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vs 국가대표 - 3
#
이정훈 감독은 국가대표 평가전이라는 탈을 쓴 이 경기가 마린스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다.
국가대표 평가전, 이름만 들으면 마린스가 국가대표를 위해 평가전을 치르는 것 같지만, 실상은 서로의 이해관계가 일치해서 성사된 경기다.
국가대표의 목표는 차치하고, 마린스는 이 경기에 여러 목적을 지니고 있다.
단장과 감독은 이 경기를 통해 마린스를 따라다니는 수많은 의문부호를 해소하고 싶었다.
휴식기 직전 3연속 위닝시리즈와 스윕승을 기록하며 좋은 마무리를 지은 건 맞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허하준의 삼 연속 완봉승, 돌핀스 전 극적인 역전승, 챌린저스 전 삼중살 등 한 시즌에 두 번 나오기 힘든 기록이 나온 것 등을 고려하면 우주의 기운이 마린스의 손을 들어준 게 아니냐는 말이 많았다.
‘그냥 운빨이라는 소리지.’
그리고 새롭게 등장한 김수호나 이호민 같은 신인들은 결국 후반기에 분석을 당해 고전할 거라는 의견도 있었다.
마지막으로 여전히 얇은 뎁스와 외국인 투수의 불안감도 문제점으로 지적 받고 있다.
‘이건 하루 이틀 일이 아니지만.’
이 모든 것에 대한 대답이 되진 않겠지만, 평가전에 결과에 따라 마린스를 보는 불안한 시선을 지울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 평가전을 진행한 것이다.
그런 만큼 이번 평가전은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퍼부을 생각이다.
“은성아, 잠깐 와봐라.”
“옙.”
허하준, 김호기 그리고 박은성.
2027년 드래프트에서 뽑은 삼인방.
그나마 이 삼인방이 있었기에 마린스라는 이름을 유지할 수 있었다.
허하준은 말할 것도 없고, 김호기 역시 타 팀에 가도 충분히 선발 한 자리는 차지할 수 있을 거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하지만 박은성에 대한 평가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
타격도 괜찮고 발은 빠르지만, 타구 판단이나 송구 능력은 그에 못 미친다.
차라리 중견수보단 좌익수가 맞지 않겠냐는 의견도 많았다.
하지만 그건 중견수로서 박은성에 대한 평가였지, 톱타자로서 박은성은 다르다.
작전을 설명해준 이정훈 감독이 차분하게 오늘 준비한 작전을 정리했다.
그리고 경기가 시작할 시간이 됐다.
#
어제 돌핀스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원정, 국가대표가 홈이었다.
의외인 게 있다면 허하준과 배터리를 이룬 포수가 양준이 아니라 최필주라는 것 정도?
그 외엔 어제 라인업과 변동이 없었다.
“플레이 볼!”
심판의 외침과 함께 경기가 시작됐다.
마린스 라인업 역시 강주호를 제외하면 주전 그대로 출장했다.
“저 둘이 붙는 건 진짜 오랜만에 보네.”
“그게 언젠데요?”
“글쎄. 청백전 같은 거 빼면 고등학교?”
김호기가 흥미롭게 그라운드를 봤지만, 결과는 금방 나왔다.
“3루수, 빨리!”
“나이스 번트!”
초구부터 곧바로 기습 번트를 댄 박은성이 딱 소리와 동시에 공을 보지도 않고 전력으로 1루로 달렸다.
공은 힘이 죽은 채 3루수를 향해 굴러갔다.
“세잎인데?”
김호기가 공이 굴러가는 걸 보며 반쯤 확신에 차서 말했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아웃이에요.”
“뭐?”
“아웃!”
“어?”
분명 평소였다면 충분히 세이프될 만한 시도였다.
하지만 20살인 황인재가 국가대표가 된 이유는 타격만이 아니었다.
글러브로 공을 잡는 대신 맨손으로 잡고 러닝스로우로 정확하게 1루로 보냈다.
아슬아슬했지만, 공이 더 빨랐다.
