림수가 정해졌다.
그렇다면 이제 중요한 건 내 선택에 확신을 갖고 흔들리지 않는 것.
‘볼.’
“볼!”
초구 슬라이더는 아슬아슬하게 볼.
첫 타석에 나를 성공적으로 꾀어낸 코스와 비슷했다.
“스트라이크!”
다음 공 역시 그대로 흘려보냈다.
이제 1-1의 볼카운트.
몸에 맞는 볼과 볼넷을 내준 투수 입장에선 반드시 이번 카운트를 잡고 싶어 할 거다.
그리고 정면 승부 또한 피하지 않겠지.
이제 무대는 준비됐다.
남은 건 한 가지.
-따아악!
내가 마음속으로 그렸던 대로 스윙을 이어 나가는 것뿐.
#
[왼쪼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옥!!!!!!! 넘어갑니다!!!]
[넘겼어요!!! 김수호!!!]
[역전 쓰리런! 이 한 방으로 대한민국이 역전에 성공합니다!!!]
“어, 어, 어! 시발!”
“으아아악! 수호야!”
“미친 새끼!!!”
“끄아아악! 금메달! 금메달!”
“아직 안 끝났어 임마!”
-와아아아아! 김수호! 김수호!
투수도, 포수도, 주자도, 야수들도, 심판도, 더그아웃에 있는 사람들도, 그리고 관중들까지.
모든 사람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이내 그 타구를 보낸 사람에게 시선이 쏠렸다.
방망이를 내던진 김수호가 격한 환호를 하며 베이스를 돌기 시작했다.
1루, 2루, 3루 베이스를 지나 홈에 발을 딛는 순간, 다시 한번 함성이 터져 나왔다.
김수호가 소리를 듣고 한국 응원단이 있는 곳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얌마, 그렇다고 형님이 활약할 기회까지 가져가면 어떡하냐.”
“백투백 한 번 가시죠.”
“그럴까? 더그아웃에서 기다리고 있어라.”
우오준을 시작으로, 강주호의 대주자로 나갔던 선수와 황인재까지 그를 반겨줬다.
“잘 쳤더라.”
“고맙다.”
물론 그 말을 하고 다시 어색해졌지만.
“빨리 와!!”
아무튼 그런 김수호를 기다리고 있는 더그아웃의 수많은 덩치.
‘좀 무서운데?’
하지만 김수호는 기꺼이 자신을 기다리는 맹수들한테 몸을 던졌다.
‘설마 죽기야 하겠어?’
덩치들을 뚫고 지나갈 때마다 몸에 손길이 안 닿는 곳이 없었고, 다들 너무 흥분한 나머지 뭐라 하는지 못 알아들을 정도였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모두 기뻐하고 있었다.
그리고 가장 마지막에 김수호를 기다리는 한 사람.
“멋진데?”
“...고마워요.”
허하준의 말에 대한 대답인지, 아니면 처음 만났을 때부터 쌓였던 말을 응축한 건지 모른다.
하지만 김수호가 할 수 있는 말은 그것밖에 없었다.
그대로 허하준을 껴안자, 주변에서 숙덕거렸다.
“야, 운다 울어.”
“이번엔 진짠 거 같은데?”
“안 웁니다!”
아무튼 감동의 순간이 지나고.
“다들 집중! 아직 경기 끝난 거 아니다.”
풀어진 분위기를 단번에 잡는 강주호의 말과 함께 경기는 계속됐다.
“맞아! 다들 집중하자! 두 번만 막으면 된다!”
그리고 어느새 아웃 당해 돌아온 우오준 역시 강주호의 옆에서 외치고 있었다.
그 말이 맞다.
아직 경기는 안 끝났고, 2점의 리드론 남은 2회를 버티기 충분치 않았다.
하지만 어쩐지, 질 것 같은 느낌은 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