“와, 쟤 뭐냐? 저게 20살이라고?”
오랜만에 듣는 저게 00살 시리즈.
3년 동안 황인재의 옆에서 지겹도록 들었던 말이었지만, 오랜만에 들으니 신선했다.
그렇게 황인재의 호수비를 등에 업은 허하준은 최치호와 오준혁을 삼진으로 잡아내며 이닝을 끝마쳤다.
선수들이 들어오면서 황인재의 머리를 툭툭 건드리는 게 보였다.
머리를 건들면 스타일 망가진다고 죽을 만큼 싫어했던 모습이 눈에 선한데, 아무리 너라도 거기에선 못 개기는구나.
새삼 몰랐던 황인재의 모습에 웃음이 났다.
근데 하필 그때, 정확히 눈이 마주쳤다.
그 자리에서 한 번 씨익 웃어주고 반응도 보지 않고 그대로 그라운드로 나왔다.
오늘 재밌는 일이 많이 일어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
적당한 긴장은 경기에 집중하는 데 도움을 준다.
가끔 허하준처럼 아예 긴장이 없는 사람도 보이긴 하지만, 그보단 너무 많이 긴장한 선수가 더 많다.
그런 의미에서 브릭 웰릭스는 후자였다.
저번 등판 전에는 얘기라도 조금 나눴는데, 오늘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올라왔다.
물론 투수는 공만 잘 던지면 장땡이라지만, 딱 보기에도 안 좋은 쪽으로 흘러갈 가능성이 크다면 얘기가 다르다.
일단 초구를 보고 결정하기로 했다.
“스트라이크!”
“공 좋은데?”
“존 그레이랑 비슷하죠?”
“그래도 내년에 메이저 갈 투수랑 비교하는 건 좀 그렇지 않냐?”
“오늘 결과에 따라 웰도 미국에 갈 수도 있어요. 그러니까 살살 해주세요.”
“됐다. 한 마디를 안 지네.”
이규영과 만담을 하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계속 다음 볼을 생각하고 있었다.
‘생각보다 공이 좋네?’
웰릭스의 가장 큰 무기는 큰 신장과 높은 낙차를 보이는 120km의 느린 커브.
그런 커브가 통하기 위해선 타자에게 위력적인 패스트볼과 최소한 한 개의 다른 변화구가 필요하다.
다시 포심의 제구를 확인하기 위해 바깥쪽으로 빠지는 공을 요구했다.
“볼!”
하지만 역시 이규영다웠다.
이 정도면 나올 만하지 않나 싶은 코스였는데, 어김없이 배트는 미동도 없었다.
어쨌든 오늘 웰릭스의 포심 제구가 상당히 좋다는 걸 확인했으니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었다.
이쯤에서 슬라이더를 한번 보여주고 싶었는데, 웰릭스가 고개를 저었다.
포심 사인마저 고개를 젓자 남은 건 하나밖에 없었다.
‘조금 아끼고 싶었는데.’
하지만 투수가 저렇게 의견을 내면 나로서는 방법이 없다.
결국 몸쪽 커브에 고개를 끄덕인 웰릭스가 공을 던졌다.
“스트라이크!”
이규영이 살짝 몸을 틀었지만, 공은 정확히 존을 통과하면서 미트로 들어왔다.
이걸로 1-2.
하지만 이제 시작이다.
2스트라이크의 이규영은 이전과 완전히 다른 선수라고 해도 좋다.
“볼!”
“파울!”
“파울!”
“파울!”
-딱.
공을 네 개나 더 던진 후에 겨우 2루수 땅볼로 잡아냈다.
고작 한 타자 상대했을 뿐인데, 진이 다 빠진다.
하지만 최건우의 얼굴을 보자 다시 정신을 붙잡았다.
아직 26개의 아웃카운트가 남아있고, 상대는 전부 국가대표다.
정신 바짝 차리자.
#
“오늘 커브가 좋네.”
“포심도 보더라인 근처에 잘 형성되고 있습니다.”
“오늘 주심의 커브 판정이 확실히 후하네요.”
“웰릭스도 드디어 하스처럼 운이 따라주는 건가?”
“잠깐만요.”
코치들의 다른 말은 다 동의한 강기호였지만, 마지막 말 만큼은 동의할 수 없었다.
“주심이 후한 건 운이 아닙니다.”
“그럼?”
“수호가 노력한 결과입니다.”
제자의 노력이 운으로 표현되는 건 가르친 입장에서 용납할 수 없었다.
커브는 모든 변화구 중 낙폭이 가장 크다.
분명 존을 통과했어도 포수가 잡을 땐 미트를 바닥에 닿는 경우도 종종 있다.
심판은 오직 존을 통과했을 때를 기준으로 판단해야 했지만, 사람인 이상 포수가 공을 잡았을 때 위치를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커브는 실제 존과 다른 판정을 받는 경우가 빈번했다.
특히 워낙 낙차가 큰 웰릭스의 커브는 스트라이크가 볼이 되는 비중이 더 심했다.
심지어 포수들도 공을 받기만 할 줄 아는 수준이었으니, 그간 쌓였을 스트레스가 상당했을 거다.
하지만 김수호와 배터리를 이룬 직전 경기에서 그간 스트라이크 판정을 받지 못한 커브가 스트라이크가 되자, 결과 역시 좋아졌다.
물론 처음부터 쉽게 성공한 건 아니다.
타자가 커브를 칠 때 히팅 포인트가 점 하나로만 형성이 된다고 한다.
그건 포수가 공을 잡을 때도 마찬가지.
불과 몇 시간 전만 해도 열심히 커브볼을 잡으며 노력했으니, 성공할 수 있었던 거다.
그리고 그 노력은.
“스트라이크 아웃!”
달콤한 꿀이 돼서 돌아왔다.
#
머리가 아플 정도로 쥐어 짜낸 결과, 삼자범퇴를 만들었다.
“예스!”
마지막 김규완을 루킹 삼진으로 잡아냈을 때 웰릭스가 너무 격하게 포효해서 대신 사과를 하긴 했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오늘 같은 모습을 매번 보여주면 대신 사과야 100번이고 할 수 있다.
“헤이. 퍼펙트 피쳐.”
“킴!”
웰릭스와 하이파이브를 하고 더그아웃으로 돌아왔다.
너무 좋아하는 것 같지만, 웰릭스는 타격을 안 하니까 그럴 수 있다.
산 넘어 산이라고, 국가대표 테이블 세터를 상대했더니 최종 보스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에라이.”
“왜 그래?”
“세상에 불합리한 일이 너무 많다.”
“뭐래.”
오늘 후보인 이주학은 고맙게도 내 장비를 받아줬다.
“들어봐. 이규영 선배, 최건우 선배, 그리고 김규완 선배 딱 잡고 들어와서 타격하려는데 상대가 허하준 선배야. 어떻겠어?”
“그야....”
“아, 미안. 오늘 후보라서 잘 모르지?”
“디진다 진짜.”
“진짜 미안. 하지마, 아 제발.”
장난 한번 쳤다가 다리 찢어질 뻔했다.
다음에 밥 한 번 쏘기로 무마한 후, 허하준의 투구를 지켜봤다.
후, 내 지갑.
강주호가 빠졌지만, 잭 미켈과 김민석으로 이어지는 타선은 다른 팀에 비해서 꿀리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중장거리라고 평가받지만, 곧장 홈런을 뻥뻥 치는 잭 미켈과 타고난 손목 힘으로 제대로 맞으면 담장 앞은 기본이라는 김민석.
하지만 그건 맞출 수 있을 때나 가능한 얘기지, 허하준을 상대론 아니었다.
결국 주자 없는 상황에서 내 타석이 왔다.
미켈과 김민석의 조언은 그다지 영양가가 있지 않았다.
포심이 좋고, 스플리터는 구분하기 힘들다.
이게 다였으니까.
원래 알던 사실이라 새삼스럽진 않았다.
타석에 서서 허하준을 바라봤다.
앉아서 보는 것과 서서 보는 건 느낌이 사뭇 다르다.
그래도 허하준의 공을 수백 번 씩 받아본 나였다.
이런 상황에서 허하준은 보통 초구에 포심을 넣는걸···.
“스트라이크!”
“흐아.”
초구부터 스플리터라니.
너무하네 진짜.
“으. 추워라. 여기 돔이야 돔. 너무 시원하게 돌리는 거 아냐? 배려는 필요 없어.”
“죄송합니다. 선배님이 좀 더워 보이셔서 한 번 돌렸습니다.”
최필주의 비아냥이 들려왔지만, 곧바로 사과하자 더 말을 하진 않았다.
후. 멘탈 챙기자.
허하준을 바라봐봤자 표정을 읽을 수도 없다.
저 서글서글한 표정이 이렇게 얄미운 표정이었다니.
“볼!”
2구는 슬라이더를 골라냈다.
이제 3구짼데 또 변화구를 던질까?
아니면 포심?
-딱!
“파울!”
포심을 예측하는 것까진 성공했지만, 타이밍이 늦었다.
확실히 공 끝에 힘이 좋아서 구속보다 더 빠른 느낌이다.
이걸로 볼 카운트는 1-2.
내가 허하준의 공을 잡을 때마다 생각했던 게 있다.
2스트라이크에 몰리면 타자의 머릿속에 포심과 스플리터가 가득할 것이라고.
이걸 이렇게 확인하게 된다니.
다른 변화구는 배제했다.
노리는 건 포심과 스플리터뿐.
그리고 제4구가 허하준의 손에서 나왔다.
방망이는 허공을 갈랐고, 공은 뚝 떨어져서 홈플레이트에 닿았다.
하지만 삼진 콜이 들리지 않았다.
“낫 아웃!”
그 소리를 들리기 전에 공이 빠진 걸 보고 곧바로 1루로 달렸다.
1루 베이스를 밟을 때까지 아웃이라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오늘 경기 첫 출루는 허무했지만, 내 손에서 나왔다.
#
“역시 필주가 블로킹이 좀···.”
국가대표의 배터리 코치가 낫아웃으로 살아나간 김수호를 보고 인상을 썼다.
이번 국가대표의 포수는 두 명.
양준과 최필주.
양준에 비교할 순 없겠지만 최필주 역시 좋은 포수다.
타격, 프레이밍, 도루저지 등 충분히 한 팀의 안방마님으로서 부족함 없는 활약을 펼친 선수다.
하지만 몇 년 전 무릎부상 이후 예전보다 떨어진 블로킹 능력이 문제였다.
인천 스타즈에 있을 땐 큰 문제 없었다.
스타즈 투수들은 떨어지는 공을 잘 던지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허하준과의 조합은 맛이 없었다.
그럼에도 굳이 이번 경기에서 최필주를 선발로 내보낸 건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한 것뿐이다.
“양준으로 모든 경기를 치를 순 없으니까 어쩔 수 없긴 한데....”
양준은 강주호와 동갑, 즉 2년이면 40이다.
그런 포수가 아직 국가대표라는 건 양준이 그만큼 뛰어난 포수라는 의미도 있지만, 한국에서 그를 이을 포수가 없다는 말이기도 했다.
“이럴 때 기호가 있으면 참 든든할 텐데. 아쉽네.”
하지만 이미 부상으로 은퇴한 선수를 그리워하는 건 미련한 일이었다.
아무튼 이번 경기가 끝나고 김목근 감독과 얘기를 해야 알겠지만, 앞으로 허하준과 최필주가 합을 맞추는 일은 없을 거다.
하지만 만에 하나 양준이 부상이라도 당한다면?
그땐 허하준의 공은 누가 잡게 되는 걸까.
‘속 시원하게 말 해줬으면 좋겠는데.’
배터리 코치는 도저히 무슨 생각 중인지 알 수 없는 김목근 감독의 뒤통수를 쳐다봤다.